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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유한 자의 복(마5:5, 11:28-30) 20220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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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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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2-03-07 21:30 조회 5,692 댓글 0
 

                                            온유한 자의 복(마5:5, 11:28-30)         2022. 3. 6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Blessed are the meek, for they will inherit the earth.

 

예수께서 하신 말씀의 의도를 오해하는 대표적인 말씀이 바로 오늘 본문이다. 땅을 좋아하는 우리나라 사람들은 특히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라”는 말씀으로부터 편견과 오해가 시작된다. 어느 시대, 어느 나라 사람이든지 땅을 기업으로 받는 것을 싫어할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반면에 온유한 자가 그런 복을 받는다는 것에 대해서는 의아해하는 경우가 많다. 왜냐하면 ‘온유하다’는 사전의 정의는 ‘온화하고 부드럽다’는 뜻이니 말이다. 아니, 세상에서 출세하고 성공하려면 강하고 실력이 있고 능력이 있고 담대하고 용감하고 씩씩하고 패기가 넘치고 줄 잘 서고 눈치 빨라야 하는 법이 아닌가. 사람이 온화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갖고 어떻게 남들 앞에 나서며 힘을 얻고 권력을 쟁취하며 이 무한 경쟁 사회에서 자리를 차지하고 살아갈 수 있다는 말인가. “눈 뜨고도 코 베어 가는 세상에서 그렇게 착해 빠지게 살고 온순하게 살고 부드럽게 살려 하다가는 제 밥 벌이도 못하고 제 식구 몇 명 먹여 살리지도 못하지 않겠나.”하고 생각하는 것이 세상 사람들의 보편적인 생각이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전혀 다른 차원에서 교훈하고 계시다. <새번역성경>에 보면 “온유한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땅을 차지할 것이다.”라고 되어 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온유한 자’(οι πραεις, 호이 프라에이스)란 “적극적인 사랑으로 인하여 당하는 고통을 오래 참고 인내하며 견디어 나가는 온화하고 부드러운 마음으로 살아가는 자”를 의미한다. 온유의 반대는 사나운 폭력과 잔인함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온유함으로 죄와 어둠과 사망의 권세를 이기셨고 앞으로도 영원히 다스리실 것이다. 

 

온유하다는 단어를 들으면 “얌전한, 유순한, 온순한, 겸손한, 참을성이 있는, 착한, 부드러운, 화를 내지 않는” 등의 뜻을 떠올릴 것이다. 그 부정적인 의미는 “분명하지 못한, 씩씩하지 못한, 당차지 못한, 당당하지 못한, 힘이 없는, 비굴한, 우유부단한” 등의 표현을 생각하게 될 것이다. 

 

역사적으로 세상의 왕과 군대의 장수들은 강하고 공격적이고 침략적인 근성으로 국경을 넓히고 이웃 나라를 점령해 들어갔다. 전쟁도 불사하고 혁명과 폭력과 억압과 살인을 일삼아 왔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온유하고 겸손하신 성품으로 십자가에 죽임을 당하셨으나 하나님이 저를 부활하게 하심으로 영원한 생명의 승리자가 되게 하셨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 속하여 그의 말씀에 순종하는 하나님의 자녀된 성도라면 이 땅에서 하늘과 땅의 권세를 누릴 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게 될 것이다. 이것을 사도 바울은 고린도 후서 6장 10절에서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라고 교훈하였다. 세상의 권력자들은 이 세상에서 눈에 보이는 땅 정도를 차지하려 하지만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의 나라의 영원한 기업을 상급으로 상속 받아 누리게 될 것이다. 이는 마치도 언약 백성들인 이스라엘 민족이 430년 동안의 애굽 종살이를 끝내고 출애굽 한 후에 광야 40년을 거쳐서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과도 같다. 그러므로 신약 시대의 성도들은 메시아 왕국의 절정인 새 하늘과 새 땅의 권세를 영원히 누리게 될 것이다. 요한 계시록 21장 1절에 보면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라고 약속하였다. 이것을 사도 바울은 로마서 8장 17절에서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라고 깨우쳐 주었다. 

 

아마도 예수께서는 시편 37편 11절의 말씀을 바탕으로 이런 복을 약속하시지 않았나 싶다. “그러나 온유한 자들은 땅을 차지하며 풍성한 화평으로 즐거워하리로다”(시37:11)라는 말씀 말이다. 세상에는 악인이 득세하는 것 같고 불법하게 살아가는 이들이 출세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악을 행하는 자들과 불의를 행하는 자들의 나중은 시편 37편 2절의 교훈처럼 풀과 같이 속히 베임을 당하고 푸른 채소와 같이 쇠잔해지고 말 것이다.

 

여러분도 그러하겠지만 개인적으로 시편 37편 말씀을 참으로 좋아한다. 다윗의 시편이다. 시편 37편 10절에 “진실로 악을 행하는 자들은 끊어질 것이나 여호와를 소망하는 자들은 땅을 차지하리로다”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온유한 자란 ‘여호와께 소망을 두고 살아가는 자’를 말씀하는 것이다. 잠시 후에 없어질 악인의 꾀를 쫓지 아니하고 우리 각 사람을 향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살아가고자 하는 마음가짐이‘온유한 자’의 마음인 것이다. 그래서 시편 37편을 읽고 묵상해 내려가다 보면,

 

여호와를 의뢰하고 선을 행하라.(3절)

여호와를 기뻐하라.(4절)

네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5절)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고 기다리라.(7절)

악한 꾀를 이루는 자 때문에 불평하지 말지어다.(7절)

분을 그치고 노를 버리며 불평하지 말라.(8절)

 

라고 강조하여 교훈해 주신다. 그러므로 온유한 자로 살아간다는 것은 어떤 역경과 환란을 당할지라도 선하신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의지하는 백성을 끝까지 보살피고 지키시며 인도하실 것이라고 굳게 믿고 살아가는 신앙인의 태도와 자세를 말한다. 이것을 예수께서는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라”(마11:29)라고 하셨다. 

 

야고보서에 보면 야고보는 온유한 자의 삶이 어떠하여야 하는가에 대하여 더욱 구체적으로 교훈해 주었다. 야고보서 3장 13절에 보면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는 그 선행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온유함으로 그 행함을 보일지니라”라고 가르치고 있다. 

 

세상을 온유하게 살아가지 못하는 자들의 특징이 무엇인가. 야고보는 야고보서 3장 14절 이하에서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너희 속에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으면 안 된다.

진리를 거슬러 거짓말하지 말아라.

이러한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다.

시기하고 다투는 것은 땅 위의 것이요 정욕의 것이요 귀신의 것이다.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혼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음이라”(약3:16)

 

야고보서 4장 1절 이하에 보니까,

싸움과 다툼이 어디서 나느냐

몸 안의 싸우는 정욕으로부터 나는 것이 아니냐

욕심을 내고, 살인하고, 시기하여도 얻지 못하는 것은 다투고 싸우기 때문이다.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면 아무리 구해도 얻을 수 없다. 

 

그러면서 잠언 3장 34절 말씀을 인용한다.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약4:6)라고 하였다. 잠언 3장을 읽다 보면 32절에, 하나님은 패역한 자를 미워하시고 정직한 자에게 교통(交通)하신다고 하였다. 여기 교통하신다는 ‘communion’이란 단어는 축도(祝禱) 때에 “성령의 교통하심”(고후13:13)이라는 표현에 등장하는 단어이다. ‘영적 교감’을 뜻한다. 오늘 성찬식을 하는데 성찬을 영어로 ‘holy communion’이라고 한다. 그렇다. 성찬은 예수께서 이 땅에 계실 때에 제정하신 주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영적 교통이다. 죄악에 빠진 인간의 불행이란 하나님과의 교통이 끊기는 것이다. 성령과의 교통이 끊기는 것이다. 그렇지 않나. 에덴동산의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고 나니까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여호와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의 숲 사이에 숨었다. 잠언 3장 33절에 보면 “악인의 집에는 여호와의 저주가 있거니와 의인의 집에는 복이 있느니라”라고 하였다. 여기 ‘의인의 집’이란 표현을 ‘온유한 자의 집’으로 바꾸어 읽어 보자. “악인의 집에는 여호와의 저주가 있거니와 온유한 자의 집에는 복이 있느니라”라고 말이다. 

 

잠언 3장 34-35절을 읽다 보면 마치도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라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말씀과 거의 같은 내용을 접하게 된다.“진실로 거만한 자를 비웃으시며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나니 지혜로운 자는 영광을 기업으로 받거니와 미련한 자의 영달함은 수치가 되느니라”라고 하였다. 

 

쟌 칼빈 (Jean Calvin, A. D. 1509-1564)은 “온유란 부드러운 마음으로 살며 노하기를 더디하며 절제할 수 있는 마음”이라고 했다.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B.C. 384-322)는 “온유란 상대방이 격하게 분노할 때에 너그럽게 대하는 덕성”이라고 말했다. 그렇다. 역사적으로 보아도 권력자들과 군대의 장수들은 창과 칼을 동원한 무력과 권력의 힘을 바탕으로 세상을 정복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온유하심으로 세상 만국과 하나님의 나라인 천국의 영원한 평화의 왕이 되셨다. 

 

마태복음 21장 5절에 보면 새끼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기 위해서 감람산 벳베게 마을 입구에서 두 제자에게 마을에 들어가서 매여 있는 나귀와 그 새끼 나귀를 풀어 끌고 오라고 분부하셨다. 그런데 그 장면은 선지자를 통한 예언의 말씀을 성취하시는 장면이라고 설명해 놓았다. 스가랴 9장 9절의 말씀의 예언이 이루어지는 장면이다.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라는 말씀 말이다. 여기 스가랴 9장 9절과 마태복음 21장 5절에서 인용된 ‘겸손’이란 단어가 ‘온유’를 의미한다. 맞다. 예수께서는 마태복음 11장 29절의 말씀처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라고 자신의 성품을 ‘온유와 겸손’이 두 단어로 함축해 주셨다. 그러므로 온유한 자로 살아가는 것은 이 세상을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라는 책의 저자인 찰스 쉘돈이 도전하는 대로,“홀로 있는 시간은 물론이고 가정의 가족과 직장의 선후배 동료들과 사업의 현장과 공공장소에서 주님이라면 어떻게 생각하실까. 주님이라면 어떻게 말씀하실까. 주님이라면 어떻게 대하실까. 주님이라면 어떻게 보실까. 주님이라면 어떻게 판단하실까. 주님이라면 어떻게 반응하실까. 주님이라면 어떻게 행동하실까.” 이런 질문을 끊임이 없이 하면서 하루 하루, 순간 순간을 살아가는 성도의 마음 가짐과 태도야말로 ‘온유한 자’답게 살아가는 것이 아니겠는가. 찰스 쉘돈 목사는 미국 뉴욕주 웰스빌에서 태어나 브라운 대학과 안도버 신학교를 졸업하고 회중교회의 목사가 되었다. 그는 버몬트와 캔자스에서 목회하였고 많은 책을 저술하였다. 사회사업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실직한 인쇄공으로 가장하고 산업 현장에서 고생하는 여러사람들을 만나는 와중에 크리스천들의 무관심과 차별에 큰 충격을 받게 되었다. 그 후에 쓴 책이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In His Steps)라는 책이다. 그는 미국의 역사적이고 유명한 기독교 잡지인 크리스천 헤럴드지의 편집장을 지내기도 했다. 

 

그러므로‘온유’는 ‘겸손’과 함께 단순히 자기 자신을 낮추는 정도가 아니라 어떤 구체적인 대상에 대하여 온화하고 부드러우며 허세를 부리지 않는 태도를 말한다. 베드로는 그의 첫 편지인 베드로전서 3장 4절에서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라고 교훈하였다.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라고 하였는데 이는 남편을 대하는 아내의 마음가짐을 교훈하면서 말씀한 것이지만 모든 경우에 합당한 가르침이 아닐 수 없다. 잔 칼빈은 “온유란 자기에게 악을 행하는 자에 대하여서도 길이 참는 것”이라고 하였다. 예수께서는 그런 온유와 겸손으로 십자가의 수치와 조롱과 모멸과 고통을 당할대로 다 당하시고 죽으셨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를 삼일후에 무덤에서 부활시키신 것이다. 

 

성경이 말씀하는 온유한 단지 사람과 사람 사이의 대인 관계에 대하여만 교훈하지 않는다. 온유란 다른 사람에 대하여 선한 마음가짐으로 대하는 태도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대하여 절대 순종하는 마음가짐을 말씀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나. 요단강을 홍해를 건너듯이 육지처럼 건넌 여호수아와 그의 군대는 여리고 성을 함락한 후에 아이성 함락 전쟁이 이어졌다. 그런데 실패하고 말았다. 아간의 범죄가 드러났다. 아간이 누구인가. 3,000명의 정예화된 여호수아 시대의 특수 부대원 중의 한 사람이다. 그런데 전쟁을 시작하자마자 이스라엘 군대 36명이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전쟁 실패의 원인을 찾다 보니 아간의 범죄 사건이 들어났다. 아간은 여호수아를 통한 하나님의 전쟁 명령을 경홀히 여긴 자였다. 그는 하나님이 금하시고, 여호수아를 통해서 구체적으로 명령하신 하나님의 전쟁 명령에 불순종하였다. 아간은 하나님 앞에서 온유하고 겸손한 자로 생활하지 않았다.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가. 하나님은 여호수아로 하여금 아간과 그의 가족을 아골 골짜기로 이끌고 가서 돌로 치고 불사르게 하였다. 그 장면을 읽다가 보면 “네가 어찌하여 우리를 괴롭게 하였느냐 여호와께서 오늘 너를 괴롭게 하시리라”(수7:25)고 경고한 후에 처형하였다. 전쟁에 이긴 후의 영광과 상급과 명예가 얼마나 크고 아름다웠겠는가. 그러나 아간은 전쟁 중에 시날 산 외투 한 벌, 은 이백 세겔, 금 오십 세겔을 자기 집 장막의 땅을 파고 감추었다. 

 

그러므로 온유한 자로 살아간다는 것은 그 시대, 그 상황에서 인간적인 이기심이나 어리석은 탐심에 빠지지 않는 것이다.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기대하심을 깨닫고 그 뜻 안에서 판단하고 행동하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초대 임금 사울은 40년 동안 왕으로 세움을 받았다. 그러나 그의 말년은 온유와는 너무나도 거리가 멀었다.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이 세우신 선지자 사무엘을 멸시하였다. 결국 하나님은 사울을 버리셨다. 사무엘상 31장은 사울의 비참한 마지막을 기록하고 있다. 하나님을 떠나고 온유함과 겸손함을 버린 교만하고 어리석은 왕 사울의 마지막은 후대의 성경을 읽는 믿음의 사람들에게 끊임이 없이 교훈하고 또 교훈하고 있다. 

시편 37편 11절에 보면 “그러나 온유한 자들은 땅을 차지하며 풍성한 화평으로 즐거워하리로다”라고 하였다. 시편 37편 22절에는 “주의 복을 받은 자들은 땅을 차지하고 주의 저주를 받은 자들은 끊어지리로다”라고 하였다. 다윗은 고백하였다. “내가 어려서부터 늙기까지 의인이 버림을 당하거나 그의 자손이 걸식함을 보지 못하였도다”(시37:25) 시편 37편 26절에서는 “의인의 자손이 복을 받는도다”라고 하였다. 시편 37편 34절에서는 “여호와를 바라고 그의 도를 지키라 그리하면 네가 땅을 차지하게 하실 것이라”라고 하였다. 

 

최근에 빌리 그래함(Billy Graham, 1918-2018) 목사의 손자인 에드워드 그래함 목사가 코로나 시국이지만 한국을 방문하였다. 그의 할머니인 루스 벨(Ruth Bell)은 중국에서 사역하던 선교사의 딸로 태어났다. 빌리 그래함 목사는 하나님 앞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그의 아들 프랭크린 그래함 목사와 그의 손자 에드워드 그래함 목사는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대를 이어 여호와를 바라고 여호와의 도를 지키고 전하는 자의 사명을 이어 가고 있다. 저들 삼대를 보라. 저들에게 있어서 땅을 기업으로 받는다는 것이 무엇인가. 땅  등기 문서에 몇 평의 땅을 넓혀 가는 것 정도를 갖고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다.

 

눈에 보이는 내 나라, 내 동네의 땅 몇 마지기에 눈이 가리어져서 탐욕의 노예로 살지 말고 눈을 들어 열방을 바라보자. 열방을 넘나드는 하나님의 나라의 대사요 사명자답게 부르심과 사명에 충실하게 살아가자. 온유하고 겸손하신 주님께서 지게 하시는 멍에를 메고 주님의 온유하심과 겸손하심을 배우자. 온유한 자가 누리는 복인 땅을 기업으로 받는다는 것은 소유의 개념으로 국한되는 차원이 아니다. 그러므로 땅 끝까지 주의 복음이 전파되는 일에 존귀하게 쓰임 받으며 살다가 장차 하나님의 나라에서 새 하늘과 새 땅의 영원한 상급을 상속으로 받아 누리는 참으로 복된 주인공이 모두 다 될 수 있기를 축원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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