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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에 그리고 이제는(엡2:11-22) 20210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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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관리자
작성일 21-07-27 22:18 조회 5,444 댓글 0
 

 그 때에 그리고 이제는(엡2:11-22)         2021. 7. 18



사도 바울이 13편의 그의 편지마다에서 강조하는 바는 분명하다. 예수 믿기 이전의 나의 모습과 예수를 믿기 시작한 이후의 모습이 확연이 달라져야 한다는 것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살아가는 나 자신과 그 이전의 나의 삶의 내용이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을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2장에서는 ‘그 때에’ 즉 예수 만나기 이전의 과거의 내 모습과 ‘이제는’ 즉 예수 만나 예수 안에서 살아가는 나의 삶의 구체적인 전반이 달라야 하는 것을 명백하게 강조하고 있다. 


바울은 로마서 1장에서 예수 믿기 이전, 하나님을 만나기 이전의 인간의 실상을 이렇게 고발한다.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그들이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나님께서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런 일을 행하는 자들을 옳다 하느니라.”(롬1:29-32)


그 앞에는 성적 타락과 동성애의 심각성에 대하여 거론한 내용이 훨씬 긴 내용으로 나온다. 그 때에는 그러하던 인생이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라면 새 사람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새 삶을 살아가야 한다. 그런 강조가 오늘의 본문이다. 


사도 바울의 모든 서신들이 다 그러하지만 특히 에베소서는 대단히 논리적인 내용으로 되어 있다. 로마서가 그러한 것처럼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복음의 정수, 복음의 핵심적인 내용을 자세하게 언급하고 있다.


택하심이란 무엇인가.

예정하심이란 무엇인가.

속량 곧 죄사함이란 무엇인가.

진리의 말씀인 구원의 복음이란 무엇인가.

부르심의 소망이란 무엇인가.

성도된 기업의 영광이란 무엇인가.

예수를 믿는 다는 것은 무엇인가.

예수의 사랑 안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나.

믿는 자에게 베푸시는 성령의 능력이란 어떤 것인가.

왜 예수는 교회의 머리인가.

복음이란 무엇인가. 

교회란 무엇인가. 


하는 질문에 대답을 찾을 수 있는 내용들이 에베소서에 가득 차 있다.


에베소서 1장 마지막 절인 23절에 보면 사도 바울은 “교회는 예수의 몸이다.”라고 선포하였다. 오늘 에베소서 2장의 후반부 내용을 먼저 읽었다. 에베소서 2장 1절을 먼저 보자.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라고 하였다. 자, 여기 이 말씀 가운데 보면, 


예수가 누구신가.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신 일이 무엇인가.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


라는 질문 앞에 답하는 내용을 접하게 된다.

그렇다. 예수는 아담과 하와의 범죄로 말미암아 그 허물과 죄로 인하여 죽었던 인간을 십자가의 피로 대속하셨다. 예수를 믿는 자들을 죄와 사망에서 건지셔서 새 생명을 얻게 하셨다. 영원한 생명 즉 영생을 선물로 받게 하셨다. 인간은 죄와 허물로 죽었던 존재이다. 그런데 하나님 아버지께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구주로 보내주셨다.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는 이들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 


인간은 스스로 자신의 생명의 주인이 아니다. 내가 살아 있는 동안에 내 안에서 내가 살아가는 것 뿐이다. 내 목숨이 끝나면 끝이다. 내 생명의 시작과 나중에 하나님의 손길 안에 있다. 이것을 깨달아 아는 것이 복음이며 은혜이다. 더 이상 내가 내 목숨을 어떻게 하지 못한다. 그렇지 않나. 우리가 이 세상에 엄마 아빠를 통해서 태어난다. 그러나 엄격하며 말하면 엄마나 아빠가 나를 낳은 것이 아니다. 내 생명의 부여자는 하나님 아버지이시다. 그 어떤 환경에서 태어날 지라도 내 생명의 주인은 하나님 아버지이시다. 


갓 태어난 아기가 엄마의 젖을 먹고 자라난다. 물론 태어나자마자 버려지는 아기도 없지는 않지만 말이다. 엄마는 온갖 귀한 것을 정성스럽게 먹여서 태어난 아기를 양육한다. 요즘이야 이유식도 다양하고 좋은 것이 많지만 과거에는 그렇지 못하였다. 그러나 엄마의 정성 가운데 한 아기가 자라나서 장성한 청년이 된다. 생각하여 보아라. 엄마가 내 생명의 주인인가. 아니면 나 자신이 내 생명의 주인인가. 내 몸이 살아 있는 동안에 내가 내 몸의 주인 행세를 하며 살아가는 것 뿐이다. 


내가 병들어 보아라. 중환자실에 실려 들어 가 보아라. 현대 의학으로도 쉽게 고치지 못하는 중병에 걸려 보아라. 내가 나 자신에 대하여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호흡, 맥박 이 모든 것이 살아 있다는 생명의 상징이라면 그런 것을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호흡 할 수 있으니 호흡하며 살고, 맥박이 계속 뛰니까 생명을 유지하며 살아가는 것 뿐이다. 그렇지 않나. 이것이 생명의 신비이다. 그런데 그 살아 있다는 상태를 성경은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라고 선포하고 있는 것이다.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인간의 실상을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시제로 나누어 분석하고 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의 제목을 “그 때에 그리고 이제는”이라고 정하였다. 


너희는 그 때에.

여기서 말씀하는 ‘그 때에’(at thet time)라는 시간은 예수를 만나기 이전의 상태를 말한다. 예수 모르고 살던 때를 말한다. 사실은 에베소서 2장 전체의 내용을 동시에 아울러서 묵상해야 문맥이 통한다. 에베소서 2장 2절과 3절에 보면 ‘그 때에’ 그리고 ‘전에는’이라는 과거를 언급하고 있다. 그러면 예수를 모르고 살던 과거에는 내 삶의 모습이 어떠하였다는 말인가. 바울이 언급하는 ‘그 때에’ 혹은 ‘전에는’이라는 과거의 모습이란 구원 받기 이전의 모습을 말하는 것이다. 예수 밖에서 자기 맘대로 살던 때의 모습을 말하는 것이다. 


에베소서 2장 11-12절에서 언급하는 그 때의 모습이란 무엇인가.


육체로는 이방인이었다.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를 받은 무리로부터 “할례를 받지 않은 무리라”고 칭함을 받는 자들이었다.

그리스도 밖에 있었다.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었다.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었다. 

세상에서 소망이 없던 자들이었다.

세상에서 하나님도 없는 자들이었다.


이것을 사도 바울은 2장 앞 부분에서 이미 소상하게 언급한 바 있다.


이 세상 풍조를 따랐다.(2절)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다.(2절)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냈다.(3절)

육체와 마음에 원하는 것을 하였다.(3절)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다.(3절)

허물과 죄로 인하여 죽은 상태였다.(1절, 5절)


이것은 구원받기 이전의 상태이다. 그리스도 밖에서 살던 때의 모습이다.



이제는 너희가

과거에는 허물과 죄로 죽은 자였으나 이제는 예수 안에서 새생명을 얻은 자가 성도이다. 에베소서 2장 13절의 ‘이제는’(but now)이라는 이 표현이 감격스러운 표현이다. 여기서 언급하는 ‘이제는’이라는 것은 “교회를 다니느냐, 세례를 받았느냐, 십일조 생활을 하느냐, 속회에서 믿는 자들과 교제를 하느냐,  교회의 무슨 부서에서 무슨 봉사 활동을 하느냐, 교회를 얼마나 오래도록 다녔느냐” 그런 정도의 차원을 뛰어넘는 것이다. 


성도는 예수 안에서 거듭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서 성령의 충만함으로 부르심에 합당한 사명자의 삶을 살아 갈 수 있어야만 한다. 이것을 사도 바울은 13절 이하에서 조목 조목 자세하게 언급하고 있다.


성도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진 자들이다.

예수는 믿는 자의 화평이시다.

예수는 둘로 하나를 만드셨다.

예수는 원수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셨다.

예수는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다. 

하나님은 둘로 예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셨다.

하나님은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이 되게 하셔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신다.

하나님은 원수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셨다. 

예수는 이 세상에 오셔서 어디에 사는 그 누구에게나 평안을 전하셨다.

예수는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가는 권세를 얻게 하려 하신다. 


예수를 나의 구주로 영접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나면 내 안의 모든 것이 변하기 시작한다. 아니, 온전히 변화된다. “거듭난다. 새사람이 된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 성령을 받는다”는 것은 그런 것을 말씀하는 것이다. 


우리가 부르는 찬송 중에 < 예수 앞에 나오면>이란 찬송이 있다. 

287장 찬송가이다. 


예수 앞에 나오면 죄 사함 받으며 주의 품에 안기어 편히 쉬리라

우리 주만 믿으며 모두 구원 얻으며 영생 복락 면류관  확실히 받겠네

예수 앞에 나와서 은총을 받으며 맘에 기쁨 넘치어 감사하리라

예수 앞에 설 때에 흰 옷을 입으며 밝고 빛난 내 집에 길이 살리라


오늘 설교 후에 부를 436장 찬송가 <나 이제 주님의 새 생명 얻은 몸>의 1절 가사를 보라.


나 이제 주님의 새 생명 얻은 몸 옛것은 지나고 새사람이로다

그 생명 내 맘에 강같이 흐르고 그 사랑 내게서 해 같이 빛난다

영생을 누리며 주 안에 살리라 오늘도 내일도 주 함께 살리라


백범(白凡) 김구(金九, 1876~1949)를 모르는 이들은 우리 나라에 단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1876년 7월 11일에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났다. 개명하기 이전의 그의 이름은 창수(昌洙)이다. 15살 때 한학자 정문재에게서 한학을 공부하였다. 17살 때에 동학(東學)에 입교하여 접주(接主)가 되었다. 해주에서 동학농민운동을 지휘하다가 일본군에게 쫓겨서 만주로 피신하여 김이언(金利彦)이 이끄는 의병단에 가입하였다. 이듬해 귀국하여 일본인에게 시해당한 명성황후(明成皇后)의 원수를 갚겠다고 나섰다. 그 후에 일본군 중위 쓰치다(土田壤亮)를 살해하고 체포되어 사형이 확정되었다. 그러나 고종의 특사로 감형되었다. 복역 중이던 1898년에 탈옥하여 충남 공주 마곡사(麻谷寺)에서 원종(圓宗)이란 법명을 받고 승려 생활도 하였다. 그러나 그 이듬해에 다시 법복을 벗고 환속(還俗)하였다. 27살 때인 1903년에 기독교인이 되었다. 황해도 안악의 양산학교 교사로 있다가 이듬해 신민회(新民會)에 참가하였다.  1911년 105인 사건으로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을 받았다. 종신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 감형으로 출옥하였다.


이후 양산학교 교장이었던 김홍량(金鴻亮)의 동산평 농장 농감(農監)이 되어 농촌 계몽 운동을 벌였다. 1919년 3 ․ 1운동에 앞장서다가 중국 상하이(上海)로 망명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 조직에 참여하였다. 경무국장(警務局長)․ 내무총장․ 국무령(國務領)을 역임하였다. 1928년 이시영(李始榮), 이동녕(李東寧) 등과 한국독립당을 조직하고 총재가 되었다.


독립운동가로서 김구 말고 기독교 신자로서의 김구는 어떤 인물인가. 그의 소원은 “첫째도 대한민국의 자주독립이요, 둘째도 자주독립이요, 셋째도 자주독립”이었다. 백범 김구는 27살에 기독교에 귀의한 후에 도산 안창호 선생의 여동생인 안신호 여사와 함께 교회학교 교사를 했다. 세월이 흘러 백범 김구 선생이 상해 임시정부의 주석이 됐을 때도 꾸준히 교회와 교회학교를 운영했다. 당시 교회학교 교사 중에는 장준하 선생도 있었다. 백범 김구는 해방을 맞은 대한민국에 귀국한 후에도 매일 새벽 6시면 자신의 사저인 경교장에서 새벽 예배를 드렸다. 남대문교회의 담임 목사였던 김치선(金致善, 1899-1968) 목사는 새벽 5시 남대문교회 새벽예배를 마치고 나서 매주 한 번씩 주 중에 김구의 경교장에 방문해서 김구와 함께 새벽 예배를 드렸다. 이처럼 김치선 목사와 백범 김구는 각별한 사이였다. 백범 김구는 주일마다 남대문교회에서 예배를 드렸다.

백범 김구는 주일 성수를 소중히 여겼다. 1948년에 평양을 방문하였다. 김일성과의 통일 논의를 위해서였다. 그 때에도 주일이면 어김없이 공산당 치하였던 평양에서 예배를 드렸다. 백범 김구는“평양에서 편안한 여생을 보장하겠다”는 김일성의 제안을 한 마디로 거절하였다. 반면에“조만식 장로를 석방하여 함께 남한으로 가게 해 달라”고 김일성에게 청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김구 선생은 그의 어머니와 아내 최준례 권사도 물론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다. 백범은 여수 애양원을 방문한 바 있다.‘사랑의 원자탄’으로 알려진 손양원 목사와도 친분이 두터웠다. 1949년 한 일간지에 기고한 글에서 백범은 “손양원 목사의 온정과 자비심에 탄복하고 경의를 표한다”고 썼다.


1949년 6월 26일, 73살 때에 경교장에서 육군 소위 안두희가 쏜 총에 암살되었다. 그는 암살당하기 한 달 전에 "동족상잔의 유혈과 국토양단의 위기를 방지하고 자주·민주의 원칙하에 조국의 완전독립을 쟁취하려는 나의 주장과 태도는 변함이 없다”는 분명한 의지를 밝힌 바 있다. 그는 눈을 감기 직전까지 “통일된 자주적 민족국가수립”이 그의 최대의 목표요 새벽 마다의 기도 제목이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하나님과 화평을 이룬 하나님의 자녀라면 어떤 삶을 살아가야 할까. 19절 이하에 보면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살아가는 성도의 모습에 대하여 자세하게 언급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는’을 영어 NIV에서는 ‘Consequently’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결과적으로’라는 뜻이다. 그러면 예수 안에 사는 하나님의 자녀는 결과적으로 어떤 삶을 살아야 한다는 강조인가. 


예수를 믿는 성도는 더 이상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다.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다. 

하나님의 권속(眷屬)이다. 여기 ‘권속’이란 ‘한 가족’이란 뜻이다.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이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성도들을 위하여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다.

성도들은 예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간다. 

성도는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어야 한다.

성도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는 자들이다.

맞다. 성도의 신앙은 한 번 받은 은혜로 완성 되는 것이 아니다. 점점 주 안에서 거룩해져 가고, 점점 주 안에서 온전해져 가고, 점점 주 안에서 영광스러워 가는 것이다. 어느 노래의 가사처럼 “우리는 늙어가는 것이 아니라 점점 익어 가는 것이다.”


이것을 존 웨슬리는 성화(聖化)라고 하였다. 점점 주 안에서 거룩해져 가는 것이다. 온유하고 겸손하신 예수의 성품을 닮아 가는 것이다.



1899년 김치선 목사는 함경남도 서호진에서 3남2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고기잡이배 40여 척을 거느린 부호였다. 1913년에 일어난 폭풍으로 모든 배를 잃었다. 죽은 선원들 보상금을 정리하고 빈털터리가 되었다.  상심한 할아버지는 가족을 이끌고 영흥으로 떠났다. 하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고 집을 떠난 지 3년 만인 1916년에 세상을 떠나고 만다. 아버지 김영준은 가족들을 이끌고 장진으로 가서 화전민 생활을 시작했다. 어려서부터 영특한 김치선을  서당 선생 김응보 옹이 가르치겠다고 나섰다. 김치선은 나중에 캐 나다 장로교 선교부의 파송으로 함흥에 와 있던 리터 영, 우리 이름 영재형(榮在馨,Lither Lisger Young, ?-1949) 선교사를 만나게 되었다. 그가 나온 영생 중고등학교 기숙사에 불량한 학생들이 불을 질렀다. 김치선은 이불에 물을 적셔 몸에 휘 감고 들어가서 영재형 선교사를 구출해 내었다. 


리터 영 선교사는 김치선의 나중을 주목하였다. 믿음으로 장성한 김치선은 리터  영 선교사의 도움으로 미국 유학 길이 열렸다. 연희 전문학교를 마치고 미국 웨스트 민스터, 달라스 신학교에서 한국인 최초로 1933년에 신학으로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일본에서 목회하다 한국에 돌아 온 가는 남대문 교회의 담임 목사가 되었다. 그 당시는 전국 각처에서 서울 역에 내리면 누구나 남대문 교회를 한 번 쯤은 가게 되어 있었다. 큰 부흥을 이루었다. 그 당시 서울에서 가장 큰 교회, 가장 신도가 많이 모이는 교회였다. 


평양 저자거리의 유명한 깡패 김익두가 예수 만나고 나니 그 시대에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는 존귀한 복음의 삶을 살다가 하나님 앞으로 간 것처럼말이다. 4세기의 탕자 어거스틴이 10대에 동거를 시작하고 아들을 낳고, 마니교라는 이단에 심취해 살았다. 그런 그가 변화되고 새 사람되고 나니 기도교 2000년 역사에 길이 길이 그 이름이 거론되는 예수의 사람, 하나님의 사람으로 기억되게 되지 않나.


창세기의 아브라함도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기 이전에는 우상을 섬기던 데라의 아들, 우상 만들어 팔던 데라의 아들일 뿐이었다. 그런 그가 하나님의 부르심과 언약 안에 살아가기 시작할 때에 이삭을 낳고, 이삭이 야곱을 낳는 언약 신앙의 선조가 된 것이다. 


살인자 모세가 하나님 안에서 부르심에 응답할 때에 연세 80에 동족을 애굽에서 구원하는 선봉장이 되었다. 언약의 말씀, 계명의 말씀을 받고, 하나님의 성막을 건설하는 언약 민족의 중심 인물로 쓰임 받았다. 


부하 장수 우리아의 아내는 전쟁 중에 범하고 그의 남편 우리아를 전쟁이 최 전선에서 죽음에 이르게 한 간악한 다윗인데 하나님 안에서 다윗이 새 사람이 되었다. 하나님은 그를 버리지 않으셨다. 그 때의 다윗이 더 이상 아니었다. 하나님은 변화된 다윗을 “내 마음에 드는 자”라고 여기며 하나님의 하시려는 뜻을 그를 통하여 이루셨다. 


무더운 여름, 다시 시작된 비대면의 예배 환경 중에서도 영상 예배를 등한히 하지 말고 말씀과 기도와 복음 전파와 선행과 예배를 소중히 여기는 나날이 되기를 축원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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