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이스북에 공유 트위터에 공유 구글플러스에 공유 카카오스토리에 공유 밴드에 공유
예수사랑교회
복음 인재를 양성하여,열방선교에 앞장서는 교회
설교문    |  지성래목사  | 설교문
포도나무 비유(요15:1-12) 20250907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플러스로 보내기
  • 카카오스토리으로 보내기
  • 밴드로 보내기
작성자 최고관리자
최고관리자
작성일 25-09-07 22:34 조회 4 댓글 0
 

                       포도나무 비유(요15:1-12)               2025. 9. 7

 

 

맛있는 포도를 먹을 수 있는 계절이 되었다. 세계인들이 가장 많이 먹는 과일 중의 하나가 포도이다. 중동지역이 원산지이다. 우리나라에는 삼국시대 무렵부터 전래되어 재배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예수의 수많은 비유 말씀 가운데에서 포도나무 비유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이스라엘에는 포도나무가 흔하다. 포도나무는 올리브 나무인 감람나무와 무화과 나무와 함께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나무 중의 하나이다. 포도나무는 나무라고 하기에는 좀 그렇다. 그러나 풀이 아니니까 나무는 나무다. 포도나무는 포도 열매로 대답하는 나무이다. 

 

예수께서 포도나무 비유로 교훈하시려는 바가 무엇이었을까. 이 비유는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기 전날인 유월절 예비일에 하신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면, 예수께서는 가까이 다가오는 죽음의 순간을 앞에 두고 왜 이런 교훈을 비유로 말씀하셨을까. 요한복음 15장 전체의 분량인 27절까지의 말씀 중에서 오늘 이 시간에는 12절까지만 읽었다. 

 

1-11절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따르는 제자 즉 성도들과의 관계를 비유로 교훈하신 내용이다. 

12–17절은 서로 이웃 간에 어떻게 대하며 어떻게 사랑하며 살아가야 할지를 말씀하고 있다.

18-27절은 주님의 제자인 성도들이 세상을 어떻게 대하며 살아가야 할까에 대하여 교훈하고 있다.

 

포도나무 비유를 한 마디로 정의한다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성도의 삶이란 어떠하여야 하나”라는 질문에 대답해 주신 말씀이라고 할 것이다. 

 

 

참포도나무이신 예수 그리스도

포도나무 비유의 시작이 “나는 참포도나무요”이다. 이미 구약 성경에는 포도나무로 비유하는 여러 번의 비유가 등장한다. 그러나 그 모든 비유들은 한 결같이 먹을 수 없는 불량품 포도를 생산하는 들포도나무가 되었다는 책망의 내용을 담고 있다. 

요한복음 2장에 소개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가나 혼인집에서의 표적은 예수께서 행하신 표적의 시작이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이 땅을 떠나시기 전날에 참포도나무 비유를 통해서 예수 자신만이 죄 사함을 이루는 대속(代贖)의 시작이며 구속사(救贖史)의 주역이신 것을 선언하셨다. 

 

예수께서는 자기 자신을 포도나무에 비유하시되 참포도나무라고 하였다. 여기서 말씀하신 ‘참’이란 ‘알레띠네’는 ‘진실된’이란 뜻이다. 그렇다. 예수는 백성들을 미혹하던 도적이나 삯꾼과 같은 거짓 지도자가 아니었다.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어리석은 지도자가 아니었다. 예수는 진실하고 충성되고 온전한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예수께서는 그를 따르는 자들에게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하려는 것이라”(요10:10)라는 약속을 성취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예수께서는 요한복음 10장의 선한 목자 비유에서 이미 분명하게 선포하셨다. “도적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 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10:10)

 

과일나무는 품종이 중요하다. 포도나무는 특히 그렇다. 예수께서는 자기 자신을 극상품 포도를 생산할 수 있는 참포도나무라고 하셨다. 농부이신 하나님은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참포도나무로 심으셨다. 그러므로 참포도나무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사랑을 양분과 수액으로 공급받으면 개인과 가정과 나라와 민족과 시대가 복을 받게 마련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은 마르지 않는 샘물과 같다. 요즘 강원도 강릉은 물이 부족해서 난리라고 한다. 생각해 보라. 아무리 설악산이 아름답고 아무리 동해바다가 아름다워도 생활용수와 식수가 부족해지면 더 이상 아름다운 강릉일 수 없다. 물은 생명과도 같은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은 생명의 물과 같은 것이다. 참포도나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 아버지의 진리의 말씀, 은혜의 말씀을 깨닫기 시작하면 그 말씀의 힘이 인생을 살리고 시대를 깨우고 세상을 살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가 대답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시작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전부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참포도나무란 말이다. 다른 포도나무란 없다. 다른 포도나무는 다 들포도나무와 같은 것들이다. 이 세상에 참포도나무는 유일하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참포도나무이다. 참포도나무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갈 때에라야만 인생의 진정한 대답을 얻게 되는 법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

 

요한복음은 “나는...이다”라는 “에고...에이미”(ἐγώ εἱμί)의 문체로 가득하다. 예수가 누구신지를 명쾌하게 선포하고 있다. 수가성 여인에게 물 한 바가지를 받아 마신 예수께서는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 마르지 아니하리라”라고 하셨다. “내가 주는 물은 영원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라”라고 하셨다. 오천명을 먹이신 후에 “나는 생명의 떡이다”라고 말씀하셨다. 나면서부터 못 보던 자의 눈을 뜨게 해 주신 후에 “나는 세상의 빛이다” 라고 하셨다. 죽은 나사로를 살려 내신 후에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라고 하셨다. 

 

그렇다. 이처럼 예수께서 누구신지를 제대로 깨닫고 나면 참포도나무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나의 전 인생의 양분과 수액으로 공급받는 인생으로 살아가게 마련이다. 참포도나무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 안에서 인생의 대답을 시원하게 찾아나가는 각 사람이 되어야만 할 것이다. 

 


농부이신 하나님

“내 아버지는 농부라”라고 하였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이라고 하지 않고 “내 아버지”라고 하였다. 이 표현은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이신 것을 강조하는 내용이다. 그렇다. 하나님이 아버지이시다. 아버지이신 하나님이 농부이시다. 목자 없는 양의 삶이 불가능한 것처럼 농부가 없는 포도나무는 농사가 불가능하다. 농부의 손길이 반드시 필요한 과일 나무가 포도나무이다. 제 때에 포도나무의 가지를 쳐 주고 가꾸지 않으면 극상품의 좋은 포도 열매를 도저히 맺을 수 없는 나무가 포도나무이다. 포도나무를 잘 관리할 줄 아는 농부는 부지런히 포도나무를 가꾼다. 좋은 가지는 북돋아 주고 나쁜 가지는 가차 없이 잘라 버린다. 포도 열매를 얻기 위해서 포도나무를 가꾸는 농부가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 바로 이것이다. 맞다. 하나님은 농부이시다. 농부이신 하나님의 손길이 계속하여 포도나무를 돌보게 될 때에라야만 좋고 풍성한 극상품 포도를 생산할 수 있는 것이다. 

농부이신 하나님 아버지는 언제나 포도나무의 열매를 구하신다. 예레미야 2장 21절에 보면 “내가 너를 순전한 참 종자 곧 귀한 포도나무로 심었거늘 내게 대하여 이방 포도나무의 악한 가지가 됨은 어찌 됨이냐”라고 책망하신 말씀이 있다. 하나님의 언약 민족인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버리고 떠나서 이방 문화를 받아 들였다. 이방 신을 섬겼다. 하나님을 멀리하였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하나님께 제사드리기를 형식적으로 하였다. 세상 물질을 더욱 더 사랑하게 되었다. 그런 이스라엘 백성들의 타락을 책망하신 말씀이시다. 호세아 10장 1절에 보면 “이스라엘은 열매 맺는 무성한 포도나무라 그 열매가 많을수록 제단을 많게 하며 그 땅이 번영할수록 주상을 아름답게 하도다”라는 책망의 말씀을 하셨다. 그렇다. 잘될 때에 조심해야 한다. 번성할 때에 겸손해야 한다. 잘 나가고 높이 되고 남들이 나를 알아주며 고개 숙이고 내가 기대하는 것 이상으로 내가 잘될 때에 분수를 지켜야 한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렇지를 못했다. 

 

생각하여 보라. 내 건강, 내 재능, 내 능력, 내 경력, 나의 지난날의 그 모든 것들을 돌아 보아라. 남들보다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났는가. 남들보다 공부를 잘했는가. 남들보다 앞서가고 높이 되고 잘되었는가. 남들보다 뛰어나고 유능하고 능력이 많은가. 남들보다 경제력이 있는가. 남들보다 사회적인 역량이 우수한가. 그런 복을 나에게 주신 분이 누구이신가. 물론 내가 노력하고 내가 수고하고 내가 성실하였고 내가 애쓴 것이 맞다. 그러나 그런 의지나 체력이나 열정이나 역량은 누가 나에게 주신 것인가.

 

그러므로 겸손해야 한다. 그러므로 남을 배려할 줄 알아야 한다. 음수사원(飮水思源)이란 말이 있다. “물을 마실 때에는 그 물의 근원을 생각하라”라는 뜻이다. 모든 것이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저절로 된 것이란 없다. 하나님이 창조주이시다. 우리는 피조물이다. 우리의 생각과 말과 행실의 바탕이 그 분에게서 비롯되어야 한다. 치매가 무서운 병이라고 하지 않나. 누가 치매로 고생하는 노년기를 원하겠나. 그러므로 생각하여 보아라. 나의 생각, 나의 지혜, 나의 건강, 나의 일거수 일투족 하나 하나가 다 주의 손 안에 있는 것이다. 농부이신 하나님의 손길 안에 있는 것이다. 농부의 손길이 없다면 포도나무에서 열매를 기대할 수가 없는 법이다.

 

아삽의 시편인 시편 80편에 보면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에서 가져다가 가나안에 심으신 포도나무로 비유한 내용을 접하게 된다.

“주께서 한 포도나무를 애굽에서 가져다가 민족들을 쫓아내시고 그것을 심으셨나이다 주께서 그 앞서 가꾸셨으므로 그 뿌리가 깊이 박혀서 땅에 가득하며 그 그늘이 산들을 가리고 그 가지는 하나님의 백향목 같으며 그 가지가 바다까지 뻗고 넝쿨이 강까지 미쳤거늘 주께서 어찌하여 그 담을 허시사 길을 지나가는 모든 이들이 그것을 따게 하셨나이까 숲 속의 멧돼지들이 상해하며 들짐승들이 먹나이다”(시80:8-13)

 

하나님이 출애굽하게 하셔서 광야의 연단을 거치고 가나안에 뿌리 내리게 하신 민족이 이스라엘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으로 하여금 가나안에 뿌리가 내리게 하시고 그 땅에 가득하게 해 주셨다. 그 그늘이 산을 가리고 그 가지가 백향목처럼 울창하게 하셨다. 그 가지가 바다까지 뻗고 그 넝쿨이 강까지 미치게 하셨다. 번성하고 창성하게 하셨다. 그런데 어느 때부터 농부이신 하나님이 그 담을 허시기 시작하셨다. 길을 지나가는 이들이 따게 하셨다. 숲속에서 달려 나온 멧돼지 떼가 포도나무 열매를 상하게 하고 들짐승들이 달려들어서 먹어 버리게 하셨다. 왜일까. 하나님의 심판이 시작된 것이다. 여기서 말씀하는 멧돼지와 들 짐승은 앗수르나 바벨론과 같은 이방 세력들을 언급하는 것이다. 우리는 잘 안다. 왜 이스라엘이 남북으로 나누이게 되었는가. 왜 솔로몬을 끝으로 이스라엘이 남북으로 갈라졌는가. 왜 북왕국 이스라엘은 앗수르의 침략을 못 이겼는가. 왜 남 유다와 예루살렘이 바벨론에 함락되고 말았는가. 하나님의 심판이다. 죄를 멀리해야 한다. 악을 가까이 하지 말아야 한다. 우상 숭배하면 안된다.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려고 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신다. 재물이 나쁘다는 말이 아니다. 부가 나쁘다는 말이 아니다. 돈과 재물을 지나치게 사랑하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하나님이 농부이시다. 하나님께 대답이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돌봐 주셔야 한다. 하나님이 그 얼굴빛을 비추셔서 은혜와 평강을 주셔야 한다. 하나님이 지키시고 하나님이 도와주셔야 한다. 

 

뒤늦게 깨달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끌려간 이방 땅에서 주께 기도하는 기도가 무엇인가. “만군의 하나님이여 구하옵나니 돌아오소서 하늘에서 굽어 보시고 이 포도나무를 돌보소서”(시80:14)

 

시편 80편에 보면, 농부이신 하나님을 향하여 간절하게 기도하는 기도의 내용으로 가득하다.

귀를 기울여 주세요

빛을 비추어 주세요

주의 능력을 나타내 주세요

우리를 돌이켜 주세요

주의 얼굴빛을 비추어 주세요

우리가 구원을 얻게 해 주세요

우리를 회복하여 주세요

우리를 소생하게 해 주세요

우리를 돌이켜 주세요

우리를 구원하여 주세요

 

라고 기도하고 또 기도하고 있다. 무슨 뜻인가. 농부이신 하나님을 업신여기면 안된다. 농부이신 하나님의 손길이 없이도 포도나무와 같은 내 인생이 순탄해지고 풍성해 지리라고 착각하면 안된다. 대답은 하나님께 있다. 농부이신 하나님이 돌보아 주셔야 한다. 농부이신 하나님이 늘 곁에 계셔야 한다. 농부이신 하나님이 외면하시면 내 인생의 포도나무 농사는 망치고 마는 법이다. 내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참포도나무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참포도나무의 포도 열매를 풍성하게 맺으려면 농부이신 하나님 아버지의 손길이 반드시 필요하다. 이것을 깨닫는 것이 믿음이다. 이처럼 농부이신 하나님 아버지의 손길을 의지하며 살아가는 것이 믿음이다.

 

 

열매를 많이 맺는 가지

우리는 포도나무의 가지일뿐이다. 포도나무 그 자체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러므로 포도나무 가지인 나의 인생이 포도 열매를 풍성하게 맺으려면 반드시 포도나무의 원 줄기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꼭 붙어 있어야 한다. 이것이 연합(聯合)의 원리이다. 예수께서 비유로 말씀하셨다.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려져 마르나니 사람들이 그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요15:6)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다고 하셨다.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15:5)라고 하셨다. 우리가 예수 안에 거하고 예수가 우리 안에 거하는 길은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 안에 거하는 길이라고 하셨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15:7)라고 하셨다. 우리는 이런 말씀을 착각하고 오해하면 안된다. 원하는 대로 구하면 이루게 된다고 하셨으니 원하는 대로 구하면 대박이 나는가 보다. 이런 착각에 빠지면 않된다. 예수께서 교훈 하신 이 말씀의 진의는 출세하고 성공하고 권력과 명예를 누리고 부자되고 만사가 형통해지라는 그런 의미의 말씀이 아니다. 

 

참포도나무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 안에서 많이 맺게 되는 열매란 무엇일까.

 

8절에 보면,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 열매이다.

예수의 제자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열매이다.

9절에 보니까, 예수의 사랑 안에 거하는 생활이 열매이다. 

10절에 보니까, 예수의 계명의 말씀을 지켜서 예수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이 열매이다.

11절에 보니까, 예수께서 원하시는 예수로 인한 기쁨이 충만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 열매이다.

12절에 보니까, 예수께서 제자들과 그의 곁의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신 것처럼 서로 사랑하며 살아가는 것이 열매이다. 

13절에 보니까,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릴 정도의 사랑을 실천하며 살아갈 수 있다면 그것이 열매 중의 열매인 것이다. 

14절에 보니까, 예수께서 말씀하신 이와 같은 비유의 교훈을 제대로 잘 깨달아 알고 실천하며 살아가면 “나의 친구라”라고 하셨다. 그렇게 살면 예수께서 우리를 예수의 친구로 여겨 주신다고 하셨다. 

15-27절에 보니까 예수의 친구답게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고 박해를 받을지라도 낙망하지 말라고 하셨다. 보혜사 성령을 받고 예수의 증인되어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참포도나무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풍성한 포도 열매를 맺는 복된 인생이라고 하셨다. 포도나무의 비유는 우리 각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답게 살아가야 한다는 강력한 초청의 말씀인 것이다. 

 

예수께서 부활 승천 하신 후에 맛디아를 포함한 12제자의 삶이 그러하였다. 사도 바울과 바나바와 디모데와 디도와 의사 누가와 브리스길라 아굴라 부부가 그랬다. 지난 이천년 교회 역사에 수 많은 주의 사람들의 삶이 그러하였다. 

 

한국교회 초기 역사의 때에 서재필이 그랬고 이승만이 그랬다. 백범 김구가 그랬고 도산 안창호가 그랬다. 남강 이승훈, 월남 이상재가 그랬다. 유관순이 그랬고 박 에스더가 그랬다. 박에스더(1876-1910)는 황해도 해주에서 양반 집 딸로 태어났다. 그러나 글 공부할 기회를 얻지 못했다. 그랬던 그가 서울 정동에서 메리 스크랜턴(Marry fletcher Scranton, 1832-1909)선교사를 만나게 되었다. 이화여자고등학교와 이화여대의 전신인 이화학당(梨花學堂)은 메리 스크랜턴 선교사가 설립하였다. 그녀는 40세 때에 남편과 사별하고 53세이던 1885년 5월에 의사인 외아들 윌리엄 스크랜턴(William B. Scranton 1856~ 1922)내외와 함께 조선에 왔다. 메리 스크랜턴 선교사를 만난 박에스더는 한글과 영어를 동시에 배우기 시작했다. 그 당시 조선에는 서양 의술을 익한 여의사가 단 한 사람도 없었다. 박에스더는 미국 볼티모어 여자 의과대학에 유학길에 올랐다. 1900년, 24살에 조선인 최초로 여의사 자격증을 받았다. 귀국해서 정동에 있는 여성 진료소에서 진료를 시작했다. 남자 의사에게 진료 받기를 꺼려하던 조선의 여성들이 몰려 들었다. “여성이 건강해야 가정이 산다”라고 말하며 산모 교육과 여성 교육에 앞장섰다. 오늘 날 이화여자대학교 의과 대학의 모체인 이화 학당 의학교에서 후학을 양성하기도 하였다. 진료와 교육을 병행한 것이다. 그녀는 안타깝게도 1910년, 34살에 눈을 감고 말았다. 날마다 너무나 많은 환자를 돌보며 지내던 중에 과로로 숨지고 말았다. 그의 본명은 김점동이다. 남편 성을 따라서 박씨 성을 쓰게 되었고 에스더는 세례명이다. 그 당시 그가 남긴 업적과 영향력은 설명으로 다 할 수 없는 대단한 결과를 낳았다. 참포도나무에 열린 포도 열매처럼 말이다. 주의 말씀 안에서 승리하는 나날이 되기를 축원한다. 아멘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지성래목사
담임목사소개
칼럼
세미나글
사역일지
출판도서소개
언론관련 글과 영상
활동사진
동영상
상담코너
사역동향

교회소개

교회연혁

주일설교

성가대찬양

교회앨범

이달의행사

행사동영상

선교지현황

섬기는분들
전체 최신글
포도나무 비유(요15..최고관리자
하나님을 찬양하라(시..최고관리자
"내 주는 강한 성이..최고관리자
"포도나무 비유"최고관리자
"만유의 주재"최고관리자
"만유의 주재"최고관리자
주께 피하는 자의 기..최고관리자
"소원"최고관리자
"빛의 사자들이여"최고관리자
"주께 피하는 자의 ..최고관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