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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휼히 여기는 자의 복(마5:7) 20220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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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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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2-03-20 12:23 조회 3,486 댓글 0
 

긍휼히 여기는 자의 복(5:7) 2020. 3. 20

 

 

지난 네 번에 걸쳐서 묵상한 팔복의 앞 부분은 자기 자신에 관한 내용이다. “심령이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온유한 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란 모두가 자기 자신에 관한 내용이다. 그런데 오늘 묵상한 다섯 번째 내용은 다른 사람 즉 주변 사람에 대한 나의 태도를 말한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라고 하였다. <새번역 성경>에서는 자비한 사람은 복이 있다. 하나님이 그들을 자비롭게 대하실 것이다.”라고 번역해 주었다. 그렇다. “인애, 자비, 사랑, 긍휼, 은총이 모든 표현들은 히브리어의 헤세드라는 단어를 여러 가지 표현으로 옮긴 다양한 번역 중의 하나이다. 어머니의 자궁을 라함이라고 하는데 긍휼이란 어머니의 태 안에 잉태된 아기의 생명이 어머니의 자궁으로부터 보호를 받는 상태를 일컫는 말이다. 가엾게 여기고 불쌍히 여김을 받는 상태를 의미하는데 그보다 훨씬 깊은 의미가 담겨 있는 말이다. 우리말 사전에 긍휼이란 단어를 검색하면 불쌍하고 가엾게 여겨서 도와 주는 것이라고 되어 있다. 그렇다. 그냥 불쌍하다고 생각만 하는 것은 긍휼히 여기는 것이 아니다. 불쌍하고 가엾은 사람에게 다가가서 구체적으로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긍휼히 여기는 것이다. 헨리 나우엔의 <긍휼>이란 책에 보면 누가복음 636절 말씀을 인용한다. “너희 아버지의 자비로우심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자가 되라이 말씀의 자비란 긍휼을 의미한다. compassion은 하나님의 십자가 사랑을 가장 잘 나타낸 라틴어에서 발전한 것이다.

 

우리는 이런 말씀을 묵상해 가다 보면 성경의 무슨 내용이 생각나나. 예수의 비유 중에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가 생각날 것이다. 이 내용은 누가복음에만 나오는 비유이다. 누가복음 1025절 이하에 보면 어떤 율법교사가 예수를 시험하려고 물었다.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그 때에 예수께서는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고 물으셨다. 그러자 율법학자는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라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리하면 살리라.”라고 하셨다. 예수께로부터 이런 말씀을 들은 율법학자는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질문하였다.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그 질문을 듣고 예수께서 비유로 교훈해 주신 말씀이 우리가 잘 아는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이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는 만났다. 강도들은 그의 옷을 벗기고 때려서 거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다. 마침 그 곁을 지나가던 한 제사장이 그 현장을 보고는 피하여 지나갔다. 얼마 후에 그 곁을 지나가던 레위인도 피하여 지나갔다. 그런데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 중에 그 곁을 지나가다가 그를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어 주었다.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밤새 돌보았다. 그 이튿날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주면서 이 사람을 돌보아 주세요.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 올 때에 갚아 드릴께요.”라고 부탁하였다. 예수는 이 비유를 말씀하신 후에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고 물으셨다. 그 때에 율법학자는 자비를 베푼 자입니다.”하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예수께서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고 분부하셨다.

 

긍휼히 여긴다는 것은 이런 것이다. 자비를 베푸는 것이 긍휼히 여기는 것이다. 불쌍하고 가엾게 여길 뿐만 아니라 도와 주는 것이다. 예수께서 마태복음 25장의 양과 염소의 비유에서도 그렇게 교훈해 주셨다. 예수께서는 이웃에게 긍휼을 베푸는 생활을 하며 살아 온 이들을 칭찬하셨다. 그러나 반면에 그렇게 하지 못한 이들을 책망하셨다.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헐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25:35-40)

 

반대로 이웃에게 긍휼과 사랑을 실천하지 못한 이들을 책망하신 말씀이 이어진다.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보지 아니하였느니라 하시니 그들도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헐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하지 아니하더이까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그들은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25:41-46)

 

그러므로 남을 긍휼히 여기며 살아가는 것은 구체적인 행동 강령이다. 예수 당시에 로마 사회에는 남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없었다. 철저하게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사회였다. 어린 아이나 여성들이나 노인들을 함부로 대하였다. 노예를 핍박하였다. 병든 노예는 낡고 고장난 농기구를 버리듯이 함부로 취급하였다. 특히 부모 잃은 고아나 남편이 없는 여인들을 함부로 대하였다. 로마 시대에는 누구 누군가에게 온유하게 대한다든지 불쌍히 여기는 것은 나약한 사람들의 삶의 모습으로 여겼다. 로마 사회는 철저하게 점령하고 지배하고 군림하는 사회였다. 그런 당시에 예수께서는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셔서 제자들과 무리들이 보는 앞에서 이런 교훈을 말씀해 주신 것이다.

 

가난한 자가 천대 받던 당시에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는 이 말씀은 쉽게 받아 들이기 어려운 교훈이었다. 뿐만 아니라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다.”는 말씀은 그 말씀을 듣는 무리들을 당황하게 하는 말씀이셨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그런 자들에게 천국이 그들의 것이다, 위로를 받을 것이다,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다, 그들이 배부를 것이다,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다라는 말씀은 너무나 저들이 살아가는 일상과 동떨어진 낯설은 말씀이었다. 지금 가난하고 배가 고프고 굶주리고 목이 마르고 누군가의 위로가 필요한 무리들이었다. 땅 한 평 없이 가난하고 불쌍하게 살아가는 자들이 많았다. 그런 그들에게 예수께서는 온유한 자가 복이 있다. 그들이 땅을 차지할 것이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복이 있다. 그들이 배부를 것이다. 긍휼히 여기는 자가 복이 있다.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다.”라고 말씀을 이어 가신 것이다.

 

오늘 날 우리들은 어떻가. 요즘 매 주일 하나씩 묵상을 이어가는 팔복의 교훈이 어떻게 깨달아지나. 어떻게 여겨지고 어떻게 받아들여지나.

 

하나님은 에덴동산에서 불순종하여 죄를 범한 아담과 하와를 긍휼히 여기셔서 짐승을 잡아 피를 흘리게 한 후에 짐승의 가죽을 입혀 주셨다. 그리고는 아담과 하와를 에덴동산에서 내보내셨다. 세상에 나가서 땅을 갈아 일해서 열매를 거두며 살게 하셨다. 그런 아담과 하와가 에덴 동산 밖에서 어떻게 번성하며 오늘 날의 문명을 이어 오도록 살 수 있었을까. 에덴을 떠난 아담과 하와의 가정에 두 아들이 태어났다. 가인과 아벨이다. 가인은 농사 하는 자였고 아벨은 양을 치는 자였다. 저들은 각기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리는 자들로 살아갔다. 가인은 농사한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다. 동생 아벨은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다. 그런데 아벨과 그 제물은 받으시고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않으셨다. 그러자 가인이 몹시 분해하고 안색이 변하였다. 그 후 어느 날 가인과 아벨이 함께 들에 있을 때에 형 가인이 동생 아벨을 쳐 죽였다. 그런 가인의 생명을 보전해 주신 것은 긍휼을 베푸시는 하나님이셨다. 생각해 보라. 동생을 죽인 가인에 대하여 하나님이 긍휼을 베풀지 않으셨다면 어떻게 목숨을 건지고 살아 남을 수 있었겠는가. 세월은 흘러갔고 아담의 가정에 새 아들이 태어났다. 그 아들의 이름은 이다. 우리가 아는 아담의 후손은 그렇게 태어난 셋의 후손들이다. 세월이 다시 흘렀고 인간의 죄와 악은 점점 커져만 갔다. 노아는 오백살 된 후에 셈과 함과 야벳 이 세 아들을 낳았다.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했고 그들에게서 아름다운 외모의 딸들도 태어났다. 성경은 그 당시의 상황을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았다”(6:2)고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그렇게 번성해 가는 인간의 모습을 하나님은 탐탁하게 여기지 않으셨다. 그 이유를 성경은 이는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고 하였다. 이 말씀은 인간이 하나님의 창조 목적대로 살지 않고 육체의 향락에 빠져 살게 되었음을 지적한 말씀이다. 창세기 6장은 점점 심각해져 가는 인류의 타락 상을 이렇게 기록해 놓고 있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6:5-6) 이 때에 하나님은 홍수 심판을 결심하셨다. 우리는 인간의 죄악이 관영하던 노아 당시의 홍수 심판을 안다. 홍수 심판 때에 방주에 들어가서 살아남은 이들은 노아 부부와 세 아들과 세 며느리를 포함한 여덟식구 뿐이었다. 우리는 홍수 심판 사건에서 하나님의 긍휼하신 모습을 볼 수 있어야 한다. 이는 마치도 포도나무 농사를 하는 농부가 불 필요한 가지를 잘라 버리고 남겨 놓은 가지를 통해서 다음 농사를 준비하는 것과 같다. 예수께서는 요한복음 15장의 포도나무 비유를 통해서 교훈하셨다. 예수께 붙어 있어서 열매를 맺는 가지가 농부이신 하나님의 긍휼을 입고 사는 가지이다.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의 긍휼을 힘 입고 살아가는 자들이다. 그러므로 성도인 하나님의 자녀들은 반드시 남을 긍휼히 여기며 살아가야만 한다. 그래야만 하나님 앞과 사람 앞에서 긍휼히 여김을 받게 될 것이다. 그것이 복된 것이다. 그것이 긍휼히 여기는 자가 받는 복인 것이다.

 

그렇지 않나. 인생이 하나님의 긍휼히 여겨 주시는 은혜가 아니라면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갈 수가 없다. 출애굽기 3319절에 보면 하나님께서는나는 은혜 베풀 자에게 은혜를 베풀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라고 하셨다. 이처럼 사랑이신 하나님도 아무에게나 은혜를 베푸시고 누구에게나 긍휼을 베푸시는 하나님이 아니신 것을 분명히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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