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이스북에 공유 트위터에 공유 구글플러스에 공유 카카오스토리에 공유 밴드에 공유
예수사랑교회
복음 인재를 양성하여,열방선교에 앞장서는 교회
설교문    |  지성래목사  | 설교문
주께 피하는 자의 기도(시71:1-6) 2025.0824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플러스로 보내기
  • 카카오스토리으로 보내기
  • 밴드로 보내기
작성자 최고관리자
최고관리자
작성일 25-08-24 20:00 조회 6 댓글 0
 

                   주께 피하는 자의 기도(시71:1-6)           2025. 8. 24

 

 

어렸을 적에 봄이 되면 한 차례씩 병아리가 깨어났다. 안마당에 어미 닭을 뒤 쫓아 다니는 노랑색 병아리 떼를 바라다 보던 그림과 같은 기억이 새롭다. 병아리들이 무슨 소리를 듣고 위협을 느끼면 서로 약속이라도 한 듯이 순식간에 어미 닭의 날개 깃 아래로 숨고 피한다. 그런 장면을 여러번 보았다. 

 

그러면 인간은 위기의 순간, 인생의 격동기에 어디로 피할 수 있을까. 누구에게로 피해야 할까. 스위스는 인구가 840만 명이다. 국토 면적이 한반도 크기의 5분의 1밖에 안 되는 영세중립국이다. 이 작은 나라에 방공호가 30만 개나 된다. 공용 방공호도 5,000개가 넘는다. 전체 국민 840만 명에 외국인 평균 체류자 20만 명까지 동시에 수용이 가능하다. 루체른의 소넨베르크 터널은 2만여명이 2주간 버틸 수 있는 세계 최대 규모의 지하 방공호 시설을 갖추고 있다. 출입문 두께가 1.5m를 넘는다. 방공호 안에 자체 병원과 자가  발전, 급수시설, 공기 정화 시스템을 완벽하게 유지하고 있다. 평소에 막대한 비용을 투자한다. 집집마다 방사능과 독가스에 대비한 공기 여과 장치를 갖추고 있다. 이것은 건축 의무 사항이다. 스위스 방공호는 워낙 견고해서 금 보관소로도 쓰인다. 스위스 남부 티치노 칸톤 주의 알프스산맥에는 세계에서 가장 많은 양의 금을 보관하는 방공호가 있다. 그 옆에는 개인 전용기 활주로도 있다. 이런 금고형 방공호가 10군데 이상이다. 스위스의 방공 시스템을 견학하고 독일과 스웨덴, 핀란드 등도 방공호를 늘려 가고 있다. 최근엔 일본과 미국에서 방공호 수요가 급증하고 있다. 북한의 핵실험과 미사일 도발 때문이다. 위급 상황에서 피할 곳을 확보하려고 하는 것이다. 

 

오늘 본문인 시편 71편의 1절과 3절에서“여호와여 내가 주께 피하오니”, “주는 내가 항상 피하여 숨을 바위”라는 고백을 접하게 된다. 시편 기록자는 악인의 위협 앞에서 그리고 불의한 자와 흉악한 자의 손아귀로부터 주께로 피하기를 소원하였다. 시편 71편의 기록자가 다윗이 맞다면 아마도 아버지 다윗의 왕권을 찬탈하려고 했던 아들 압살롬의 반역이나 열왕기상 1장에 소개된 압살롬의 동생으로 태어난 왕자 아도니아의 반란을 배경으로 고백된 기도라고 여겨진다.

 

시편 71편은 반란 세력에게서 쫓겨 다녀야 하는 급박한 상황에서 하나님의 보호와 구원의 손길을 간구하고 있다. 그런 다급한 상황 가운데서도 찬양을 잊지 않는 것은 궁극적인 구원에 대한 확신 때문이었을 것이다. 

 

시편 71편의 기록자가 이 시편의 고백을 기록할 당시에 나이가 꽤 들었을 때인 것을 알 수 있다. 9절에 보니까 “늙을 때에 나를 버리지 마시며 내 힘이 쇠약할 때에 나를 떠나지 마소서”라고 기도 하였다. 18절에도 보면, “하나님이여 내가 늙어 백발이 될 때에도 나를 버리지 마시며”라고 간구하고 있다. 

 

연세가 지긋하게 드신 분들의 말씀 중에 “자네는 아직 몰라 인생을 더 살아 봐야 알지”라는 말을 할 때가 있다. 실로 그렇다. 요즘 세상은 4-5살 어린이들이 기저귀를 찬 채로 영어 학원에서 시험을 치르는 세상이라고 한다. 그 나이 때부터 이미 학업 경쟁의 최 일선에 내몰리는 것이다. 세상이 급박하게 돌아간다. 세상이 점점 이상하게 변해 간다. 인공 지능 시대인 AI 세상에서는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하루가 다르게 세상이 변해 가고 있다. 세상의 변화를 다 따라 살 수가 없다. 아주 간단한 변화이지만 어느 식당에 들어서서 음식을 주문하거나 어느 상점에 가서 물건 하나를 사려고 해도 키오스크 작동법을 모르면 금방 바보가 되고 만다. 어리둥절해지고 만다. 

 

다윗은 오늘날로부터 삼천년 전의 인물이다. 그 당시에도 사람 살기가 힘들기는 마찬가지였다. 눈 뜬 상태에서 코 베어 가는 세상이 요즘만이 아니다. 인류의 역사에는 언제나 도전과 응전이 계속되고 있다. 그렇지 않나. 하나님이 만드시고 하나님이 거니시는 동산인 에덴동산 안에서조차도 인간은 뱀의 유혹에 넘어가고 말았다. 공간적으로 하나님이 거니시는 동산이요 시대적으로 하나님의 창조 세상의 시작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형상을 덧입은 인간이 하나님을 배반하고 불순종하고 죄악에 빠지고 말았다. 이것이 인생이다. 

 

요즘 세상은 어떤가. 다른 나라 뉴스 말고 우리나라 안에서 일어나는 뉴스들만 봐도 그렇다. 세상에 영원한 권력과 영원한 명예가 있는가. 세상에 영원한 부와 영원한 기업이 있는가. 세상에 영원한 인기가 있는가. 세상에 영원한 젊음, 영원한 아름다움이 있는가. 세상에 영원한 관계가 있는가. 이 세상에 영원한 것이 그 무엇이 있는가. 진정으로 우리가 부러워하고 흠모할 만한 그 무엇이 있는가. 

 

막상 어려운 일을 겪어 보거나 힘겹고 충격적인 일을 당해 보면 평온할 때의 그 일상이 금방 지나간 옛적 일이 되고 만다. 여러분은 어떤가. 무슨 다듭한 일이 있을 때에 누구를 먼저 찾는가. 어디로 피하길 원하는가. 

 

오늘의 시편 기록자는 여호와 하나님 아버지께로 피하길 원하고 있다. 나를 위험한 지경에서 건지시는 분도 주님이시고 나를 결박으로부터 풀어나게 해 주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다. 나의 탄식 소리와 나의 부르짖음을 들어 주시는 분도 주님이시다. 어쩌다가 필요하면 주께 피하라고 하는 것은 주님을 의지하는 자의 태도가 아니다. 시편 기록자는 “주님은 내가 항상 피하여 숨을 바위시라”고 고백하고 있다. 그렇다. 주님을 의지하고 주님을 신뢰하며 시시 때때로 주님께 피하려는 마음이 소중한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고백이 무엇인가. ‘항상’이란 고백이 아닌가. 시편 기자가 하나님을 향하여 이런 고백을 하는 것은 하나님만이 언제나 안정과 평안의 근원이신 것을 늘 체험하며 살아 왔기 때문이다. 이전에 보던 성경인 <개역한글 성경>에는 ‘무시(無時)로’라고 하였다. 밤이나 낮이나 평안할 때나 뒤숭숭할 때나 언제나 라는 뜻이 아닌가. 신명기 33장 27절에 보면, “영원하신 하나님이 네 처소가 되시니 그의 영원하신 팔이 네 아래에 있도다”라고 하였다. 모세의 고백인 시편 90편 1절에 보면,“주여 주는 대대로 우리의 거처가 되셨나이다”라고 하였다. 시편 91편 1절에 보면 주를 믿는 성도란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주하며 전능자의 그늘 아래에 사는 자여”라고 하였다. 이처럼 불안하고 답답하고 암울하고 안타깝고 위급한 상황에서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 피하며 무슨 기도를 드리고 있나. 

 

나를 구원하소서

2절 끝에 보니까“나를 구원하소서”라고 기도하고 있다. 그렇다. 인생을 구원할 수 있는 손길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의 손길 밖에는 없다. 그 누구라도 무속인을 찾아다니면 안된다. 돌과 나무를 다듬어 만들고 은과 금을 녹여  부어 만든 우상 덩어리가 인생을 지켜 주는 것이 아니다. 어느 조각가가 평가하기를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의 미소는 동서고금의 최고라고 극찬한 것을 보았다. 그래봐야 불교 예술의 금속공예품에 담긴 미술적 가치 말고는 그 이상 아무것도 아니다. 국보 83호이다. 국립중앙박물관에 가면 볼 수 있다고 한다. 이단과 사이비의 교주에게 마음을 빼앗기면 안된다. 수염이 길게 자랐다고 해서 영험하게 여기고 귀 기울이면 안된다. 개인을 구원하고 가족을 구원하고 공동체를 구원하고 민족을 구원하고 시대 역사를 불의와 악으로부터 구원하는 능력은 오직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만 가능한 것이다.

 

요즘 묵상하는 에스겔서의 교훈이 무엇인가. 남 유다의 마지막 왕 시드기야가 애굽을 의지하고 바벨론을 배척해 보려 했지만 소용이 없게 되었다. 물론 어느 시대나 주변 열강들과 외교적인 안정을 잘 취해야 하는 것이 맞다. 그러나 근본적으로는 언제나 하나님만 의지해야 한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구원을 절대 신뢰하여야 한다. 그런데 남유다의 백성들과 예루살렘의 왕과 왕족과 고관대작과 심지어는 제사장들까지도 우상을 숭배하며 거짓 복술에 마음을 빼앗기고 점을 쳤다. 정성이 떠난 형식적인 성전 제사를 계속하는 남 유다의 백성들을 향하여 하나님이 분노를 쏟으시며 진노의 불을 내 뿜겠다고 경고하셨다. “내가 엎드러뜨리고 엎드러뜨리고 엎드러뜨리려니와”(겔21:27)라는 세 번이나 반복해서 말씀하시며 진노의 심판을 선포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대하게 된다.

 

우리는 나 자신의 삶을 내 지혜, 내 능력, 내 경험, 내 판단으로 다 이루고 성취하며 살 수 있다고 착각하면 안된다. 매 순간마다 하나님의 도우심과 하나님의 구원을 의지하고 간구해야 한다. 늘 묵상하지만 출애굽이 모세의 작품인가. 아론의 지략인가. 아니다.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이다. 요단강을 건너고 여리고성을 함락하고 아이성을 재 공략하고 연전연승 가나안을 점령해 들어 간 것이 여호수아의 능력인가. 아니다. 하나님의 섭리에 순종한 것 뿐이다. 물론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려면 실력도 쌓고 노력도 하고 최선을 다해야 하는 것이 맞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도우시는 하나님의 손길,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손길, 성취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의지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기도하는 것 아닌가. 구원은 여호와께 속한 것이다. 군대의 수가 많다고 해서 전쟁에서 반드시 이기는 것이 아니다. 성공과 실패가 주님의 손 안에 있는 것이다. 최근에 말씀 나눈대로 생명과 사망, 복과 화가 우리 앞에 있다. 문제는 선택이다. 사망을 버리고 생명을 택하고 화와 저주를 버리고 복을 택할 줄 알아야 한다. 그렇지 않나. 스스로 자신을 어떻게 할 수 있었다면 베데스다 연못가의 38년 된 병자가 그 긴긴 세월을 그렇게 지내고 있었겠나. 스스로 해결할 수 있었다면 12해 동안 혈루병으로 고생하던 여인이 그 긴긴 세월 동안 하혈을 하며 지냈겠나. 예수를 만났을때에 38년된 병이 떠나갔다. 예수의 옷자락을 잡았을 때에 12해 혈루병이 깨끗해졌다. 그러므로 구원은 여호와께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하나님을 만날 때,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때 구원이 임하는 것이다. 하나님께로 피할 때에 구원이 임하는 것이다. 시편 기자는 “주님이 나의 숨을 바위요 나의 반석이요 나의 요새”라고 선포하고 있다. 

생각하여 보라. 누가 나를 악인의 손에서 구원할 수 있나. 누가 나를 불의하고 흉악한 자의 손아귀에서 건져 낼 수 있나. 11절에 보니까 “하나님이 그를 버리셨은즉 따라잡으라 건질 자가 없다”라고 떠들어 대는 원수들이 보는 앞에서 하나님은 시편 고백자를 구원하셨다. 건져 주셨다. 지켜 주셨다. 막아 주셨다. 보호해 주셨다. 시편 71편의 맨 마지막 절인 24절에 보니까 그를 모해하려 하던 자들이 수치와 무안을 당하게 하셨다. 하나님은 하루 종일 주님의 의를 작은 소리로라도 읊조리던 그를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건져 내 주셨다. 시편 147편 6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겸손한 자들은 붙드시고 악인들은 땅에 엎드러뜨리시는도다”라고 하였다. 매 순간마다 하루 하루나를 구원하시는 여호와의 손길에 붙잡혀 살아가는 범사가 되길 축원한다. 

 

 

나의 소망이 되소서

5절에 보니까 “주 여호와여 주는 나의 소망이시며”라고 하였다. 주님의 그가 어렸을 적부터 신뢰하는 분이시라고 하였다. 사람은 누구나 소망의 힘으로 살아가는 법이다. 소망이 끊기면 살아갈 더 이상의 의욕을 찾지 못하게 되고 만다. 6절에 보면 시편 기자의 믿음은 너무나도 분명하였다. “내가 모태에서부터 주를 의지하였으며”라고 하였다. 그가 어머니의 태에 잉태되는 때에 이미 주님께서 그를 주님의 사람으로 택하셨다는 믿음이 있었다. 14절에 보니까 “나는 항상 소망을 품고 주를 더욱더욱 찬송하리이다”라고 하였다. 그의 소망이 무엇이었을까. 하나님이 결코 그를 멀리하지 아니하시리라는 소망, 하나님이 어느 순간에 그의 곁에 다가 오셔서 그를 속히 도와 주시리라는 소망 가운데서 살아가고 있었다. 그에게는 살아오면서 경험한 간증이 많았다. 그것이 믿음이다. 그것이 소망이다. 17절에 보니까 “하나님이여 나를 어려서부터 교훈하셨으므로 내가 지금까지 주의 기이한 일들을 전하였나이다”라고 증거하고 있다. 

 

맞다. 믿음으로 살아가는 증거는 주께 소망을 두고 살아가는 것이다. 주께 소망을 두고 살아가는 믿음의 성도라면 그 어떤 환난, 그 어떤 고난, 그 어떤 역경, 그 어떤 시련, 그 어떤 두려움, 그 어떤 불행한 여건의 한 가운데에서도 결코 절망하지 않는 소망 가운데 살아갈 수 있게 되는 법이다. 그러므로 믿음과 소망은 함께 하는 것이다. 믿음이 있으므로 소망을 갖게 되고 소망이 있으므로 믿음 가운데 거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에게 여러 가지 심한 고난을 보이신 주께서 우리를 다시 살리시며 땅 깊은 곳에서 다시 이끌어 올리시리로다”(시71:20)라고 하였다. 18절에 보니까 그는 결코 하나님이 자신을 버리시지 않으시리라는 분명한 확신과 믿음과 소망이 있었다. 

 

우리가 때때로 이렇게 찬양하지 않나. <정결한 맘 주시옵소서>

 

정결한 맘 주시옵소서 오 주님

정직한 영을 새룹게 하소서

정결한 맘 주시옵소서 오 주님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나를 주님 앞에서 멀리하지 마시고

주의 성령을 거두지 마옵소서

그 구원의 기쁨 다시 회복시키시고

변치 않는 맘 내 안에 주소서

 

시편 51편 10- 12절에 나오는 다윗의 고백이다. 그런 고백과 비교해 보면 성경학자들이 시편 71편을 다윗의 고백으로 구분하는 근거가 분명하다. 그렇지 않나. 우리는 시편 71편을 읽다가 보면 계속해서 다윗이 생각난다. 하나님을 향한 다윗의 소망은 언제나 분명하였다. 7절에 보니까 시편 기록자는 자신으로 인해서 그를 조롱하고 대적하는 원수들에게 수치거리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그의 분명한 소망과 믿음은 분명하였다. 7절 말미에 있는“주는 나의 견고한 피난처십니다”라는 고백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렇지 않나. 그 누가 그를 조롱하고 대적하고 박해하고 원수로 취급하고 불의하고 흉악하게 대할지라도 그의 믿음과 소망은 분명하였다. 하나님이 언제나 그의 견고한 피난처이시라는 믿음과 소망 말이다. 고라자손의 시편인 시편 46편 1절에도 보면,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오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라고 고백하였다. 

 

우리는 때때로 <피난처 있으니>라는 찬송가 70장을 부른다. 그 1절과 4절 가사가 무엇인가.

 

피난처 있으니 환난을 당한 자 이리오라 

땅들이 변하고 물결이 일어나 산 위에 넘치되 두렵잖네

 

높으신 하나님 우리를 구하니 할렐루야

괴롬이 심하고 환난이 극하나 피난처 되시는 주 하나님

 

언제 어디에서 무슨 일을 만날 지라도 이러한 신앙 고백 가운데 주를 향한 분명한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는 주인공이 다 될 수 있기를 축원한다. 

 

 

나의 찬송을 받으소서

주께로 피하지 않고는 한 순간도 목숨을 부지할 수 없는 위급한 상황 가운데에서도 그는 항상 주를 찬송한다고 고백하고 있다. 6절 끝에 보면 “나는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라고 고백하였다. 14절에 보니까 “나는 항상 소망을 품고 주를 더욱더욱 찬송하리이다”라고 하였다. 22절과 23절에 보면 그의 찬양의 정도가 점점 더 깊은 은혜를 더해 가는 것을 볼 수 있다.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또 비파로 주를 찬양하며 주의 성실을 찬양하리이다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주여 내가 수금으로 주를 찬양하리이다 내가 주를 찬양할 때에 나의 입술이 기뻐 외치며 주께서 속량(贖良)하신 내 영혼이 즐거워하리이다”(시71:22-23)

 

다윗이 언제나 찬송의 사람이었듯이 시편 71편의 기록자는 하나님을 찬송하고 있다. 비파와 수금을 동원하고 마음을 모아서 주를 찬양하고 있다. 환난과 핍박과 위기의 순간에도 찬양을 계속하고 있다. 그렇다. 찬양의 정도가 그 사람의 믿음의 척도이다. 예배가 곧 찬양이다. 찬양이 없는 예배를 상상해 보라. 다음 주일 예배 시간에 마음껏 찬양의 자리에서 큰 은혜를 체험하는 각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 사랑하는 가족, 사랑하는 친척, 사랑하는 친구, 가까운 이웃들을 초청해서 이 시대 최고의 찬양의 사람과 더불어 은혜 가득한 예배의 시간, 찬양의 시간이 되기를 바란다. 

 

우리 다 같이 <나의 피난처 예수>라는 찬양을 함께 찬양하고 기도하도록 하자. 주께 피하는 자의 은혜가 각 사람에게 늘 함께 하기를 축원한다. 아멘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지성래목사
담임목사소개
칼럼
세미나글
사역일지
출판도서소개
언론관련 글과 영상
활동사진
동영상
상담코너
사역동향

교회소개

교회연혁

주일설교

성가대찬양

교회앨범

이달의행사

행사동영상

선교지현황

섬기는분들
전체 최신글
주께 피하는 자의 기..최고관리자
"소원"최고관리자
"빛의 사자들이여"최고관리자
"주께 피하는 자의 ..최고관리자
"내가 예수 믿고서"최고관리자
2025년 8월 선교..최고관리자
2025년 태국 선교..최고관리자
2025년 6월 태국..최고관리자
2025년 6월 선교..최고관리자
2025년 2월 선교..최고관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