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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서의 빛과 그림자 2017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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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최고관리자
작성일 17-10-11 17:30 조회 12,219 댓글 0
 
김종서의 빛과 그림자
 

 

삭풍(朔風)은 나모 끝에 불고 명월(明月)은 눈 속에 찬데,
만리변성(萬里邊城)에 일장검(一長劍) 짚고 서서,
긴 파람 큰 한 소래에 거칠 것이 없에라.
 

이는 절재(節齋) 김종서(金宗瑞, 1390~1453)가 쓴 <삭풍은 나무 끝에 불고>라는 시조이다. 나라와 민족을 위하는 의지와 애국심이 배어 있는 이런 시조를 문학에서는 호기가(豪氣歌)라고 부른다. 이 시조는 그의 호방한 기상과 나라에 대한 염려와 지도자다운 절조와 기개를 잘 드러내고 있다. “살을 에는 듯한 차가운 북풍은 앙상한 나뭇가지에 윙윙 불어대고, 겨울밤의 밝은 달은 하얀 눈으로 뒤덮인 대지를 차갑게 비춘다. 한양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국경 지대에 있는 외딴 성()에서 큰 칼을 힘주어 짚고 서서 북방을 노려보며 긴 휘파람과 크게 한 번 질러 보는 고함소리에 거칠 것이 없도다.”고 노래하고 있다.
 

충남 공주군에서 태어난 김종서는 조선 초의 문신이며 장군이고 정치가였다. 지략이 뛰어나고 강직하고 엄정하며 밝은 성격과 면모를 갖추어 대호(大虎)라는 별명이 붙었던 그는 태종 5년인 15살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그 후 세종의 두터운 신임을 받고 함길도 도관찰사, 함길도 병마도절제사가 되어 8년간 북쪽 변방에서 여진족을 무찌르고 육진(六鎭)을 개척하는 등 북벌 정책을 수행한 공신이다. 압록강과 두만강을 경계로 하는 오늘날의 남북한의 지도가 그 때 이후로 변함이 없으니 역사적인 인물이 아닐 수 없다. 육진 정벌 후 그는 형조판서를 거쳐 예조판서에 임명되었고 나중에는 우찬성으로서 판예조사를 겸하였다. 관료로서 세종의 절대적인 총애를 받으면서 성장하게 되자 그의 위세는 문종과 단종의 대에 이르기까지 범하기 어려운 자리에 이르렀다.
 

세종은 <고려사>(高麗史) 개수 작업이 미비한 것을 보고 학자이기도 했던 김종서와 정인지 등에게 고쳐 쓰기를 명하였다. 2년여에 걸친 집필과 교열을 맡은 이들은 김종서 외에는 모두가 다 집현전의 관료 출신들이었다. 이는 김종서의 뛰어난 학자적 능력을 입증하는 사례이기도 하다. <고려사>를 왕에게 올리는 자리에서 김종서는 편년체의 <고려사> 편찬을 건의하였다. ‘편년체’(編年體) 란 연월일을 따라서 역사를 서술하는 방식이다. 왕은 즉시 편찬의 착수를 명하였고 이듬해에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가 이루어졌다.
 

역사책에서 공부한 적이 있으나 잊고 지내던 김종서의 묘를 중심으로 그 주변을 개발하고 있는 현장을 방문해 보았다. 추석날 새벽 기도 후에 강화도에 계신 어머니를 뵙고 선친의 묘소를 둘러보았다. 오후에 교회에 돌아와서 수요일 밤 예배를 드렸다. 깊은 밤중에 출발해서 세종시에서 노년기를 지내시는 빙모님을 찾아뵈었다. 다음 날 오후 시간에 빙장의 유골을 모신 묘원을 방문하고 멀지 않은 곳에 있는 김종서의 묘를 찾았다. 오늘날은 세종시에 속한 충남 공주시 장기면 대교리 산에 위치해 있다. 세종특별자치시에서 보존하는 기념물 2호라는 안내판에 실린 짧은 설명과 홍살문과 보존된 묘 말고는 아직은 기념관등의 별 시설이 없었다.
 
그는 세종 때부터 문종과 단종에 이르는 충신이었다. 허약했던 문종은 재위 24개월 만인 39살에 죽음을 앞두고 영의정 황보인, 좌의정 남지 등과 함께 우의정인 김종서에게 그 해에 12살이었던 어린 단종을 부탁했다. 그러나 세종의 여러 왕자들은 다투어 세력 확장을 도모하였다. 결국 수양대군(首陽大君)은 자신이 왕위에 오르려는 야망을 실현시키는 데 가장 장애가 되는 인물로 그를 지목하고 제거하고자 하였다. 수양대군은 한명회와 권람 등의 모사(謀士)에 힘을 얻고 홍달손, 양정, 유수 등 무사들을 규합하였다. 단종 재위 제 1년인 14531013일에 거사하기로 하였다. 서대문 밖에서 살던 김종서의 집으로 찾아간 양정과 임운등이 김종서와 그의 두 아들을 살해하였다. 역적으로 몰려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그의 묘에는 옷가지와 신발과 한쪽 다리 밖에는 장례 할 수 없었다고 하니 숙연한 생각이 들었다.
 

수양대군의 측근들은 김종서 등이 반역을 도모하였기에 대역모반죄(大逆謀叛罪)로 우선 죽였다고 단종에게 거짓으로 보고하였다. 어린 왕 단종의 명을 받아 낸 저들은 홍윤성을 앞장세워 대신들을 소집하였고 차례대로 죽였다. 황보인, 조극관, 이양 등을 죽이고 정분, 조수량 등을 귀양 보낸 후 권력을 완전히 장악하였다. 이리하여 왕위에 오른 이가 수양대군인 세조이다. 그 후 단종은 세조의 아우인 금성대군의 집에 감금되어 지내다가 영월로 유배되었고 17살에 사약을 받고 숨졌다. 오랜 세월이 지난 후인 숙종 6(1680)에 강화유수 이손이 김종서의 억울함을 논하였고 숙종 45(1719)부터는 후손들이 다시 등용되기 시작하였다. 역적으로 몰려 누명을 쓰고 비운에 죽임을 당한 김종서는 영조 22(1746)에야 그의 벼슬이 회복되었다. <장백산에 기를 꽂고>라는 그의 또 다른 시조를 대하면 그가 얼마나 나라와 민족을 위하는 삶을 살고자 하였는지를 알기에 충분하다.
 

장백산에 기를 곳고 두만강에 말을 싯겨
서근 져 션븨야 우리 아니 사나희냐
엇덧타 인각화상(獜閣晝像)을 누고 몬져 글리오.”
 

이 시조를 현대어로 해석하면 백두산에 기를 꽂고 두만강에 말을 씻기니 썩어 빠진 저 선비들아 우리는 사내대장부가 아닌가. 인각(獜閣)에 과연 누구의 화상이 먼저 걸리겠느냐.”는 내용이다. ‘인각’(獜閣)이란 조선시대에 나라에 공훈이 많은 공신과 그의 자손을 기리기 위해 세운 관청의 각을 말한다. 그렇지 않나. 아무리 지위가 높고 권력이 대단했던 것 같아도 후대가 두고두고 지탄하는 역사의 인물이 있는가 하면 불운한듯하게 생을 마친 것 같으나 세월이 지날수록 향기롭고 후세대가 귀감으로 삼는 역사적인 인물이 있지 않은가.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12:24)는 성경 말씀 그대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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