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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에는 그리고 후에는(사9:1-4) 20230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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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최고관리자
작성일 23-01-25 21:28 조회 1,742 댓글 0
 

                            전에는 그리고 후에는(사9:1-4)            2023. 1. 22

 

 

 이 세상에 고통이 없이 사는 사람은 없다. 지난 날의 고통이든 지금 여전히 계속하여 겪고 있는 고통이든 말이다. 고통이란 것이 육체적인 것일 수도 있지만 마음의 고통도 있다. 몸과 마음이 고통 속에 살아간다. 걱정 근심 염려 불안 초조 두려움에 휩싸여서 사냥꾼의 올무에 갖힌 들짐승처럼 괴롭게 살아가는 이들이 의외로 많다. 그래서 현실을 도피해 보려고 술을 퍼 마시기도 한다. 놀음에 손을 댄다. 마약에 빠지기도 한다. 방탕한 생활 습관에 빠져서 탈선의 늪에서 헤매기도 한다. 그런 소식들이 하루가 멀다하고 뉴스에 도배를 하기도 한다. 시장이나 도지사 등의 고위 공직자, 국회의원, 판검사, 의사, 대학교수, 군대의 고급 장교나 장군, 국가적인 기업의 총수, 방송인, 유명한 배우를 비롯한 연예인들이나 스포츠의 스타의 일탈 행위가 세상을 깜짝 깜짝 놀라게 하기도 한다. 

 

왜 그럴까. 어떤 이들은 인생의 허무와 공허를 채우려는 심리적 덫에 빠져 들기도 한다. 어떤 이들은 겉 보기에는 화려해 보이고 굉장해 보이는데 정작 그의 삶에 떨치지 못하고 살아가는 심신의 고통과 무거운 짐으로 인해서 허덕이기도 한다. 하루 하루 사는게 사는게 아닌 고통의 연속, 고민의 연속의 동굴 속에 갇혀 지내기도 한다. 아프고, 괴롭고, 답답하고, 슬프고, 우울하다. 그래서 인생을 비관하기도 한다. 이 세상 보다는 저 세상을 흠모하기도 한다. 그런 이들의 종교적인 불안과 심리적인 갈등의 틈새를 비집고 사이비와 이단이 독버섯처럼 밀고 들어와서 개인과 가정을 무너트리고 만다. 약인줄 알고 먹었는데 인생의 비극을 부르는 독을 퍼 마신 경우도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배후에는 하나님이 계셨다. 이는 창세기 12장의 아브람을 부르신 그 부르심 이후에 언제나 그랬다. 과거에도 그랬고 오늘날도 마찬가지이다. 오늘 날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을 모를 때에는 그렇다치고 하나님이 나에게 있어서 누구신지 깨달아 알고 난 이후의 내 삶의 주인은 내가 아니다. 내 삶의 주인이 하나님이시다. 그런데 하나님을 부인하려하고 인생의 주인을 세상 피조물 중에서 찾으려 하거나 인생의 만족을 세상 물질 문명 가운데서 채우려 하면 할수록 인생은 점점 꼬여 가고만 말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점점 멀리 떠나서 하나님의 언약 백성답지 못하게 살아가던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의 한 장면을 오늘 본문 속에서 만나게 된다.k 

 

오늘 본문에 보면, “전에는, 옛적에는, 후에는”이라는 시제(時制)에 대한 용어를 접하게 된다. 그래서 오늘 말씀의 제목을 “전에는 그리고 후에는”이라고 정한 것이다. 여러분 각 사람에게 질문해 보고 싶다. “당신의 과거는 어떠하였는가”아니면 “당신의 장래는 어떠하기를 소망하는가”아마 어떤 사람은 “나의 지난 날에 대하여 묻지도 마세요. 나의 어린 시절에 대하여 질문하지도 마세요. 생각하기조차 끔찍합니다. 악몽과고 같습니다”이렇게 대답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아니면 지금 그런 처지와 형편 가운데 살아가는 이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반면에 어린 시절과 결혼 전의 성장기와 청년기 때의 행복하고 아름답고 좋은 추억을 많이 갖고 있는 이들도 없지는 않을 것이다.

 

이사야 선지자는 우리가 이사야 6장의 내용을 아는 대로 남유다의 제 10대 왕이었던 웃시야 임금이 죽던 해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선지지이다. 웃시야 왕은 무려 52년 동안이나 왕으로 있었다. 이사야는 주전 739년에 선지자로 부름을 받아 주전 680년까지 무려 60여년 동안 활동 하였다. ‘이사야’(Isaiah)는‘여호와는 구원이시다’라는 이름의 뜻을 가지고 있다. 그 시대는 애굽과 앗수르가 강대국이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바벨론이란 신흥 세력이 큰 힘을 얻고 일어나자 앗수르는 역사의 뒤안 길로 사라지고 말았다. 이사야 당시에 오래도록 가장 강력한 국가는 앗수르였다. 요나서에 소개되는 니느웨는 앗수르의 수도였다. 어린아이만도 12만명이었으니까 2,700년 전의 고대 국가 치고는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의 인구가 적지 않았던 강력한 국가였다. 니느웨는 주전 612년 신흥 국가인 바벨론에 의해서 점령당하였다. 

 

사사 시대가 그러하였던 것처럼 배가 부르고 살만하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등지고 우상을 숭배하기 시작하였다. 하나님을 거역하고 세상의 낙을 쫓으며 악을 짝하기 시작하였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지금처럼 하나님을 멀리 하기 시작하면 때가 되면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게 될 것이라는 경고의 말씀을 전하기 시작하셨다. 지금 저들이 겪는 정치적 혼란이나 국제적 불안정의 원인이 하나님 앞에서의 신앙의 변질과 도덕적 타락에 있다고 경고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당면한 위기와 혼란으로 부터 벗어나려면 진정으로 회개하고 여호와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한다는 말씀을 촉구한 내용을 담고 있다. 

 

시대적인 위기와 혼란의 때에 이웃 나라만 의지하려 하지 말고 만군의 주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하여야 한다는 강조이다.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선민 이스라엘 백성답게 온 민족이 거룩성을 회복하고 분명한 역사의식을 갖고 살아야 한다고 촉구한 내용을 접하게 된다. 개인이든 나라이든 궁극적인 구원은 애굽이나 앗수르나 바벨론에 있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시기 위한 예언의 말씀이 이사야서 전체에 가득하다. 좀 어렵게 말하면 “세상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신본주의 인생관을 갖고 살아가라”는 강조인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점점 심각해져만 가는 시대적인 죄악상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앞에서 언약 백성다운 삶을 살아가고자 하는 경건한 ‘남은자’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시리라는 분명한 교훈을 담고 있다. 

 

가령 이사야서의 시작인 1장 2절 하반절을 보면“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라고 경고하였다. 3절에 보면 소와 나귀를 언급하면서 짐승 만도 못한 백성이 되었다고 책망하시고 있다.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그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라고 엄중하게 책망하였다. 

 

하나님은 시작부터 이사야 선지자를 통한 책망과 심판에 대한 경고와 더불어 회개를 촉구하는 말씀을 쏟아 놓으셨다. 그런데 오늘 본문으로 읽은 이사야 9장에서는 먼 장래의 회복과 소망의 약속을 하시고 있다. 오늘 본문 앞뒤로는 계속하여 장차 앗수르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을 심판하시겠다는 경고의 말씀이 가득하다. 그러한 내용 중에 삽입구처럼 빤짝하고 눈에 띄는 내용이 오늘 본문으로 읽은 이사야 9장 1-4절이다. 사실 그 뒤에 이어지는 6-7절에 보면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메시아 예언의 말씀이 담겨 있다. 한 아기의 탄생을 예언하면서 그 아기의 이름은 기묘자, 모사, 전능하신 하나님, 영존하시는 아버지, 평강의 왕이라 할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하나님은 애굽과 앗수르와 바벨론을 통해서 언약 민족인 선민 이스라엘 백성을 풀무 불 속에 던져 넣으시듯이 연단하셨다. 우리가 아는 바벨론 포로 생활 70년이 그런 것이다. 하나님은 앗수르와 바벨론을 통해서 북 왕국 이스라엘과 남 왕국 유다가 점령되는 고난의 풀무 불에 집어 던지셨다. 그러나 그런 고난과 시련은 하나님이 포기하지 않으시고 사랑하시는 언약 민족을 향한 사랑의 또 다른 표현일 뿐이었다. 

 

오늘 말씀인 이사야 9장의 본문은 장차 겪게 될 고통과 멸시 가운데서 하나님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이루어 가실 장래의 약속을 미래 완료형으로 말씀하신 내용을 담고 있다. 무슨 교훈인가. 

 

 

영화(榮華)롭게 하실 것이다.

생각하여 보라. 내 사랑하는 아들딸이 고통과 멸시 가운데 살아가기를 원하는 부모가 누가 있겠는가. 아무리 어려운 환경에서 태어나고 아무리 가난하게 자라나고 아무리 병약하게 태어났을지라도 그렇다. 자녀를 향한 부모의 한결같은 소원은 내 당대 보다는 아들딸의 대에 가서 더욱 건강하고 더욱 행복하고 더욱 여유롭고 더욱 넉넉한 형편에서 살기를 원할 것이다. 쉬운 말로 성공하고 출세하기를 바랄 것이다. 흑수저로 태어났을지라도 금수저 인생이 되기를 바라는 부모의 소원은 누구나 다 마찬가지일 것이다. 

 

오늘 본문이 ‘전에는 혹은 옛적에는’이라고 말하고 혹은 ‘후에는’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이 모든 환경이 다 장차 이루어질 일들을 말씀하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주전 931년, 솔로몬을 끝으로 남 유다와 북이스라엘로 분단되었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 가면서 저들은 점점 하나님을 멀리 떠나고 말았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북 왕국 이스라엘과 남 왕국 유다 백성 모두 다 하나님의 심판으로 말미암아 장차 고통과 멸시와 흑암에 갇히는 참담한 날들을 겪어야 했다. 북왕국 이스라엘이 아람 나라와 연합군을 형성하고 남 유다를 위협하려고 하자 남 유다는 애굽과 손을 잡고 북 왕국의 위협을 견뎌 보려고 했다. 그러나 그런 세속적인 방법을 하나님은 마음에 흡족하게 여기지 않으셨다. 오늘 본문 9장 1절이 교훈하는 고통이나 멸시의 원인이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저들에게 벌로 내리신 하나님의 징계였던 것이다. 

 

찬송가 272장 <고통의 멍에 벗으려고>을 함께 부르자.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장차 겪게 될 고통과 멸시에 대하여 예언하여 말씀하셨다. 이사야 7장 3절에 보면 이사야의 아들 ‘스알야숩’의 이름을 통해서 ‘남은 자는 돌아오리라’는 예언을 하게 하셨다. 장차 고통의 날들을 겪을 것인데 살아 남은 자만이 돌아오게 되리라고 예언하게 하신 것이다. 이사야 8장 3절에 보면 이사야의 아들의 이름을 ‘마헬살랄하스바스’라고 짓도록 하셨다. 그 뜻은 ‘노략이 급할 것이다’라는 뜻이다. 실로 하나님은 이사야의 아들이 철이 나며 말을 제대로 배우기도 전에 이스라엘이 앗수르로 인하여 멸망할 것을 예언하셨다. 

 

우리 가운데 연세 드신 분들은 일제 강점기 말기에 어떻게 1945년 8월 15일, 해방의 날이 왔는지를 체험하였다. 그 뿐만 아니라 1950년 6월 25일, 전쟁이 어떻게 벌어졌는지를 소문에 들어서 아는 것이 아니라 체험으로 생생하게 기억할 것이다. 북한에서 남한으로 피난 한 분들은 더욱 더 그 전쟁의 참상이 생생할 것이다. 4. 19, 5. 16, 10. 26, 12. 12, 5. 18 이런 날짜를 숫자로 뿐만 아니라 체험해서 아는 세대들은 그런 날들이 역사 속에 무엇을 말하는 지를 알 것이다. 그런 민족의 격동기를 겪어 온 세대들은 오늘날 이렇게 눈부신 발전을 이룩한 대한민국에서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너무나도 할 말이 많을 것이다. 물론 여전히 ‘영끌 세대’와 ‘삼포 세대’의 한숨 소리가 가득한 세상이긴 하지만 말이다. 

 

지금 이사야 9장 1절의 의미가 그런 것이다. ‘전에는’이라는 시제와 ‘옛적에는’이라는 시제가 아직 겪지 않은 장래의 일들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사야를 통해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후에는 때가 되면 흑암이 없을 것이다. 후에는 때가 되면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실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우리 성경에는 한결같이 이 모든 시제를 미래 완료형으로 썼다. “하셨느니라”라고 말이다. 

 

맞다. 이는 아직 고통을 겪기 전이고 아직 멸시를 당하기 전이지만 먼 훗날 때가 되면 남은 자들로 하여금 영화롭게 하시리라는 분명한 약속의 말씀을 해 주신 것이다. 

 

마태복음을 꼼꼼하게 읽고 묵상한 분들은 이사야 9장 1절이 어디에 인용된 말씀인지 기억할 것이다. 마태복음 4장 15절에 보면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과 요단 강 저편 해변 길과 이방의 갈릴리여”라는 말씀이 나온다. 이사야 9장 1절의 인용이다. 예수께서는 사십일간 광야에서 금식하신 후에 세례 요한이 헤롯에게 붙잡혀서 옥에 갇혔다는 소문을 들으셨다. 그 후에 갈릴리로 물러 가셨다. 그리고 나사렛을 떠나서 스불론과 납달리 지경의 해변에 있는 가버나움에 가서 얼마 동안 사셨다. 거기서 이사야 9장 1-2절의 말씀을 인용하며 말씀하신 적이 있으셨다. 그 때부터 예수께서는 비로소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라고 전파하기 시작하셨다. 

 

열왕기하 15장 29절에 보면 스불론과 납달리 지경은 앗수르의 군대가 쳐들어 와서 점령하고 그 지역의 백성들을 앗수르로 끌어간 지역이었다. 그런 고통과 슬픔과 충격과 시련과 멸시의 땅에 긴긴 세월이 흘러갔다. 그리고 그 곳에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이 마을 저 마을을 일일이 방문하셨다. 예수께서 가시는 곳마다 만나는 사람들마다 그 삶이 영화로워졌다. 

 

맞다. 예수를 만나야 그 땅이 영화로워진다. 예수를 만나야 그 곳의 인생들이 영화로워진다. 예수를 만나야 삶이 영화로워지고 시대가 영화로워진다. 

 

엊그제 장례식장에서 경북 영천시 북안면의 돌할매 신당 이야기를 들었다. 인터넷에서 찾아보았다. 온 마을 사람들이 검으틱틱하게 생긴 둥근 돌멩이 하나를 위해서 신당을 지었다. 그 돌맹이에 돌 할매라고 이름도 지었다. 전국에서 소문을 들은 이들이 그 돌 할매를 찾아가서 돌덩이 앞에 복전을 놓고 빈다고 한다. 그 시주 돈이 날마다 얼마나 많이 쌓이는지 그 마을 사람들은 봄 여름 가을 농사도 하려 하지 않고 그 돈을 모아서 집집마다 나누어 가지고 생활비로 충당할 정도라고 한다. 돌할매가 마을 사람들을 먹여 살리는 것이다. 그 마을에 교회가 들어서거나 복음이 받아들여지기란 여간 어렵지 않다고 했다. 1548년 이후 오늘까지 영험한 돌이라고 전해지는 곳이라고 한다. 그렇게 날마다 쌓여져 가는 시주와 복전이 마을 사람들에게는 행복의 길이 아니라 우상 숭배로 인한 영적인 어리석음에 갇히게 하고 말았다. 

 

생각하여 보라. 오늘 날 어디가 스불론이며 어디가 납달리인가. 하나님은 스불론과 같고 납달리와 같은 땅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화로워지며 그 곳의 인생들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화로워지기를 소원하신다. 

 

디모데 전서 2장 4절에 보면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라고 하였다. 맞이한 새해, 2023년을 살아가면서 개인과 가정과 가족과 범사가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영화로워지기를 축원한다. 

 

 

큰 빛이 비치게 하실 것이다.

하나님은 이사야를 통해서 분명하게 약속해 주셨다.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던 자에게 빛이 비치도다.”여기서 말씀하는 ‘흑암’이란 ‘죄, 무지, 고통’을 상징하는 단어가 사용되었다. 또한 ‘빛’이란 ‘생명, 하나님의 진리’를 뜻한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진리의 말씀이신 여호와의 빛을 등지고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죄악 가운데 고통당하며 유리하고 방황하던 백성에게 하나님의 용서로 인한 회복의 날이 다가오게 하신다는 약속의 말씀이시다. 

 

이 세상을 고통스럽게 살다가 생을 끝내고 평생을 남에게 멸시만 받다가 생을 마치길 원하는 사람은 아마 단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나라가 불행해지거나 가정이 불행해지거나 개인의 운명이 불행해 지면 고통과 멸시의 흑암 가운데서 탄식하며 살아가는 이웃들이 의외로 많다.

 

지난 금요일인 1월 20일 오전에 구룡마을에 불이 났다. 5시간 동안에 60채의 비닐과 합판으로 가리고 살던 열악한 주거지가 잿더미가 되었다. 500여명이 피신해서 인명피해는 없었다. 구룡마을은 개포 주공단지의 큰길 건너 맞은편의 열악한 주거 환경에서 살면서 재개발 계획이 뒤엉켜 있는 지역이다. 강남 노른자위 땅 위에서 살아가는 집단 무허가촌이다. 그 삶의 여건이 참담하다. 그런 가운데 구정 이틀 전에 구룡마을 전체 60여 가구가 잿더미로 변했다. 생각하여 보라. 만약에 이번 기회에 그동안 엉켜서 법정 다툼만 계속하고 있던 그 곳의 개발 계획의 난제들이 말끔히 해결된다고 상상해 보라. 장기 임대 아파트라도 저들 주민에게 주어진다고 상상해 보라. 저들은 무허가 판자촌에서 35년이 넘도록 살아왔다. 12년 전인 2011년에야 겨우 주민등록 혜택을 받은 이들이다. 1986년, 1988년 올림픽 준비를 위해서 강제 철거당한 이들이 모여 살기 시작한 곳이 구룡마을이다. 도시 개발에 밀려나 한 많은 삶을 이어 온 1200여 가구 2500여명 의 지지리 가난한 이웃들이 살던 곳이다. 

 

세상을 돌아보라. 나라마다 흑암에 행하는 백성이 이 세상에 얼마나 많은가.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는 자들이 얼마나 넘쳐나는가. 그런 세상 가운데 해와 달과 별들의 광명을 다 합한 것보다도 더 밝은 광명한 빛으로 오셔서 각 사람의 마음을 환하게 비추시는 빛으로 오신 분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렇지 않나. 스스로에게 물어보아라. “내가 만약에 예수를 모르고 하나님을 모르고 오늘날 까지 살아 왔다면 어떤 인생을 살아왔을까.” 물론 하나님을 모르고도 모범생으로 자라나고 모범생으로 평생을 살 수 있다. 그러나 성경이 말씀하고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인생은 모범생 인생을 원하시는 것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복음을 깨닫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서 하나님의 아들딸의 영광과 권세를 누리며 살아가기를 기대하시는 것이다. 

 

내가 태어나 보니 아버지나 어머니가 거지라면 다리 밑에서 거적대기로 바람을 막는 곳에서 자라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나 어머니가 나라의 대통령이나 총리나 왕이면 왕궁에서 살고 총리 관저에서 살고 대통령 궁에서 살 수 있다. 최근에 묵상한 빌립보서 3장 20절에 보면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고 하였다. 그렇다. 오늘날 세계 최강국인 미국의 시민권자는 세계 어느 나라에 가든지 그 신분 보장이 다르다. 그처럼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다. 천국 시민이다. 하나님의 자녀이다. 우리는 주기도문의 마지막 부분에서“대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이라고 고백하며 기도한다. 이렇게 기도하라고 예수께서 가르쳐 주셨다. 영어로 고백하면“For yours is the kingdom and the power and the glory forever. Amen”이다. 하나님의 자녀로 흑암을 이기는 빛의 자녀답게 살아가기 시작하면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권세와 권능 그리고 하나님 안에서 누리는 그 영광이 영원한 것이다. 

 

인공위성이 찍어 보낸 한반도의 야경 사진을 본 적이 있는가. 휴전선 너머의 북쪽은 깜깜하다. 남한은 밤에도 온 천지가 빛이 번쩍인다. 경제력이 다르다. 왜 그런가. 북한에는 남한과 비교할 수 없는 지하자원이 넘쳐난다. 그런데 왜 그렇게 못 사는가. 하나님을 떠난 민족, 하나님을 등지고 사는 민족은 그렇다. 물론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서도 엄청난 부를 누리며 살아가는 중동의 산유국들이 있다. 그러나 부가 대답은 아니다. 여기 이사야 9장 2절의“큰 빛”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마치도 동방 박사들이 크고 밝고 낯설은 별빛을 따라서 베들레헴에 도착하고 예수의 탄생을 경배한 것처럼 말이다. 

 

예수 만나야 참 빛이요 큰 빛 안에 사는 인생이 되는 것이다. 요한복음 1장 5절에 보면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라고 하였다. 9절에 보면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라고 하였다. 

 

그렇다. 예수는 참 빛이시며 큰 빛이시다. 예수 만나야 빛 안에 거하며 그 빛을 누리는 인생으로 살아갈 수 있다. 세상에는 사망의 그늘에 주저앉아 있고 낮보다 깜깜하고 어두운 밤이 어서 오기를 기다리며 살아가는 어둠의 백성들이 이 세상에 가득하다. 지난 1월 12일, 동대문구 불법 도박장에서 업주가 돈을 갚지 않는다는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의 인기척을 듣고 놀란 놀음하던 여성 둘이 2층 창문 밖으로 뛰어내렸다. 한 명은 병원에 실려 갔으나 죽었고 한 명은 목숨을 건졌다. 도망간 남자 놀음꾼 두 명은 경찰이 수배 중이라고 한다. 

하나님 중심, 예수 중심, 성령 중심, 예배 중심, 말씀 중심, 교회 중심, 목회자 중심, 성도 중심으로 사는 것이 복 중의 복이다. 이런 은혜가 모든 가족들의 범사에 늘 함께하기를 축원한다. 

 

 

창성(昌盛)하게 하시며 그 즐거움을 더하게 하실 것이다.

사랑하는 아들딸을 향한 아버지의 사랑, 어머니의 사랑이란 자녀들이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도 마찬가지이다. 더군다나 선민 이스라엘을 향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과 기대는 더욱 더 그러하시다. 그런데 언약 민족으로 택함 받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멀리 떠난 것이다. 우상을 숭배하며 세상 번영만 바라보며 하나님의 말씀을 경홀히 여기고 하나님을 경배하는 생활에서 멀어진 것이다.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 오기를 기다리시던 하나님은 4절의 말씀처럼 무겁게 맨 멍에와 그들의 어깨의 채찍과 그 압제자를 통한 막대기로 인하여 눈물과 한숨과 탄식과 고통의 날을 보내며 멸시와 천대를 받도록 내어 버려 두셨다.

 

열왕기하 25장 7절에 보면 남 유다의 마지막 왕인 제 20대 왕 시드기야의 불행한 최후를 기록하고 있다. “그들이 시드기야의 아들들을 그의 눈 앞에서 죽이고 시그디야의 두 눈을 빼고 놋 사슬로 그를 결박하여 바벨론으로 끌고 갔더라.”라고 했다. 예루살렘의 솔로몬 성전을 불에  탔고 그 안의 모든 것을 바벨론의 군대가 모두 다 집어 갔다. 심지어는 야긴과 보아스 두 놋기둥까지 다  끌어 갔다. ‘남은 자’의 존귀함을 드러내며 하나님의 언약 백성답게 생명을 바쳐 하나님 중심 신앙으로 살아가려 했던 다니엘서의 주인공 다니엘도 그렇게 청년기에 바벨론으로 끌려 가야 했다. 다니엘의 세친구인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도 그러하였다.

 

하나님은 먼 훗날 때가 되어 고난의 풀무와 견딜 수 없는 멍에와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의 채찍질과 그 험악하고 악랄한 바벨론 군대의 고난의 막대기로부터 언약 백성인 이스라엘 백성들을 풀어놓기 시작하셨다. 그것이 우리가 아는 바벨론 포로 70년으로 부터의 회복이며 해방인 것이다. 그날의 그 기쁨과 감격과 즐거움을 하나님은 미리 이사야를 통해서 이사야 9장 3절에서 이렇게 예언하신 것이다. “주께서 이 나라를 창성하게 하시며 그 즐거움을 더하게 하실 것이다.”를“하셨으므로”라고 말이다. 포로와 압제의 땅에서 풀려 나는 그 기쁨과 즐거움과 감격이란 “추수하는 즐거움과 탈취물을 나눌 때의 즐거움 같이 그들이 주 앞에서 즐거워하게 하실 것이라”고 약속하신 것이다. 올 2023년 그리고 앞날에 평생에 자자 손손 하나님을 경외하는 민족 답게 살자. 하나님을 경외하는 가정답게 살자. 하나님이 주목하시고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사람답게 살자. 세상만 쫓고 재물과 명예와 세상낙만 쫓지 말고 만군의 주 여호와 하나님이 기대하시고 기뻐하시는 믿음의 사람답게 살자. 주님의 은혜와 평강이 가득하기를 축원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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