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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청결한 자의 복(마5:8) 20220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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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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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2-03-29 23:33 조회 5,025 댓글 0
 

                      마음이 청결한 자의 복(마5:8)           2022. 3. 27

 

 

21세기는 오염의 시대이다. 공기의 오염, 바닷물과 강물과 샛강의 오염, 땅의 오염 등으로 인해서 바다와 땅에서 생산되는 물고기와 온갖 과일과 채소와 가축들까지 오염되어 가고 있다. 사람에게도 온갖 질병이 찾아 들고 있다.  나라와 나라 사이에도 녹색 성장 운동, 탄소 줄이기 운동 등을 펼쳐 보지만 그 심각성이 수치의 경보 이상으로 심각하다. 해수면의 온도 상승과 북극의 빙하가 녹아내리는 속도는 상상을 초월한다. 일회용 포장재와 산업 쓰레기의 처리 문제는 심각한 정도를 넘어선 지 오래다. 공해 혹은 오염이란 말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자연의 아름다운 상태가 점점 병들어 가는 것을 지적하는 용어들이다. 그러나 어찌 보면 공기와 물과 땅의 오염 이상으로 심각한 것이 인간의 마음의 오염이다. 인간의 마음은 청결하지 못하다. 예레미야 17장 9절에 보면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라고 하였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인간의 원래의 모습은 ‘하나님의 형상’대로의 창조였다. 그러나 불순종으로 인한 인간의 타락은 하나님의 형상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인간의 원 창조란 지정의(知情意)에 있어서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창조를 말한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의 마음 속에 죄가 찾아 들어오게 되면서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되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마음’이란 ‘카르디아’(καρδιά)인데 ‘감정과 사고의 중심’을 의미한다. ‘감정, 욕망, 열정, 사고, 이해’의 근거를 이루는 것이 ‘마음’이다. 마음이란 것이 생각, 사고, 의식의 세계를 말하는 인간의 지적 영역이다. 성경에 기초해서 생각해 보면 ‘종교적이고 도덕적인 행동’을 결정하는 생각의 근거지가 마음이다. 이처럼 마음이란 지정의의 근원으로서 사람다움을 결정하는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이다. 잠언 4장 23절에 보면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고 하였다.

 

‘청결하다’는 것은 ‘카다로스’(καθαρός)인데 이는 “깨끗하다. 순수하다”란 뜻이다. 영어의 clean 아니라 pure이다. 회칠한 무덤과 같이 겉으로만 그럴싸한 것을 청결하다고 하지 않는다. 내면의 청결, 내면의 성결, 내면의 순결을 말씀하는 것이다. 그릇으로 하면 겉으로는 번지르르하고 화려한 것 같지만 문제가 많은 양은 냄비가 아니라 순금으로 만든 금 그릇을 의미한다. 

 

구약 시대의 제사에 있어서 제사를 집전하는 제사장이나 제물이 깨끗하여야 하는 것은 물로 씻고 불로 태우는 행위 그 이상의 요구였던 것처럼 말이다. 그렇지 않나. 제물이란 흠이 없고 티가 없고 병 들지 않는 양과 염소와 송아지를 준비하는 것이 중요하다. 제사는 집전하는 제사장의 몸을 깨끗하게 하고 의복을 깨끗하게 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나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제사는 그 제물의 깨끗한 정도나 그 제사를 집전하는 제사장의 몸과 의복의 상태 정도를 말씀하는 차원이 아니다. “하나님은 중심을 보신다”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청결하다는 것은 겉으로 드러나고 남에게 보여지는 외면적인 차원이 문제가 아니다. 지극히 내면적인 것이다.  

 

“마음이 청결한 자”란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영적 성결의 문제이다. 하나님과 세상을 동시에 섬기지 않는 마음의 상태이다. 두 마음으로 나누어지지 않은 상태가 마음이 청결한 상태이다. 예수께서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6:24)고 교훈해 주셨다. 즉,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 할 것이다, 혹 이를 미워하거나 저를 사랑하거나 하여야 한다,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겨야 한다”고 깨우쳐 주셨다. 그렇지 않나. 우리가 ‘주여 주여’ 하며 살지만 나의 마음과 생각을 아시는 주님 앞에서 내 마음의 상태가 하나님께 한 발 그리고 세상에 한 발을 딛고 어정쩡한 상태의 회색지대에서 하나님 눈치도 보고 때로는 세상 눈치도 보며 방황하는 나약한 인간의 모습이 누구에게나 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말씀하신 ‘마음이 청결한 자’란 하나님께 대하여 두 마음을 품지 않은 순결한 영적 상태를 말씀하는 것이다. ‘청결하다’는 것은 의복으로 하면 한가지 재료로 직조한 순수한 옷이다. 곡물로 하면 쭉정이를 구분해 낸 알곡을 의미한다. 군대로 하면 정예화 부대이다. 사사 시대 기드온의 군대로 하면 32,000명 중에서 22,000명을 돌려보내고 10,000명을 남겼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10,000명도 많다고 하셨다. 다시 또 많은 수를 집으로 돌려보내고 남은 자가 300명이었다. 하나님은 기드온과 그 정예화된 군대 300명으로 미디안 군대 135,000명을 대적하여 싸워 이기게 하셨다. 그 때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기드온에게“당신이 우리를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셨으니 당신과 당신의 아들과 당신의 손자가 우리를 다스리소서”(삿8:22)라고 요구하였다. 그러나 기드온은 “여호와께서 우리를 다스리시리라”(삿8:23)라고 대답하였다. 이 때의 기드온의 마음 상태가 ‘청결한 마음’이다. 

 

이와 같은 놀라운 전쟁 승리 후에 기드온은 백성들에게 “너희는 각기 탈취한 금고리를 내게 줄지니라”고 하였다. 백성들은 즐거운 마음으로 겉옷을 펴고 각기 금고리를 내어다가 쌓아 놓았다. 기드온은 그렇게 모여진 금고리로 제사장의 의복인 에봇을 만들어 자기의 성읍인 오브라에 두었다. 그런데 사사기를 읽다가 보면 “온 이스라엘이 그것을 음란하게 위하므로 그것이 기드온과 그의 집에 올무가 되니라”(삿8:27)라고 하였다. 이는 우리에게 무슨 교훈을 주나. 우리의 마음을 두어야 할 곳은 어디여야 하는가. 누구여야 하는가. 우리는 자신의 외모, 젊음, 건강, 경험, 직장, 사업, 자녀, 출신 학교, 학위, 학력, 쌓아 두고 모아 둔 재물, 재주, 실력, 인간 관계, 사회적인 신분과 지위와 역량 등 이력서에 쓸 수 있는 것이 아무리 다양하고 대단한 것 같을지라도 오직 하나님께만 마음을 두는 신앙이어야 ‘마음이 청결한 자’로서의 길을 가게 될 것이다. 

 

그런데 살아가다 보면 어찌 쉽게 그렇게 되나. 우리는 얼마나 안목의 정욕의 육신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으로 인하여 봄바람에 버드나무 가지가 흔들리듯 요동치는 매 순간을 살아가고 있는가. 

 

이쯤에서 우리는 진지하게 스스로에게 질문해 보아야만 한다. “나 스스로 나의 마음을 청결하게 할 수 있을까”라고 말이다. 그 대답은 “불가능하다”이다. 그러면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의 마음을 청결하게 할 수 있는 길이 무엇일까. 그것은 하나님의 향한 믿음의 결과이며 믿음의 열매이다. 

 

예레미야 13장 23절에 보면 하나님께서는“구스인이 그의 피부를, 표범이 그의 반점을 변하게 할 수 있느냐”고 질문하신다. 그리고 몇 절을 더 읽어 내려 가다 보면 “화 있을진저 예루살렘이여 네가 얼마나 오랜 후에야 정결하게 되겠느냐”(렘13:27)고 회개의 삶을 촉구하신다. 여기서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정결한 마음이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를 깨달아 알 수 있는 청결한 마음인 것이다. 불순종하고 죄를 범하고 타락하여 그 마음이 거짓되고 그 마음이 심히 부패한 인간이 청결한 마음을 회복할 수 있는 길은 무엇일까.

 

사도행전 15장에 보면 예루살렘 회의 장면이 나온다. 그 당시에 이방인들에게 복음이 전파되는 것에 대하여 의견이 나뉘고 있었다. 예루살렘의 적지 않은 유대인들은 이방인이 구원을 받으려면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아야 한다는 주장이 강하였다. 여러 말로 많은 변론이 오가던 중에 베드로가 일어나서 말하였다. “믿음으로 그들의 마음을 깨끗이 하사”(행15:9)라는 표현을 사용하였다. 여기서 베드로 사도가 강조한 믿음이란 타락한 인간의 마음을 청결하게 하는 길임이 분명하다. 그렇다. 우리는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할례자이든 무할례자이든 그 누구이든지 오직 믿음으로서만 자신의 마음을 청결하게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나의 마음을 청결하게 하실 수 있는 분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 뿐이시기 때문이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뿐이시기 때문이다. 오직 성령님 뿐이시기 때문이다. 

 

믿음의 사람이었던 다윗에게도 그런 고민이 있었다. 그래서 다윗은 이렇게 기도하였다.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세롭게 하소서”(시51:10) 다윗이 여기서 고백한 ‘정한 마음과 정직한  영’이 ‘청결한 마음’인 것이다. 이 청결함의 상태란 일회적인 것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코로나19 바이러스 감염 시대에 손을 씻고 또 씻는 것처럼 매 순간 청결한 마음의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서 씨름하여야 한다. 청결한 마음으로 살아가기 위하여 예민한 삶을 추구하여야 한다. 고린도 후서를 보면 사도 바울은 이러한 신앙생활의 태도에 대하여 분명하게 권면하였다.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자”(고후7:1)

 

야고보도 마음의 청결한 삶에 대하여 분명한 가르침을 주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약4:8) 그러므로 마음을 청결하게 하려면 하나님을 가까이 하여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도 우리 각 사람을 가까이 해 주실 것이다.“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는 말씀은 마음의 청결 뿐만 아니라 행실의 정결을 의미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생각이 말을 말이 행동을 행동이 습관을 습관이 그 한 사람의 전 생애를 이끌어 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삶이 청결하려면 먼저 그 사람의 인격 즉 그 사람의 마음의 청결해져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의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을 멀리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고 하나님을 친근히 하여야 한다. 뿐만 아니라 마음이 청결한 자의 삶을 살아가려면 두 마음을 품지 말아야 한다. 빛과 어둠은 함께 할 수 없다. 성령과 사탄이 함께 할 수 없다. 의와 불의가 하나 될 수 없다. 진리와 거짓이 하나 될 수 없다. 죽음과 생명이 함께 할 수 없다. 그러므로 마음을 청결하게 하려면 하나님과 하나요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요 성령님과 하나여야 한다.

 

교회 생활도 마찬가지이다. 교회의 지향하는 바가 성경적이고 진리에서 벗어나지 않았다면 다른 마음을 품으면 안 된다. 다른 목소리를 내서도 안 된다. 이런 면에서 문제가 많았던 에베소 교회에 편지한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4장에서 이렇게 강조하였다.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엡4:3) 뿐만 아니라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범사에 그에게 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엡4:13, 15하) 

 

다윗은 그의 시편 24편 3-4절에서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가 누구며 그의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구인가 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 데에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하지 아니하는 자로다”라고 하였다. 

 

사도 바울은 골로새 교인들에게 편지한 골로새서 3장에서 마음이 청결한 자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위의 것을 찾으라

위의 것을 생각하라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을 죽이라

탐심은 우상 숭배다.

이 모든 것을 벗어 버리라.

분 내는 것, 노여움, 악한 의도, 악한 생각, 비방, 입의 부끄러운 말, 거짓말 등 이런 옛사람의 행위를 벗어 버리라고 하였다. 그래서 마음이 청결한 자로 살아갈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러면 마음이 청결한 자가 받는 복이 무엇인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라고 하였다. 그러면 하나님을 본다는 것이 무엇일까. 인간이 영이신 하나님의 존재를 어떻게 볼 수 있을까. 요한 복음 1장 18절에 보면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라고 하였다. 요한복음 14장에 보면 제자 빌립이 예수께 하나님을 보여 달라고 요구하였다. 그 때에 예수께서는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요14:9)라고 대답해 주셨다. 

 

그러면 우리는 복음서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무엇을 보는가. 예수의 기사와 이적, 수 많은 표적들 그리고 다양한 천국 비유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알게 된다. 하나님의 나라가 어떤 곳인지도 깨닫게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본다는 것은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알게 되고 깨닫게 되고 체험하는 것을 의미한다. 

 

흠과 티가 많았던 다윗이었지만 그는 점점 마음이 청결한 자로 살아갔다. 다윗은 시편 16편 8절에서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나의 오른 쪽에 계심으로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라고 고백하였다. 그 다음 절인 시편 16편 9절에 보면 “이러므로 나의 마음이 기쁘고 나의 영도 즐거원하며 내 육체도 안전히 살리니”라고 말하였다. 이 상태, 여호와로 인하여 마음이 기쁘고 여호와로 인하여 영이 즐거운 상태야말로 마음이 청결한 자답게 살아가는 것이 아니겠는가. 다윗은 시편 17편 15절에서 “나는 의로운 중에 주의 얼굴을 뵈오리니 깰때에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라고 하였다. 

 

우리가 즐겨 부르는 찬송가 85장 <구주를 생각만 해도>의 1절 가사는 이렇다. 

 

“구주를 생각만 해도 이렇게 좋거든 

주 얼굴 뵈올 때에야 얼마나 좋으랴”

 

작사자인 클레르보의 버나드(Bernard of Clairvaux, 1091-1153)는 “나는 하나님을 경험하기 위해서 믿는다”라고 말했다. 4세기의 성 어거스틴이 “나는 알기 위해서 믿는다”고 이성 중심을 주장했다면 버나드는 체험 중심이었다. 그는 12세기를 대표하는 영성가였다. 우리 찬송가에 145장 <오 거룩하신 주님>, 262장 <날 구원하신 예수님>도 그가 쓴 찬송가 가사이다. 그의 책 <하나님의 사랑>은 900년 전에 쓰인 기독교의 유명한 고전 중의 하나이다. 그는 “육체의 다섯 가지 감각은 촉각, 미각, 후각, 청각. 그리고 시각이다. 육체는 오감을 통해 존재할 수 있듯 사랑도 마찬가지다. 성도는 하나님은 만지고, 맛보고, 냄새 맡고, 듣고 보아야 한다. 에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자 ‘맛’이다.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을 맛보고, 체험하고, 말씀을 듣고, 보게 된다.”고 설명해 주었다. 마음이 청결해지면 클레르보의 버나드처럼 영의 눈을 활짝 떠서 하나님을 보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모든 것을 점점 체험하게 될 것이다. 마음이 청결해 지면 질수록 점점 하나님의 사랑을 분명하게 알게 될 것이다. 

 

야고보는,

 

“온갖 좋은 선물과 모든 완전한 은사는 위에서, 

곧 빛들을 지으신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옵니다.”

 

(새번역, 약1:17)라고 고백하였다. 

 

영적으로 오염되고 타락하고 혼탁한 이 세상에서 마음이 청결한 자로 살아갈 수 있기를 하나님께 간절히 간구하자. 그리하여 이와 같은 하늘의 복을 누리며 하나님을 삶으로 체험해 가는 은혜의 주인공이 모두 다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원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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