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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자의 온 것은(막10:35-45) 2021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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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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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1-10-27 20:52 조회 4,450 댓글 0
 

인자의 온 것은(막10:35-45)          2021. 10. 17



동서고금의 모든 사람들은 남들보다 높은 지위와 권력을 얻고 싶어한다. 이는 어느 시대나 어느 나라나 다 마찬가지다. 사람들은 남자 여자를 막론하고 남들 위에 군림하고 싶어한다. 남들보다 더 가지고 싶어하고, 남들로부터 대접받는 자리를 차지하려고 한다. 에덴 동산의 아담과 하와를 무너지게 한 뱀의 꾀임도 그러하였다. 하나님이 금하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말고는 에덴 동산의 그 모든 것들은 아담과 하와를 위한 선물이었다. 부족함이 없는 곳이었다. 하나님이 거니시는 동산이었다. 천국이었다. 그런데 그 곳에서 뱀의 꾀임에 빠지고 말았다. 불순종의 결과는 타락으로 이어졌다. 인간의 불행이 시작된 것이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에덴은 하나님과 더불어 그 은혜를 누리는 것으로 족한 축복의 동산이었다. 


심지어는 예수의 제자로 부름을 받아 삼 년 동안 제자로 지낸 야고보와 요한조차도 그랬다. 아마도 야고보와 요한은 장차 때가 되면 예수께서 세상적으로 대단한 지위를 차지할 것으로 예상하였던 것 같다. 왜냐하면 예수는 가시는 곳마다 백성들로부터 인기가 대단하였기 때문이다. 오늘날로 하면 여야를 막론하고 국민으로부터의 지지율이 대단했기 때문이다. 물론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 대 제사장들이야 예수를 늘 못마땅하게 여겼지만 대개의 백성들은 예수를 만나보고 싶어하였고 흠모하고 존경하였다. 왜냐하면 예수는 가시는 곳마다 백성들의 모든 요구를 해결해 주시는 해결사이셨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나. 예수는 가시는 곳마다 온갖 병자들을 고쳐 주셨다. 그 당시에는 귀신들린 사람들이 많았는데 귀신을 내쫓아서 깨끗하게 해 주었다. 심지어는 죽은 자도 살리셨다. 예수는 가시는 곳마다 모든 사람의 필요를 완전하게 채워 주셨다. 벳세다 광야에서 보리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남자만도 오천 명이 넘는 사람들을 배불리 먹게 하는 기적을 베풀었다. 오히려 부스러기만도 열두 광주리가 남을 정도였다. 그날 광야의 백성들은 한결같이 예수를 왕 삼자고 수군대기 시작하였다. 예수는 그들의 하는 말을 못 들은 척하시고 한적한 곳으로 가셔서 기도하셨다. 


야고보와 요한이 “주의 영광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막10:37)라고 요구한 것은 마태복음 20장 20절 이하에 보면 저들의 어머니가 나서서 예수께 요구한 것으로 되어 있다. 세베대의 아내인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는 예수를 낳은 마리아의 친정 자매간이다. 즉 야고보와 요한의 이모이다. 이모가 나서서 예수께 두 아들의 장래를 책임져달라고 부탁한 것이다. 


그 때에 예수께서 교훈하신 내용이 오늘의 본문이다. 예수께서는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막10:43-44)는 교훈을 가르쳐 주셨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인자가 이 세상에 온 목적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교훈하신 내용이 오늘 본문이다. “인자가 온 것은”이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 땅에 보냄을 받은 목적이 무엇인지를 가르치신 내용이다. 



종의 삶을 살아가기 위하여.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그러나 그는 이 땅에 아버지의 뜻을 온전히 순종하는 삶을 살기 위하여 종처럼 보내심을 받으셨다. 메시아 예언을 담고 있는 이사야 42장 1절에 보면 “내가 붙드는 나의 종”이란 표현이 나온다. 그렇다. 하나님은 예수를 이 땅에 종으로 보내셨다.


‘둘로스’(δοῦλος) 종이란 주인에게 속한 노예이다. 물론 로마 시대에는 종의 신분도 여러 종류였다. 로마 시대에 종의 수가 6,000만명에 이르렀다. 종 중에는 주인의 가정 살림을 도맡아 하는 총무와 같은 종이 있었다. 주인의 수행 비서와 같은 역할을 하는 종도 있었다. 집안에서 음식만 만드는 종도 있었다. 청소하고 정원을 가꾸고 집안의 궂은일들만 하는 종도 있었다.


그러나 그 하는 일, 그 맡은 일이 어떠하든 종의 특징은 주인에게 속한 자라는 점이다. 종에게는 자유가 없다. 종은 자신의 목숨과 시간과 삶 자체가 주인에게 속한 것이다. 하인은 때가 되면 풀려 날 수 있지만 종은 평생 주인과 운명을 같이하는 자이다. 주인이 행복하면 종도 행복하고 주인이 불행하면 종도 불행을 같이 겪게 된다. 이것이 종의 운명이다. 


사도 바울은 자신을 종으로 소개하였다. 로마서 1장 1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이라고 소개하였다. 여기서 사용한 ‘종’이란 단어가 ‘둘로스’즉 노예라는 단어이다. 바울 사도가 자신을 종으로 표현한 것은 자신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받은 사도일 뿐만 아니라 자신의 모든 삶은 예수께 종속된 종의 삶이라는 고백이며 선언이다. ‘둘로스’(δοῦλος)란 ‘데오’(δέω)라는 단어에서 나온 용어인데 ‘데오’라는 말은 “묶다, 족쇄를 채우다”라는 뜻이다. 무슨 말인가. 자유가 없는 존재란 말이다. 


예수의 말씀 중에 “주인이 와서 깨어 있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복이 있으리라”(눅12:37)말씀이 있다. 여기 종이란 주인을 위해서 살아가는 자이다. 종이란 주인이 원하는 바를 하여야만 한다. 마태복음 25장의 달란트의 비유에 등장하는 다섯, 둘, 한 달란트 받은 자들은 다 종이다. 주인이 타국에 가면서 저들에게 달란트를 맡겼다. 어느 날 갑자기 주인이 돌아와서 종들과 결산하는 때가 있었다. 두 종은 칭찬과 상급을 받았고 한 종은 그 한 달란트 조차 빼앗겼다. 주인은 그 한 달란트 받았던 종에 대하여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 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마25:30)고 책망하였다. 


종으로 이 땅에 보내심을 받았던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종으로서 어떤 삶을 사셨는가. 예수의 마지막 기도인 요한복음 17장에 보면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요17:4)라고 기도하고 있다.


그렇다. 예수는 종으로 보냄을 받은 사명을 다 이루셨다. 예수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다 이루셨다. 예수는 십자가를 지고 죄 사함을 위하여 희생제물로 돌아가시는 것이 이 땅에 보냄을 받은 종으로서의 최종 사명이었다. 예수는 그 쓴 잔을 버리고 도망가지 않으셨다. 예수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밤새 기도하셨다. 그리고 십자가의 쓴 잔을 받으심으로 종으로서의 보냄 받은 사명을 온전히 이루셨다. 


예수께서 야고보와 요한에게 말씀하신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막10:38)란 장차 예수께서 짊어지시고 골고다 언덕에 오르실 십자가를 미리 말씀하신 것이다. 고난이 아닌 영광과 권세만을 추구하는 야고보와 요한을 책망하신 말씀이 이 말씀이시다. 야고보와 요한의 이러한 사실을 알고 다른 열 제자가 화를 냈다는 것은 저들의 평소 생각도 같았다는 것을 입증하는 장면이다. 


그리스도인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서의 삶을 살아가는 자들이다. 예수 만나기 전에야 자기 마음대로 살아왔다고 할지라도 예수 만난 후의 삶은 달라야 한다. 성도는 어른이나 아이나 젊은이나 노인이나 남녀를 불문하고 자신의 경험, 지식, 사회적인 지위, 능력, 실력, 배운 것, 가진 것을 주인이 원하시는 데 헌신하고 충성하는 종으로서의 삶을 살아갈 수 있어야만 한다. 



섬기기 위하여.

예수는 이 땅에 섬김을 받으러 오신 것이 아니다. 남들을 섬기기 위해서 보냄을 받은 종이다. 예수는 탄생의 순간으로부터 십자가를 지시기까지의 전 생애가 섬김의 연속이셨다. 예수는 열두 제자를 부르시고 저들과 함께 지내시는 삼년 간 거의 쉼이 없는 나날을 사셨다. 이른 아침부터 예수를 만나려고 찾아오는 이들로 인산인해(人山人海)를 이루었다. 예수께서 어느 성읍에 들어가시든, 혹은 갈릴리 호수 주변의 그 어느 곳을 가시든 예수의 소문을 들은 무리로 말미암아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심지어는 예수가 계신 집의 지붕을 뚫고 중풍병자를 들것째로 달아 내릴 정도였다. 예수는 제시간에 음식을 잡수실 겨를도 없었다. 심지어는 잠이 부족하여 갈릴리를 건너는 배 안에서 뱃고물을 베고 잠이 드실 정도였다. 예수의 하루 하루는 끊임이 없는 섬김의 나날이었다. 


예수는 많은 병자들과 병든 가족들을 데리고 예수를 찾아오는 많은 이웃들 사이에 둘러 쌓여 계셨다. 심지어는 어떤 엄마 아빠들은 자기의 어린아이를 데리고 와서 축복하는 안수 기도를 요청하기도 하였다. 예수는 이 땅에 계신 동안의 마지막 일주일도 그렇게 분주한 하루 하루를 보내셨다. 예수는 기진 맥진하도록 섬기는 종으로서의 삶을 살다가 하나님 아버지께로 돌아가셨다.


의사 중에는 강남의 목 좋은 곳에서 성형외과로 소문나는 이도 적지 않다. 그러나 반면에 사고 환자나 중병에 든 환자를 수술하는 외과 의사들의 모습을 영상으로 대할 때가 있다. 어떤 경우에는 한 환자를 수술하기 위해서 열댓 시간씩 수술을 계속하기도 한다. 심지어는 화장실 출입을 자제하려고 수술이 시작되기 전에는 목이 말라도 물을 마시는 것조차 참는다고 한다.


그 중에 수원 아주대학교 병원 외상 의학과에서 2020년까지 근무한 의사 이국종 교수를 모르는 이들은 거의 없다. 그는 경기남부권역 외상 센터장으로 지내며 닥터 헬기를 타고 한밤 중에라도 사고와 사건 현장으로 날아가고는 했다. 밤을 새워 가며 사고 환자나 응급 환자를 수술하며 생명의 위급한 순간을 다룬다. 


2011년 1월에 대한민국 삼호해운의 삼호주얼리호가 소말리아 해적에게 피랍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석해균 선장은 해적이 쏜 총에 맞아 심각한 부상을 당하였다. 총상을 입은 석해균 선장을 국내로 빨리 이송하는 것은 사활이 달린 큰 관건이었다. 1차적으로 오만 대학병원에서 수술을 받았지만 석 선장은 위중한 상태에 빠졌다. 그 때에 오만에 급파된 이국종 교수는 석해균 선장의 상태를 확인한 후 오만에 두면 사망한다고 판단하고 에어 앰뷸런스를 이용해 한국으로 호송할 것을 적극 주장하였다. 하지만 후송에 이용하려는 에어 앰뷸런스 비행기는 전세비용이 약 40만 달러로 당시 환율로 약 4억 5천만원에 달했다. 긴박한 상황에서 국내 정부 측과 연락이 원활하게 이뤄지지 않자 이국종 교수는 사비라도 낼테니 이송부터 하자고 재촉했다. 에어 엠브런스는 이국종 교수의 이름으로 빌리되 외교부가 비용 지급 보증을 서는 것으로 상황이 정리되었다. 결국 석해균 선장을 한국으로 이송한 후 이국종 교수의 집도로 수술이 성공적으로 진행되었고 사경을 헤매던 석해균 선장은 새 생명을 얻게 되었다. 


마가복음 9장에 보면 예수의 제자들이 서로 누가 크냐고 쟁론한 적이 있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예수께서 가버나움의 어느 집에 계실 때에 제자들에게 물으셨다. “너희가 길에서 서로 토론한 것이 무엇이냐”그 때 제자들은 서로 잠잠하였다. 예수께서 열두 제자들을 불러 앉히고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 사람의 끝이 되며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막9:35) 


스코틀랜드 어느 가정의 표어 가운데 


“섬기기 위하여 구원받았다”

(Saved to serve)


란 말이 전해 온다. 섬김을 모르는 삶은 구원의 감격이 없는 삶이다.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누군가를 섬기기 위해서이다. 우리가 고침을 받은 것은 누군가를 섬기기 위해서이다. 우리가 건강한 것은 누군가를 섬기기 위해서이다. 내가 학식이 있고 내게 재물이 있는 것도 누군가를 섬기기 위해서이다. 섬기는 것이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사람의 사명이다. 어떤 이는 “인생은 테니스 경기와 같다. 서브(serve)를 잘 하지 않고는 이길 수 없다”고 말했다. 정말 그렇다. 서브는 경기의 승패를 결정적으로 좌우하는 테크닉이다. 서브 하나로 많은 점수를 거둬들이는 경우도 많다. 인생도 마찬가지로 서브를 잘 해야 한다. 인생은 섬김을 잘 해야 한다. 잘 섬기는 사람이 잘 사는 사람이다. 잘 섬기는 사람이 이기는 사람이다. 인생의 성패는 얼마나 서브를 잘 했느냐에 달려 있다. 예수는 그의 마지막 순간, 그의 생명이 다하기까지 이 땅의 인류를 구원으로 인도하기 위하여 섬기는 삶을 살았다. 예수는 십자기를 지기 전날 밤에도 제자들이 발을 일일이 씻겨 주신 후에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요13:15)고 교훈해 주셨다. 


세계 2차대전 때 미국의 많은 젊은이들이 전쟁터의 이슬로 사라졌다. 병력이 부족하자 각 지방의 젊은 청년들은 영장을 받은 후 큰 도시로 집결해서 기차를 타고 훈련소로 실려 갔다. 당시 국민의 마음을 안정시키기 위하여 젊은이들을 태운 기차는 주로 밤늦게 떠났다. 그러므로 워싱턴에도 밤마다 유니온 기차 정거장에는 수백 명의 젊은이들이 몰려들었다. 전쟁터로 떠나는 저들을 시민들이 자원하여 나와서 도와주고 격려하고 있었다. 그때 시민 가운데 밤늦게까지 휠체어에 몸을 실은 채로 뜨거운 코코아 잔을 쟁반에 들고 젊은이들에게 봉사하는 한 사람이 있었다. 어떤 때는 임시로 마련된 주방에 드나들면서 코코아를 친히 끓이기도 했다. 어느 젊은이 하나가 불 빛 아래 그 노인을 자세히 살펴보니 프랭크린 루즈벨트 대통령과 너무나도 닮아 보였다. "혹시 루즈벨트 대통령이 아니십니까?”프랭크린 루즈벨트 대통령은 육체의 불편을 무릅쓰고 밤마다 기차 정거장에 나와 기차로 떠나는 청년들에게 뜨거운 코코아를 들고 다니며 전쟁터를 향하는 저들을 섬겼다. 대통령이 친히 기차 정거장에 나와서 따라주는 코코아를 마신 그 당시 미국 청년들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 듯했다. 이처럼 섬기는 일에는 위아래가 없는 법이다. 예수께서는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는 것이다.”라고 말씀해 주셨다. 



자기 목숨을 대속물(代贖物)로 주기 위하여.

45절에 보면 ‘대속물’이란 단어를 보게 된다. ‘뤼트론’( λύτρον)이란 이 단어의 원 뜻은 “노예를 해방시켜 주기 위하여 지불하는 댓가 즉 보석금”의 의미이다. 노예를 자유하게 하기 위해서 치루는 값이 ‘대속물’이란 뜻이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많은 사람의 대속물이 되셨다. 모든 사람의 대속물이 아니시다. 여기서 말씀하신 많은 사람이란 열방의 모든 백성들 중에서 인종, 국적, 피부색, 계급, 신분, 연령, 성별에 상관 없이 예수를 구세주로 믿고 영접하는 수많은 믿음의 사람들을 일컫는 신학적인 표현이다. 그렇지 않나. 이 세상의 그 모든사람들이 구원 받는게 아니다. 한 어머니가 낳은 형제자매라도 각 사람의 신앙 고백에 의해서 구원 받는 것이다. 날마다 한 지붕 아래서 한 가족으로 한솥밥을 먹는 가족이라도 구원은 각자의 믿음으로 받는 것이다. 이것이 대속이다. 죄 사함은 각자의 몫이다. 노예의 해방이 각자에게 주어지는 복인 것처럼 말이다. 디모데전서 2장 6절에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대속물로 주셨으니 기약이 이르러 주신 증거니라”고 하였다. 여기에 ‘대속물’이란 용어를 사도 바울도 사용하였다. 사도 바울이 말하는 ‘모든 사람’이란 예수를 대속의 주로 믿고 영접하는 각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 


아내의 믿음으로 구원받을 남편이 없다. 남편의 기도로 구원받을 아내도 없다. 부모의 믿음으로 구원받을 자녀도 없고 자녀의 믿음으로 구원 받을 부모도 없다. 분명한 것은 대속의 은혜를 입는 구원의 은혜를 각 사람의 신앙 고백을 통해서 값없이 주어지는 선물이다. 


요즘은 어디 모임에 가도 함께 식사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 어디 감리사 모임에 급하게 가느라 새벽 기도 후에 콩나물국밥을 먹는데 옆 테이블에 이른 새벽에 등산 가는 세 중년 남자들이 있었다. ‘기분 좋아지는 것 주세요’하고 메뉴를 주문하기에 무슨 말인가 하고 바라봤더니 손님을 맞이하는 분이 알아듣고 ‘처음처럼’이란 소주를 한 병 갖다 주는 것을 보았다. 


아마 이른 새벽부터 소주를 마시면 기분이 좋아지나 보다. 그러나 대속의 은혜를 입는 것은 그런 것과 비교할 수 없는 영원한 은혜요, 영원한 행복이요, 영원한 기쁨이요, 영원한 즐거움이요, 영원한 만족이요, 영원히 기분 좋아지는 일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나를 죄와 사망에서 자유하게 하시는 대속물이신 것을 차근차근 가족과 주변 사람들에게 설명해 주어서 전도의 열매를 맺는 가을이 되기를 소원한다. 예수는 요한 복음 10장의 선한 목자의 비유에서 이렇게 교훈하셨다.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요10:11)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대속물로 죽임을 당하신 것은 이 땅 위의 모든 백성들 중에서 그가 누구신지를 깨닫고 믿는 자들에게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이 되는 권세를 선물로 주시기 위함이다. 


네덜란드 출신의 천재로 불리던 한 소년이 있었다. 그의 인생은 항상 오르막길이었다. 그는 주위의 기대대로 예일 대학을 거쳐서 하버드대학의 교수가 됐다. 그가 집필한 30여 권의 책은 모두 베스트 셀러가 됐다. 뛰어난 영성가였던 그는 상담, 심리, 신학, 사회학 분야의 저명한 학자로 자리매김하였다. 그를 만나기 위해 수많은 사람이 모여들었다. 그를 강연회 연사로 초대하고 싶어하는 대 기업과 기관이 넘쳐 났다. 그의 인생은 오직 성공과 성취로 장식됐다. 어느 날 그는 폭탄선언을 했다. “나는 교수직을 내려놓습니다. 이제 캐나다의 데이 브레이크라는 정박아 시설에 들어가 새로운 인생을 살아갈 것입니다.” 사람들이 그에게 물었다. “그 많은 명예와 보수를 왜 버리려 하는가. 차라리 후학을 양성하라.” 그의 대답은 “오르막길 인생은 성공과 칭찬에 가려 예수가 보이지 않았다. 이제 낮은 곳에서 예수를 만날 것이다.”


그는 인생의 말년을 캐나다 토론토 라르쉬 데이브레이크 정박아시설에서 장애인들의 용변, 식사, 목욕 등의 일을 하며 10여 년을 지내다 64살에 세상을 떠났다. 그는 <상처입은 치유자>의 저자로 잘 알려진 헨리 나우웬(Henri Jozef Machiel Nouwen, 1932-1996)이다. 그는 인생의 오르막길에서는 예수가 보이지 않았다고 고백하였다. 고통과 눈물의 돌자갈이 깔린 저 낮은 곳에서 예수의 마음을 삶으로 깨달아 알 게 되었다. 


예수는 인류를 위하여 자신의 몸을 십자가의 대속물로 주셨다. 내가 세상을 떠나면 내 주변의 그 누군가가 내 손 때 뭍은 삶의 흔적들을 정리하기 전에 이 세상 나그네 인생길에서 예수처럼 대속물과 같은 삶을 사는 길이 무엇인지 깨닫고 실천하며 섬기는 하나님이 부르심에 합당하게 종과 같은 삶을 살아가는 칭찬받을 만한 청지기들이 다 되어야만 할 것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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