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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령이 가난한 자의 복(마5:1-12) 20220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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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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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2-02-21 01:22 조회 6,124 댓글 0
 

                      심령이 가난한 자의 복(마5:1-12)        2022. 2. 20

 

 

오늘부터 팔 주 동안 주일마다 팔복(八福)을 묵상할 것이다. 4월 둘째 주일인 종려주일에까지 이어질 것이다. 마태복음 5-7장을 산상수훈(山上垂訓)이라 한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갈릴리 호수 부근의 산에 올라가 제자들과 군중들에게 교훈하신 설교의 내용을 담고 있다. 

 

산상수훈은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집대성한 복음서의 대헌장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한 신자의 삶이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답하게 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팔복을 비롯한 산상수훈의 교훈은 기독교인들뿐만 아니라 일반 세상 사람들에게도 널리 알리진 내용이 적지 않다. 모세 때에 말씀하신 계명과 율례와 법도의 중심이 십계명이라면 팔복의 말씀은 예수께서 산 위에서 말씀하셨다고 전해지는 산상수훈의 핵심 내용을 담고 있다.  

 

팔복의 내용은 현실적이며 동시에 종말적이고 영원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그 하나하나의 내용은 이 땅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한 성도들이 평생 그리고 장차 영원히 누리고 맛보게 될 복과 그 영원한 상급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약속해 주고 있다. 

 

항상 본문을 세 가지의 주제와 내용으로 관찰하여 묵상해 오고는 했는데 이번의 팔복 말씀 묵상은 매주 한 가지씩의 주제에 집중하여 은혜를 나누게 될 것이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마 5:3)

 

<공동번역성경>과 <현대인의 성경>은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라고 번역하였다. 영어 NIV에서는 “Blessed are the poor in spirit, for theirs is the kingdom of heaven.”이라고 하였다. 

 

예수는 이 땅에 천국을 선포하기 위해서 보냄을 받으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마태복음 4장 17절에 보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고 하셨다. 이는 세례 요한도 마찬가지였다. 마태복음 3장 2절에 보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고 하였다. 

 

그렇다. 세례 요한이나 예수 그리스도는 지옥과 심판에 대한 경고보다도 천국 즉 하나님의 나라를 향한 소망과 구원의 길을 선포하기 위해서 이 땅에 보냄을 받으신 것이다. 

 

같은 팔복을 담고 있는 누가복음 6장 20절에 보면 “너희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라”고 되어 있다. “아니,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니 이게 무슨 말씀일까” 하고 질문하게 된다. 

 

여기 ‘가난한 자’란 헬라어로 ‘프토코이(πτωχοὶ)’라는 단어인데 “스스로의 힘으로 의식주를 해결하기 어려운 자”를 일컫는 표현이다. 그냥 먹을 것이 좀 부족하고 살림살이가 빈약한 정도가 아니라 먹고 마시고 입고 살아가는 그 모든 것이 누군가의 도움이 없이는 하루도 버티고 살 수 없고 한 끼도 연명할 수 없는 절대 빈곤의 상태를 일컫는 말이다. 가난이란 절대 의존의 상태를 의미한다. 시편 37편 5절에 보면 “네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를 의지하면 그가 이루시고”라는 말씀이 있다. 여기 ‘그를 의지하면’이란 상태가 가난의 상태이다. 하나님을 절대 의존하는 상태가 심령의 가난 즉 마음의 가난이다. 잠언 16장 20절에 보면 “삼가 말씀에 주의하는 자는 좋은 것을 얻나니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라고 하였다. 맞다.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의 상태가 심령이 가난한 자의 모습이다. 

 

혹시 우리 중에 절대적인 빈곤과 굶주림과 가난을 겪어 본 이가 있는가. 유엔은 ‘지속 가능한 발전 목표 보고서'(The Sustainable Development Goals Report) 2019년 판에서 영양 결핍에 시달리는 전 세계 인구가 2017년 기준으로만 보아도 약 8억 2,100만 명에 달한다고 추산했다. 매년 굶주리는 인구의 수는 2,000만명 가까이 늘어나고 있다. 전 세계의 8억 명 이상이 음식을 제대로 먹지 못해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다. 아프리카 사하라 이남 지역엔 극단적인 빈곤에 처해 있는 4억 명 이상의 사람들이 살고 있다. 특히 굶주림으로 인한 영양 부족은 어린이에게서 심각하게 나타났다.

 

 

5살 미만의 어린이들 중에서 다섯 명 중의 한 명 꼴로 영양이 결핍되어 성장 저해를 겪고 있다. 충분하게 못 먹고 있어서 못 자라고 있다는 말이다. 아프리카 사하라 이남 지역은 영양 결핍 인구가 가장 많은 동시에 극단적인 빈곤에 시달리는 전 세계 인구 비중도 가장 높았다. 극단적 빈곤 인구는 약 7억 3,600만 명인데 4억 명 이상이 사하라 이남에 몰려있다. 유엔은 극단적인 빈곤을 2030년까지 종식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그러나 유엔은 기아와 빈곤 퇴치 등을 위한 노력이 효과를 발휘하지 못하는 중요한 이유로 기후 변화를 지목했다.

 

이처럼 오늘날과 같은 최첨단 과학 문명을 자랑하는 때에도 세계 처처에는 한 끼의 먹을거리가 없어서 굶어 죽어가는 이들이 부지기수이다. 이는 2천년 전인 예수 그리스도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더 심각했을지도 모른다.그 당시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로마의 지배 아래 지내면서 압제와 수탈을 일삼는 지배 세력의 칼과 창 앞에서 배고프고 가난하며 희망을 찾을 수 없는 무기력한 나날을 보내야했다. 

 

요한복음 4장의 수가성 여인의 운명이 그러하였다. 오죽하면 여섯 번째 남자를 만나서 동거하고 있었겠나. 이는 여성 혼자의 몸으로 세상에서 먹고 살 수 없던 시절에 어느 남자인가를 만나 노예처럼 종속되어 살아가지 않으면 생계를 유지할 수 없던 불운한 시대 상황을 대변하는 내용이다. 그런 여인이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로 달려 들어가서 소리쳐서 외쳤다.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요4:29) 이 여인은 그리스도를 향하여 영혼이 가난한 상태였다. 그래서 예수께 말하였다. “주여 그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으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요4:15)아니 예수께서 그 여인에게 무슨 물을 주신다고 했기에 이런 요청을 한 것일까.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4:13-14) 그렇다. 이 수가성 여인은 예수를 만나 평소에 갖고 있던 심령의 가난한 상태를 진솔하게 말하였다. 그리고 예수께서 하신 말씀에 귀를 기울였고 복음이 깨달아 진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이 깨달아지고 영접될 때에라야 심령의 가난, 마음의 가난이 해결되어지는 것이다. 

 

 

열왕기하 6장 24절 이하에 보면 아람 왕 벤하닷의 군대가 이스라엘에 쳐들어 왔다. 북 왕국 이스라엘의 아합 왕의 아들 여호람이 왕으로 있을 때의 일이다. 수도 사마리아를 포위하였다. 장기화되자 사마리아 성안에는 성 밖에서 조달되어야 하는 식량 유입의 통로가 막히고 말았다. “아람 사람이 사마리아를 에워싸므로 성중이 크게 주려서 나귀 머리 하나에 은 팔십 세겔이요 비둘기 똥 사분의 일 갑에 은 다섯 세겔이라.”(왕하6:25) 심지어는 여인들이 자기 아들을 삶아 먹는 참극이 벌어지기까지 했다. 여인들이 굶어 죽어가면서 “오늘은 네 아들을 삶아 먹고 내일은 내 아들을 내어 놓으리라” 하다가 싸움판이 벌어졌다. 임금 앞에 이 억울함을 호소해도 해결의 길이 없었다. 사마리아 성 안에 굶주림이 찾아오니까 왕이든 신하든 성민이든 너나 할 것 없이 고스란히 성문 안에 갇혀서 굶어 죽을 날만 기다리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여인의 말을 들은 왕은 자기 옷을 찢었다. 성 위로 지나가는 왕의 속살이 백성들에게 보였는데 왕도 속에 베옷을 입고 있었다. 

 

예레미야애가 2장 19에 보면“초저녁에 일어나 부르짖을지어다 네 마음을 주의 얼굴 앞에 물 쏟듯 할지어다 각 길 어귀에서 주려 기진한 네 어린 자녀들의 생명을 위하여 주를 향하여 손을 들지어다 하였도다”라고 하였다. 시대적으로 참담한 굶주림과 가난과 불행의 현장을 묘사한 말씀이다. 

 

요한복음 6장 35절에 보면 예수께서“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라고 초청하셨다. 여기에 소망이 있다. 예수 안에 영원한 대답이 있다. 

 

예수께서는 그냥 가난 정도를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심령의 가난’을 언급하셨다. 심령의 가난이란 무엇인가. 사람이 잘 되고 형통하고 잘 나갈 때에는 자기를 드러내고 누군가가 자기를 알아주기를 바란다. 그래서 교만하고 그래서 우쭐해한다. 그런 이들의 마음은 거만하고 교만하지 가난하지 않다. 마음의 가난이란 주님을 향하여 목마르고 겸손한 상태이다. 

 

모세와 아론을 만난 애굽 왕 바로는 교만하였다. “여호와가 누구이기에 내가 그의 목소리를 듣고 이스라엘을 보내겠느냐 나는 여호와를 알지 못한다”(출5:2)라고 큰 소리쳤다. 그렇지 않나. 고대 사회와 오늘 날이나 하나님을 두려워 하지 않는 권세자들이 얼마나 많은가.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 唯我獨尊)인 자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런 오만하고 어리석고 교만한 이들에게 있어서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심령이 가난한 자의 복”이란 너무나 거리가 먼 남의 나라의 이야기일 뿐이다. 그런 복에는 관심도 없다. 그런 이들에게는 ‘천국’도 저들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남의 나라 이야기일 뿐이다. 

 

그러므로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나는 부족하고 나는 가진 것이 없고 나는 아무 가치도 없으며 나는 무엇을 할 수 있는 아무 능력도 없고 나는 모든 것이 결핍되어 있어서 하나님의 도우심과 돌보심과 공급하심이 아니고는 전혀 세상을 살아갈 수 없는 나약한 존재입니다.”라는 영적인 갈급함의 상태를 말씀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나. 모세 시대 때에 출애굽한 백성들이 어떻게 날마다 먹을 음식과 마실 물을 해결하고 살았나. 광야에서 농사를 했나. 광야에 무슨 생산 시설이 있었나. 광야에서 무슨 경제 활동이 가능했나. 그런데 어떻게 200여만 명이 날마다 무엇을 먹고 살았다. 2,000여만 마리 이상의 양과 염소와 소와 나귀와 약대가 무엇을 먹고 버티며 살 수 있었나.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만나와 메추라기가 아니면 어떻게 버티고 살 수 있었겠나. 하나님이 그 때 그 때마다 반석에서 물이 나오도록 공급해 주시지 않았다면 어떻게 해갈하며 목마름을 해결하며 살았겠나.

 

가나안에 들어가기까지 광야 백성의 음식은 만나와 메추라기였다. 그러므로 광야 백성들은 하나님을 향한 심령의 가난이 아니고는 버틸 수도 없었고 한 순간도 연명할 수가 없었다. 우리가 알지 않는가. 광야 생활 중에 애굽의 고기 가마를 그리워하고 애굽의 그 풍성했던 과일과 채소를 그리워하며 불평하던 이들이 다 어떻게 되었는가. 그렇게 불평 불만하던 이들이 다 어디로 갔는가. 

 

그러므로 ‘심령이 가난하다’는 상태는 절대로 하나님만 의지하고 하나님만 사모하고 하나님을 목말라하고 하나님으로만 대답을 찾으려는 영적인 자세와 태도를 말한다. “하나님 없이도 내가 알아서 잘 벌고 잘 먹고 잘 마시고 잘 누리며 잘 살아간다.”는 의식은 ‘심령이 가난한 자’의 상태가 아니다. 그건 심령이 비만한 상태다. 그건 심령이 심각한 고지혈증에 걸린 상태다. 영적으로 심각하게 중병에 든 상태이다. 

 

예수의 비유 중에 둘째 아들의 비유가 있다. 일찍이 유산을 분배받아서 남의 나라에 가서 허랑방탕하게 지내며 주색잡기를 즐기던 아들 이야기 말이다. 그런데 돈과 재산이란 것이 있을 때 돈이고 있을 때 재산이지 다 없어지고 나면 돈이나 재산은 바람에 먼지가 날아가듯이 사라지는 것이다. 그렇게 주색잡기를 즐기던 이 둘째 아들이 남이 나라에서 거지가 되었다. 빈털터리가 되었다. 남의 나라에서 돼지를 치는 곳에 가서 들판에서 돼지를 치며 지내게 되었다.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도 주는 사람이 없어 죽어 갈 지경이 되었다. 누가복음 15장 11절 이하의 이 내용은 이번 주 목요일 새벽 말씀 분량이다. 빈털털이가 되고 배가 고파지니까 제정신이 들었다. 그래서 이렇게 탄식하게 되었다.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눅15:17-19)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이런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마음, 아버지의 집을 사모하는 마음이 심령이 가난한 상태이다. 

 

<나 주를 멀리 떠났다>라는 273장을 다 같이 부르자. 

 

나 주를 멀리 떠났다 이제 옵니다 나 죄의 길에 시달려 주여 옵니다

나 이제 왔으니 내 집을 찾아주여 나를 받으사 맞아 주소서

 

그 귀한 세월 보내고 이제 옵니다 나 뉘우치는 눈물로 주여 옵니다

나 이제 왔으니 내 집을 찾아주여 나를 받으사 맞아 주소서

 

나 죄에 매여 고달파 이제 옵니다 주 크신 사랑받고자 주여 옵니다

나 이제 왔으니 내 집을 찾아주여 나를 받으사 맞아 주소서

 

이 병든 맘을 고치려 이제 옵니다 큰 힘과 소망 바라고 주여 옵니다

나 이제 왔으니 내 집을 찾아주여 나를 받으사 맞아 주소서

 

나 바랄 것이 무언가 우리 주 예수 날 위해 죽임 당하심 믿고 옵니다

나 이제 왔으니 내 집을 찾아주여 나를 받으사 맞아 주소서

 

심령이 가난해지는 것은 주께로 돌아가는 것이다. 마음이 가난해 지는 것은 하나님을 나의 삶의 주관자로 영접하는 것이다. 심령의 가난이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공급해 주시는 떡을 먹고 살고 주님이 주시는 물을 마시고 영생하는 것이다. 누가복음 15장 14절의 “비로소 궁핍한지라”라는 상태가 바로 심령이 가난한 상태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마19:23)는 말씀이 그런 뜻이다. 부자이기 때문에 천국에 못 들어간다는 말씀이 아니다. 부자이기 때문에 천국에 들어가기 어렵다는 말씀도 아니다. 부자는 하나님보다 자기 재물을 의지할 가능성과 위험이 높은 것을 경고하신 말씀이다. 그렇지 않나. 부자라는 것이 매우 상대적이다. 도대체 얼마를 가졌으면 부자라고 여길까. 누가복음 12장 15절에 보면 예수께서는“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고 하였다. 그렇다. 심령이 가난하지 못한 상태란 탐심에 매여 살고, 탐심에 갇혀 사는 상태이다. 사람이 탐심의 노예가 되면 형제도 몰라보고 부부도 몰라보고 부모 자식의 관계도 금이 가고 깨지고 만다. 그렇지 않나. 우리나라에도 대기업들중에서 부자간에 다투고 형제간에 다투는 기업의 난을 보라.

 

누가복음 11장에 보면 옥에 갇혀 지내던 세례 요한이 세상의 소문을 듣고 있었다. 하루 하루 예수의 소문이 천지에 가득하였다. 세례 요한은 제자들을 보내서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하고 묻게 하였다. 그 때에 예수께서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마11:5)고 대답해 주셨다. 그리고 이어서 하신 말씀이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라는 말씀이시다. 여기서 예수께서 강조하신 말씀이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는 말씀이시다. 

 

그렇다. 맞다. 심령이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되는 것이다. 먹고 마실 것이 없는 이에게 한 덩이의 먹을 떡과 한 바가지의 마실 물이 복음인 것처럼 심령이 가난한 자에게는 복음이 영원한 천국 백성의 양식이요 음료가 된다. 

 

우리나라의 선교 초기 역사가 그러하였다. 135년 전의 구한말 조선은 가난한 이들이 넘쳐 나는 나라였다. 어두웠고 가난했다. 그런 상태의 보릿고개는 1970년대와 1980년대까지 이어졌다. 한문은커녕 한글을 읽지 못하는 이들도 넘쳐 났다. 소위 문맹율이 높던 시대였다. 그런 여건에 이 땅에 와서 활동을 시작한 선교사들이 공로로 배재학당, 경신 학당, 이화 학당, 연희 학당과 같은 서양 학문을 가르치는 학교가 세워졌다. 병원이 세워졌다. 우리나라 젊은이들 중에서 서양 의술을 익힌 의사가 배출되기 시작하였다. 고아와 과부를 돌보는 복지 시설이 늘어났다. 마을마다 생겨난 교회를 중심으로 한글 공부와 영어 공부와 성경 공부가 시작되었다. 한글을 못 읽던 이들이 한글을 배우고 내 손에 한글 성경책을 들고 펼쳐 읽을 수 있는 날이 다가오게 되었다. 

 

복음이 들어오고 그 복음이 받아들여지자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은 어른과 아이와 남녀를 막론하고 그들의 몸과 마음의 가난이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와 평강과 감사와 복으로 채워지기 시작하였다. 이 복음은 한양과 같은 도시나 농촌이나 다 마찬가지였다. 이 복음이 서울, 충청도, 강원도, 경상도, 전라도, 함경도, 평안도, 황해도 심지어는 제주도에까지 불길처럼 번져가기 시작하였다. 

 

옆 마을에 첩을 두고 살며, 겨우 내내 땅문서를 잡혀가며 놀음하고, 길거리마다에서 술에 취해 싸움하고 난장판을 벌이던 모습이 사라지기 시작하였다. 

심령이 가난해지고 나면 자신의 영적 실상을 제대로 발견하게 된다. 이는 마치도 최첨단 의학 기기에 의해서 종합검진을 받고 우리 신체의 구석 구석의 병을 찾아 내고 진료하는 것과 같다. 

 

이사야 64장 6절에 보면 “대저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우리는 다 쇠패함이 잎사귀 같으므로 우리의 죄악이 바람 같이 우리를 몰아 가나이다.”라는 말씀이 있다. 그렇다. 우리 각 사람의 심령이 가난해지고 나면 이 전에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깨달아지지 않던 것들이 깨달아지기 시작한다. 들리지 않던 말씀이 들리기 시작한다. 이전에 주저하고 말하지 못하던 복음을 담대하게 말하게 된다. 

 

누군가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면 사람이 세상을 나약하게 사는 것처럼 비칠 수 있다. 더군다나 요즘처럼 첨단 과학 문명이 발전한 시대에 보이지도 않는 “하나님을 믿는다. 예수를 믿는다. 부활을 믿는다. 천국을 믿는다. 성령의 은혜다” 이런 소리를 하면 좀 어디가 모자라는 사람처럼 보일 수 있다. 현대 과학의 발전이란 것이 기승전결의 대답이 분명한 최첨단 시대 문명인데 “무슨 하나님 하나님 하며 사느냐”고 흉보고 깔보고 무시하고 업신 여길 수 있다. 

 

사십일은 광야에서 금식하신 예수를 마귀가 시험하였다. 돌들로 떡 덩이가 되게 하라고 하였다. 그때 예수께서는 신명기 8장 3절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라는 말씀으로 마귀의 시험을 대적하고 물리치셨다. 맞다. 심령이 가난한 자의 상태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이러한 태도여야 한다.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다. 그것을 시인하는 것이 심령이 가난해지는 상태이다. 인생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것을 깨닫는 것이 심령이 가난해지는 상태이다. 

 

예수는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 이것은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니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그것과 같지 아니하여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요6:54-58)

 

심령이 가난한 자란 이와 같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 설명이 필요 없이 ‘아멘 아멘’으로 믿어지고 깨달아지고 사모하게 되는 자이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만 목마름이 해결되고 배고픔이 해결되는 영혼의 만족과 충만이 늘 계속되는 그것이 심령이 가난한 자가 누리는 복이다. 그것이 천국 생활의 시작이다. 

 

존 맥아더는 그의 책 <팔복>에서 헬라어 ‘프토코스’(πτωχόs)는 “완전한 극빈의 상태 즉 거지의 상태이다. 아무 생활 기반이 없는 상태다. 누군가의 도움이 없이는 생존할 수 없는 상태가 가난한 상태다”라고 설명해 주었다.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는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속을 완전히 비우는 것이다. 그 후에 나머지 복을 채우는 것이다. 심령의 가난은 뒤에 오는 모든 복을 받아 누리는 열쇠이기 때문이다.”라고 설명해 주었다. 

 

심령이 가난한 자가 누리는 복을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씀하고 있나.

 

첫째, 심령이 가난한 자는 자신의 연약한 참모습을 제대로 보게 된다.

 

고린도전서 1장에 보면 사도 바울은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 기록된 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라.”(고전1:26-31)라고 하였다. 

 

무슨 책에 보니까 “사람이 자신은 외롭지 않다고 여기는 것은 자신의 뒷 모습을 스스로 볼 수 없기 때문이다.”라는 표현을 보았다. 무슨 말인가. 사람이 누구나 자신의 실상을 제대로 보지 못한다. 자기의 실상을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착각하며 살아간다. 그러므로 심령이 가난한 자란 자신의 영적 실상을 제대로 보기 시작하는 자이다.

 

둘째, 적은 것에도 감사한다.

셋째, 항상 하나님 앞에서 마음이 겸손해진다.

넷째, 자신이 죄인인 것을 늘 깨닫고 살아간다.

다섯째, 항상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신전 의식을 갖고 살아간다.

여섯째, 어린아이와 같은 순결하고 순순한 마음을 갖고 살아간다.

일곱째, 하나님을 항상 찬양하며 살아간다.

여덟째, 항상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려 한다.

아홉 번째, 날마다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한다.

열 번째, 예수 안에서 항상 위의 것을 찾고 생각하며 살아간다. 

 

다시 읽자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천국이란 헬라어로  ‘바실레이아’(βασιλεία)인데 '다스리다, 통치하다'라는 뜻이다. 하나님의 다스림 가운데 살아가는 상태를 말씀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곳은 그 어디나 하늘 나라인 것이다. 하나님의 통치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것이다. 이것을 깨달아 알고 믿고 누리는 것이 천국 생활의 시작이다. 이런 은혜와 축복을 날마다 누리며 살아가는 천국 백성이 우리 모두 다 될 수 있기를 축원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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