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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하고 감사하라(시30:1-12) 20220703 맥추감사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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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최고관리자
작성일 22-07-04 00:26 조회 2,480 댓글 0
 

                      감사하고 감사하라(시30:1-12)            2022. 7. 3 맥추감사주일

 

양력, 음력, 불력, 단군력을 세상이 쓰는 것처럼 교회력이란 것이 있다. 절기를 중심으로 52주를 구분한 것이다. 매주 주보에 교회력을 싣는다. 그 중에 신구약의 성경 말씀을 다양하게 3년 주기로 편집한 교회력에 따른 성서일과란 것이 있다. 설교자들과 매주 균형이 있는 성경 묵상을 위해 신학자와 준비된 목회자들이 심혈을 기울여 발전시켜 온 기독교 역사의 보물과 같은 것이다. 학교나 관공서나 기업체의 공동 식사 식단을 담당 영양사가 날마다 골고루 영양의 균형에 맞추어서 준비하듯이 교회력에 따라 주어져 있는 성서일과의 본문을 묵상하여 설교하는 것은 설교자의 편파적인 본문 선택의 위험을 뛰어넘을 수 있는 장점이 있다. 물론 성서일과를 따르다 보면 교회 정황에 맞는 목회 설교에 적합하지 못한 아쉬움이 있을 수는 있다. 

 

2022년 7월 3일, 성령강림 제 4주차인 오늘의 교회력 성경 본문 중의 하나가 시편 30편이다. 오늘은 맥추감사절이다. 지난 주일에 나눈 말씀대로 출애굽기 23장 14-17절에 세 절기를 반드시 지키라고 하였다. 그 절기는 ‘유월절로 시작하는 무교절과 맥추절과 추수감사절인 수장절이다.’맥(麥)이란 보리를 뜻한다. 요즘 보리 농사하는 곳은 흔하지 않다. 그러나 우리 어렸을 적만 해도 보리농사를 했다. 보리타작은 참 어려운 일 중의 하나이다. 한 해 농사 중에 가장 어려운 것이 보리 베기가 아니라 보리타작일 것이다. 덥고 따갑고 힘겹다. 땀이 비 오듯 한다. 눈을 뜰 수가 없다. 보릿 껍질과 끝의 가시 같은 것들이 타작기에서 날리면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그래도 보리 수확은 기다려지는 요즘과 같은 계절의 농사였다. 

 

우리나라에 보릿고개라는 것이 있었다. 보리 수확을 할 요 때쯤 되면 지난해 농사해서 저장해 두었던 쌀을 비롯한 곡물들이 바닥이 나기 시작해서 먹을거리가 빈약했던 가난한 시절 이야기이다. 초근목피(草根木皮)라고 하지 않나. 고려시대나 조선시대나 왕족이나 귀족들이야 잘 먹고 잘 입고 잘 살았을 것이다. 그러나 가난한 백성들은 보릿고개에 대비하기 위하여 추수 뒤에도 쌀·보리·무우를 섞어 먹는다든지 또는 보리죽을 먹거나 질 나쁜 쌀을 조금씩 섞어 먹을 수밖에 없었다. 일본 식민지 때의 우리 농민들은 밥은 죽으로, 쌀은 잡곡으로, 잡곡은 만주의 좁쌀로, 그리고 대부분의 농민은 만주의 좁쌀도 제대로 구하지 못하여 싸라기를 산채나 나물의 묽은 죽에 띄워 먹곤 하였다.이들은 초근목피 중 먹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먹었다. 소나무껍질·칡뿌리·솔잎 등 닥치는 대로 먹어야 했다. 

 

수탈자의 입장에 있던 당시 일본의 조선총독부 당국자까지도 <조선> 1921년 3월호에 이런 글을 실었다. “조선인들 중에는 먹을래야 먹을 것이 없고, 입을래야 입을 옷이 없는 방랑의 신세가 되어, 산야나 노변에 쓰러져 친척과 친구의 간호도 받지 못한 채 외로이 인생행로에 종언을 고하는 자가 연년이 거수(巨數)에 이르고 있다.”

 

이 때 혹독한 수탈을 참아가며 대부호의 소작농으로 노예처럼 일하며 겨우 연명하며 살거나 구걸하러 다니는 거지들이 무리를 이루어 유랑하였다. 아니면 먹고 살아 보겠다고 만주나 시베리아로 떠나는 소작농도 적지 않았다. 1960년대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을 시행하면서 통일벼의 공급을 비롯한 자급 자족 단계에 이르기 전에는 배부르게 먹고 사는 사람들이 국민의 절반도 못되었다. 

 

남한 인구 5,500만, 북한 인구 2,500만여명이다. 북한의 가난과 굶주림의 실상은 설명이 필요 없다. 남한에도 여전히 극빈층이 없지 않다. 한반도에 사람이 와서 살기 시작한 지난 5,000여년 동안에 요즘처럼 잘 살았던 적이 없다. 세계 249개국 중에서 우리나라는 수출과 무역 규모 세계 8위 국가이다. 경제 대국, 경제 강국이 되었다. 물론 빈부의 격차가 크고 집 없는 사람이 많고 전세, 월세로 전전긍긍하는 세대가 많지만 식민지와 6. 25 이후 70년 만에 이렇게 잘 사는 나라는 세계 그 어디에도 없다. 

 

오늘도 다윗의 시편을 묵상할 것이다. 시편 30편은 ‘다윗의 성전 낙성가’라는 표제어가 붙어 있다. “아니 다윗은 성전을 지은 적이 없는데 무슨 성전 낙성가인가”라고 반문할 수 있다. 그러나 다윗은 실제 성전 건축의 기회만 갖지 못했을 뿐 항상 그의 마음 속에는 하나님의 집을 잘 건축하여 봉헌하고 싶은 열망이 가득하였다.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셔서 하나님의 뜻을 따랐을 뿐 다윗은 성전 건축에 필요한 모든 것들을 다 준비하였다. 금과 은과 백향목과 대리석으로 넘쳐 났다. 그 거룩한 열망을 아들 솔로몬 때에 이룩한 것이다. 다윗이 성전 낙성가를 이처럼 고백할 수 있었던 것은 가는 현재를 살면서 장래를 마음에 품었던 선지자요 유대민족 역사에서 모세에 버금가는 최고의 지도자였다. 다윗은 백성을 사랑하였다. 다윗은 나라를 부강하게 하였다. 그러나 다윗의 마음 바탕에는 언제나 하나님의 도우심,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인도하심, 하나님의 보호하심에 대한 분명한  믿음이 있었다. 시편 30편은 그런 다윗의 하나님을 향한 감사의 마음을 담은 시편 중의 하나이다.  

 

다윗은 4절에서 ‘감사하라’라고 하였고 마지막 절인 12절에서 ‘감사하리로다’라고 하였다. 그러면 다윗은 하나님을 향하여 무엇을 감사한다는 내용인가. 12절 분량의 길지 않는 시편 30편에는 ‘여호와’라는 표현을 10번, 주라는 표현을 13번, ‘내 하나님’이란 표현이 2번이다. 12절의 시편 30편에서 무려 25번이나 하나님을 부르고 있다. 이처럼 다윗은 하나님을 가슴 깊에 모시고 밤낮 하나님의 은혜와 손길 가운데 살아가고자 했던 믿음의 사람이었다. 우리는 시편 30편에서 무슨 교훈을 얻게 되는가.

 

 

주께 부르짖으라.

요즘 며칠 동안 계속하여 다윗의 시편을 대하는 대로 다윗은 부르짖는 기도의 사람이었다. 2절에 보면 다윗은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부르짖으매”라고 하였다.

 

다윗은, 1절에서 자신을 “원수들로부터 끌어내어 구원해 주신 하나님을 높인다”라고 고백하였다.  2절에서는 “내가 주께 부르짖으매 여호와 내 하나님이 나를 고치셨다”고 하였다. 영어 성경에 보니까 “내 하나님께 도움을 청했더니 주께서 나를 고쳐 주셨다”라고 고백하고 있다. 3절에서는 “하나님이 그의 영혼을 무덤과 같은 곳에서 끌어내어 보호하셨고 살려내셨다”라고 고백하였다. 다윗은 수많은 전쟁과 어려움을 겪으면서 나라 안팎으로 우겨 싸임을 당하는 죽음의 위험한 순간과 자신을 연약하게 하는 각양 질병으로부터 고쳐 주시는 주님의 은혜를 체험하며 살아왔다. 

 

8절에도 보면 “여호와여 내가 주께 부르짖고 여호와께 간구하기를”이라고 하였다. 생각하여 보라. 우리가 어떤 경우에 여호와께 부르짖게 되는가. 요즘 어떻게 지내고 있는가. 요즘 기도 제목이 무엇인가. 요즘 주께 부르짖어 기도하는 그 누군가가 있다면 그 부르짖는 기도 제목이 무엇인가. 

 

우리가 평상시에 밤낮이 없이 식음을 전폐하고 밤잠을 설쳐 가면서 주께 부르짖는 이들은 없다. 그러면 언제 부르짖어 기도하게 되는가. 왜 무엇 때문에 부르짖어 기도하게 되는가.

 

마태복음 15장 21절 이하에 보면 예수께서 두로와 시돈 지방에 가신 적이 있다. 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예수게 나와서 소리 질렀다. 거기 22절에 ‘소리 질러 이르되’라는 상황이 부르짖는 상황이다. 가나안 여자가 예수께 무슨 요구를 가지고 부르짖었는가.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하게 귀신 들렸나이다.”(마15:22)

 

그렇지 않나. 이 지경이 되면 차근차근 침착하게 말 할 수 있겠나. 사랑하는 자식이 흉악한 귀신에 들렸는데 봄이 되었다고 꽃놀이 가고, 여름이 되었다고 비키니 입고 해수욕장 가고, 가을이 되었다고 단풍놀이 다닐 부모가 누가 있겠는가. 이 지경이 되면 사는게 사는게 아닐 것이다. 무얼 먹는지 무얼 입는지 집안 살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관심이 있겠나. 흉악한 귀신에 들린 딸 고쳐 보려고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용하다는 의사, 용하다는 병원, 용하다는 기도원, 용하다는 목사 다 찾아다니지 않겠나.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 있다. 어느 병원, 어느 의사, 어느 기도원, 어느 목사 다 좋지만 분명한 것은 무엇인가. 내 인생의 문제를 갖고 여기저기 찾아다니기 전에 주님 앞으로 나와야 한다. 예수께 찾아 나서야 한다. 가나안 여자는 묵묵부답이신 예수께 절하며 “주여 저를 도우소서”하고 간청하기 시작하였다. 예수께서는 이상한 반응을 보이셨다.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라고 대답하셨다. 그 때 가나안 여자는“주여 옳소이다 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라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마15:28)라고 축복해 주셨다. 성경은 “그 때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라고 증언하고 있다.

 

우리가 부르짖으면 주께서 들으신다. 사람도 급할 때 “사람 살려”하고 큰 소리로 외치면 누군가가 나타나서 나를 돕지 않는가. 이처럼 우리가 주께 부르짖으면 주께서 들으신다. 어제 토요일 새벽에 묵상한 시편 28편 1절에서 다윗은 “내가 주께 부르짖을 때에 귀를 막지 마소서”라고 기도하였다. 

 

맞다. 내가 주께 부르짖어 기도하면 사랑의 하나님, 긍휼이 많으신 하나님은 나의 부르짖는 그 부르짖음에 귀를 기울여 주신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하나님은 우리의 하나님이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430년 동안 애굽의 종살이 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부르짖음과 탄식 소리를 들으셨다. 그리고 호렙 산에서 양을 치던 모세를 보내셔서 동족을 구원하셨다. 홍해를 건너 광야로 인도하셨다. 

하나님은 사사 기드온의 부르짖음을 들으셨고 사사 드보라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다. 하나님은 선지자 엘리야의 갈멜산 꼭대기에서 부르짖는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불로 응답하셨다. 

 

예수께서는 열 명의 한센병 환자의 부르짖음을 들어 주셨다.

예수께서는 앞 못 보는 거지 바디메오의 부르짖음을 들어 주셨다.

예수는 예수의 옷자락을 뒤에서라도 붙잡는 열두해 혈루병 여인의 부르짖음과 같은 소원을 들어 주셨다.

 

예수는 앞 못 보고, 소리도 못 듣고, 말도 한 마디도 못하는 시각, 청각, 언어 중증 장애 속에 태어난 헬렌 켈러( Helen Adams Keller, 1880-1968)의 곁에 뛰어난 엔 셜리번 선생을 보내 주셔서 헬렌 켈러의 삶을 역사적인 인물의 삶이 되게 붙들어 주셨다. 그는 “장애는 불편하지만 불행한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앞을 못 보게 태어난 것보다 더 비극적인 것은 꿈이 없다는 점이다”라는 말도 했다. “소망은 볼 수 없는 것을 보게 하고 만질 수 없는 것을 느끼게 하고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한다.”라는 말도 남겼다. 그는 못 보고, 못 듣고, 못 말하는 장애를 딛고 세계를 날아다니며 강연하였다. 그녀의 곁에는 그녀의 입술과 목의 진동을 손가락으로 감지해서 그가 말하고 싶어하는 말을 영어로 통역하는 폴리 여사가 늘 곁에 그림자처럼 그녀와 동행하였다. 5개 언어를 습득한 그녀는 세계의 각계 각 분야의 지도자들을 상대하였다. 그녀는 일본에서 삼개월을 각지에 다니며 장애인들을 만나 격려하고 강연한 후에 뱃길로 1937년 7월 11일에 부산에 도착했다. 부산, 대구, 서울에서 강연하였다. 평양에서는 숭실대학 강단과 맹아 학원에서 강연하고 일주일 만에 만주로 떠났다. 일본 식민지 하에 있던 우리나라를 방문한 적도 있다. 그는 가는 곳마다 이렇게 말했다.“하나님이 여러분의 앞뒤에 계시니 두려워하지 마세요. 모든 것은 하나님의 뜻대로 되어 갑니다. 세상에 힘 써서 하면 않될 일은 없습니다. 나를 보세요. 나 같은 사람도 하나님이 붙들어 쓰시잖아요.”

부르짖음이 무엇인가. 우리는 어른이나 어린이나 청년이나 노인이나 각자의 형편과 처지를 따라서 시시때때로 주께 부르짖으며 살아가는 자들이다. 믿음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여호와 나의 하나님 아버지께 부르짖으며 살아가는 것이다. 우리가 주께 부르짖고 주께 간구하면 주께서 응답하시고 인도하신다. 이런 믿음과 확신과 소망 가운데 살아가는 모두가 되기를 축원한다. 

 

 

주께 은혜를 구하라.

하나님 아버지는 그의 사랑받는 자녀들인 성도들의 삶에 슬픔과 재난을 주시기 원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11절 말씀처럼 “주께서는 슬픔이 변하여 춤이 되게 하시고 베옷을 입어야 하는 재난의 순간이 변하여 기쁨이 되게 하시는 좋으신 하나님”이시다. 5절에 보면 “그의 노염은 잠깐이요 그의 은총은 평생이로다”라고 하였다.

 

7절에서 다윗은 “여호와여 주의 은혜로 나를 산같이 굳게 세우셨더니”라고 하였다. 10절에서는 “여호와여 들으시고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라고 기도하고 있다. 그러면 다윗이 부르짖어 간구하던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란 무엇인가. 오늘 날 우리는 주께 무슨 은혜를 구하며 살아가고 있는가. 성경이 말씀하는 은혜란 것이 무엇인가. 오늘 성가대에서 <주의 은혜라>라는 찬양을 불렀다. 무엇이 주의 은혜인가. 뒤돌아 생각해 보면 주의 은혜가 아닌 것이 무엇인가. 우리가 즐겨 부르는 301장 찬송가 <지금까지 지내 온 것>의 가사도 보라. 

 

“지금까지 지내 온 것 주의 크신 은혜라 

한이 없는 주의 사랑 어찌 이루 말하라 

자나 깨나 주의 손이 항상 살펴 주시고 

모든 일을 주 안에서 형통하게 하시네

 

몸도 맘도 연약하나 새 힘 받아 살았네 

물붓듯이 부으시는 주의 은혜 족하다 

사랑 없는 거리에나 험한 산길 헤맬 때 

주의 손을 굳게 잡고 찬송하며 가리라.”

 

이 고백에서 나는 아니라고 부인할 그 누가 우리 중에 있는가. 없다. 단 한 사람도 없다. 왜 그런가. 우리 각 사람이 이 험한 세상을 살아가는 게 모든 것이 주의 은혜이니 말이다. 

 

그렇지 않나. 나사렛의 마리아가 천사 가브리엘의 방문을 받았다. 하나님의 아들을 낳으리라는 말을 들었다. 두렵고 무섭고 떨렸다. 그런 마리아가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낳을 수 있었나. 그것도 베들레헴에 호적 하려고 갔다가 짐승의 우리인 마구간에서 출산하였다. 헤롯의 남아 살해 명령을 피해서 애굽으로 피난했다. 몰래 다시 나사렛에 숨어 들어가 예수의 어린 시절을 지켜보아야 했다. 하나님의 도우심과 인도하심과 보살피심과 은혜가 아니라면 어떻게 마리아가 살아남았겠나.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을 낳아 키울 수 있었겠나.

 

다윗은 전쟁과 질병과 몸의 허약함을 비롯해서 그야말로 사면초가와 같고 내우외환의 끊임이 없는 불안과 두려움과 초조와 긴장과 위기와 어려움의 순간을 죄책감 속에서 계속하여 감당해야만 했다. 장인인 선대의 임금 사울 왕은 청년 다윗을 죽여 없애려고 호시탐탐 다윗을 죽음으로 몰아가려 했다. 욕정을 참지 못해 전쟁 중이던 부하의 아내를 취하기도 했다. 그 남편 우리아 장군을 전쟁의 최전선에서 죽임당하게 몰아갔다. 갓 태어난 왕자가 죽기도 했다. 배다른 형제가 배다른 자매를 성추행하기도 했다. 이 일에 대한 앙갚음으로 형제간에 살인극이 벌어지기도 했다. 충성되던 부하가 등을 돌리기도 했다. 아들 압살롬의 반역 사건은 최근에 접하고 또 접했다. 블레셋을 비롯한 미디안, 아멜렉, 암몬, 에돔 등의 대적들이 언제 다시 쳐들어 올지 모르는 불안정한 국제 정세 속에 지내야 했다. 그야말로 풍전등화와 같은 나날을 보내야 했다. 

 

지금 성전낙성가를 고백할 이 때에 지난 날을 뒤 돌아 보는 다윗의 마음에 가득찬 고백은 그의 범사를 도우시고 지켜 주신 주님의 은혜가 너무나도 크고 감사했던 것이다. 수 많은 전쟁의 위기에서 이스라엘을 누가 지켰나. 다윗의 왕국을 누가 번성하고 창성하게 하였나. 누가 다윗의 마음의 병과 몸에 찾아 드는 연약하게 만드는 질병에서 그를 건졌나. 다윗은 분명하게 고백한다. “그의 노염은 잠깐이요 그의 은총은 평생이로다 저녁에는 울음이 깃들일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시30:5)

 

누가 연약한 다윗, 베들레헴의 양치기 소년 다윗을 산같이 굳게 세우셨는가. 일순간 주께서 얼굴을 가리시면 근심할 수 밖에 없는 나약한 존재가 아닌가. 다윗은 그래서 고백한다. 7절에, ‘주의 은혜로’, 10절에서 ‘여호와여 들으시고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라고 말이다.

 

믿음이 좋아진다. 믿음이 좋아졌다는 표현의 바탕은 무엇인가. 주의 은혜를 계속 겸허하게 겸손하게 의지하고 사모하며 살아가는 상태를 말한다. “내가 할 수 있고 내가 해 왔고 내 힘이고 내 의지이고 내 판단이고 내 결정이고 내 노력이고 내 수고이고 내 끈기의 열매다”라고 생각하는 것은 신앙인의 모습이 아니다. 

 

주를 찬송하라.

그래서 다윗은 주님을 찬송하고 또 찬송한 것이다. 그래서 다윗은 주님께 감사하고 또 감사한 것이다. 4절을 보라. “주의 성도들아 여호와를 찬송하며 그의 거룩함을 기억하며 감사하라.”하나님은 슬퍼하든 자에게 춤을 추게 하시며 베옷을 입던 자에게 기쁨의 띠를 띠게 하시는 전능자이시다. 하나님은 잠잠하지 아니하고 각 사람에게 주어진 영광으로 주를 찬송하게 하시는 주님이시다. 다윗은 반문한다. “진토가 어떻게 주를 찬송하며 주의 진리를 선포하리이까”그렇다. 진토란 티끌과 흙을 말한다. 비천한 것이고 죽음을 상징한다.  9절 앞 부분에 다윗의 탄식이 있다. “내가 무덤에 내려갈 때에 나의 피가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다윗의 찬송과 감사는 끊임이 없다. 오늘 날 3000년이 지난 우리들까지도 도의 찬송과 감사의 시편을 통해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는가. 이것이 말씀의 힘이다. 이것이 시편의 능력이다. 이것이 찬양의 힘이며 이것이 말씀의 권세요 위로요 인도하심이다. 

 

“이것이 나의 찬송이요 이것이 나의 간증일세 

나 사는 동안 끊임없이 구주를 찬송하리로다”

 

(찬송가 288장, 예수를 나의 구주 삼고)라고 찬송하지 않나. 이런 은혜와 축복이 늘 함께 하시기를 축원한다. 아멘

 

다 같이 “찬양 하라 내 영혼아”를 찬양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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