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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통하는 자의 복(마5:1-12) 20220227 삼일절 103주년 기념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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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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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2-03-01 15:46 조회 3,682 댓글 0
 

                      애통하는 자의 복(마5:1-12)             2022. 2. 27 삼일절 103주년 기념주일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Blessed are those who mourn, for they will be comforted.

 

생노병사(生老病死)란 말이 있다. 태어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인생의 여정을 표현한 말이다.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다. 탄생의 순간이 있는가 하면 죽음의 순간도 있다. 그러는 중에 별의별 희로애락(喜怒哀樂)을 겪으면서 살아간다. 누가 화나고 분노할 일이나 슬픈 사건을 원하고 애통할 일을 바라겠는가. 그러나 살다 보면 탄식이 나오고 슬픈 애곡 소리가 울려 퍼지고 한숨이 절로 나오는 사건과 사고와 충격 속에 휩싸일 때가 어찌 없으랴.

 

평생 꽃길만 걷는 인생이란 없다. 살다 보면 이런 일도 겪고 저런 일도 겪는다. 천년 만년 평화만 계속되는 나라나 민족도 없다. 요즘 우크라이나는 전쟁으로 인해서 온 백성들이 애통하고 있다. 우리 민족은 일제 36년 동안 그런 애통을 겪어야 했다. 해방 된지 5년 만에 동족 간에 전쟁이 일어나서 수백만명의 죽었다. 눈물이 강이 되고 한숨이 안개가 되고 슬픔이 바다가 되었다. 3.1 독립 만세 운동은 일제에 1910년, 한일합방이 된 경술국치의 부끄럽고 한스러운 날들을 지내며 겪던 슬픔과 애통과 고난과 억울함이 평화의 만세 시위로 전국을 휩쓴 비무장 평화시위요 자유와 인권과 평화를 되찾기 위한 민족 운동이었다. 

 

사도 바울이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는 강조를 한 것을 보면 사실 항상 기뻐하는 삶이란 그리 쉽지 않은 것이 분명하다. 

 

사복음서에 보면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신 기록은 있어도 예수께서 크게 웃고 기뻐하시거나 껄껄거리시며 즐겁게 지내신 장면을 기록한 곳을 찾아볼 수가 없다. 그도 그럴 것이 예수께서는 늘 수많은 각색 병자들과 귀신 들린 자들 곁에서 지내셨다. 자신이나 가족의 병을 고쳐 달라고 찾아오는 수많은 무리들 사이에 갇혀 지내시듯 하셨으니 맘 편히 즐겁고 기쁘게 지내실 순간이 별로 없으셨을 것이 분명하다.

 

물론 병자가 고침을 받는 장면을 보고 기뻐하셨을 것이다. 귀신이 떠나가고 새 삶을 회복하는 것을 보시고 만족해하시고 즐거워하셨을 것이다. 그러나 이른 아침부터 몰려오는 불쌍한 각색 병자들 사이에서 지내신 예수의 하루 하루 일과는 얼마나 고단하고 기진맥진한 나날을 보내셨을까하고 상상하게 된다.

 

애통(哀痛)이란 말은 “몹시 슬퍼하다”라는 뜻이다. 영어 NIV 성경에서는 ‘mourn’이란 단어를 사용하였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 하루 전날인 목요일을 표현할 때에 ‘mourn thursday’이라고 한다. 우리 말로는 ‘거룩한 목요일’이란 뜻에서 성(聖)목요일이라고 번역한다. 예수의 죽음을 준비하고 기다리시던 날의 고통을 표현한 단어임이 분명하다. 

 

예수께서 붙잡혀 심문받으시고 십자가에 죽임을 당하시던 전날에 밤이 새도록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셨다. 그 밤에 겟세마네 동산에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따로 데리고 기도하러 가시면서 예수는 고민하고 슬퍼하셨다.  그리고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마26:38)라고 부탁하신 적이 있다. 예수의 그 때의 심정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애통하는 마음”이셨을 것이다. 

 

이 세상에 애통하며 살기를 원하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다. 그렇지 않나. 즐겁고 기쁘고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지 누가 슬프고 고통스럽고 애통하는 날들을 원하겠는가. 그러나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는 하나님의 아들을 짐승의 우리에서 낳아 말의 먹이를 담는 말구유에 뉘어야 하는 애통을 경험하였다. 예수의 탄생은 이사야의 예언처럼 마른 땅에서 힘없게 자라난 마른 순과도 같았다. 그 아기 예수가 커서 인류를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신 것이다. 

 

여러분은 그동안 어떤 삶을 살아 왔는가. 물론 젊은이들이야 별 충격적인 경험이 없이 평탄하고 무난한 날들을 살아 온 이들도 없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연세가 지긋한 어른들은 험악한 세월을 살아왔노라고 고백하시게 될 것이다. 

 

요즘 103세로 장수하는 김형석 박사는 1920년생이다. 윤동주 시인과 평양 숭실중학교에 다닐 때에 같은 반에서 공부하였다. 시인 윤동주(1917-1945)는 전쟁이 막바지에 이르던 1945년 2월에 그의 고향집에 갑자기 전보가 배달되였다.‘2월 16일 동주 사망, 시체 가지러 오라.’란 전보가 배달되자 가족들은 경악하였다. 아버지와 당숙 윤영춘이 일본으로 건너가고 있는 사이에 사망하기 전에 발송된 편지가 윤동주가 사망한지 열 흘 뒤 늣게 도착하였다.‘동주, 위독하니 보석할 수 있음. 만일 사망 시에는 시체를 가져가거나 아니면 규슈제국대학 의학부에 해부용으로 제공할 것임. 속답 바람.’이라는 요지의 우편통지서였다. 

 

그런 사실도 모른 채 일본 후쿠오카형무소에 다다른 아버지와 당숙은 우선 살아남아 있는 송몽규를 면회했다. 그런데 초췌한 몰골의 송몽규는 매일 이름 모를 주사를 맞고 있다고 말했다. 이 증언 때문에 두 사람이 일제로부터 생체실험을 당했다는 추측을 갖게 한 것이다. 

 

후쿠오카형무소 측은 가족들에게 윤동주의 운명 시각이 2월 16일 오전 3시 36분임을 통보했다. 윤동주의 나이 28살 때의 일이다. 그때 일본인 간수가 “동주 선생은 무슨 뜻인지 모르나 큰 소리를 외치고 운명했습니다.”라고 전해주었다. 윤동주의 시신은 규슈제국대학 의학부에서 방부제 처리를 해 둔 상태였다. 만주 용정으로 운구된 윤동주의 시신은 3월 6일 용정중앙감리교회 문재린 목사의 집례로 장례되었다. 장례식장에서는 그의 시 〈자화상〉과 〈새로운 길〉이 낭송되었다. 윤동주의 시 중에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라는 시가 있다. 팔복이란 제목으로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저희가 슬플 것이요”라고 슬퍼하는 자를 여덟 번 반복하여 써 내려갔다. 

 

일제에 나라의 주권을 빼앗긴 식민지 백성의 슬픔을 팔복이 빗대어 써내려간 청년 민족시인 윤동주의 슬픔은 그 당시 모든 민족의 슬픔이요 모든 백성의 애통이었다. 

 

1919년 3월 1일 이후 전국을 휩 쓸었던 시위 운동은 집회 횟수 1,542회, 참가인원 202만 3,089명, 사망자수 7,509명, 부상자수 1만 5,961명, 피검자수 5만 2,770명에 이른다. 교회 47곳이 불에 탔다. 민가 715채나 되었다. 이화학당 1학년을 다니다가 3. 1 운동 소식을 들은 유관순(1902-1920)은 고향에 내려갔다. 한 달 후인 4월 1일 오후 1시 천안 병천 아우내 장마당에는 약 3천명의 군중이 모여들었다. 오후 4시경에 유관순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일본군대가 쏜 총에 맞아 숨졌다. 현장을 벗어나 만세 시위를 계속하여 주도하던 유관순은 체포되었다. 공주 재판소를 거쳐 서울 서대문 형무소로 이감된 유관순은 온갖 고문과 학대를 당하다가 다음 해인 1920년 9월 28일에 서대문 형무소에서 숨지고 말았다. 해방을 맞기까지 일제 식민지 아래서 독립을 염원하던 그 당시의 우리 민족은 끝이 보이지 않는 슬픔 속에서 애통하는 날들을 견디고 벼티어 내야만 했다. 

 

창세기의 야곱이 가나안 지역에 덮친 대기근과 흉년의 때에 70여명의 자손들을 이끌고 애굽으로 이주하였다. 애굽에 도착한 야곱은 애굽 임금 바로 왕을 만날 기회가 왔다. 나이를 묻는 바로 왕의 질문 앞에 야곱은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백삼십 년이니이다 내 나이가 얼마 못 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연조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창47:9)라고 대답하였다. 생각하여 보라. 130년을 살았으니 무슨 꼴인들 겪지 않았겠는가. 우리가 잘 아는대로 야곱은 실로 파란만장한 세월을 살았다. 죽이겠다고 뒤 쫓아 오는 형 에서를 피해서 정든 집을 벗어나 외삼촌 댁으로 도망친 적도 있었다. 들판에서 돌을 베개 삼고 잠을 청한 적도 있었다. 길지 않은 세월을 보내고 고향에 돌아갈 날아 찾아오길 기대했지만 그렇지 못했다. 외삼촌 집에서 장가들고 20여년 세월을 지내야 했다. 야곱은 두 부인과 두 부인의 여종들을 통해서 네 여인의 배가 다른 아들 열둘을 낳았다. 그리고 외동딸도 낳았다. 

 

야곱이 총애하는 아들은 열한 번째로 태어난 요셉이었다. 특별히 사랑하는 아내 라헬을 통해 뒤늦게 얻은 아들이었다. 그래서 편애가 심했다. 그런데 그 아들을 잃고 말았다. 도단 성 밖의 들판에서 양털을 깎던 10명의 배 다른 형님들에게 면회하고 돌아오도록 보낸 아들 요셉은 아버지 곁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여러 날 후에 10명의 아들들은 짐승의 피에 범벅이 되고 짐승에 물려 찢겨진 요셉의 채색옷을 아버지 야곱에게 던져 드렸다. 그리고는 하는 말이 “우리가 이것을 발견하였으니 아버지의 아들의 옷인가 보소서”하고 뻔뻔스럽게 연극을 꾸몄다. 

 

요셉의 10명의 배다른 형들은 요셉을 애굽으로 향하는 미디안 장사꾼들에게 은 삼십을 받고 옷을 모두 벗기고 노예로 팔아 버렸다. 그리고는 숫염소를 잡아 요셉의 옷을 그 피에 적셨다. 그리고 그 옷을 가져다가 아버지 야곱에게 건네며 천연덕스럽게 반응한 것이다. 이 비보를 접한 아버지 야곱은 자기 옷을 찢으며 굵은 베로 허리를 묶고 오래도록 애통하였다. 슬픈 날을 지내며 애통하던 야곱은 “내가 스올로 내려가 아들에게로 가리라”고 말하며 요셉으로 인한 슬픔을 이기지 못하여 날마다 울고 또 울며 지냈다. 

 

창세기 37장 34절에 보면 그 때의 야곱의 모습을 “오래도록 그의 아들을 위하여 애통하니”라고 하였다. 우리가 자주 언급하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말할 때의 그 야곱은 애통의 나날을 지냈던 언약의 사람이었다. 

 

그런 야곱이 험악한 세월을 슬픔과 애통을 가슴에 삭히며 살던 중에 22여년 후에 죽은 줄 알았던 요셉을 애굽의 총리가 된 모습으로 재회하게 되었다. 이것이 꿈인가 생시인가. 야곱은 130살에 요셉을 만났다. 그 후에 후손 70명과 함께 고센 땅에서 17년을 더 살다가 147살에 하나님께로 돌아갔다.

 

노아가 600살 때에 홍수 심판을 겪었다. 100년간 건축한 방주에 들어간 이들은 노아와 그를 포함한 여덟 식구 뿐이었다. 생각하여 보라. 노아가 방주 안에서 구원 받았으니 마냥 기쁘고 마냥 즐겁고 마냥 감사하기만 했을까. 아니다 노아에게는 구원받은 자의 애통이 있었다. 그 애통의 심정이 크고도 컸다. 방주의 문은 닫혔다. 사십 주야를 하늘 문이 열린 듯이 큰비가 내려서 온 땅을 덮었다. 더 이상 물 위로 드러난 산봉우리가 없도록 온 지면이 물에 잠겼다. 노아가 자기의 여덟 식구와 함께 방주 안에서 구원을 받았으니 날마다 방주 안에서 잔치하고 춤추며 지냈을까. 아니다 방주 안의 노아에게는 방주 밖에서 죽어간 형제자매들에 대한 애통이 있었을 것이다. 

 

홍수가 멈추고 물이 감했다. 마른 땅이 들어나자 노아는 방주 밖으로 나왔다. 노아는 제단을 쌓고 정결한 짐승과 정결한 새를 구별해서 번제를 드렸다. 그때에도 여전히 노아의 마음 한 구석에는 애통하는 심정이 컸을 것이 분명하다. 

 

그렇지 않나. 예수께서 말씀하신 ‘애통’(哀痛)이란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갈라 놓은 죄를 슬퍼하며 처절히 회개하는 마음을 말한다. 그러므로 애통하는 자가 받아 누리는 위로라는 복도 하나님과 나와의 사이에서 경험되는 위로인 것이다. 

 

예수께서 복이라고 말씀하시는 위로라는 것이 그냥 세상 적인 방법으로 경험하는 그런 차원의 위로가 아니다. ‘παρακαλέω’(파라칼레오)는 ‘곁으로(παρα) 부르다(καλέω)’라는 뜻이다. 예수께서 누구를 곁으로 부르시나. 하나님 아버지께서 누구를 곁으로 부르시나. 이는 죄로 인하여 슬퍼하고 애통하고 아파하고 괴로워하는 이의 곁에 다가 오셔서 품에 안아 주시는 주님의 사랑을 표현한 말이다. 

 

생각하여 보라. 죽었다가 살아난 아들이요 잃었다가 얻은 아들이라고 여기며 반기고 잔치하는 아버지의 위로가 아니었다면 집 나갔던 둘째 아들에게 위로의 복이 임했겠나. 허랑방탕하게 살며 남의 나라에서 창기와 함께 뒤엉켜 지내며 빈털터리가 된 둘째 아들이다. 남의 나라의 들판에서 지내며 돼지를 치는 신세가 되었다. 거기서 신세타령하며 애통해 할때에 그의 마음에 아버지의 집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생겼다. 그리고 용기를 내어 아버지의 나라로 돌아왔다. 아버지의 마을로 돌아왔다. 그런데 마을 어귀에 나타난 남루한 행색의 그를 먼저 알아본 것은 아버지였다. 측은히 여긴 아버지는 달려가서 아들을 끌어안고 입을 맞추었다. 이렇게 아버지의 아들을 향한 위로가 시작되었다. “아버지. 나는 하나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지금부터는 나를 아들로 여기시지도 마십시오.”이것이 애통하는 마음이다. 그런데 아버지는 달랐다. 아버지는 종들에게 명령하였다.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 입혀라. 손에 가락지를 끼워라. 발에 신을 신겨라.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 잡아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잠시 후 아버지의 집에서는 풍악이 울리고 춤추는 소리가 들렸다. 아버지는 말하고 또 말했다. “내 아들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 내가 잃었던 아들을 다시 얻었다.”아버지와 종들은 돌아온 아들로 인해서 즐거워하고 또 즐거워 하였다.

 

이것이 애통하는 자에게 주시는 주님의 위로이다.

 

우리는 피에타Pietà)라는 조각 작품을 안다. 십자가에서 내려진 아들 예수의 시체를 끌어안고 오열하는 어머니 마리아와 숨을 거둔 예수 그리스도를 형상화한 작품이다. 로마 바티칸 베드로 성당 안에 있는 미켈란젤로의 조각상이다. 이 장면에서 마리아의 애통을 느끼는가. 마리아의 설명할 수 없는 슬픔을 느끼는가. 33살 아들 예수의 죽음의 시체를 끌어안은 어머니 마리아의 나이는 그 당시 46살 혹은 48살 정도였을 것으로 역사학자들은 말한다. 13-15살 되던 나사렛의 마리아가 마을의 나이 많은 총각 목수 요셉과 약혼하였다. 그리고 결혼을 준비하고 기다리던 중에 천사 가브리엘의 방문을 받은 것이다. 그 후에 마리아는 하나님의 아들을 낳는 예수의 어머니가 되었다. 

 

물론 아들 예수의 가야 하는 길을 마리아가 몰랐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슬픔은 슬픔이고 애통은 애통이다. 그렇지 않나. 우리 모든 사람에게 언젠가는 죽음의 순간이 찾아온다는 것을 몰라서 슬프고 몰라서 애통하는 것이 아니지 않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단번 희생 제물로 죽으심으로 인류 구원의 대업이 성취되는 것을 몰랐던 어머니 마리아가 아니었다. 그러나 그 날 골고다 언덕에서 숨을 거둔 아들 예수의 시체를 끌어안은 어머니 마리아는 통곡하고 또 통곡하였을 것이다. 그 깊고 깊은 슬픔, 그 처절한 애통을 표현한 작품이 1499년에 완성된 미켈란젤로의 조각 피에타(Pietà)이다. 피에타는 이탈리아어로 ‘슬픔, 비탄’을 뜻한다. 

 

이 세상에는 애통할 일이 많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정도의 차이가 다를 뿐 각기 다른 슬픔과 비애와 애통을 경험하며 살아간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한’(恨)이 있다. 억울하고 원통하고 슬프고 답답하고 한스러운 것을 뜻하는 ‘한’(恨, han)이란 단어는 옥스퍼드사전에도 실렸다. 

 

애통이 역사 속에 흐르고 가슴마다 흐르는 한 민족은 ‘한 오백년’이란 노래를 부를 때 누구나 동감한다. 그렇지 않나.“한 많은 이 세상 야속한 님아 정을 두고 몸만 가니 눈물이 나네 아무렴 그렇지 그렇고 말구 한오백년 사자는데 왠 성화요.....청춘에 짖밟힌 애끓는 사랑 눈물을 흘리면서 어디로 가리 아무렴 그렇지 그렇고 말구 한오백년 사자는데 왠 성화요..”이런 노래에 하나님의 위로가 있는가. 

 

<티끌 같은 세상 이슬 같은 세상>이란 장사익의 노래를 들어 보면 희망이 보이나.  

 

“이 나라 이 강산에 이 몸이 태어나 삼베옷 나물죽으로 이어온 목숨

기구하여라 고단한 세월 타고난 굴레는 벗을 길이 없어라

달은 기울고 별빛조차 희미한데 기다려도 기다려도 오지않는 세상

기다려도 기다려도 오지 않는 세상

슬퍼말아라 티끌같은 세상 슬퍼말아라 이슬같은 인생

슬퍼말아라 티끌같은 세상 슬퍼말아라 이슬같은 인생

대장부 가는 길에 무슨 한이 있으리”

 

A라는 이름을 가진 그녀는 1954년, 미국 미시시피강 근처의 흑인 빈민가에서 흑인 미혼모의 딸로 태어났다. 9살 때 사촌 오빠에게 성폭행을 당했다. 14살 때에 자신도 미혼모가 되었다. 아기는 태어난 지 2주 만에 눈을 감았다. 20대 때에는 술과 마약을 가까이했다. 감옥에도 드나들었다. 그러는 중에 몸무게는 100kg을 넘어섰다. 자신을 바라보는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곱지 않았다. 

 

B라는 이름을 가진 그녀는 1998년 <포춘>지가 선정한 여성 최고 비즈니스 우먼 제 2위, 2003년에 실시된 헤리스 여론 조사에서는 1998년과 2000년에 이어서 미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TV 방송인에 3번이나 선정되었다. B는 영화, TV 프로그램 제작, 출판, 인터넷 사업 등 하포 엔터테인먼트 그룹 대표로 10억불 이상의 자산을 보유하고 있다. B는 자신의 이름을 붙인 토크쇼를 25년째 진행하고 있다. 그가 방송에서 언급하는 물건은 그 날로 품절이 된다. 그가 특정 정치인을 언급하면 정치 판세가 바뀐다. 위의 A와 B는 같은 인물이다. 그녀의 이름은 오프라 윈프리(Oprah Winfre, 1954-)이다.  

 

그는 어느 날 하나님을 만났다. 정말 자신은 쓸모없는 존재로 여겼었다. 부적절한 부모는 있어도 부적절한 자식은 없다는 것을 나중에 깨달았다. 한 때 자기는 태어나서는 안 될 뚱뚱보요 흑인으로 여겼지만 목적이 없이 태어난 사람은 없다는 것을 뒤 늦게 깨달았다. 하나님은 인간의 실수와 죄까지도 하나님의 손길 안에서 섭리로 다듬어 가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은 동물이나 식물까지도 선하신 계획에 따라 만드셨다. “그렇다면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을까?”하고 고민하던 그녀는 구원하시는 주님을 만나고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다. 그는 솔직하게 자신의 어둡고 힘들고 참담했던 과거를 진솔하게 고백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여 주셨고 우리 주님은 나를 구원하여 주셨다”고 외쳤다. 그는 전 세계 많은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예수님을 만나고 보니 전혀 새로운 사람이 되었다.

 

지금 애통해하고 있고 울고 있고 슬퍼하고 있는 그 누구일지라도 나를 부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맡기신 사명을 바라보고 나를 위로 하시는 하나님의 위로를 체험할 수 있어야 한다. 사명이 없는 그리스도인은 한 사람도 없다. 우리에게 은사를 주시고 재능을 주신 것은 우리에게 맡기신 일을 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지금 이 시대를 사는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에게 맡기신 일이 무엇인지를 찾고 최고의 관심을 가지는 것이다.

 

그녀의 인생 역전을 이룬 시작은 뒤늦게 만난 친아버지의 한마디 조언 덕분이기도 했다. 그녀의 친어머니는 자녀에게 도대체 관심이 없었다. 그래서 딸의 성장기는 더 불행했고 우울했다. 그러나 뒤늦게 만나게 된 친아버지는 딸에서 “하나님을 믿어라. 그리고 책을 읽어라. 그러면 너의 인생이 180% 달라질 것이다.”라고 충고하였다. 

 

그 날 이후로 딸은 2주마다 책 한 권씩을 읽고 독후감을 썼다. 독서 습관이 몸에 배기 시작했다. 덕분에 어휘력과 글쓰기 실력이 늘어 학교 공부에도 큰 도움이 되었다. 자신에게도 잘 할 수 있는 것이 있다는 것을 발견한 그녀는 공부와 인간관계 모두에 자신감을 얻게 되었다. 밝고 당당한 사람으로 변모해 가기 시작했다. 그녀가 독서 초기에 읽고 감명을 받은 책은 마야 안젤루(Maya Angelou, 1928-2014)의 <새장에 갇힌 새가 왜 노래하는지 나는 아네>였다. 그 책의 저자인 마야 안젤루의 지난날의 운명은 오프라 윈프리와 너무나도 흡사하였다. 그 책은 “어떻게 과거의 상처를 극복하고 오늘의 행복을 쟁취하게 되었는지”를 교훈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오프라 윈프리는 그 책에서 자신도 장차 행복해질 수 있다는 희망을 발견하였다. 

 

마야 안젤루는 1928년 4월 4일, 미국 미주리주 세인트루이스에서 태어났다. 그는 세 살 때 부모가 이혼하면서 남부 아칸소주의 할머니 집에 맡겨졌다. 어머니와 재회한 7세 무렵 어머니의 남자친구에게 성폭행을 당했다. 그 강간범은 나중에 누군가에 의해 살해당했다. 이후 5년간 실어증을 앓으며 마을 도서관에서 시와 소설을 읽었다. 16세에 미혼모가 돼 웨이트리스, 칼립소 가수 겸 댄서, 트럭 운전, 자동차 정비로 연명했다. 매춘한 적도 있었다. 결혼 생활도 대체로 불운했다. 그에겐 다행히 좋은 친구들이 있었다. 유년의 그에게 문학을 알게 한 아칸소 스탬스의 이웃집 교사, 30대 초반 뉴욕 시절에 만난 마틴 루터 킹 목사와 말콤 엑스, 한 때 연인이었던 남아공 인권 운동가 부숨지 마케 등이 그런 이들이다. 그는 그들과 더불어 일하며 자기 삶을 객관화할 수 있었다. 인권운동의 넓은 지평 위에 자신을 세울 수 있었다. 각종 매체 편집자와 프리랜서 기자로 활동하며 그는 글쓰기를 시작했다. 1969년의 기념비적 자서전 <새장에 갇힌 새가 왜 노래하는지 나는 아네>는 그렇게 탄생했다. 

 

그는 사적 경험이 일깨운 것들과 그가 만났던 거인들에게서 받은 영향을 글과 연기와 앞서는 춤과 노래로 세상에 전했다. 가수, 배우, 극작가, 배우, 작곡가, 프로듀서, 여성 운동가, 흑인 인권 운동가, 저널리스트, 대학교수, 강연가 등 그의 나중의 삶은 화려하였다. 그녀를 그렇게 만든 힘은 성폭행당한 후유증으로 5년 동안 실어증으로 고생하던 당시에 도서관에 갇혀서 읽었던 시와 소설을 비롯한 독서의 힘이었다. 그로 인하여 오프라 윈프리, 미셸 오바마를 비롯한 수많은 여성이 힘과 용기와 희망을 얻었다. 

 

요한 계시록 21장 4절에 보면 천국 즉 하나님의 나라에는 “애통하는 것이 없다”고 하였다. 맞다. 하나님의 나라는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한 나라”이다. 아버지의 나라는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는 나라”이다. 

 

하나님은 엘리사 때에 선지자 학교 학생이었던 남편을 잃고 홀로 된 여인의 슬픈 탄식을 들어 주셨다. 열왕기하 4장에 나오는 내용이다. 남편은 죽고 두 아들과 함께 빚에 눌려지내고 있었다. 그의 애통하는 탄식을 들은 선지자 엘리사는 그 부인에게 “집에 무엇이 있는지 내게 말하라”고 하였다. “집에 기름 한 그릇 외에 아무것도 없다”고 대답하였다. 이웃에 가서 빈 그릇을 빌려 오라 하였다. 두 아들과 함께 문을 닫아걸고 그 빈 그릇마다 기름을 부으라고 하였다. 더 이상 부을 그릇이 없게 그릇마다 가득가득 기름이 넘쳐 났다. 엘리사는 “그 기름을 팔아서 네 두 아들과 함께 생활하라”고 축복해 주었다. 

 

하나님은 엘리야를 사렙 땅에 보내셔서 희망이 없이 애통하며 살아가던 홀로 된 여인에게 하나님 안에서 살아가는 자의 희망을 선물해 주셨다. 마지막 한 조각 떡을 구워 먹고 죽음을 기다리려던 불쌍한 어머니와 아들에게 대기근의 삼년 육개월 동안 가루 독에 가루가 마르지 않고 기름병에 기름이 떨어지지 않게 해 주셨다. 

 

하나님은 “죽으면 죽으리이다” 하고 금식을 선포하고 동족과 함께 금식을 시작한 에스더와 유대 민족의 애통하는 기도를 들으셨다. 

 

하나님은 눈물의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하여 그의 애통과 슬픔이 헛되지 않게 하셨다. 

 

다윗은 시편 56편 8절에서 “나의 유리함을 주께서 계수하셨사오니 나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 이것이 주의 책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나이까.”라고 고백하였다. 다윗은 시편 6편 6절에서 “내가 탄식함으로 피곤하여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 내 요를 적시나이다.”라고 고백하였다. 맞다. 부끄럽고 숨기고 싶은 죄와 허물이 많았던 다윗이지만 그는 회개한 후에 하나님 앞에서 눈물의 사람, 애통의 사람으로 살아갔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위로는 다윗을 성경 역사에 존귀하게 하셨다. 

 

하나님은 나병에 들어 고통당하며 애통하던 아람 나라의 나아만 장군을 겸손하게 하셔서 완전히 고침을 받는 은혜를 위로로 누리게 하셨다. 하나님은 교만하던 나아만 장군을 겸손하게 만드셨다. 그리고 하나님의 위로를 자기 나라 백성들에게 간증하는 주인공이 되게 해 주셨다. 

 

우리는 바사 즉 페르시아 나라의 수산 성에서 나라를 통치하던 아닥사스다 왕 곁에서 술 맡은 관원으로 있던 느헤미야를 안다. 어느 날 그는 형제 하나니를 통해서 예루살렘의 폐허의 소식을 접하였다. 그날 이후 눈물과 금식과 통곡의 사람으로 지내던 느헤미야의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은 그를 예루살렘에 보내셨다. 그리고 주전 444년,  52일만에 150년간 폐허의 도성으로 있던 예루살렘의 무너진 성곽을 중건하게 하셨다. 12년 동안 녹을 받지 않는 존경받는 총독이 되게 하셨다. 에스라를 앞장 세우고 언약의 말씀을 회복하는 말씀과 기도 운동에 앞장 서게 하였다. 

 

하나님은 애통하는 자의 눈물을 보고 계신다. 하나님은 울고 있는 자의 눈물을 외면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하나님 안에서 울고 슬퍼하며 애통하는 개인과 가정과 나라와 민족을 버리지 않으시다. 그리고 하나님의 위로를 복으로 영원히 누리게 해 주시는 사랑의 아버지이시다. 주님의 위로가 날마다 새롭게 경험되기를 축원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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