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 꾸는 것 같은 날의 감사(시126:1-6, 살전5:16-18) 2024. 11. 17 추수감사주일
오늘 날까지 살아오면서 가장 감격스럽고 가장 기뻤던 때가 언제인가. 꿈인가 현실인가 싶을 정도로 믿어지지 않을 정도의 감격이 넘쳐 났을 때가 언제인가. 아마 연세 드신 분들은 1945년 8월 15일, 광복의 날이라고 대답하실 것이다. 그런 민족적인 감격의 날, 국가적인 경사의 날을 기억하는 분들이 계실 것이다. 맞다. 1910년 경술년이 일본에게 주권을 빼앗긴 경술국치의 해라면 1945년은 일제의 식민지로부터 해방되어 자유를 되찾은 기쁨과 감격과 감사의 해이다.
그러면 개인적으로 그런 기쁨, 그런 감격, 그런 감사, 그런 은혜를 누린 때는 언제인가. 아마 요즘처럼 수시 합격자가 발표될 때에는 입시 준비생들 중에서 원하는 대학, 원하는 학과에 진학하게 된 기쁨과 감격이 그런 감격과 기쁨 중의 하나일 것이다. 그러나 인생을 칠팔십년 살아 오신 분들은 수 많은 인생의 우여곡절을 겪어 오면서 만감이 교차하는 순간들을 주마등처럼 떠올리게 될 것이다. 기뻤던 순간과 슬펐던 날들, 즐거웠던 순간과 우울했던 날들, 부끄럽고 수치스러웠던 순간과 자랑스럽고 영광스러웠던 날들, 천하를 다 가진 것처럼 만족스럽고 좋았던 순간과 세상을 다 산 것처럼 낙심하고 괴로워했던 날들...이러 저러한 날들과 일들이 쌓이고 쌓여서 마치도 나무의 나이테를 더하는 것처럼 세월이 흘러가고 있다.
오늘은 2024년의 추수 감사 주일이다. 교회 설립 제 15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성경의 삼대 절기로 하면 수장절 혹은 장막절이라고 하는 절기이다.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와 감람나무가 유대인을 상징하는 세 가지 나무이다. 이 모든 나무마다 열매를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사람의 노력으로 열매를 거두는 것이 아니다. 물론 사람이 심고 가꾸고 물을 주고 방제하는 노력을 해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돌보심과 은혜가 아니면 단 한 톨의 열매도 농부의 손에 거둘 수가 없는 법이다.
그렇지 않나. 창세기의 아브라함은 거대한 짐승 떼를 거느린 족장이었다. 집안에 불러 모을 수 있는 남자만도 318명이 있을 정도였다. 양과 염소와 소와 낙타가 들판에 가득하고 산허리를 덮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75세가 되도록 자식이 없었다. 하나님을 만난 후에도 자녀를 주시리라는 약속은 25년 세월이 흘러간 그의 나이 100세 때에야 이루어졌다. 나이 100세 되어서야 언약의 아들 이삭을 낳았다. 사람이 내 생각대로 모든 것이 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감사하며 살 줄 알아야 한다.
성경이 말씀하는 감사란 각 사람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깨달아 알고 믿으며 그 분에게 순종하며 살아가는 믿음의 사람의 성숙한 표현을 말한다. 누가 내게 밥 한 그릇 사 주었으니 ‘고맙다, 잘 먹었다’라고 말하는 그런 차원의 감사를 말하는 게 아니다. 물론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물 한 그릇에 감사하고, 떡 한덩이에 감사하고, 한 벌 옷에 감사하고, 한 켤레 신발에 감사해야 하는 것이 맞다. 그러나 그런 정도의 감사 말고 삶의 중심이 나의 전 생애를 이끌어 가시는 주님께 집중될 때에 그런 감사가 진정한 감사인 것이다.
오늘, 추수 감사 주일에 시편 126편을 본문으로 묵상하려는 목적도 거기에 있다. 시편 126편은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라는 표제어가 붙어 있다. 시편 120 –134편까지의 15편이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이다. 성전 순례시(Pilgrim psalms)라고 부른다. 이 모든 시편은 한결같이 바벨론 포로에서 예루살렘에 귀환한 백성들이 성전을 순례하며 부르도록 구분해 놓은 시편들이다. 포로의 땅에서 풀려나서 언약의 상징인 예루살렘 성에 다시 오르며 약속의 도성에 성전을 재건하고 무너진 성곽을 다시 쌓고 잃어 버렸던 성전 제사를 회복하게 된 때에 감격스럽게 부르던 예배 찬양인 것이다.
요즘 무엇을 감사하며 지내왔는가. 오늘 무엇이 감사한가. 지금 무엇을 감사하고 있는가. 왜 감사한가. 구체적으로 무슨 일들이 감사한가. 누구 때문에 감사한가. 무엇 때문에 감사한가. 반대로 왜 감사하지 못하는가. 왜 불만인가. 왜 아쉬운가. 왜 아니라고 여기는가. 요즘 우리는 예배 시간마다 손경민의 찬양 <은혜>를 반복해서 불러왔다.
“모든 것이 은혜 은혜 은혜 한 없는 은혜
내 삶에 당연한 것 하나도 없었던 것을
모든 것이 은혜 은혜였소”
라고 찬양한다. 생각해 보라. 왜 감사해야 하는가. 무엇을 감사해야 하는가. 우리가 감사해야 하는 크고 작은 그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 것이 단 한가지도 없기 때문이다. 당연하게 생각하면 안된다. 생각하면 모든 것이 감사한 것 뿐이다.
본문으로 돌아와서 시편 126편의 기록자는 무엇을 감사하고 있는가. 시편 126편의 기록자는 제 2차 바벨론 포로 귀환의 선봉에 세움받아 쓰임 받았던 학사 에스라일 것이라고 말한다. 자, 그러면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사람 학사 에스라는 시편 126편에서 무슨 감사를 드리고 있는가.
웃음과 찬양이 있는 감사.
“그 때에 우리 입에는 웃음이 가득하고 우리 혀에는 찬양이 찼었도다”라고 감사하고 있다. 입가에 웃음이 가득한 감사, 혀에 찬양이 가득 찬 감사를 드리고 있다. 1-2절에 보면, ‘그 때에’라는 시제에 대한 표현이 세 차례 반복된다. “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려 보내실 그 때에 우리는 꿈꾸는 것 같았도다”라고 하였다. 그날 그 때에 꿈꾸는 자 같은 감격이 있었다는 것이다. 영영 돌아오지 못할 것 같은 포로의 땅에서 선조의 언약의 땅 시온에 되돌아 올 수 있게 된 그 때의 감격과 감사의 순간이 사람의 수고에 의한 결과가 아니다.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이다. 전적인 하나님의 섭리이다. 전적인 하나님의 계획이다. 전적인 하나님의 도우심이다. 전적인 하나님의 승리이다. 전적인 하나님의 용서이다. 전적인 하나님의 돌보심이다.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돌보심, 하나님의 용서가 아니라면 빼앗겼던 유다 땅, 빼앗겼던 예루살렘 성에 되돌아와서 성전을 짓고 예배를 회복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러한 감사와 감격의 순간이 어느 개인, 어느 몇 사람의 노력으로 된 일이 아니란 말이다. 누가 입가에 가득한 웃음을 웃고 싶지 않아서 웃지 못하고 사는 게 아니다. 누가 혀에 가득 찬 찬양을 부를 줄 몰라서 찬양하지 못하는게 아니다. 그런 기쁨과 감격의 찬양의 순간을 맞이하게 해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기쁨의 순간에, 찬양의 순간에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할 줄 알아야 한다.
사람이 사는 게 그렇지 않나. 어젯밤에 울음이 찾아 왔다가도 다음 날 아침에 기쁨과 평화가 회복될 수 있다. 반대로 어젯밤에 기쁨과 웃음과 즐거움이 가득했다가도 다음 날 아침에 슬픔과 괴로움에 갇힐 수 있다. 그러므로 인생은 교만하거나 자랑하면 안 된다. 매 순간을 주 안에서 기뻐하고, 주 안에서 즐거워하고, 주 안에서 예배하고, 주 안에서 찬양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우리는 순간을 살아가므로 하루를 살고 하루 하루를 살아가므로 한 평생을 살아가는 것이다.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가 무엇인가. 예배자의 찬양이란 말이다. 우리가 집에서도 예배할 수 있고, 직장에서도 예배할 수 있다. 언제 어디서나 예배자의 마음가짐으로 살아갈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한 주간 살아가면서 경험하는대로 이처럼 하나님의 집에 나와서 예배하는 이 시간, 이 순간이 얼마나 대단하고 귀한 시간이냐 말이다.
올 2024년 추수 감사 예배를 드리고 있다. 내년, 2025년 추수 감사 예배를 드릴 수 있다는 보장이 내게 있는 것이 아니다. 왜 시편 126편 기록자의 이런 찬양시가 은혜의 고백이요 감사의 고백인가.
주전 586년, 바벨론이 예루살렘을 침략해서 함락되었다. 다윗이 그렇게 소원하고 소원하던 성전 건축의 꿈이 솔로몬의 때에 이루어졌다. 그런데 바벨론의 침략을 받아서 예루살렘 성이 불 바다가 되었다. 예루살렘 성전도 초토화가 되고 말았다. 성전의 귀한 금그릇을 다 집어 갔다. 심지어는 부삽, 부젓가락까지 다 집어 갔다. 성전 낭실의 두 놋기둥까지 다 끌어 갔다. 예루살렘 성전은 폐허가 되었다. 긴긴 세월이 흘렀다. 스룹바벨을 앞장 세우신 하나님은 주전 538년에 제 1차 귀환의 길을 열어 주셨다. 하나님은 바사의 고레스 왕의 마음을 감동하게 하셔서 꿈 꾸는 것 같은 일을 이룩하신 것이다. 도저히 포로의 땅에서 벗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선조들의 땅으로 돌아갈 길을 열어 주신 것이다. 역대하 마지막 장인 36장 마지막 부분인 22-23절에 기록된 역사적인 장면이다.
그 스룹바벨이 앞장 선 제 1차 귀환한 백성들이 힘을 모아서 제 2 성전을 재건하였다. 49,897명이었다. 다시 긴긴 세월이 흘러 갔다. 주전 458년에 하나님은 에스라를 앞장 세우셔서 제 2차 포로 귀환의 길을 열어 주셨다. 1,754명이었다. 감격스러운 일이 아닌가. 그런 역사적인 체험의 중심에 서 있던 에스라가 오늘 시편 126편과 같은 감격적인 고백을 하며 스룹바벨 성전에 올라가며 하나님을 찬양하고 높이는 감격과 감사의 노래를 하고 있는 것이다. 세월이 오래 흐르고 주전 444년, 느헤미야를 앞장 세운 귀환이 제 3차 귀환이다.
“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려 보내실 때에 우리는 꿈 꾸는 것 같았도다
그 때에 우리 입에는 웃음이 가득하고 우리 혀에는 찬양이 찼었도다”
생각하여 보라. 언제 이런 감격스러운 순간이 개인에게 있었는가. 가정적으로는 언제 이런 감격스러운 기쁨과 즐거움과 감사가 있었는가. 결혼할 때인가. 시집가고 장가 갈 때인가. 아들 낳았을 때인가. 딸을 낳았을 때인가. 처음으로 내 집을 마련했을 때인가. 처음으로 승용차 마련했을 때인가. 승진했을 때인가. 분에 넘치는 보너스 받았을 때인가. 아들딸이 공부도 잘하고 칭찬받고 유능하고 자랑스러웠을 때인가. 사업이 너무 잘 되고 장사가 너무 잘 되서 돈을 세다가 지쳐서 잠들 때였는가. 긴긴 질병으로부터 벗어나서 새로운 건강을 되 찾았을 때인가.
며칠 전에 종합 병원에 갈 일이 있었다. 병원 가던 길에 구파발의 어느 커피 숍에 커피 한 잔을 마시려고 들어갔다. 커피를 마시는 동안에 십여명의 장애우들과 가족과 교사들이 함께 그 커피숍에 들어왔다. 중앙의 긴 테이블에 서로 마주 보고 앉았다. 어느 20대 장애우 청년은 침대식의 휠체어에 누워서 들어 왔다. 그의 손발이 되어주는 분은 첫눈에 그의 아버지로 보였다. 잠시 후에10대 후반의 한 자매가 화장실에 가고 싶어 했다. 2-3초 간격으로 계속 소리를 질렀다. 화장실로 교사 두 명에 그를 양편에서 부축해서 데리고 갔다. 화장실에서 우는 소리가 들렸다. 또 다른 여 교사 한 명이 서둘러 달려 갔다. 얼마 후에 세 명의 교사가 그 장애우 자매를 부축하며 데리고 나와서 테이블 가까이 의자에 앉게 했다. 연신 소리를 질러 댔다. 아마도 잠을 자는 시간 말고는 계속 그렇게 소리를 지르는 증상의 장애인 것 같았다. 교사들 표정에 흔들림이 없었다. 익숙하고 안정된 모습으로 일일이 장애우들에게 원하는 메뉴를 시켜서 그 들 앞에 갖다 놓았다. 감사란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았다.
우리는 대개 남들과 비교해서 자신의 삶을 상대적으로 평가한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우리의 삶은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다. 하나님은 각 사람에게 베풀어 주시는 은혜가 있다. 그 시대에 그 나라, 그 민족에게 베풀어 주시는 은혜가 있다. 그 시대에 각 사람에게 내려 주시는 은혜가 있다. 시편 133편의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같도다”라는 고백처럼 하나님은 천하만민에게 골고루 베풀어 주시는 은혜가 있다. 악인과 선인의 밭에 이른 비와 늦은 비의 은택을 내려 주시고 골고루 햇빛이 비치게 해 주신다.
요즘 은행잎이 노랗게 단풍이 들어 한창 아름답다. 낮에 햇빛을 받아도 아름답고 밤에 가로등 불빛을 받아도 아름답다. 엊그제 금요일 밤 기도회 후에 걸어서 집에 돌아가는데 그 밤 중에 어느 중년 부부가 큰 자루에 은행잎을 긁어 담고 있었다. 무엇에 쓰려는 것이냐고 물었다. 주말 농장 텃밭에 심은 마늘을 덮어 주려고 한다고 대답했다. 요즘 텃밭 데라피(텃밭 theraphy)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텃밭에 상추, 고추, 가지, 방울 토마토 이런 것 심고 가꾸며 아침 저녁으로 들여 다 보며 지내는 이들은 우울증이 없다고 한다. 우울증이 치료된다고 한다. 누구나 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당선자 같은 정도의 황제의 궁궐 같은 곳에서 살 수 있는게 아니다. 누구나 다 일론 머스크 같은 천재적인 사업가가 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나를 향하신 주의 은혜를 깨닫고 나면 그 누구라도 그 입에 웃음이 가득하고 그 누구라도 그 혀에 찬양이 가득 찬 감사 인생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남과 비교하고 다른 집과 비교하지 말고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은혜, 우리 가정을 향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진심으로 감사하며 기쁨과 즐거움과 감사가 있는 나날을 주 안에서 살아갈 수 있기를 축원한다.
하나님이 행하신 큰 일 앞에서 감사.
과거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앗수르에 끌려가고, 바벨론에 끌려 가게 된 원인은 나라에 군대가 부족해서만은 아니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 25장 6절부터 11절까지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이 하나님으로부터 떠나고 우상을 숭배한 죄값으로 그렇게 될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내가 그들 중에서 기뻐하는 소리와 즐거워하는 소리와 신랑의 소리와 신부의 소리와 맷돌 소리와 등불 빛이 끊어지게 하리니 이 모든 땅이 폐허가 되어 놀랄 일이 될 것이며 이 민족들은 칠십 년 동안 바벨론의 왕을 섬기리라”(렘25:10-11)
그런 긴긴 심판과 진노의 날들을 뒤로 하고 이방에 끌려 갔던 포로의 땅에서 선조의 땅, 언약의 땅으로 되 돌아 갈 수 있는 감격의 날을 맞게 되었다. 그래서 학사 에스라는 시편 126편에서 고백하는 것이다.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큰 일을 행하셨다 하였도다”라고 말이다. 누가 이런 고백을 하게 되었다는 것인가. “그 때에 뭇 나라 가운데서 말하기를”이라고 하였다. 때가 차니 하나님은 이방 땅에 끌려갔던 하나님의 백성들을 용서하시고 이방 사람, 뭇 나라 백성들의 입을 통하여 여호와 하나님께서 행하신 큰 일을 서로 말하게 하셨다는 말이다.
그렇지 않나. 오늘 날 누구에게 좋은 일이 있으면 세계 열방의 뉴스가 실시간으로 생중계를 한다. 며칠 전 쿠웨이트와의 아시아 월드컵 3차 예선에서 손흥민이 50골을 달성했다. 손흥민이 축구 A매치 경기 통산 130경기에 출전해서 이번에 50골 득점을 달성했다. 그 뒤를 같은 50골을 달성한 황성홍 선수가 따라붙고 있다. 과거에 차범근은 136경기에 출전해서 58골을 득점했다. 사전에 찾아 보면 “A매치란 축구의 국가대표 A팀 간의 국제 공식 경기를 지칭하는 단어다. 여기에서 확장되어 현재는 축구뿐만 아니라 다른 구기 종목의 국가 대표팀 간의 경기를 가리키는 용어로도 쓰인다.”라고 설명해 주고 있다. 축구에 관심이 없는 분들에게는 그게 무슨 말이야 할 수 있지만 선수 자신에게는 큰 일, 대사가 벌어진 것이다. 분야마다 누구나 그런 자리에 설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다. 주 안에서 주의 은혜를 따라 살아가다 보면 때가 되면 하나님은 택한 백성들에게 분명히 큰 일을 경험하고 누리게 해 주실 것이다.
우리는 누구나 살아가면서 ‘큰 일’을 꿈 꾸며 살아간다. 그러나 작은 일에 감사하고 감격해하는 일들이 쌓이고 쌓여서 큰 일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첫 술에 배 부른 경우는 없다. 예배자로 살고, 믿음의 사람으로 살고, 말씀의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이 그런 것이다. 교회에 오면 늘 “예배하자, 기도하자, 찬송하자, 전도하자, 봉사하자, 말씀 읽자, 말씀대로 살자” 그런 강조만 대하는 것 같다, 그러나 맞다. 그래야 한다. 성경을 자세히 대해 보라. 창세기로부터 요한 계시록까기 분명한 강조가 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면 복을 받는다는 강조이다. 성경이 말씀하는 복은 한 두마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복이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사람에게 내려 주시는 복이 그런 것이다. 내일부터 요한 계시록을 날마다 묵상할 것이다. 요한계시록 1장 3절 말씀이 무엇인가.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라고 하였다.
그렇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며 따르며 순종하며 살아가다 보면 각 사람에게 하나님은 큰 일을 행하여 주실 것이다. 큰 기쁨, 큰 즐거움, 큰 은혜, 큰 감격, 큰 감사를 경험하고 누리게 해 주실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중심, 성경 말씀 중심, 교회 중심’의 삶을 살아가다 보면 하나님은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각 사람이 누리게 해 주실 것이다. 내 삶의 중심에 찾아 오셔서 큰 일을 행해 주시는 하나님을 체험하게 해 주실 것이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큰 일을 행하셨으니 우리가 기쁘도다”
(시126:3) 주님 안에서 이런 기쁨과 즐거움과 감사가 계속되는 나날이 되기를 축원한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린 자의 감사.
1-3절은 하나님이 행하신 놀라운 일들에 대한 감사의 고백이다. 나머지 4-6절은 아직 포로의 땅에서 돌아오지 못한 이방 땅에 남아 있는 동족들을 위한 기도이다. ‘남방 시내들 같이’라는 말은 유대 남부의 네게브 지역을 말한다. 건기에는 살 수가 없다. 그러나 우기 철이 되면 황량했던 광야에 넘치는 빗물이 강을 이루며 계곡을 흘러간다. 그런 풍성한 은혜의 감격의 날을 아직 돌아 오지 못한 동족들에게 허락해 달라는 간구이다.
우리가 기억하는 그 유명한 구절이 시편 126편 5절에 나온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라고 약속하였다. 우리는 살아가다 보면 눈물 흘릴 때가 있다. 눈물 흘릴 일이 생긴다. 눈물 흘릴 일을 만난다. <누군가 널 위하여/마음이 지쳐서>라는 찬양이 있다.
“마음이 지쳐서 기도할 수 없고
눈물이 빗물처럼 흘러 내릴 때
주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고
사랑으로 인도하시네
누군가 널 위하여
누군가 기도하네
네가 홀로 외로워서
마음이 무너질 때
누군가 널 위해 기도하네”
이스라엘 백성들은 포로로 끌려간 땅 바벨론의 그발강가에 버드나무 가지에 수금을 매어 달아 놓고 울었다. 시편 137편이 그런 내용이다.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에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
그 중의 버드나무에 우리가 우리의 수금을 걸었나니
이는 우리를 사로잡은 자가 거기서 우리에게 노래를 청하며
우리를 황폐케 한 자가 기쁨을 청하고
자기들을 위하여 시온 노래 중 하나를 노래하라 함이로다”
끌려간 포로의 땅 바벨론의 그발 강가에서 조롱당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을 고발하고 있다. 그런 비운의 날들에 갇혀 지내야 했던 포로의 땅에서 선조의 땅에 되돌아 오게 된 것은 감격이요 감사요 간증이 아닐 수 없다. 세상을 하루 하루 살아가는 것이 누구에게나 쉽지 않다.
웃음과 찬양을 주시는 하나님, 큰일을 행하시는 하나님 안에서 지금 겪고 있는 일이 가슴 먹먹한 순간, 답답하고 괴롭고 슬프고 억울하고 힘겨운 순간일 지라도 우리 각 사람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찾아 나가다 보면 주님은 분명하게 응답하실 것이다. 주님은 분명하게 돌보실 것이다. 주님은 분명하게 보응하실 것이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게 될 것이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게 될 것이다. 이런 은혜의 날을 마음에 품고 믿음으로 살아가는 주인공이 모두 다 될 수 있기를 축원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