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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고한 희생 0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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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성래
지성래
작성일 12-04-21 20:38 조회 13,974 댓글 0
 
이 세상에 자신의 목숨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이란 단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누군가를 위하여 혹은 그 무엇인가를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스스로 던지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나라의 근대사로 하면 삼일 독립 운동을 기점으로 일본의 식민지로부터 독립을 위하여 항거하다가 목숨을 잃은 순국열사들과 6.25 전쟁에 희생된 참전 용사들과 국민들의 희생이 그러하다. 1948년에 건국된 대한민국의 민주화를 위하여 죽어간 4. 19의거의 희생자들과 긴긴 군사 정권하에서 희생된 수많은 이들의 고귀한 헌신과 그 숭고한 삶을 결코 잊을 수가 없다. 올 2012년 4월에 국가 보훈처의 초청으로 유엔 참전 국가 중에 영연방 4개국인 호주와 캐나다와 뉴질랜드와 영국의 연세 많은 생존자와 그 가족들을 휴전 60년 만에 초청하는 뜻 깊은 행사가 있었다. 그 중에 우리의 가슴을 뭉클하게 하는 소식이 전해졌다.

1951년 1월 6일, 캐나다의 조셉 허시(Joseph Hearsey)는 다니던 철도회사를 그만두고 동생 몰래 동생이 소속되어 있는 프린세스 패트리셔 연대 제2대대에 자원입대하였다. 이미 동생 아치볼드 허시(Archiebald Hearsey)는 1950년 9월 7일에 21살 나이로 입대하였고 6. 25 한국전에 참전한 상태였다. 그 후 1951년 10월 13일에 한국전에서 형이 총상을 입고 죽어 가는 상태에서 비로소 형제가 만나게 되었다. 이웃한 인접 부대의 전투 현장에서 어깨에 총상을 입고 많은 피를 흘리며 고꾸라져 죽어가던 형은 동생 품에서 눈을 감아야 했다. 형의 시신은 전쟁 중에 부산 유엔기념공원에 안장되었다. 그렇게 희생된 캐나다 병사들의 수만도 부산유엔기념공원에 378기나 된다. 유엔이 집계한 자료에 따르면 6.25로 희생된 한국군이 1,312,836명(약90%)이고 미국군 144,173명 그리고 나머지 유엔참전15개국의 희생자가 17,260명이다. 대한민국은 이 같은 엄청난 희생자들의 숭고한 희생의 피가 이 땅의 곳곳에 뿌려진 슬프고 값진 죽음 위에서 다시 일어선 민족이다.

지난 2011년 6월에 25년간 앓던 폐질환으로 숨진 동생은 그의 유언에 따라 금번 2012년 4월에 부산에 있는 유엔기념공원에 형의 곁에 60년 만에 나란히 안장되었다. 그 유해 봉송 기금도 캐나다의 6.25 참전용사들과 가족들에 의해서 모금되었다고 한다. 동생은 늘 “전쟁은 끔찍한 일이지만 당시로서는 그것이 옳은 일이었다.”는 말을 하고는 했다고 전해진다. 전쟁에 대한 공포와 전쟁 중에 죽어간 형에 대한 슬픈 충격과 그리움에 잠을 자면서도 크게 소리를 지르거나 평소에 형의 사진을 보고 우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늘 그의 손잔등에는 검푸른 멍이 들어 있었는데 잠결에 전쟁터에서 적에게 둘러싸인 형을 보호하려고 주먹질을 하며 꿈을 꾸다가 침대 옆의 탁자를 쳐서 든 멍이었다고 한다. 영화 ‘태극기를 휘날리며’의 주인공 형제와 같이 가슴 뭉클한 전쟁의 아픔을 전해주는 이야기이다. 오늘 날 세계적인 번영을 이룩한 대한민국의 이 같은 국가 발전과 부흥의 배후에는 이처럼 희생되어간 순국자들과 순교자들의 값진 피가 우리나라 산야의 처처에 젖어있다. 더욱이나 와 본적도 없고 알지도 못하던 나라에 유엔군의 이름으로 참전하여 죽어간 참전 용사들의 숭고한 희생 앞에 고개가 절로 숙여지지 않을 수 없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요15:13-14)고 하셨다. 사람이 한 생을 살면서 이념이나 정의를 위하여 죽거나 국가를 위하여 죽거나 신앙을 지키기 위하여 죽는 이들이 있다. 뿐만 아니라 부득이한 경우에 자신의 목숨을 아끼지 않고 분연히 죽어가는 이들이 있다. 지난 2010년 3월, 백령도 앞바다에서 피격된 천안함 피폭현장의 희생자 유해탐사를 위해서 헌신하다가 25미터의 깊은 바다 속에서 죽어간 고 한주호 준위의 희생이 그러한 경우가 아닌가. 지금은 초등학교 6학년 도덕교과서에 ‘책임과 희생정신으로 살다간 영웅’이라는 제목의 주인공이 되어 후세들에게 숭고한 희생의 가치 있는 삶을 교훈하는 역사적인 인물이 되었다.

최근에 서천군 서면 마량포구에 위치한 동백정감리교회와 그 곁에 건축 중인 아펜젤러 순직기념관을 방문할 기회를 가졌다. 그 지역은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로 성경이 전래된 곳이기도 하다. 1816년에 영국 알세스트 호와 리라 호의 함장인 머리 맥스웰 함장과 바실홀 함장은 본국의 명령에 따라서 한국의 서해안 일대를 탐사하라는 훈령을 받고 서해안 일대를 시찰하며 해도를 작성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같은 해 9월 5일에 비인만 마량진 앞 갈곳에 들러서 당시의 첨사였던 조대복에게 영어성경(KJV)을 전달하였다. 이 같은 사실은 구한말 순조실록에도 기록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영국 측에서 발간한 ‘한국서해안 항해기’(A voyage of discovery to the west coast Loochoo island)에도 기록되어 있다. 그 후 1832년 7월 귀츨라프와 1866년 평양의 대동강 변에서 죽어간 영국의 로버트 저메인 토마스(Robert Jermain Thomas, 1840-1866)선교사에 의해 중국어 성경이 조선에 소개되었다. 성경의 도래와 함께 1880년대 만주와 일본에서는 은밀하게 성경이 번역되기 시작했다.

1902년 6월 11일에 감리교의 선교사 H. 아펜젤러(Henry G. Appenzeller, 1858-1902) 목사는 목포에서 열리는 성경번역위원회에 참석하기 위하여 제물포를 떠나 그 곳 마량진 앞 바다를 지나가고 있었다. 밤 10시가 넘은 시간에 그가 타고 있던 배가 같은 일본 회사의 또 다른 배와 충돌하는 사고로 침몰이 시작되었다. 고등학교 때 수준급 수영 선수 출신이었던 아펜젤러는 캄캄한 밤중에 일어난 충돌 침몰 사고 현장에서 배 안의 이곳저곳을 뒤지며 한 사람의 생명이라도 더 구해 보려고 하다가 결국은 구명정과 구조보트 등이 뒤 엉킨 아비귀환의 현장에서 죽고 말았다. 그의 나이 44살 때의 일이다. 이처럼 한 나라와 민족의 역사에는 누군가의 끝없는 희생이 숨겨져 있다.

6.25 때의 종군기자였던 마거리트 히긴스( Marguerite Higgins,1920-1966)는 <자유를 위한 희생>(War in Korea)이라는 전쟁 참전기를 써서 전쟁의 참상과 대한민국의 국제적인 입지를 미국 사회와 열방에 알렸다. 그녀는 6.25가 일어난 그 다음 날로 한국에 도착하였고 6개월간 종군여기자로 활동하면서 전쟁의 참상을 세계에 알린 인물이다. 이 책으로 그는 1951년 여성 최초로 퓰리처상을 수상했으며 이 책을 들고 미전역을 돌면서 "한국을 도와야 한다."고 호소했다. 그녀의 이 책은 자유민주주의를 위한 교과서 아닌 교과서 역할을 해 왔다. 히긴스는 "한반도에서 우리는 준비하지 않은 전쟁을 치름으로써 값비싼 대가를 치렀다. 또한 승리는 많은 비용을 요구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패배할 때 치러야 할 비용보다는 훨씬 저렴할 것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그녀는 책에서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북한 공산군의 대한민국 침략소식은 마치 시한폭탄이 터진 것처럼 일본 도쿄를 강타했다. 북한군이 이날 새벽에 남침했다는 첫 보고를 받은 일본 점령 연합군 최고사령부의 당직 장교는 별로 놀라지 않았다. 당시 사령부는 도쿄의 다이치 빌딩에 있었다. 장교는 이 사건 보고를 위해 최고사령관 맥아더(Douglas MacArthur, 1880-1964) 장군을 일부러 깨우지도 않았다. 그러나 공격자들의 신속한 진격은 몇 시간도 안 되어 우리에게 그들의 힘에 대해 경각심을 갖게 했다. 동북아시아 최후의 비공산주의 전초기지인 한국이 무너지고 있었다. 미국은 피보호국인 한국에 대한 전투지원을 할 것이냐, 아니면 공산주의자들에게 완전히 양보할 것이냐를 즉시 결정해야만 했다. 이틀 후 나를 실은 비행기는 번쩍이는 제트전투기의 엄호를 받으며 한국전쟁 지역의 심장부로 굉음을 내며 날아가고 있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미국의 참전 결정은 내려지지 않았다.”고 글을 시작하고 있다. 그렇게 벌어진 6. 25는 3년이 넘게 계속되었고 오늘 날도 전쟁의 불안은 멈추지 않고 있다. 6.25는 엄청난 희생자를 내야만 했다. 그리고 “하나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의 애국가를 부르는 소리와 함께 여기까지 발전을 계속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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