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지을 수 있는 죄 중에서 가장 무섭고 독하고 악하고 고질적인 뿌리를 갖고 있는 것이 무엇일까. 바로 ‘교만’이란 것이다. 교만은 살인이나 간음이나 도적질이나 거짓말이나 탐심보다 더 지독한 악이다. 인간은 교만하기 때문에 타락하는 것이다. 심지어는 천사도 교만의 악령에 붙잡힐 때에 사탄으로 타락하고 말았다. 인간의 교만은 바벨탑을 쌓아 하나님께 까지 높아져 보려 하였었다. 교만은 온갖 악을 불러 오는 악마적인 힘이 있다. 교만은 매사에 하나님께도 대적하려 한다. 인간을 붙들고 장악한 교만은 자기 보다 더 나은 그 누구도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교만은 끝없는 경쟁력에 불을 붙인다. 그래서 자기 자신보다 더 잘 하거나 더 잘 났거나 더 많이 가졌거나 더 높아졌거나 더 화려하거나 더 굉장한 그 무엇도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반대로 자기보다 조금이라도 더 부족하거나 더 약하거나 더 안쓰러운 모습에 대하여 동정심을 보내는 대신에 무시하려 하고 상대하려 하지 않고 깔보려 하는 악이 작용한다.
인간을 교만하게 만드는 뿌리는 끝없는 비교의식이다. 그래서 우월감에 젖어 살고 경쟁심을 불태우며 자기 교만과 자기만족의 감옥에 갇혀서 살아간다. 자기가 남들보다 더 실력이 있거나 더 좋은 학교를 나왔거나 더 돈이 많거나 더 잘 생겼거나 더 예쁘다는 생각에 사로잡혀서 끊임없이 교만하게 행동한다. 혹시 겸손하게 자기를 낮추는 경우가 있더라도 그것은 자기를 가리는 변장이요 위장술에 불과하다. 여전히 그 가면의 뒤에는 교만한 자아가 꽉 들어차 있다. 이 교만이란 것은 항상 사람을 적대감 속에서 살아가게 만드는 묘한 힘으로 작용한다. 기독교인인 성도조차 타락하게 만들고 교회마저 병들게 하는 악한 바이러스의 출처가 바로 이 ‘교만’이란 것이다. 이 교만에 붙잡히면 우쭐하게 되고 자기가 남들보다 뭐 대단히 더 나은 사람인 줄로 착각하며 지내게 된다. 이쯤 되면 교만의 샘 줄기에서 오징어의 먹물과 같은 검고 쓴 물이 흘러 나와서 자신의 정체를 잃어버리고 매사에 가면을 쓰고 행동하게 만들어 버린다. 실로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처럼 “양의 옷을 입고 노략질하려고 나아오는 이리”(마7:15)가 되고 만다. 저들 중에는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마7:23)는 책망을 들을 자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제라드 리드의 <C. S. 루이스의 일곱 가지 악과 선>이란 책이 있다. 지난 20세기 영국과 세계를 대표하는 기독교 지성의 한 사람이었던 C. S. 루이스(Clive Staples Lewis, 1898-1963)가 정의한 일곱 가지 악 중의 첫째도 바로 그 ‘교만’이란 것이다. 그는 ‘교만, 시기, 분노, 호색, 탐식, 게으름, 탐욕’이 인간을 대표하는 악이라고 정리하였다. 그 첫째로 다룬 악의 정체가 바로 ‘교만’이란 것이다. 그러면 일곱 가지 선이란 무엇일까. ‘분별, 정의, 용기, 절제, 믿음, 소망, 사랑’이다. 루이스는 <순전한 기독교>(Mere Christianity)라는 그의 책에서 “교만한 사람은 하나님을 알 수 없다. 교만은 영적인 암이며 그것은 사랑과 자족하는 마음과 상식을 갉아 먹는다.”고 했다. 그렇기 때문에 교만한 사람은 세상을 살면서도 사물과 사람들을 있는 그대로 대하지 못하는 과오를 계속하여 범하고 만다.
영국 런던 대학교의 게린 그린버그 교수는 모래를 250배 확대 촬영한 사진을 세상에 공개하였다. 육안으로 보면 아주 평범해 보이는 고운 돌가루에 불과한 모래 한 알이 얼마나 아름답고 영롱한 보석인지 모른다. 단지 그 현란하고 아름다운 모래의 색과 모양을 눈으로 관찰 할 수 없을 뿐이다. 하나님이 사천년 전에 아브라함에게 바다의 모래와 같은 후손들을 약속하실 때에 작아 보이지만 그런 영롱하고 아름다운 빛을 간직한 후손들을 언약의 자손들로 약속해 주신 것이 아닐까. 하나님은 금강산의 웅장한 비경(秘境)과 같은 드러난 아름다움만 아름다움으로 여기시는 분이 아니시다. 하나님은 그 수많은 모래알과 같은 평범한 인생들 속에도 그 무엇과 비교할 수 없는 창조자의 형상을 회복할 아름다움을 숨겨 놓으신 구원자이시다. 그러므로 인간이 서로에 대하여 그리고 모든 환경과 사물과 사건 앞에서 교만하면 안 된다. 교만은 참으로 어리석은 악이다.
사람이 교만의 늪에서 벗어나서 겸손해 지려면 큰 걸음으로 교만의 늪을 박차고 뛰쳐나와야 한다. 그래도 여전히 사탄은 교만의 늪에 빠져 있는 인간을 쉽게 놓아 주려 하지 않을 것이다. 결국 사탄은 또 다시 악한 갯벌의 개흙을 칠하듯이 덕지덕지 칠해 놓고 말 것이다. 인간은 권력과 탐심과 지위와 재물과 명예와 인기의 가면에 가리어져서 자기 교만을 즐기는 것으로 점점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져 가고 있다. 교만은 허영심에 갇혀 마비된 모습으로 남들의 박수갈채와 나의 귀를 즐겁게 해 주는 감언이설과 인정해 주고 띄워 주는 말 뿐인 거짓 존경의 늪에 빠져서 자기 어리석음의 왕국을 건설해 가려고 한다. 루이스는 “하나님은 인간을 겸손하게 만들기 원하시며 우리가 바보처럼 걸쳐 입고 우쭐대며 돌아다니는 우습고 추한 가장무도회의 의상을 벗기고자 애쓰신다.”고 했다. 그러므로 아담과 하와의 타락도 불순종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교만에 근거한다.
교만은 판단력이 흐려지고 분별력이 약하여지고 자기 자신의 분수를 가름하지 못하게 하여 한 가지에 집착하게 하는 사탄이 건네는 독약이며 영혼의 질병이다. 이런 병에 걸리고 나면 쉽게 헤어 나올 용사가 없다. 가인이 하나님께 제사 드린 후에 동생 아벨을 죽인 것도 교만이란 악이 그의 마음 속 깊은 곳에서 독사의 머리처럼 고개를 든 것이다. 성경의 역사와 인류 역사의 그 모든 인물들 중에서 타락하거나 변질되거나 혹은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서 넘어지거나 쓰러진 이들의 특징이 무엇인가. 일정한 지위나 권력이나 명예나 역할이 주어졌으나 결국은 하나님으로부터 떠났거나 죄와 악에 빠지게 된 그 시작이 어디에서부터 기인하는가. 이스라엘의 초대 임금 사울은 왜 하나님이 후회하신 인물이 되었는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 중에 가롯 유다는 왜 주님을 팔아 버리고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는가. 순교의 날을 의식하며 로마의 감옥에서 마지막 편지를 쓰던 사도 바울의 마음에 앙금처럼 남아 있던 씁쓸한 추억의 이름 데마나 알렉산더를 그의 곁에서 떠나가게 했던 원인이 무엇인가. 데마가 세상을 사랑하여 바울의 곁을 떠나가고 구리 세공업자 알렉산더가 그렇게도 바울에게 해를 많이 끼치고 떠나가 버렸던 그 악의 뿌리는 모두가 다 교만에서 기인한 것이 아닌가.(딤후4:10, 14) 무드셀라를 쓰러트리고 노아를 홍수 후에 술에 취해 실수하고 넘어지게 한 것도 결국은 사탄이 공급하는 교만이 아닌가. 그러므로 사람은 과거에 받은 은혜나 자기 절제나 공덕을 자랑하면 안 된다. 인간이 스스로 쌓은 선은 일순간에 무너지고 마는 것이다.
인간은 노력에 의해서 선해지는 것이 결코 아니다. 인간을 인간답게 붙들고 지탱하는 힘은 따로 있다. 우리가 보이지 않는 공기를 평생 호흡하며 생명을 부지하면서 살아가는 것처럼 말이다. 아무리 인간이 큰 소리를 치고 현대의 첨단 과학과 의학의 발전을 자랑해도 인간은 창조주 하나님 앞에서 한 인간일 뿐이다. 한 나라를 건국하고 수십 년을 통치하고 주변 국가를 공략하고 수백만의 군대를 동원하고 항만과 공항을 건설하고 수천 킬로미터의 고속도로와 거대한 도시를 건설했던 통치자라고 하여도 하나님 앞에서는 단지 죄와 악의 사이에서 씨름하는 인간일 뿐이다. 나라의 왕이나 바티칸의 교황이나 교단의 감독이나 총회장이나 무슨 큰 조직이나 거대한 기업의 회장을 역임하였어도 그 지위의 가면에 가리어져서 교만해 지면 돌이킬 수 없게 불행해 지는 것이다. 사울은 다메섹 체험 후에 그 이전에 자랑스럽게 여기던 교만들을 배설물처럼 버렸노라고 고백하지 않았는가. 그러므로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고 사람들과 같이 되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자기 비하의 신앙을 본받아야 한다. 그래야 구원의 소망이 있는 것이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로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2:5)는 그 마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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