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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문    |  지성래목사  | 설교문
부활 복음의 증인으로서의 동행(눅24:44-49) 20210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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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1-01-25 20:53 조회 5,152 댓글 0
 

              부활 복음의 증인으로서의 동행(눅24:44-49)    2021. 1. 24



동행한다는 것은 희로애락을 함께 하는 것이다. 마음이 서로 잘 통하는 사람과는 천리만리 동행할 수 있다. 그러나 불편한 사람과는 십리를 함께 가는 일도 고통이다. 불편하기 그지없는 일이다. 그러나 서로 사랑하는 사람과는 한 달을 함께 여행하고 평생을 함께 살아도 아쉬움이 남는다. 이념이 같고 사상이 같고 신념이 같고 추구하는 바가 같고 믿는 바가 같은 이들과는 그 어떤 고난과 시련이라도 극복하며 평생을 동행하길 원한다. 그 반대로 어떤 경우에는 곁에 있는 가까운 사람에게 배신을 당하는 경우도 있다. 또 어떤 경우는 자신이 어떤 경우에 누군가를 배반하고 관계를 악화시키고 오랜 우정을 끊어 버리는 경우도 없지 않다. 예수의 12제자들 중에서는 가롯 유다가 그런 경우이다.  


신앙생활이란 주님과 동행하는 생활이다. 주님이 내 안에, 내가 주님 안에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생활이다. 요한 계시록의 라오디게아 교회에 편지한 말씀 중에서 요한 계시록 3장 20절에 보면 이렇게 말씀하셨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그렇다. 주님과 동행하기 위해서는 내가 스스로 나의 마음 문을 열고 주님을 나의 마음에 모셔 들여야 한다. 그래야 주님과 더불어 먹고 마시는 일상의 동행이 시작된다. 주님의 은혜와 십자가 사랑을 깨닫고 나면 순교자의 길이라도 마다하지 않는다. 부활 복음 전파를 위해서 주의 성령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가기를 기꺼워하는 것이 믿음의 사람이 모습이다.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면 항상 마음에서 그 상대방에 대한 생각이 떠나질 않는다. 우리가 어떤 취미나 습관에 빠지면 밤낮 없이 그것에 마음과 생각을 쏟게 된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이나 좋아하는 취미생활을 위해서 시간, 재물, 돈 등 그 무엇이든 무한 투자하여도 아까운 생각이 들지 않는다. 왜냐하면 사랑하니까. 사람을 사랑해 보라. 일을 사랑해 보라. 스포츠나 게임이나 그 어떤 오락에 빠져 보라. 그것에 시간과 돈과 온갖 정열을 쏟아붓게 마련이다. 

정선 카지노에 도박하러 가는 이들은 서울에서 택시를 타고 “어서 빨리 갑시다. 더 속도를 내세요”라고 재촉한다고 한다. 어서 빨리 가서 정선 카지노의 돈을 다 내 주머니에 긁어 담을 의욕에 가득해서 달려가는 것이다. 


최근에 뉴스거리가 된 제주신화월드 안에 있는 랜딩카지노 145억 6,000만원 횡령 사건를 보라. 이런 뉴스가 전해지고 나면 범행에 연루된 카지노 전문모집인인 에이전트를 향한 궁금증이 커지게 마련이다. 일확천금을 꿈꾸는 이들의 배후에는 언제나 검은 손이 들락거리게 마련이다. 세상에는 어두운 일, 불의한 일에 관련된 이들과 동행하는 이들이 있다. 불의한 일에 가담하는 사람들 곁에서 동행하는 척하며 쉬운 방법으로 빨대를 꽂고 피를 빨아먹는 것을 전업처럼 하는 이들도 없지 않다. 


그 반대로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가치를 깨닫고 나면 삶의 중심에 늘 하나님이 동행하시는 삶을 추구하게 될 것이다. 

예수와 함께하는 일상의 가치를 만족으로 여기며 생활하게 될 것이다. 그것이 동행이며 사도 바울은 이런 모습을 “주 안에서”라는 표현으로 강조하였다. 주님과 동행하는 것은 일상생활을 “주 안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하나님은 누구에게나 함께 하신다. 누구에게나 동행하신다. 문제는 동행하시는 하나님의 임재를 나 스스로 깨닫지 못하는 것 뿐이다. 산상 수훈에 소개된 예수의 교훈처럼 하나님은 악인과 선인에게 골고루 햇빛을 비추신다.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골고루 비를 내리신다. 그러나 악인이나 불의한 자는 햇빛을 받으면서도 하나님의 은혜를 모른다. 불의한 자는 비를 내려주시는 하나님의 공급에 대하여 감사할 줄을 모른다. 그래서 형제 아벨에 대해서도 가인처럼 처세하고, 그래서 사울 임금처럼 어리석어 지는 것이다. 


지난 삼 주 동안 연속하여 묵상한 누가복음 24장의 예수 부활 이후의 내용을 좀 더 묵상하길 원한다. 오늘 본문으로 읽은 내용은 예수께서 부활 하신 한 밤 중에 있었던 장면이다. 베드로를 비롯한 11제자가 한 곳에 숨어 있었다. 거기에는 그들 말고도 몇 사람들이 더 같이 숨어 있었다. 누가복음 24장 33절이 그런 내용을 언급하고 있다. 그곳을 찾아간 글로바와 또 다른 제자 한 사람도 그 곳에 같이 있던 그 밤 중에 예수께서 그 곳에 찾아 가셔서 하신 말씀이 본문 내용이다. 


성경을 깨닫게 하는 열리어진 마음.

예수께서는 부활 하신 날 오후 내내 글로바와 또 다른 한 제자에게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들의 말씀에 전해진 메시야 예언에 관한 내용을 소상하게 가르쳐 주셨다. 그 밤에 예수께서는 11제자들이 숨어 있던 곳에 찾아 가셔서 다시 또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들의 글에 담긴 메시야 예언과 뿐만 아니라 시편에 기록된 장차 오실 하나님의 아들에 관한 내용을 자세하게 풀어 설명해 주셨다. 


문제는 성경 말씀을 얼마나 많이 아느냐 혹은 얼마나 자주 접하느냐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성경 말씀이 깨달아져야 한다. 깨달아져야 믿게 되고 믿게 되어야 신앙생활이 건강해지는 법이다. 교회에 열심히 다니다가 별 것 아닌 것 같고 인생이 풀리는 것도 없고 더 어려움만 계속되는 것 같고 그러니까 “에이 다 그만두고 절에나 다녀 볼까” 하는 식으로 믿어서는 않된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음 문이 열리기를 기도해야 한다. 주께서 나를 불쌍히 여기셔서 나의 마음 문을 열어 주시길 간구해야 한다. 주님이 아무리 나의 마음 문 밖에서 문을 두드리셔도 내가 마음 문을 꼭꼭 닫아 걸고 있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나. 그러므로 나의 완악한 마음, 나의 고집스러운 마음, 나의 어리석은 마음의 문이 열려지도록 주님의 도우심을 기도하여야 한다.


우리는 내 고집, 내 주장, 내 경험, 내 편견, 내 어리석음에 갇혀서 내 마음 문을 닫고 산다. 세상에 내가 왕이다. 세상에 내가 최고다. 내가 나의 주인이 되어 세상을 이렇게도 살아가고 저렇게도 살아가려 한다. 그런 마음가짐이나 그런 삶의 태도를 갖고는 예수께서 나의 마음에 들어오실 수가 없다. 내 닫혀진 마음 문을 주님도 여실 수가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스스로 무장을 해제하고 주님께서 내 마음 문을 열어 주시기를 간구하여야 한다. 이것이 은혜 생활의 시작이다.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내가 이래 보여도 내가 누군데, 내가 어느 학교 출신인데, 내가 이래 보여도 사회생활을 어떻게 해 왔는데 하며 자신의 과거와 공로를 추켜세우려 한다. 자신의 학력, 경력, 사회 신분, 지위, 재력, 경제력, 명예 등을 은근히 자랑하며 자기 자신의 성(城)을 쌓고 살아가려 한다. 그런 상태에서는 하나님께서 그의 마음에 발 들이실 곳이 없게 된다. 

그러나 물론 주님이 한 사람의 영혼을 불쌍히 여기셔서 찾아 오시기로 작정하시면 그 어떤 누구의 마음에라도 찾아 오 실 수 있으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중보하며 기도하여야 한다. 주님이 사랑하는 나의 가족, 나의 남편, 나의 아내, 나의 부모, 나의 자녀, 나의 형제자매의 마음 문을 열어 주시고 그 마음에 찾아와 주시기를 기도하여야 한다. 


사도행전 10장에서 만나는 이달리아의 백부장 고넬료가 그런 사람이었다. 그는 경건하고 온 집안과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주변 백성들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오후 세시 경에 기도하는데 환상을 보았다. 천사가 나타나서 말했다. 하나님은 천사를 통해서 고넬료의 구제생활과 기도 생활을 칭찬해 주셨다. 그리고 욥바에 머물며 선교 여정 중인 베드로 사도를 초청하라고 명하셨다. 고넬료는 집안의 하인 둘과 경건한 사람 하나를 대동해서 가이사랴에서 욥바까지 심부름을 보냈다. 베드로 사도를 모셔 오기 위한 것이었다. 고넬료는 친척과 친구들을 불로 모으고 베드로 사도를 기다렸다. 다음 날 도착한 베드로 사도를 모시고 말씀 부흥 성회를 열었다. 베드로 사도의 말씀 부흥 성회 첫 내용은 이런 것이었다. 사도행전 10장 34절이 그 내용이다.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아니하시고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다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


 이렇게 시작해서 예수께서 고난을 당하시고 십자가 죽임을 당하신 내용과 부활 승천하시기 까지의 내용을 자세하게 전하였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예수의 이름을 힙입어 죄 사함을 받는다”(행10:43)는 내용까지 소상하게 전파하였다. 그 때에 말씀을 듣고 있던 그들에게 성령이 임하였다. 베드로는 성령이 임한 저들에게 물 세례도 베풀었다. 그러니까 고넬료와 그의 가족과 친척과 친구들은 성령 세례를 먼저 받고 물 세례를 나중 받은 역사적인 주인공들이 되었다. 성령 충만을 받고 물로 세례를 받은 저들은 베드로 사도에게 며칠간 더 머물면서 말씀을 더 전파해 주기를 간청하였다. 


요즘과 같은 코로나19 바이러스에 대한 두려움에 갇혀 지내는 이 때에 영상으로 접하는 예배의 찬송, 기도, 말씀 묵상 등을 주변과 세계 열방에 있는 가족, 자녀, 친구, 친척들에게 전해서 오히려 이러한 때를 나의 사랑하는 이들의 마음 문이 열리고 주의 말씀이 깨달아지는 기회로 삼아 나가야 할 것이다. 




복음 전파의 사명.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예수께서는 갈릴리의 몇몇 영혼만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이 땅에 보냄 받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시다. 예수는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주의 구원의 부활 복음이 전파되게 하시려고 이 땅에 오셨다.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그 밤 중에 11제자들 곁에 찾아 가셔서 이 말씀을 강조하셨다. 그리스도의 고난, 부활, 죄사함, 회개의 복음이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되게 하는 일에 너희가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고 사명을 고취하셨다. 


성도는 부르심과 사명으로 살아가는 자들이어야 한다. 우리의 직업이 다 다르고 생업의 분야가 다 다르고 삶의 차원과 여건이 다 다를지라도 우리 각 사람을 향한 부르심과 분부하신 사명만은 한가지이다. 이 부활 복음이 땅 끝의 모든 족속에게 전파되게 하는 일에 증인으로서의 삶을 살기를 기대하시는 것이다. 


우리 교회가 속회를 강조하고 매주 속회에 모이기를 강조하는 바탕이 이것이다. 우리는 다 선교사들처럼 열방에 직접 나가서 사역하지는 못한다. 그러나 매주 언라인으로라도 서로 문안하고 서로 찬양하고 서로 말씀을 접하고 서로 삶을 나누며 적은 액수의 헌금이지만 일정하게 모아서 선교지에 보내는 이 일이 결코 작은 일이 아니다.


전쟁은 최 전선에서 싸우는 군대의 전투력도 중요하지만 보급로가 차단되면 안된다. 식량과 무기와 탄약이 줄기차게 보급되어야  전쟁이 계속될 수 있는 것이다. 우리교회의 속별 후원금은 별것 아닐 수 있다. 그러나 그렇게 모이고 쌓여서 백도 되고 천도 되고 만도 되는 것이다. 모래가 쌓여서 산이 되는 것이고 시냇 물이 모여서 강도 되고 바다를 이루는 것이다. 작은 것을 결코 작게 여기면 않된다. 금은 작아도 금이다. 눈에 보일까 말까 한 금가루가 모여서 금괘 덩어리를 이루는 것이다. 우리의 사역은 금보다 더 귀한 믿음 사역을 계속해 가는 것이다. 


비행기가 발명되기 이전에 조선 땅을 찾아 태평양을 배를 타고 건너 온 선교사들에 의해서 이 땅에 복음 전파의 문이 열렸다. 대원군 집권 3년인 1866년 병인년은 우리나라 교회 역사상 가장 다사다난(多事多難)했던 한 해였다. 새해 벽두부터 나라 안의 천주교인들을 무차별적으로 학살한 병인박해가 일어났다. 곧이어 병인양요로 이어지는 대원군의 쇄국정책은 극에 달했다. 같은 해 8월, 평양의 대동강에 미국의 무장상선 제너럴셔먼호가 나타났다. 이 배에는 스코틀랜드 성서공회의 후원을 받은 로버트 토마스(Robert J. Thomas, 1840-1866)라는 선교사가 한국말을 배워서 통역관으로 동승하고 있었다. 그가 바로 한국 개신교의 첫 순교의 피를 흘린 주인공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선교사인 영국의 로버트 토마스 선교사는 영국 런던선교회를 통해 중국으로 파송 받았다. 그 후 중국선교를 포기하고 있는데 그에게 조선 선교라는 새로운 길이 열렸다. 그는 한국의 백령도 근처 섬에 1차로 선교여행을 와서 한문으로 된 성경 200권을 주민들에게 전하며 복음을 전했다. 다시 중국으로 돌아 갔다가 1866년 무장상선인 제너럴셔먼호를 타고 평양근처 대동강변에 왔다. 그러나 조선군과의 무력충돌이 생겨 토마스 선교사는 체포되었다. 한 권이라도 더 조선에 성경을 보급하기 위해 그는 조선군에게 잡힐 때까지 사력을 다해 강가로 성경책을 던졌다. 그는 즉시 생포되어 칼로 순교를 당했다. 대동강변에서 그의 시신은 불태워졌다. 그를 죽인 사람은 조선군 군인 박춘권 이라는 자였다. 박춘권이 칼을 뽑아들자 토마스 선교사는 급히 자기 품에 들렸던 성경책을 꺼내어 웃으며서 그에게 내밀었고 그리고 두손을 모아 짧은 한국말로 마지막 기도를 올렸다.


“오 하나님. 이 사람이 자기의 하는 일을 모르니 이 사람의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조선 땅에 뿌린 복음의 씨앗이 헛되지 않게 하소서. 내 영혼을 받아주소서.”


1840년, 영국 하노버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난 로버트 토마스는 어려서부터 선교사에 대한 소망이 남달랐다. 그는 23살에 런던 뉴칼리지 대학을 졸업한 다음 해인 24살에 목사 안수를 받았다. 런던선교회의 파송을 받아 꿈에도 그리던 중국에 도착하게 되었다. 하지만 선교지인 중국에서 신혼 부부였던 그의 부인이 죽는 슬픔과 선임 선교사와의 갈등으로 한때 선교사역을 포기하려 하였다. 하지만 세관에서 통역 일을 하던 그에게 조선 선교라는 새로운 길이 열렸다.


당시 로버트 토마스 선교사의 죽음을 직접 목격한 최치량이라는 13세 살 된 소년이 로버트 토마스 선교사가 강변에 던져 놓은 성경 3권을 주워 집으로 가져갔다. 그런데 서양인의 물건을 함부로 가져온 것이 무서워서 다시 그 책을 평양성 대동문을 지키던 박영식에게 갖다 주었다. 그런데 박영식은 종이가 귀하던 시절에 한문성경책 3권을 집으로 가져다가 뜯어 벽지로 사용했다. 

그리고 얼마 후 벽지로 사용된 성경을 읽다가 그가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했다. 이후 13살이었던 최치량이 성인이 되어서 박영식의 집을 사들여 주막으로 썼다. 주막이란 것이 나그네가 잠도 자고 음식도 먹던 당시의 여관이다. 


평양선교가 제대로 시작된 것이 로버트 토마스 선교사가 죽은 지 27년 후인 1893인데 이때 마펫 선교사가 평양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갔다가 최치량의 주막에 머물게 되었다. 마펫 선교사는 성경으로 주막의 벽지가 되어있는 것을 보고 놀랐다. 그리고 이것을 계기로 주인 최치량과 많은 대화를 나누게 되고 최치량도 예수를 믿고 그 다음 해인 1894년에 세례를 받았다. 그리고 그 곳이 평양 최초의 널다리골 예배당이 되었다. 널다리골 예배당은 우리가 아는 1907년 평양대부흥 운동의 중심에 있던 장대현 교회의 전신이다. 그 장대현 교회의 길선주 장로는 후에 평양 신학교를 제 1기생으로 졸업하고 조선 최초의 장로교 목사가 되었다. 더 놀라운 것은 어느 날 널다리골 예배당 근처에 살고 있던 노인이 마펫 선교사를 찾아와서 울면서 죄를 고백하고 예수를 믿게 되었다. 그는 바로 30년 전에 로버트 토마스를 대동강변에서 칼로 쳐 죽인 박춘권 이었다. 지난 30년간 박춘권은 서양인을 죽이고 죄의식 가운데 살고 있었는데 몇 년전 부터 널다리골 예배당에서 새벽마다, 주일마다 울리는 종소리를 들을 때마다 마음이 괴로워 견딜 수가 없었다고 고백하였다. 


박춘권은 자신이 예수를 믿은 후 그가 간직하고 있던 한문성경책 1권을 그의 조카 이영태에게 건네 주었다. 이영태 역시 그 성경을 읽다가 예수를 믿게 되는데 훗날 이영태는 평양숭실학교를 졸업한 후 레이놀즈 선교사를 도와 한글성경번역에 큰 공헌을 한 인물이다. 


우리는 누구나가 디 엘 무디나 빌리 그레함 목사와 같은 세계적인 복음 전파의 거장들이 되기를 원할 수 있다. 그러나 주님이 기대하시는 것은 주님의 말씀 앞에 열려진 마음을 갖고 이 부활 복음이 내 곁의 그 누군가의 마음 속에 복음의 씨앗으로 자리 잡게 하는 일에 증인이 되는 삶을 살기를 원하신다. 


지금 집 안에서, 내 무릎 위에서 자라나는 내 어린 자녀들에게 그런 복음의 증거가 잠잠히 계속하여 일어나기를 기도하며 양육하자. 모세도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에게서는 불행한 시대에 태어난 어린 아들이었다. 다윗도 가난하고 힘겹고 블레셋의 잦은 침략으로 불안하기 그지없던 시대에 베들레헴에서 태어나 자라나던 어린 소년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그의 마음에 심겨진 이새의 아들다운 하나님 신앙이 블레셋의 적장 골리앗 앞에서도 주저하지 않는 담대한 신앙으로 드러나지 않았는가. 부모 잃찍 잃은 에스더를 역사적인 인물로 성장시킨 배후에는 늘 하나님과 동행하던 그의 사촌 오빠 모르드개가 있었다. 




​약속하신 성령의 능력.

하나님과 동행하고, 예수와 동행하는 길은 성령을 받는 길이다. 성령 받아야 한다. 성령이 임해야 한다. 세상에는 성령 받은 사람과 성령 받지 못한 사람 이렇게 두 종류의 사람들로 구분할 수 있다. 


 A. W. 토저 목사의 여려 권이 설교집 중에 <임재 체험>이란 책이 있다. 그는 책에서 사도행전 4장 23절의 앞부분을 인용하며 동행하는 믿음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다. “사도들이 놓이매 그 동료에게 가서”라는 이 본문을 중심으로 10여 페이지의 묵상을 이어가고 있다. 여기서 말씀하는 사도들이란 감옥에 갇혔다가 풀려난 베드로와 요한 사도를 말한다. 사도행전 4장에는 예수를 죽일 당시의 그 세력들이 다 같이 한 자리에 모여서 베드로와 요한을 위협하고 감옥에 가두는 내용이 실려 있다. 이는 사도행전 3장의 성전 미문 앞의 걷지 못하는 걸인을 걷게 한 기적 사건으로 예수의 소문과 제자들의 소문이 점점 예루살렘에 퍼져 가고 있었다. 예수의 부활 복음의 증거는 예루살렘 안에 약 오천 명의 남자들이 예수 부활을 믿고 전하는 강력한 신도들이 되었다. 안나스와 그 당시 현직 대제사장이었던 가야바와 요한, 알렉산더와 및 대제사장의 문중이 다 참여한 재판이 열렸다. 관리와 장로와 서기관들도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그 때 저들이“너희가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느냐”고 심문하였다. 그 때에 성령 충만한 베드로가 담대하게 대답하였다.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행4:10-12) 


저들은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고 협박하였다. 그 때에 베드로와 요한은 다시 담대하게 대답하였다.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행4:19-20)


더 이상 베드로와 요한 사도를 심문한 이유를 찾지 못한 저들은 다시 한번 위협하고 풀어 주었다. 그 때에 베드로와 요한은 풀려나자 마자 저들이 풀려나기를 기도하던 동료들에게 간 것이다. 


토저 목사는 그의 책에서 질문한다. “우리에게 선택의 자유가 있을 때에 우리가 어디로 가느냐”그것이 나의 솔직한 모습이라는 것이다. 주일에 맹장염이 심해서 응급실로 실려 가고 수술대에 오를 수도 있다. 그런 경우는 나의 선택이 아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반대로 주일에 비대면 예배와 영상 예배를 핑계 삼아 골프장으로 향할 수도 있다. 이는 시간, 재물, 돈, 경험 그 모든 것 앞에서 누구나 그러하다. 성령의 능력을 사모하며 내 힘과 내 지혜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매사에 범사에 성령의 능력과 성령의 도우심을 의지하는 은혜의 사람들이 되어야만 할 것이다. 


새해를 맞아 오늘 처음으로 예배당에 와서 예배하는 성도들이 적지 않다. 올 한해 바이러스의 전염에 대한 두려움 앞에서도 지혜롭고 슬기롭게 굳굳한 믿음의 사람답게 자신의 신앙을 잘 지켜서 동행하시는 하나님, 동행하시는 예수님의 은혜가 성령의 충만함으로 이어지기를 축원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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