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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문    |  지성래목사  | 설교문
동행하시는 예수님의 사람들(눅24:13-17, 25-31) 20210103 신년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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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1-01-25 20:51 조회 5,188 댓글 0
 
             동행하시는 예수님의 사람들(눅24:13-17, 25-31)   2021. 1. 3 신년주일

기독교 신앙의 바탕은 동행하는 것이다. 더 엄밀하게 말하면 그 분이 내게 다가 오셔서 동행해 주시는 것이다. 이것을 기독교 용어로는 ‘임재’라고 한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찾아 오셨다. 그를 부르셨다. 그에게 일방적으로 말씀하셨다. 아브람이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그에게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였기 때문에 그가 믿음의 조상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는 에녹, 노아 모두 마찬가지이다. 물론 하나님을 따르려는 인간의 의지가 있어야 하지만 하나님의 절대적인 부르심과 성신의 임재가 먼저다. 그렇게 쓰임 받은 인물이 창세기의 요셉이다. 사사기의 기드온이다. 사사요 제사장이요 선지자로 부름 받고 존귀하게 쓰임 받은 사무엘이다. 다윗도 하나님이 사무엘을 그의 집에 보내셔서 그에게 기름을 붓게 하셨다. 하나님의 일방적인 선택이다. 그 후에 다윗은 우여곡절을 많이 겪었다. 그러나 그 모든 연단과 시련의 배후에는 동행하시는 하나님의 임재가 늘 있었다. 

신앙생활은 그래야 한다. 내가 하나님을 믿어 보려고 발버둥치는 것으로는 아쉬움이 남는다. 하나님이 나에게 찾아 오셔서 동행해 주셔야 한다. 이것이 은혜요 은총이요 긍휼히 여기심이요 복 주심이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들도 다 마찬가지이다. 예수께서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 등 제자 한 사람, 한 사람을 부르셔서 제자 삼으신 것이다. 주님이 부르셔서 늘 함께 데리고 다니신 것이다. 동행해 주신 것이다. 나중에도 성령을 부어 주셔서 사명의 사도가 되게 해 주신 것이다. 이는 사도 바울도 마찬가지이다. 사울의 본 모습으로는 도저히 예수를 주로 섬길만한 그릇이 못된다. 그런데 부활 예수께서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박해하느냐”고 물으시며 주의 부활 복음을 이방 땅에 전파할 사도로 쓰시려고 부르신 것이다. 

하나님을 모르던 에녹이 하나님을 만난 이후에 300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다. 창세기 5장 24절에 보면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고 하였다. 에녹이 65살에 낳은 아들이 무드셀라이다. 무두셀라를 낳은 그 때에 어떤 체험이 있었기에 에녹이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사람이 되었는지는 알 길이 없다. 
에녹의 부인의 믿음은 어떠하였는지도 알 수가 없다. 왜냐하면 그런 내용을 성경은 전혀 언급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분명한 것은 에녹이 무드셀라를 낳던 그 해에 하나님의 임재 체험을 하였다는 점이다. 하나님이 그를 부르셨다. 그 이후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하나님이 그를 하나님의 나라로 데려 가시기 까지 늘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다. 그의 아들 무드셀라는 969세를 살았다. 성경에 기록된 인류의 나이 중에 가장 장수한 주인공이다. 그러나 성경 어디를 보아도 무드셀라가 31년 모자라는 천년 세월을 살면서 아버지 에녹처럼 하나님과 동행하였다는 내용을 찾아 볼 수가 없다. 

이런 내용을 묵상하다 보면 신앙생활이란 지극히 개인적이다. 아버지의 신앙을 아들이 이어 받으리라는 보장이 없다. 어머니의 믿음을 딸이 잘 이어 가리라는 그 어떤 보장도 없다. 

에녹은 히브리서 11장의 믿음장에 기록된 믿음의 선진들 중의 한 사람이다. 히브리서 11장 5절에 보면 에녹의 신앙의 모습을 “믿음으로 에녹은....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는 증거를 받았느니라”고 교훈하고 있다. 그렇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신앙생활이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생활이어야 한다.

히브리서 11장 6절에 보면,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고 하였다. 

자, 그러면 지난 송구영신 예배시간에 잠시 묵상한대로 하나님과 동행하고,예수님과 동행하고, 성령님과 동행하는 신앙생활이 지속되려면 어떤 신앙생활을 하여야할까.


말씀의 동행.
신앙생활을 하는 증거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는 생활이다. “성경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의 책이다.”그러므로 하나님과 동행하고, 예수님과 동행하고, 성령님이 내게 임재하셔서 떠나지 아니하시는 동행의 은혜를 체험하며 살아가려면 당연히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대하는 생활을 지속하여야만 한다. 

그렇지 않나. 예수께서 부활하신 그 날 오후에 글로바와 또 다른 한 제자가 함께 엠마오로 가고 있었다. 누가복음 24장 17절에 보면 두 제자는 슬픈 빛을 띠고 있었다. 소문에 전해들은 대로 예수의 시체는 보이지 않고 빈 무덤 뿐이었다. 빈 무덤을 지키고 있던 두 천사가 “예수는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하고 말해 주었다. 이 소문은 그날 새벽에 예수의 무덤을 찾아 갔던 막달라 마리아를 비롯한 몇몇 여인들의 입을 통해서 오전 나절에 여기 저기 퍼져 나갔다.

이름이 기록되지 않은 한 제자와 글로바는 70명의 예수 제자 중의 두 사람이라고 한다. 저들은 그 며칠 동안 예루살렘에서 예수께 일어난 사건을 서로 이야기하면서 엠마오로 향하고 있었다. 엠마오라는 마을은 예루살렘에서 이십 오리 즉 10km정도 떨어진 시골 마을이었다. 

그런 저들 곁에 다가서신 예수께서 저들과 함께 걸어가고 계셨다. 그러나 그들은 눈이 가리어져서 자기들 곁에 함께 걷고 계신 분이 부활하신 예수님이신 것을 몰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께서 먼저 그들에게 말을 거셨다. 

“너희가 길 가면서 서로 주고 받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

낯 설은 누군가가 말을 걸어 올 때에 걷던 걸음을 잠시 멈추어 선 저들 두 사람의 얼굴 표정에 슬픈 빛이 역력하였다. 

오늘 날 우리들은 어떠한가. 믿음으로 사노라 하는 우리들은 어떠하냐는 말씀이다. 이미 그 날 새벽에 예수께서 부활하셨지만 글로바와 그와 동행하던 저들 두 제자의 마음에 슬픔이 가득해 있었다. 이는 예수의 빈 무덤을 찾아 갔던 여인들도 마찬가지이고 어디론가 도망가서 숨어 있던 베드로를 비롯한 예수의 11제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예수께서 부활하신 그날 저들을 꽉 누르고 있는 감정은 “근심(눅24:4) 두려움(눅24:5), 슬픔(눅24:17), 놀라움과 무서움(눅24:37)”등이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이다. 근심, 걱정, 염려, 불안, 초조, 두려움, 슬픈, 무서움, 우울, 낙심 등의 어두운 감정들이 거미줄처럼 우리 영혼을 얽어 매고 있다. 

생각하여 보라. 우리의 신앙생활은 부활에 근거하는 것이다. 이점이 불교와 다르다. 유교나 이슬람이나 힌두교와도 비교할 수 없다. 우리의 신앙의 바탕은 사람답게 사는 법을 가르치는 “윤리, 도덕, 철학, 신념 혹은 그 어떤 옳다 하는 가르침”의 차원을 뛰어넘는 것이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임당하고 부활 승천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기독교 신앙의 바탕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다. 이걸 믿을 수 없었고 받아 들일 수 없었던 바리새파 율법학자였던 젊은 사울이 앞장서서 예수 믿는 이들을 박해하였다. 예수의 부활을 믿고 전하는 자들을 색출해서 박멸해 버리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다.

예수의 부활은 그 은혜를 믿는 자들에게 죄 사함의 은총을 선물해 주신다. 예수님은 아담과 하와에게서 비롯된 죄에 빠진 인간을 죄로부터 구원하여 죄 사함 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는 구원과 영생의 문을 활짝 열어 놓으셨다. 오라버니 나사로의 죽음을 슬퍼하고 있던 그의 누이 동생 마르다에게 예수께서 해 주신 말씀이 무엇인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나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11:25-26)

맞다. 우리가 믿는 신앙의 바탕은 부활이요 영생이다. 어둠을 이기는 빛이요 인간의 그 어떤 권세라도 뛰어 넘는 초월적이고 무한하신 하나님의 능력이다. 

예수 스스로 다시 살아난 것이 아니다.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이 예수를 어두운 무덤에서 일으켜 세우신 것이다. 생명의 근본이신 하나님이 예수를 부활의 첫 열매 되게 하신 것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다  죽음을 두려워 한다. 이 세상에 죽음을 환영하는 이들은 단 한 사람도 없다. 만약에 그런 사람이 있다면 좀 정상이 아닌 사람일 뿐이다. 그러나 그 죽음이란 것을 피하여 살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단 한 사람도 없다.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은 누구나 반드시 죽는다. 그러나 그 죽음의 순간이 언제 내게 찾아 오느냐하는 것이 차이일 뿐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죽음 앞에 슬퍼하기도하고 괴로워하기도 하고 당황하기도 하고 걱정하기도 하고 불안해 하기도 하고 두려움과 무서운 생각에 갇혀서 살아간다. 

그렇지 않나. 우리가 늘 보이지 않는 공기를 마스크를 쓰고라도 호흡하며 살아가듯이 삶과 죽음은 바로 나의 곁에 있다. 내 곁에 늘 그림자가 따라 다니는 것처럼 죽음과 상관이 없는 생을 사는 이들은 이 세상 그 어디에도 없다. 

중국의 진시황(秦始皇)처럼 불로초(不老草)를 찾아오게 한다고 해서 생로병사(生老病死)의 문제를 해결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지난해 말에 묵상한 베드로후서 3장 8절에 보면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고 하였다. 그렇지 않나. 성도는 주님 안에서 하루를 천년 같이, 천년을 하루 같이 살아가는 영생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이다. 성도가 살아서 주를 믿는 이 은혜는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는 영생하는 자의 부르심과 특권 가운데서 사는 것이다. 

새해가 밝았다. 우리 각 사람의 믿음이 날마다 순간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의 주인공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나. 하나님과 동행하고, 예수님과 동행하고, 성령님과 동행하는 것이 신앙생활이라면 그 열매가 어떠하여야 할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예수님을 기쁘시게 하고, 성령님이 기뻐하시는 신앙생활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어떤 교회는 이 비대면의 코로나 19 바이러스가 계속되는 2021년에 날마다 한 구절씩 성경 말씀 361구절 암송하기 운동을 펼치는 것을 보았다. 잘하는 일이다. 귀한 일이다. 주님이 기뻐하실만한 일이다. 우리 각 사람도 그래야 한다. 날마다 일정한 말씀을 묵상하고 그 말씀을 나의 생활에 구체적으로 적용하며 살아가는 말씀의 동행이 이어져야만 할 것이다.  

누가복음 24장 32절을 보라. 엠마오를 향하던 글로바와 또 다른 한 제자는 예수께서 모세와 모든 선지자들의 말씀을 비롯해서 예수 자신에 관한 메시아 예언의 말씀을 자세하게 풀어 설명해 주실 때에 그들의 마음이 뜨거워지는 은혜를 체험하게 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올 한해 날마다 순간마다 언제 어디서나 주님의 말씀을 가까이 묵상하고 실천해 가는 중에 마음이 뜨거워지는 열정(熱情)의 사람들로 살아 갈 수 있기를 소원한다. 


식탁의 동행.
예수님과 두 제자가 엠마오 마을에 도착할 즈음에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예수는 그 마을에서 묵어가지 않고 가야 할 길이 아직 먼 것처럼 반응하였다. 그러자 글로바와 또 한 제자는 예수께“때가 저물어 가고 날이 이미 기울었는데 이 마을에서 함께 주무시자”고 강권하였다. 두 제자의 제안을 받아 들이신 예수께서 한 집에 들어가셨다. 그들과 함께 식탁에 둘러앉아서 음식을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고 감사 기도를 드리셨다. 그리고 떼어 그들에게 주셨다. 성경의 이런 장면을 묵상하다 보면 예수께서 돌아가시기 전날 밤에 12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만찬을 잡수시던 장면이 생각난다. 

예수는 늘 가시는 곳 마다 만나는 사람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 것을 즐겨 하셨다. 장소와 상대를 차별하지 않으셨다. 그래서 예수를 비난하는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은 예수의 제자들에게 “너희 선생은 어찌하여 늘 먹고 마시느냐”고 비난하였다. 그렇다. 맞다. 예수는 창기나 세리를 구분하지 않으셨다. 누구라도 차등으로 대하지 않으셨다. 모든 각색 병자들을 골고루 고쳐 주셨다. 귀신 들린 자를 만나면 그 귀신을 내어 쫓아서 온전하게, 건강하게 고쳐 주셨다. 예수님은 누구라도 만나 주셨고 누구와도 함께 둘러 앉어 먹고 마시며 하나님의 나라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누셨다. 

예수는 예루살렘에 가실 기회가 되면 베다니의 나사로의 집에서 지내시고 주무시기도 하셨다. 예수는 나사로를 “나의 친구”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는 어느 가정에라도 찾아 들어가셨고 예수와 함께 먹고 마시고 이야기 나누길 원하는 자들을 외면하지 않으셨다. 

예수는 여리고 성의 세리장 삭개오의 집에도 들어가셨다. 그 집에서 묵어 가길 원하셨다. 온 여리고 성민들이 세리장 삭개오를 멀리하고 싫어하였다. 그러나 예수는 달랐다. 예수가 삭개오의 집에 들어가시자 몰려서서 있던 여리고 성민들이 수군대기 시작하였다. 예수가 삭개오의 집에 묵어 가길 원하시자 삭개오의 마음이 움직였다. 삭개오는 자기 집에 들어오신 예수님께 서서 말했다.“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눅19:8) 그 때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눅19:9-10)

신앙 생활은 주 안에서 함께 더불어 먹고 마시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한 낮의 뙤약볕에 지나가는 손님 세 사람을 장막 안에 모셔 들이고 송아지를 잡아 대접하였다. 그들은 그냥 낯 설은 나그네가 아니라 하나님이 보낸 천사들이었다. 저들은 아브라함의 가정을 축복하였다. 일 년 후에 아내 사라에게서 아들 이삭이 태어나리라는 하나님의 축복의 말씀을 전달해 주었다. 

식탁의 은혜가 있다. 세상을 사는 것은 서로 더불어 둘러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고, 생각을 나누고, 마음을 나누고, 소망을 나누고, 정을 나누고, 사랑을 나누는 것이다. 

룻기에 보면 남편을 잃은 세 여인의 이야기가 나온다. 베들레헴에서 모압 땅에 남편 엘리멜렉을 따라서 흉년을 피해 먹고 살아 보겠다고 함께 갔던 그 가정의 남편이 죽었다. 모압 여자를 아내로 맞아 들였던 두 아들 말론과 기룐도 죽었다. 세 여인들만 남았다. 룻은 홀로 이방 땅에 외롭게 남은 시어머니 나오미와 늘 식탁을 함께 하였다. 다른 한 며느리 오르바는 제 동족에게로 가 버렸다. 룻은 늘 시어머니 나오미의 곁을 지켰다. 하나님을 모르던 모압 며느리 룻은“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룻1:16)라고 고백하며 시어머니 나오미와 운명을 같이 하길 원했다. 

그리고 늙은 시어머니 손을 잡고 시댁 나라인 유대 땅 베들레헴으로 찾아 갔다. 먹고 사는 것이 묘연하였다. 수건으로 얼굴을 가린 모압의 홀로된 젊은 여인 룻은 들판에 나가서 농사가 끝난 남의 밭에서 보리 이삭과 밀 이삭을 주워다가 빵을 구웠다. 그것으로 늙어 가시는 시어머니 나오미와 늘 식탁에 마주 앉았다. 그런데 먹고 사는 것이 막연하던 룻에게 하나님의 은총이 임하였다. 그 마을의 넓은 땅을 소유하고 농사하던 대 지주 보아스가 이방 여인 룻에게 마음을 준 것이다. 보아스의 기대는 이루어졌고 모압 출신 젊은 과부 룻은 보아스의 아내가 되었다. 룻은 자기 혼자 시집 가 버리지 않고 불쌍하게 되신 시어머니 나오미를 모시고 보아스의 집에서 함께 살길을 선택하였다. 룻이 보아스를 통해서 나은 아들 오벳은 나오미의 무릎 위에서 커 나갔다. 동네 사람들은 나오미가 오벳을 낳았다고 말할 정도였다. 룻기의 마지막 구절인 4장 22절은 이렇게 끝난다. “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새는 다윗을 나았더라.”

룻은 보아스의 아내로 출가해 가서 오벳을 낳았다. 성경은 더 이상 룻의 출입에 대하여 설명하지 않는다. 불쌍한 시어머니 나오미를 위해서 보리 이삭을 줍고 밀 이삭을 주어다가 빵 한 덩이 구워서 어머니와 마주 앉아 연명하며 시어머니와 동행하며 살아가던 룻을 하나님은 주목하셨다.
식탁의 동행이란 그런 것이다. 요즘 코로나 19 바이러스로 인해서 성도들 간에 식탁에 둘러 앉는 일이 조심스러워진지 오래다. 그래도 같이 먹어야 한다. 그래도 같이 만나야 한다. 교회 식당은 불이 꺼진 채 해가 바뀌었지만 제 삼의 장소에서라도 조심스럽게 만나야 한다. 속도원들끼리 먹고, 교사들 간에 먹고, 부서원들 간에 먹고, 함께 더불어 이것 저것을 먹으며 식탁의 동행이 이루어져야 한다. 

교회는 절대 끼리 끼리만 먹으면 안 된다. 남성들 간에든 여성들 간에든 끼리 끼리만 둘러 앉고 누군가를 왕따 시키거나 배제하거나 무시하거나 모른체 하면 안된다. 주님이 아신다. 성도의 식탁 교제란 친목 모임이 아니다. 사담하는 자리가 아니다. 누구 흉보고 누구 따돌리는 자리가 아니다.

어디 까지나 성도와 성도는 성도의 신분으로 만나고 성도와 성도로 헤어지는 식탁의 거룩함이 있어야 한다. 먹을 것이 없어서 함께 먹자는 것이 아니다. 성도 간에 만나 먹고 마셨으면 그 뒤에 은혜가 남고 간증이 남고 유익이 남고 뿌듯함이 남고 푸근함이 남고 잔잔한 그 무엇인가의 감동이 남아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식탁에 둘러앉으면 안 된다. 그건 가롯 유다가 예수와 마주 앉아 같은 떡 그릇에 손을 넣었지만 그 밤에 유월절 잔치 자리에서 나가서 예수를 팔아 버린 것처럼 사탄의 꼬임에 넘어갈 위험이 커진다. 

성도와 성도의 만남은 늘 예수님과 함께 하는 듯한 자리여야 한다. 사사롭게 만난다든지 교인들간에 계 모임을 한다든지 하면 그 끝은 반드시 큰 탈이 나고 만다. 왜냐하면 그런 모임, 그런 식사 자리, 그런 친교, 그런 교제를 주님이 절대로 기뻐하지 아니하시기 때문이다. 은혜로운 식탁의 동행이 이어지길 축원한다.


기도의 동행.
하나님을 믿는 성도의 기도는 우상 앞에 비는 독백이 아니다. 기도하면 하나님이 들으신다. 예수는 이 땅에 계신 동안에 늘 기도하셨다. 제자들에게 어떻게 기도하여야 할지를 가르쳐 주셨다. 그것이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 즉 ‘주기도문’이다. 신앙생활은 기도 생활이다. 그러므로 말씀의 동행과 기도의 동행 이것이 신앙생활의 두 기둥이다. 

예수께서 교훈하신 기도의 교훈이 무엇인가. “구하라. 그러면 받을 것이다. 찾아라. 그러면 찾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그러면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구하는 사람은 받을 것이며 찾는 사람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사람에게는 열릴 것이다.”(마7:7-8) 이것은 <현대인의 성경>에서 대하는 예수님의 기도에 관한 가르치심이다. 

맞다.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면서 말씀을 멀리하는 것은 예수님과 동행하는 생활이 아니다. 믿음으로 살아간다고 하면서 기도 생활을 게을리하거나 등한하게 하는 것은 믿음으로 사는 것이 아니다. 제 맘대로 판단하고, 제 맘대로 결정하고, 제 맘대로 말하며 사는 것은 믿음으로 사는 것이 아니다. 믿음으로 산다고 말은 하면서 제 맘대로 들고 나고, 제 맘대로 앉고 서고, 제 맘대로 가고 오고, 제 맘대로 눕고 일어나는 것은 믿음으로 주님과 동행하며 살아가는 성도의 참 모습이 아니다. 

급할 때만 하나님 찾는 것은 하나님을 경홀히 여기는 것이다. 자기 필요할 때만 ‘예수님 예수님’ 하는 것도 주님을 믿고 주님과 동행하는 신자의 모습이 아니다. 믿음의 사람은 갈라디아 2장 20절 신앙으로 살아가야 한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이런 믿음이 아니면 기도의 동행이라 할 수 있겠는가. 
 
369장 찬송 <죄짐 맡은 우리 구주> 2, 3절을 함께 부르자.

“시험 걱정 모든 괴롬 없는 사람 누군가 
부질없이 낙심 말고 기도드려 아뢰세 
이런 진실하신 친구 찾아볼 수 있을까 
우리 약함 아시오니 어찌 아니 아뢸까 

근심 걱정 무거운 짐 아니 진 자 누군가
피난처는 우리 예수 주께 기도 드리세
세상친구 멸시하고 너를 조롱하여도
예수 품에 안기어서 참된 위로 받겠네”
지난 해와 별 차이가 없을 이 어려운 시련의 때에 기도의 능력을 덧입고 살아가자. 매 순간 주님께 간구하여 부활하신 주님, 내 곁에 찾아오셔서 동행하여 주시는 예수님의 사람답게 살아가는 믿음의 승리자들이 다 되어야 할 것이다.  


전도의 동행.
글로바와 또 다른 한 제자는 엠마오 마을의 한 집의 식탁에 예수님과 둘러 앉았다. 예수께서 감사 기도를 드리셨다. 그리고 떡을 떼어 두 제자들에게 주셨다. 그 때에 그들의 눈이 밝아졌다. 자기들의 맞은편에 앉으신 분이 부활하신 예수님이신 것을 그 때에야 알아 보게 되었다. 그런데 예수는 더 이상 그 자리에 함께 계시지 않고 훌쩍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셨다.

한나절 엠마오로 향해 걸어오면서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 마음이 뜨거워진 글로바와 또 한 제자는 그 분이 부활 예수이신 것을 알고 곧 일어나 어두운 밤 중에 예루살렘을 향하여 다시 돌아갔다. 누가복음 24장 33절에 보면 “곧 그 때로 일어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고 하였다. 여기 ‘곧’이란 시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글로바와 또 한 제자는 망설일 겨를이 없이 그 깜깜해진 밤에 예루살렘을 향하여 되돌아 갔다. 그리고 깊은 밤중에 11제자와 몇 사람들이 숨어 있던 곳을 찾아 갔다 .그리고 저들에게 말하였다. 

“주께서 과연 살아나셨다.”(눅24:34)

동행하시는 예수님의 사람들의 일상이 어떠하여야 할까를 교훈하는 장면이다. 맞다. 예수 부활의 복음을 믿는 우리들이라고 하면 우리는 직장, 사업, 상업, 학업의 그 모든 현장에서 지체하지 말고 할 수만 있으면 예수 부활의 복음을 전하고 또 전하여야만 할 것이다. 

밝아 온 2021년 새해.
나에게 찾아 오셔서 동행하시는 예수님의 사람들답게 살아가자. 
나와 함께 걸으시고 함께 하나님의 말씀을 나누시며 함께 식탁에 마주 앉으시고 함께 감사 기도하시는 예수님과 일상 생활의 출입을 늘 함께 더불어 같이 하는 동행의 은총이 날마다 풍성하게 임하기를 축원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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