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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유지족吾唯知足 0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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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최고관리자
작성일 18-04-16 23:43 조회 12,033 댓글 0
 
오유지족吾唯知足
 
십 수 년 가까이 쓰던 손목시계가 고장이 났다. 거의 매년마다 전지를 교체해 가며 줄 곧 사용하던 정든 시계이다. 가죽 줄로 되어 있어서 여름에는 땀이 차기에 두어 해마다 줄만 새로 바꾸어 차고는 해왔다. 얇고 가볍고 시간도 잘 맞아서 정이 많이 든 시계이다. 동네 시계방에 둘렀더니 고치려면 서너 날 맡겨 놓으라고 했다. 시계 점 벽에 이상한 한자(漢字) 한 글자가 걸려 있었다. 액자에 쓰인 글씨는 가운데에 입‘구’(口)자를 중심으로 상하좌우로 병합하여 쓴 것이었다. “나는 오직 족함을 안다.”는 뜻의 ‘오유지족’(吾唯知足)을 그렇게 쓴 것이었다. 지나친 욕심을 버리고 현재의 삶에 만족하며 살아간다는 뜻이다. 그렇다. 그 누구나 자신의 역량과 재주와 은사와 분수를 알고 세상을 살아가야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다.
 
물론 어린 시절과 청년의 때에 재주와 실력을 키우고 역량을 계발해서 각 분야의 뛰어난 인물로 성장하는 것은 귀한 일이다. 나라 안팎을 넘나들며 일정한 분야에서 사회적으로 공헌하고 꿈을 키우며 열매가 풍성한 인생을 가꾸어가는 것은 반드시 필요하다. 요즘과 같은 무한 경쟁사회에서 자신의 역량을 갈고 닦지 않으면 어디 가서 자기 목구멍에 풀칠이나 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지나친 것은 부족함만 못하다는 ‘과유불급’(過猶不及)의 교훈처럼 매사에 지나치면 헤어 나올 수 없는 깊은 수렁에 빠지고 만다. 요즘 신문과 각 언론에 도배를 하는 각계각층 인사들이 연루된 불미스러운 사건들이 다 그러하지 않나. 그렇게 주옥같은 잠언과 전도서의 말씀의 기록자로 쓰임 받았던 지혜의 왕 솔로몬(Solomon, BC 991-931)도 하나님의 말씀에서 벗어나니 그의 말년은 너무나도 형편없게 되고 만 것처럼 말이다.
 
조선 중기의 문신이며 학자인 김정국(金正國, 1485-1541)의 묘는 경기도 문화제 112호이다. 경기도 파주시 진동면에 위치해 있다. 그는 사재(思齋)라는 호 외에 팔여거사(八餘居士)라고 불리었다. 우찬성(右贊成)까지 지낸 인물이다. 우찬성이란 조선 시대 의정부에서 영의정·좌의정·우의정의 3정승을 보필하는 역할을 했던 고위직이다. 의성이 본관인 그는 중종(中宗, 1506-1544, 재위 38년) 2년인 1507년, 22살 나이에 생원시와 진사시에 오르고 2년 후에는 별시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그 후 요직을 두루 역임한 후 직제학에 등용되었다가 같은 해에 승정원동부승지로 승진하여 왕명을 출납하였다. 34살 때에 황해도 관찰사로 부임하였다. 오늘 날로 하면 도지사격이다. 재임 중 백성을 교화시키기 위하여 ‘경민편’(警民編)을 편찬하는 등 지역민을 위하여 선정을 베풀었다. 개혁을 꿈꾸던 조광조(趙光祖, 1482-1519)를 비롯한 사림파의 향약 장려운동에 뜻을 같이하여 향약의 보급을 통한 향촌 교화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그러나 다음 해인 1520년, 기묘사화(己卯士禍, 1519)때 사림파를 옹호했다는 죄목으로 형 김안국과 함께 관직에서 쫓겨났다.
 
그 후 20년을 고향의 시골집에 낙향(落鄕)하여 조용하게 지냈다. 그는 고향에 작은 정자(亭子)를 짓고 스스로 ‘팔여거사'(八餘居士)라 불렀다. ‘팔여'(八餘)란 여덟 가지가 넉넉하다는 뜻이다. 그의 가까운 친구가 그 사연을 물었다. 35살 한창의 나이에 녹봉(祿俸)도 끊긴 채 낙향한 그는 웃으며 편안한 모습으로 설명하여 주었다. "토란국과 보리밥을 넉넉하게 먹고, 따뜻한 온돌에서 충분한 잠을 자며, 맑은 샘물을 만족하게 마시고, 서가(書家)에 가득한 책(冊)을 언제나 읽을 수 있으며, 봄꽃과 가을 달빛을 언제나 감상(感想)하고, 새와 솔바람 소리를 항상 들을 수 있으며, 눈 속에 핀 매화(梅花)와 서리 맞은 국화(菊花) 향기(香氣)를 넉넉하게 맡을 수 있네. 거기에 한 가지를 더하여 이 일곱 가지를 넉넉하게 즐길 수 있기에 ‘팔여’(八餘)라 했다네.”
 
그의 설명을 들은 친구는 세상 사람들을 빗대어 ‘팔부족’(八不足)으로 화답하였다. 역시 그의 친구 또한 문인다운 면모이다. “세상에는 자네와 반대로 사는 사람도 있다네. 진수성찬(珍羞盛饌)을 배불리 먹어도 부족하고, 휘황(輝煌)한 난간(欄干)에 비단(緋緞) 병풍(屛風)을 치고 잠을 자면서도 부족하며, 이름난 술을 실컷 마시고도 부족하고, 울긋불긋한 그림을 실컷 보고도 부족하며, 아리따운 기생(妓生)과 실컷 놀고도 부족하고, 희귀(稀貴)한 향(香)을 맡고도 부족하다 여기지. 거기에 한 가지 더하면 이 일곱 가지 말고도 부족한 게 있다고 부족(不足)함을 탓한다네.”
 
팔여거사(八餘居士) 김정국은 관직에서 쫓겨나 낙향하여 지낸지 20년 만인 1537년에 전라도관찰사에 등용되었다. 그의 나이 52살 때의 일이다. 오늘날로 하면 전라남북도 지사가 된 것이다. 그는 전라도관찰사로 있는 동안 백성들의 병을 보다 쉽게 치유하려고 약방문을 수집하여 ‘촌가구급방’(村家救急方)이란 의학서를 간행하였다. 2년 후에는 병조참의와 공조참의를 역임하고 가선대부로 승진한 후에 경상도 관찰사가 되었다. 그 후 병으로 관직을 사퇴하였다가 다음 해에는 예조·병조·형조참판 등의 나라의 요직을 차례로 지내고 지중추부사에 이르렀다. 그가 병으로 눈을 감은 나이는 56살이었다.
 
오유지족(吾唯知足)의 교훈은 동서고금의 진리이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에 욕심을 갖지 않았다면 인간에게 에덴에서  쫓겨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아간이 아이 성 전투에서 금과 은과 시날산 외투에 눈이 멀지 않았다면 아이 성 함락 전쟁 승리 후에 가나안 정복시대의 요직에 등용되었을 것이다. 예수의 제자들 중 하나였던 가롯 유다가 스승을 은 삼십 냥에 팔아 버리고 배반하지 않았다면 다른 제자들처럼 회개하고 변화되어 성령 받은 초대 교회의 존귀한 사도의 한 사람으로 쓰임 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편지하면서 이렇게 교훈하였다. “그러나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은 큰 이익이 되느니라.”(딤전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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