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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도란 무엇인가(창39:7-18 엡6:1-3) 20230514 어버이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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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3-05-14 18:30 조회 730 댓글 0
 

                      효도란 무엇인가(창39:7-18  엡6:1-3)            2023. 5. 14 어버이주일

 

 

 

효도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부모께 어떻게 대하는 것이 효도인가?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말씀은 출애굽기 20장 12절에서 강조한 십계명 중의 하나이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라고 약속하였다. 

 

그 외에서 부모 공경에 관한 성경 말씀은 적지 않다. 

 

“내 아들아 네 아비의 명령을 지키며 네 어미의 법을 떠나지 말고 그것을 항상 네 마음에 새기며 네 목에 매라 그것이 네가 다닐 때에 너를 인도하며 네가 잘 때에 너를 보호하며 네가 깰 때에 너와 더불어 말하리니 대저 명령은 등불이요 법은 빛이요 훈계의 책망은 곧 생명의 길이라”(잠6:20-23)

 

“너를 낳은 아비에게 청종하고 네 늙은 어미를 경히 여기지 말지니라”(잠23:22)

 

“네 부모를 즐겁게 하며 너를 낳은 어미를 기쁘게 하라”(잠23:25)

 

“자녀들아 주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은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니 이로써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엡6:1-3)

 

이 세상에 부모 없이 태어난 아들딸은 단 한 명도 없다. 고아라도 낳아 준 부모는 있다. 이 세상에 나의 생명이 존재한다는 것은 신비한 일이다.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살아가는 것이 나의 선택이 아니다. 남자로 혹은 여자로 태어나는 것이 내 선택이 아니다. 성별, 인종, 피부색, 키, 체형, 얼굴 생김새, 건강 상태, 기질 등등 내가 나의 그 어떤 것을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 요즘 성형의술이 발전해서 의학의 혜택을 입는 이들이 있다. 그러나 우리 각 사람은 부모를 통해서 나만의 나된 특질들을 독특하게 갖고 태어나는 것이다. 

 

부모를 공경하라. 어머니 아버지의 가르침과 말씀을 지켜라. 부모의 말씀에 청종하고 거슬리지 말아라. 어머니 아버지를 기쁘고 즐겁게 해 드려라.  부모에게 순종해라. 이런 강조의 이유가 뭘까. 왜 성경은 이런 강조를 구체적으로 반복하는 것일까.

 

이 세상에 자식을 낳자마자 버리는 부모도 없지는 않다. 자식을 학대하거나 죽음으로 몰고 가는 못된 부모도 있다. 무책임한 부모, 사회적으로 지탄 받는 부모도 있기는 있다. 그러나 정상적인 부모라면 자기 아들딸이 잘되고 복되기를 누구나 원하고 바랄 것이다. 

 

오늘은 어버이 주일이다. 창세기의 요셉 이야기를 통해서 은혜를 나누려고 한다. 요셉은 그의 아버지 야곱이 라헬을 통해서 낳은 두 아들 중의 한 명이다. 야곱에게는 네 부인을 통해서 열두 아들이 있었다. 그 중에 열 한 번째로 태어난 아들이다. 요셉의 어머니 라헬은 요셉의 동생 베냐민을 난산하고 베들레헴 길가에서 눈을 감았다. 라헬은 베냐민의 이름을 슬픔의 아들이란 뜻의 ‘베노니’라고 이름 지으며 죽어 갔다. 남편 야곱은 베노니의 이름을 기쁨의 아들이 되길 바라며 ‘베냐민’이라고 고쳐 부르며 키웠다. 야곱은 베들레헴 길 가에서 베냐민을 난산하고 눈을 감은 라헬을 위하여 길가에 돌 무덤을 만들었다.

 

그런 여건에서 청소년기를 보내던 요셉이 열 일곱 살에 배 다른 형들의 미움으로 애굽의 노예 시장에 팔려 갔다. 요셉은 애굽의 노예 시장에서 바로 왕의 친위대장 보디발의 집으로 팔려 갔다. 하나님은 불쌍한 처지가 된 요셉과 함께 하셨다. 하나님은 요셉의 하는 일마다 잘 되게 하셨다. 주인 보디발은 요셉이 믿는 여호와 하나님이 요셉과 함께 하시고 요셉이 하는 범사가 형통하게 되어 가는 것을 보고 알았다. 창세기 39장 앞 부분에 나오는 내용이다. 

 

열 일곱 살에 남의 나라에 끌려가 종 살이를 해야 했던 요셉이지만 하나님은 요셉을 버리지 않으셨다. 요셉은 돌아가신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지냈을 것이다. 다시 만날 수 없는 아버지 야곱을 보고 싶어 하며 지냈을 것이다. 그런 요셉에게 하나님은 친히 아버지가 되어 주셨다. 하나님은 요셉의 마음과 생각과 범사에 은혜를 베푸셔서 비록 노예의 신분이지만 그의 마음을 주장해 가셨다. 요셉은 신분은 노예이지만 주인 보디발은 그를 신뢰하고 그에게 은혜를 베풀었다. 요셉을 가정 총무로 세웠다. 주인 보디발은 가정의 제반 사무를 모두 다 요셉의 손에 맡겼다.

 

하나님은 요셉의 손이 미치는 곳마다 잘 되게 하셨다. 집안 일이든 밭 일이든 복이 되게 하셨다. 창세기 39장 5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요셉을 위하여 그 애굽 사람의 집에 복을 내리시므로 여호와의 복이 그의 집과 밭에 있는 모든 소유에 미친지라”라고 하였다. 우리 말에 집안에 며느리가 잘 들어오면 삼대가 흥한다고 하지 않나. 보디발의 가정은 여러명의 종들 중에 요셉을 종으로 데려 온 후로 집안의 범사가 점점 형통해져 갔다. 주인 보디발도 알았다. 노예인 요셉을 집안에 들인 이후로 그가 믿는 여호와께서 요셉에게 복을 주셔서 자기 집 안밖의 범사가 점점 형통해져 가는 것을 보고 알게 되었다. 

 

보디발은 먹는 음식 말고는 일체의 자신의 소유를 모두 다 요셉의 손에 맡겼다. 오늘날로 하면 부자집의 금고 열쇠까지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주인의 주식 일체를 관리하고 동산과 부동산 일체를 관리하는 자리에 까지 세움 받았다는 말이다. 보디발의 신분이 임금의 자리에 버금가는 친위대장의 고위직이다 보니 신변 안전을 위해서 음식 만드는 일만 맡은 이들에게 맡겼을 뿐이었다. 

 

열 일곱 살에 보디발의 집에 종으로 들어간 요셉은 그럭저럭 십여년의 세월이 흘러 이십대 후반의 늠름한 청년으로 장성하였다. 요셉은 용모가 빼어나고 아름다웠다. 요즘 사무엘하에서 만난 다윗의 아들 압살롬의 외모가 출중했는데 창세기의 인물 중에서는 요셉만한 이가 없을 정도였다. 아마도 요셉은 증조할머니 사라의 빼어난 외모를 이어 받았던 것 같다.

 

사람이 남자이든 여자이든 평균 정도로 소박하게 생긴 것이 좋지 너무 빼어난 외모를 갖고 있으면 그 외모가 사회생활에 오히려 큰 부담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 영화 배우나 드라마 배우가 아닌 경우라면 웬만하게 생긴 외모가 피차의 마음을 편안하게 한다. 요셉은 신분은 노예요 종이었지만 그의 용모가 너무나도 잘 생겨서 보는 이들의 시선을 늘 끌게 하였다.

 

오늘 본문은 요셉의 나이가 스물여덟 살이던 때에 있었던 일화이다. 무엇을 교훈하는가. 

 

 

거절(拒絶)할 줄 알아야 한다.

언제부터인가 여주인의 눈길이 예사롭지를 않았다. 늘 마당쇠처럼 땀을 뻘뻘 흘리며 집 안일과 밭일로 바쁘게 지내는 요셉에게 여주인이 윙크를 하기 시작했다. 창세기 39장 7절에 ‘눈짓’했다는 말은 윙크했다는 말이다. 심지어는 여주인이 노골적으로 요셉에게 잠자리를 청하기까지 하였다. 사태가 이렇게 까지 심각해 지자 요셉은 여주인에게 분명한 거절의 의사를 밝혔다. 

 

“내 주인이 집안의 모든 소유를 간섭하지 아니하고 다 내 손에 위탁했습니다. 그러나 내 주인이 마님의 신변까지 나에게 맡긴 것은 아닙니다. ‘마님은 내 주인의 아내가 아니십니까’”

 

요셉이 단호하고 분명하게 자신의 입장을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여주인은 날마다 요셉에게 노골적으로 잠자리를 요구하였다. 10절에 보면 ‘날마다’라고 하였다. 이 표현을 보면 보디발의 아내의 심리 상태가 심각한 것을 알 수 있다. 요즘 사무엘 하에서 다윗의 장남인 맏 왕자 암논이 배 다른 공주 다말을 연애하며 상사병으로 고생하다가 일을 저지르고 그 결과 불행하게 생을 마친 것을 보았다.

 

그런데 창세기의 오늘 본문에 보면 그 당시 애굽 왕 바로의 친위대장인 보디발의 아내의 병이 심각한 것을 알 수 있다. 병적이다. 10절의 ‘날마다’라는 표현이 이미 자제력을 잃고 심각하게 병 들어 있는 상태를 언급하는 것이 아닌가. 마음의 병, 생각의 병은 팔다리 부러지는 것과는 다른 병이다.

 

보디발의 아내는 애굽의 친위대장 보디발의 아내답지 않았다. 그 당시 왕의 친위대장이란 요직은 왕 곁에서 출세한 최 고위직 중의 하나이다. 그런 지위, 그런 신분을 가진 보디발의 아내는 심각한 관계의 병에 빠져 있었다. 정상적인 사생활이 불가능한 지경이 되었다. 그걸 알게 된 요셉은 집 안을 출입하는 일이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우리가 아는대로 요셉은 자기 관리를 끝까지 잘 한 역사적인 인물이다. 8절의 ‘거절’이란 단어에 밑줄을 치자. 그렇다. 맞다. 날 낳아 주신 부모에게 효도하고 부모 공경을 제대로 하는 길이 뭘까. 좋고 맛있는 음식 대접하고 용돈 잘 드리고 경제적으로 넉넉하게 모시고 화려하고 값비싼 여행 시켜 드리는 것 다 좋다. 우리나라는 갑자기 초고령화 국가가 되었다. 역사상 이렇게 장수한 시대가 없었다. 그러하다 보니 노후 준비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장수하는 이들이 너무나 많다. 이것은 개인의 문제이며 가정의 문제이며 사회적인 문제 곧 국가적인 문제가 되어 있다. 

 

물론 자신의 노후를 잘 준비한 상태에서 자식 눈치 보지 않고 넉넉하게 노후를 즐기며 살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러나 육십살 전후에 은퇴하고 그 후에 삼사십년을 은퇴 후의 삶을 살아야 하는 이들에게 있어서의 노후 설계란 만만한 일이 아니다. 그런 경우에 대개 효도 혹은 부모 공경이란 성경의 단어를 떠 올리면 부모에게 경제적인 어떤 역할을 지속적으로 분담해야 하는 아들딸의 경우를 상상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효도나 부모 공경은 그런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아들딸이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거절하여야 할때에 단호하고 분명하게 거절할 줄 아는 사회인으로 자리매김하는 것이야 말로 효도 중의 효도이며 부모 공경 중의 부모 공5경이 아닐 수 없다.

 

그렇지 않나. 이 세상에 우리 주변에 이 ‘거절’을 제대로 하지 못해서 불행해 지고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키며 지탄의 대상이 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그러므로 우리는 끊임이 없이 겪게 될 경제적인 유혹이나 대인관계의 유혹 앞에서 거절의 지혜를 동원할 줄 알아야 한다. 

 

명예, 권력, 지위, 돈, 물질, 이성, 술자리, 마약의 유혹 등을 거절해야 한다. 가는 곳과 서는 곳과 앉을 자리와 누울 자리를 우리가 매일 매 순간마다 거절할 수 있어야 한다. 거절할 때 거절하지 않으면 수렁에 빠져들게 하는 유혹의 순간이 우리 주변에는 얼마든지 독버섯처럼 도사리고 있는가.

 

돈이 된다면 남의 목숨이라도 살해하는 것이 세상이다. 공짜라면 독약이라도 마시려고 달려드는게 세상이다.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 하지 말라, 거짓 증거하지 말라, 남의 것을 탐내지 말라”라는 계명은 “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의 뒤에 이어서 나오는 계명의 조항들이다. 그런데 그 계명의 내용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 모든 것마다에 ‘거절’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그렇지 않나.

 

거절을 제대로 할 줄 아는 것은 뭘 전공했느냐, 어느 대학을 나왔느냐, 하는일이 어느 분야이냐, 무슨 재주와 무슨 관심이 있느냐, 주로 시간과 돈을 어디에 많이 쓰느냐 보다 훨씬 중요한 요소이다. 

 

열왕기 하 5장에 보면 선지자 엘리사에게 아람 왕의 군대장관 나아만이 찾아 왔다. 나아만 장군은 한센 병 환자였다. 나아만 장군은 아람 나라를 대표하는 장군이었다. 전에 이스라엘과의 전쟁에서 생포한 포로 소녀 한 명을 나아만 장군은 자기 아내의 수종을 드는 자리에 두었다. 그런데 그 여종이 이스라엘의 사마리아에 머무는 엘리사 선지자를 소개한 것이다. 주인 나아만 장군의 한센 병은 이스라엘의 엘리사 선지자를 만나면 고침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 것이다. 나아만 장군은 그런 정보를 왕에게 전하였다. 아람의 왕은 이스라엘 왕에게 친서를 써서 보내겠다고 하였다. 나아만 장군은 은 십 달란트와 금 육천개와 의복 열벌을 가지고 이스라엘로 떠났다. 아람 왕의 친서를 받아 든 이스라엘의 왕은 정치적인 오해에 휩싸여서 불쾌한 감정을 나타냈다. 그러나 소문을 들은 엘리사 선지자는 나아만 장군을 자기 곁으로 오게 하였다. 나아만 장군은 말과 병거를 동원하고 거창하게 행차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엘리사 선지자는 나아만 장군을 가까이에서 만나 주지도 않았다.  단지 심부름하는 이를 보내서 “요단 강에 몸을 일곱 번 씻으라 그리하면 네 살이 회복되어 깨끗하리라”라는 전갈만 보낼 뿐이었다. 이 말을 전해 둘은 나아만 장군은 화가 잔뜩 나서 제 나라로 돌아가 버리려고 하였다. 그러나 수행하던 종이 간청해서 결국은 요단 강에 가서 몸을 담그게 되었다. 어린 아이 피부처럼 깨끗해 졌다. 나아만 장군은 엘리사의 거처 가까이 찾아 갔다. 정중한 예절로 예물을 전하고 싶어 하였다. 그러나 엘리사 선지자는 단호하게 예물을 거절하였다. 열왕기하 5장 16절에 보면‘ 거절’이란 표현이 나온다. 나아만 장군은 엘리사 선지자의 입장이 하도 분명한 것을 알고 노새 두 마리에 실을 흙을 달라고 요청하였다. 제 나라 아람으로 돌아가서 앞으로는 그 동안 섬기던 림몬의 신당에 절하지 않고 여호와를 섬기며 살겠다고 말하며 하나님의 용서를 구하였다. 

 

엘리사 선지자와 작별한 나아만 장군은 제 나라인 아람을 향해 가고 있었다. 그런데 그 뒤를 허겁지겁 따라 오는 자가 있었다. 엘리사 선지자의 사환 게하시였다. 게하시는 주인에게 나아만 장군이 예물을 가지고 왔다가 그냥 가지고 돌아 가는 것에 대한 탐심이 생겼던 것이다. 그래서는 나아만 장군을 만나서 거짓말을 하였다. “엘리사 선지자의 제자 중에 두 명이 에브라임 산지에서 내게로 왔는데 저들을 도와야 하니 은 두 달란트와 옷 두벌만 달라”고 요청하였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거짓말이었다. 

 

나아만 장군에서서 은 두 달란트와 옷 두벌을 받아 들고 오던 게하시는 자기와 함께 한 두 종에게서 건네 받았다. 그리고 그것들을 자기 집에 감추었다.  그리고 선지자 엘리사 곁으로 갔을 때에 엘리사가 물었다. “네가 어디서 오느냐”그 때 게하시는“ 아무데도 간 적이 없다”라고 시치미를 떼었다. 그러나 기도의 사람 엘리사 선지자는 알고 있었다. 엘리사 선지자가 사환 게하시를 책망하자 그에게 한센병이 발해서 피부가 눈처럼 희어졌다. 엘리사는 게하시에게 “나아만의 나병이 네게 들어 네 자손에게 미쳐 영원토록 이르리라”라고 저주 섞인 책망을 하였고 사환 게하시는 엘리사 선지자가 보는 앞에서 심각한 한센병에 걸리고 말았다. 

 

우리의 아들딸들이 부모에게 효도하고 부모를 공경하는 길은 세상을 살면서 거절할 때 거절 할 줄 아는 나날을 살아가는 길이다. 따로 부모에게 뭐 잘 챙겨 드리지 않아도 세상을 깨끗하게 살아갈 줄 아는 것이 효도하는 길이요 부모 공경하는 길이다. 

 

히브리서 11장 24절에 보면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라는 말씀이 있다. 하나님은 인생의 결정적인 순간에 거절 할 줄 아는 이들을 주목하신다. 그리고 저들을 역사의 중심에 붙들어 쓰신다. 우리의 자손들이 역사의 중심에 서서 거절의 지혜를 배우고 하나님이 주목하시는 삶을 살아가는 효자 인생이 되기를 기도하자. 요셉은 거절할 때에 거절할 줄 아는 하나님의 사람이었다. 

 

 

하나님 앞에서 살아갈 줄 알아야 한다.

창세기 39장 9절 끝에 보면 요셉은“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라고 보디발의 아내인 여주인이게 또박 또박 말하였다. 신앙 생활이 무엇인가. 예배 시간에 예배 잘 드리는 것만 가지고는 모른다. 세상에 나아가서 가정과 직장과 장사하고 사업하는 내 일상 생활 중에서 하나님을 의식하며 살아갈 줄 알아야 한다. 경상도 사람들 말하는 것처럼“시퍼렇게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서” 코람 데오(Coram Deo)의 신앙을 가져야 한다. 신전의식(神前意識)이 매 순간 분명하여야 한다. 

 

늘 이야기 하지만 부산에 가면 고신대학교가 있다. 원래 신학교인데 종합대학교로 발전한 것이다. 그 학교 교훈이 코람 데오(Coram Deo) 즉‘하나님 앞에서’이다. 

 

우리는 아들딸을 하나님 앞에서 살아갈 줄 아는 자녀로 양육해야 한다. 그래야 늙어도 효도 받고 공경 받을 수 있다. 우리의 아들딸이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모르고 세상을 되는데로 살게 되면 보디발의 아내처럼 되고 만다. 아무리 출세하고 아무리 지위가 높고 아무리 잘 나가고 아무리 대궐 같은 집에 살아고 그 생각이 바르지 못하며 스스로 무덤을 파는 결과가 되고 말 것이다. 자신도 불행해지고 가정이 무너지고 부모에게 피 눈물이 나게 하는 불효자가 되고 말 것이다. 

 

우리나라의 기독교 역사에 주기철 목사가 있다면 독일교회에는 디트리히 본 회퍼(Dietrich Bonhoeffer, 1906-1945)가 있었다. 그의 아버지 카를 본회퍼는 프로이드 비판으로 유명한 정신과 의사였다. 그의 어머니는 교사였다. 그의 외가의 선조들 중에는 저명한 신학자와 미술가 등이 있었다. 본 회퍼는 독일 루터교회의 목사가 되었다. 신학자요 반 나치주의자였다. 히틀러 암살 계획에 가담한 혐의로 체포되었다.

 

본 회퍼의 나이 27살 때이던 1933년에 집권한 히틀러의 나치 독재에 대해서 독일교회는 예언자적인 목소리를 내면서 저항하지 못했다. 오히려 히틀러를 그리스도로 숭배하고 있었다. 당시 독일교회에서는 “하나님이 영혼구원을 위해 예수를 보내 주셨듯이 지금 현재 독일의 ‘경제적, 사회적 구원을 위해 하나님께서 히틀러를 보내주었다.’”라고 주장하는 목소리가 커 가고 있었다. 그가 체포되어 감옥에 있는 동안에 친구와 가족들에게 보낸 편지는 <옥중서간>으로 출판되었다. 1945년 4월 9일 새벽, 플로센뷔르크 수용소에서 39살에 교수형으로 처형되었다. 그의 유언은 "죽음은 끝이 아니라, 영원한 삶의 시작이다.”였다. 그의 묘비에는 “디트리히 본회퍼–그의 형제들 가운데 서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라고 새겨져 있다. 

 

디트리히 본회퍼는 고난을 함께 나누는 삶의 실천을 소중하게 여겼다. 그에 대한 나치의 박해가 시작되었을 때 그는 미국으로 망명할 수도 있었다. 유니온 신학교 교수로 일하던 라인홀트 니버가 신학 교수 자리를 마련한 뒤 초대장을 보냈다. 그러나 그는 독일 국민들과 고난을 함께 하지 않는다면 전쟁이 끝났을 때 독일교회를 재건하는 일에 동참할 자격이 없다면서 이를 거절하였다. 우리가 아는 <선한 능력으로>라는 찬양도 그의 고백에 곡을 붙인 찬양이다. 

 

 

억울한 일을 견뎌 낼 줄 알아야 한다.

보디발의 아내는 집에 돌아온 남편에서 요셉이 자기를 겁탈하려 하였다고 누명을 씌웠다. 크게 노한 보디발은 요셉을 왕궁에 속한 죄수를 가두는 감옥에 가두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억울하게 감옥에 갇혀 지내는 요셉에게까지도 함께 하셨다. 창세기 39장 21절을 보라.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고 그에게 인자를 더하사 간수장에게 은혜를 받게 하시매”라고 하였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은혜인가. 우린 세상을 살다 보면 별의별 일을 다 겪게 된다. 억울한 일, 답답한 일, 속 상한 일, 괴로운 일, 충격적인 일, 해명이 불가능한 일들을  당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신다. 

 

“아시지요. 아시지요 아시지요 주님

아시지요. 아시지요 아시지요 주님”

 

이런 찬송을 부르고 또 부르며 억울한 일, 답답한 일 앞에서 하나님께 하소연 하다보면 요셉에게 함께 하셨던 하나님께서 우리의 개인사와 가정사와 범사에 개입하셔서 역사의 진실이 드러나게 하시고 최후 승리의 개가를 부르도록 인도하실 줄로 믿으라. 

 

하나님은 비록 요셉이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혀 있었지만 간수장의 마음을 감동하게 하셔서 옥중 제반 사무를 요셉에게 맡길 정도로 간수장에게 까지도 절대 신임을 받게 하셨다. 

 

창세기 39장의 마지막 절인 23절은 이렇게 끝난다. 

 

“이는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이라 

여호와께서 그를 범사에 형통하게 하셨더라.”

 

 우리가 아는대로 요셉은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갇혀 지내던 옥중 생활 이년을 뒤로 하고 바로 왕의 꿈을 해석하는 자리에 불려 나갔다. 요셉의 나이 삼십살 때의 일이다. 그 자리에서 바로 왕은 요셉을 나라의 제 이인자로 세웠다. 요셉은 그렇게 시작해서 팔십년 간 애굽의 총리로 세움받았다. 나중에 요셉은 아버지 야곱을 만나게 되었다. 야곱의 연세 백 삼십세였다. 야곱은 요셉으로 인하여 고센 땅에서 십칠년간 행복한 노년기를 지냈다. 효자 요셉으로 인하여 야곱이 백 사십칠세에 임종하자 바로 왕은 야곱의 죽음을 국장 수준으로 성대하게 치루었다. 요셉은 못 만날 것 같던 아버지 야곱을 만난 후에 정성을 다하여 아버지께 효도하였다. 요셉의 효도는 자기를 애굽에 팔아 버린 배다른 열명의 형들을 다 용서하고 품고 살아가는 넉넉한 모습으로 이어졌다. 요셉은 효자였다.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부모를 기쁘게 하는 길이며 참 효도인지 생각하며 살아가는 나날이 되기를 축원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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