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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앞에서 성도는(시99:1-9) 2020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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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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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0-25 20:30 조회 6,629 댓글 0
 
                  하나님 앞에서 성도는(시99:1-9)         2020. 10. 18

시편 99편에는 여호와 하나님은 어떠하신 분인가에 대하여 묵상하게 하는 여러 가지 내용을 담고 있다. 여호와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시다. 하나님의 다스리심에는 의롭고 영원하다. 그런 내용을 담고 있는 시편 99편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통치를 찬양하는 신정시(神政詩) 중의 한 편이다. 95-100편까지를 신정시라고 한다. 

여호와께서 다스리신다
만민으로 하여금 그의 앞에서 떨게 하신다
구룹 사이에 좌정하신다
땅이 흔들리게 하신다
시온에 계신다
위대하시다
모든 민족보다 높으시다
주의 이름이 크고 두려우시다
거룩하시다(3, 5, 9)
공의를 견고하게 세우신다
정의와 공의를 행하신다
간구하면 응답하신다
구름 기둥 가운데서 말씀하신다
행한대로 갚으신다
용서하신다
간구하면 응답하신다
구름 기둥 가운데서 말씀하신다
행한대로 갚으신다
용서하신다

이와 같은 내용들로 가득차 있다. 

자, 그러면 거룩하신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성도로 부름을 받은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시편 99편의 기록자는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자신의 믿음에 대하여 고백하고 있다. 시편 기록자의 고백이 오늘 우리 각 사람의 고백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응답하시리라는 믿음으로 간구하여야 한다.
6절에 보면 모세, 아론 그리고 사무엘의 이름이 등장한다. 모세와 아론은 형제이다. 하나님은 호렙산의 떨기나무에 불이 붙는 것과 같은 환상 앞에서 모세를 부르셨다. 그리고 이어서 오래도록 만나지 못하고 지냈던 형 아론을 만나게 하셨다. 우리가 익숙하게 아는 내용이지만 3500년 전에 80평생을 떨어져서 지내던 형제를 서로 만나 형제임을 알아보게 되었다는 것이 신비에 가깝지 않나. 모세의 형 아론은 모세보다 세 살 위의 형이다. 하나님은 저들 형제를 부르셔서 제사장 가문이 되게 하셨다. 모세도 제사장이고 형 아론도 제사장이다. 하나님은 아론과 그의 아들들과 그 후손들을 거룩한 제사장 가문으로 부르셔서 구별하셨다. 이는 일방적인 하나님의 선택이며 부르심이다. 감사한 일이고 복된 일이 아닐 수 없다.

한나의 기도를 들으시고 낳게 하신 아들 사무엘은 원래 제사장 가문이 아니었다. 그러나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는 아들을 임신하기 이전부터 하나님 앞에 기도하였다.“주의 여종에게 아들을 주시면 내가 평생에 그를 여호와께 드리고 삭도를 그의 머리에 대지 아니하겠나이다.”(삼상1:11) 한나의 남편 엘가나는 에브라임 사람이다. 남편 엘가나는 아기를 낳지 못하는 한나 대신에 브닌나라는 새 부인을 맞아들여서 자식을 낳았다. 한나는 본 부인이지만 자식이 없는 것이 늘 한이었다. 그런 한나의 기도를 들으시고 하나님은 사무엘을 선물로 주셨다. 그렇게 기도 응답으로 태어난 사무엘이 어려서부터 실로에 있는 성막에 보내져서 자라났다. 그 당시의 제사장은 엘리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엘리에게 말씀하시지 않고 어린 사무엘의 이름을 부르셨다. 어느 날 밤 중에 있었던 일이다. 그 날 이후로 제사장 엘리도 어린 사무엘을 주목하게 되었다. 하나님은 어린 사무엘을 부르셔서 평생토록 하나님의 제사장이요 선지자요 사사로서의 사명을 잘 감당하도록 붙들어 쓰셨다. 

우리가 잘 아는대로 모세와 아론과 사무엘 저들은 모두가 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서 기도의 비중과 중요성을 깨달아 알고 기도하던 제사장이요 선지자요 말씀의 사람들이었다. 

사무엘상 2장 26절에 보면 “아이 사무엘이 점점 자라매 여호와와 사람들에게 은총을 더욱 받더라.”라고 하였다.

사무엘상 3장 19절에 보면 “사무엘이 자라매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셔서 그의 말이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시니”라고 하였다. 그 다음 절인 20절에 보면 온 나라의 백성들이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그 시대에 선지자로 세우심을 알았다고 했다. 사무엘상 3장 21절에 보면 “여호와의 말씀으로  사무엘에게 자기를 나타내시니라.”고 하였다. 하나님이 말씀으로 사무엘에게 임하셨다는 뜻이다. 

그 시대는 사사시대 말기였다. 격동기였다. 블레셋이 쳐들어 와서 실로에 있는 성막의 하나님의 법궤를 빼앗아 갔다. 제사장 엘리의 악을 행하며 부정하게 출입하던 두 아들인 홉니와 비느하스가 블레셋 군대에 의해서 죽임을 당했다. 그 때 제사장 엘리에 연세가 98세였다. 그 당시 엘리 제사장은 앞을 못 보았다. 엘리는 사사이며 제사장이 된지 40년이었다. 엘리는 두 아들이 전쟁에서 죽임을 당한 비보(悲報)를 듣고 의자에서 뒤로 넘어져서 숨을 거두었다. 악이 가득하던 사사 시대 말기의 불행한 역사를 대변하는 사건이다. 법궤는 블레셋에 빼앗기고 사사이며 제사장이었던 엘리는 불행하게 목숨을 거두었으니 말이다. 

그런 격동기에 하나님이 들어 쓰신 사사요 제사장이요 선지자였던 인물이 사무엘이다. 사무엘 상 7장에 보면 사무엘이 이스라엘 온 족속에게 말하였다. “만일 너희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돌아 오려거든 이방 신들과 아스다롯을 너희 중에서 제거하고 너희 마음을 여호와께로 향하여 그만 섬기라. 그리하면 너희를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건져 내시리라.”(삼상7:3)

이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알과 아스다롯을 버리고 여호와를 섬기는 회개 운동이 일어났다. 선지자 사무엘은 백성들을 미스바로 불러 모았다. 거기서 기도 운동을 펼쳤다. 물을 길어다 붓고 종일 금식하며 “우리가 여호와께 범죄하였나이다.”하고 고백하며 회개 기도를 하였다. 그런데 블레셋 군대가 다시 쳐들어 온다는 소식이 들렸다. 백성들은 사무엘에게 기도해달라고 요청하였다. 사무엘은 젖 먹는 어린 양 하나를 취하여 온전한 번제를 하나님 앞에 드렸다. 그리고 이스라엘을 위하여 여호와께 부르짖어 기도하였다. 하나님은 그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였다. 사무엘 상 7장 9절에 나오는 내용이다. 기도하면 하나님이 들으신다. 기도하면 하나님이 응답하신다. 번제를 드리며 하나님께 기도할 때에 하나님은 기도에 응답하셨다. 하나님이 큰 우레를 발하셔서 이스라엘을 치려고 달려드는 블레셋 군대를 어지럽게 하셔서 패하게 하셨다.

사무엘은 그 전쟁 승리의 기념으로 하나님 앞에서 미스바와 센 사이에 돌을 세우고 ‘에벤에셀’이라고 이름 붙였다. ‘에벤에셀’이란 “도움의 돌”이란 뜻이다. 빼앗겼던 법궤도 되 찾아 오고 사무엘이 나라와 백성들 통치하는 동안에 하나님이 온 땅에 평화를 주셨다. 빼앗겼던 성읍들도 되 찾게 되었다.

모세, 아론, 사무엘 저들 모두의 특징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하던 기도의 사람들이었다는 점이다. 저들은 모두가 다 제사장일 뿐만 아니라 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하고 간구하는 기도의 사람들이었다. 

베드로 전서 2장 9절에 보면 베드로 사도는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라고 하였다. 그 목적은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어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2:9하)고 하였다. 

그렇다. 우리 모두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의 마음가짐으로 하나님 앞에서 부르짖어 기도하고 간구하여야 한다. 왜냐하면 기도하면 하나님은 응답하시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이 땅에 계신 동안에도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하여야 할 것을 강조하셨다.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날마다 계속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하는 생활을 계속하셨다. 그러므로 기도는 해도 그만 안해도 그만이 아니다. 기도는 살아있는 동안에 계속하여 숨을 쉬는 것처럼 끊임이 없이 계속해야 하는 영적 활동이다. 바빠도 기도하고 급해도 기도해야 한다. 바쁘면 바쁠수록 더욱 더 기도하고 급하면 급할수록 더욱 더 기도를 우선해야 한다. 

지난 해 봄에 소풍을 갔던 기자촌 공원까지 어제 밤중에 걸었다. 가로등이 대낮같이 켜져 있고 잔디도 말끔하게 깎여 있었다. 당장 교우들과 함께 다음 주일에라도 가을 소풍을 가고 싶을 정도로 산뜻한 가을의 밤 바람이 얼마나 상큼했는지 모른다.“밤 깊도록 동산 안에 주와 함께 있으려 하나”하는 442장 찬송 3절 가사가 생각났다. 

6절 끝에 “그들이 여호와께 간구하매 응답하셨도다”하는 말씀을 믿고 기도하자. 마스크를 벗지 못해 답답한 나날이지만 기도하면 응답하신다는 소망을 갖고 기도 생활을 계속하는 은혜로운 계절이 되기를 축원한다.


정의를 사랑하며 증거와 율례를 지켜야 한다.
4절에 보면 ‘정의’ 혹은 ‘공의’라는 표현이  두 차례씩 반복된다. 우리 말의 번역에 정의와 공의의 차이를 구분하기란 그리 쉽지 않다. 그 말이 그 말 같다. 그러나 원어인 히브리 성경에서 쓰인 두 단어는 ‘미쉬파트’라는 단어와 ‘체다카’라는 단어이다. ‘미쉬파트’라는 단어는 ‘판결’, ‘판단’, ‘재판’이란 뜻이다. 그리고 ‘체다카’라는 단어는 ‘의로움’혹은 ‘옳바름’을 뜻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판단과 판결은 의롭고 올바르시다.는 뜻이다. 그러하신 하나님이 구름 기둥 가운데 임재하셔서 말씀하시는 광경은 장엄하고 엄위로움을 느끼게 한다. 모세나 아론이나 사무엘의 특징은 저들에게 말씀하신 여호와의 증거와 율례를 지켰다. 그렇지 않나. 우리가 아무리 많은 말씀을 알아도 그 깨달아 알게 된 말씀을 지키지 않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눈여겨 보면 시편 99편은 1-3절, 4-5절 그리고 6-9절의 세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다. 어떻게 알 수 있나. 3절과 5절과 9절 끝에 ‘하나님은 거룩하시다’라는 표현이 반복된다. 그러면 과연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기에 거룩하신 분이란 말인가. 

다시 1-3절을 보면 “세상 만물을 통치하시는 거룩하신 하나님”에 대하여 찬양하고 있다. 4-5절은 “공의와 정의를 견고하게 세우시고 행하시는 하나님”에 대하여 찬송하고 있다. 마지막 부분인 6-9절은 “기도에 응답하시고 죄를 용서하시며 예배를 받으시는 하나님”에 대하여 송축하며 하나님을 높이고 있다. 

그렇다. 하나님은 공의와 정의의 하나님이시다. 사람은 앞과 뒤가 다르다. 사람은 여기서 이 말하고 저기서 저 말하기도 한다. 사람은 아침에 다르고 저녁에 또 다르다. 아담과 하와를 보라. 에덴 동산에서 범죄하고 동산 나무 사이에 숨었다. 그들을 찾아 오신 하나님이 물으시는 질문 앞에 거짓말하고 또 거짓말하였다. 서로 책임을 전가하고 불순종하는 모습을 보였다. 하나님은 공의와 정의로 세상을 다스리신다. 낮과 밤, 여름과 겨울, 봄과 가을의 변화 가운데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손길이 있다. 
우리는 여기 시편 기자가 거론하는 모세와 아론과 사무엘을 안다. 물론 모세에게도 부족함이 있었다. 아론에게도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백성들 앞에서 금송아지가 저들을 애굽에서 이끌어 낸 신이라고 절하게 하는 등 쉽게 이해되지 않는 실망스런 모습이 없지 않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모세, 그런 아론이라도 붙드셔서 그 죄를 용서하시고 그 허물을 가리우셔서 제사장으로 존귀하게 쓰셨다.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가 세워져 가는 민족으로 삼아 가셨다. 하나님의 증거와 율례를 행하는 백성들로 연단해 가셨다. 

그렇지 않나. 아브라함, 이삭, 야곱 저들 믿음의 조상들에게도 얼마나 많은 생의 우여곡절이 있었는가. 그런 가운데서도 하나님은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믿음을 불같은 시험으로 연단하셔서 정금보다  더 귀한 믿음의 조상들로 자리매김하도록 이끌어 가셨다. 

그렇지 않나. 7절 말씀의 “여호와께서 구름 가운데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니”라는 장면을 묵상하다 보면 출애굽기 33장의 내용이 생각난다. 거기에 보면 9절 이하에 “모세가 회막에 들어갈 때에 구름 기둥이 내려 회막 문에 서며 여호와께서 모세와 말씀하시니 모든 백성이 회막 문에 구름 기둥이 서 있는 것을 보고 다 일어나 각기 장막 문에 서서 예배하며 사람이 자기의 친구와 이야기함 같이 여호와께서는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시며 모세는 진으로 돌아오나 눈의 아들 젊은 수종자 여호수아는 회막을 떠나지 아니하니라.”(출33:9-11)는 말씀이 있다. 

이런 장면들을 묵상하다 보면 너무나 그림을 보듯 선명한 그 당시의 하나님의 임재 장면이 생각나지 않나. 이 전염병의 시대가 다 잦아 들기까지 서로 간의 사이는 거리를 두고 늘 대하되 마음만은 더욱 더 가까워져 가는 성도들 간의 마음의 연합이 있어야 할 것이다. 주님과도 말씀과 기도로 점점 더욱 더 주님과 가깝게 대하는 신실한 동행의 은총이 있어야만 할 것이다. 

그러면 무엇이 하나님의 공의이고 무엇이 여호와의 정의인가. 4절에 보면 “주께서 야곱에게 정의와 공의를 행하셨다”고 하였다. 여기서 말하는 야곱은 창세기의 야곱 자신이기도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을 일컫는 말씀이다. 그렇지 않나. 우리가 아는대로 야곱의 생애는 그 이름처럼 문제 투성이였다. 아버지 이삭을 대하는 태도도 그러하였고 형 에서를 대하는 자세도 그러하였다. 그런 부족함이 많고 너무나도 인간적이고 욕심과 투지와 지나친 경쟁심과 질투와 시기심이 이글 이글 타오르던 야곱을 하나님은 평생토록 정금을 다듬듯이 다듬어 가셨다. 루스 광야에서 돌베게를 배고 잠을 청하던 밤이 그러하였다. 이십 년 세월이 흐른 처가살이를 청산하고 고향을 향해 가던 중간에 압복강가에서 밤새워 천사와 씨름하며 기도하던 그 날 밤도 그러하였다. 하나님은 여전히 부족함이 많은 야곱을 사랑하셨다. 그래서는 그 때 그 때마다 야곱을 기도의 사람, 말씀의 사람, 성결의 사람, 은혜의 사람, 거룩하신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한 걸음씩 점점 다가서는 언약의 조상으로 다듬어 가셨다.

올해 처음으로 시속 40키로 제한 구역에서 51키로의 속도로 달린 것이 해당 지역 CCTV에 찍혀서 교통 발전 기금을 납부하였다. 속도 제한이 무엇인가. 신앙 생활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은 우리가 총알같이 빨리 달려 가는 것만을 원하지 않으신다. 때로는 속도를 줄이기를 원하신다. 일정한 구간에서는 그 제한된 속도를 유지해서 천천히 가길 원하신다. 내가 급하다고 속도를 낸다고 다 될 일이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방향과 삶의 속도를 주목하신다. 7절의 말씀대로 우리가 주의 증거와 율례를 주목하고 그 증거와 율례를 지키며 생활해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복된 길이요 영생의 길이요 하나님의 자녀다운 길이기 때문이다. 

복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말아야 한다.
복있는 사람은 죄인들의 길에 서지 말아야 한다.
복있는 사람은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말아야 한다.
반대로 복있는 사람은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고 그 율법을 밤낮으로 묵상하며 살아가야 한다. 

그것이 번영의 길이며 형통의 길이며 여호와께서 의롭다고 인정하시는 길이다. 

공의를 견고하게 새우시고 정의를 행하시는 여호와 안에서 주의 말씀이 증거가 되고 주의 말씀인 사랑의 율례를 준행하며 살아가는 동행의 은총이 늘 함께 하기를 축원한다. 


하나님을 높이고 그 성산에서 예배하여야 한다.
3절에 보면 “너희는 주의 크고 두려운 이름을 찬송할지니”라고 하였다. 5절에서는“너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높여 그의 발등상 앞에서 경배할지어다”라고 하였다. 9절에 보면 “너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높이고  그 성산에서 예배할지어다”라고 하였다. 

하나님을 높이는 길은 하나님의 크고 두려우신 이름을 찬송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고 섬기고 따르려는 성도는 하나님을 진심으로 경외하고 찬송하여야 한다. 그렇지 않나. 모든 찬송은 하나님을 높이고 경배하는 찬송이어야 한다. 

27장
빛나고 높은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지극히 높은 위엄과 한 없는 자비를

68장
오 하나님 우리의 창조주시니
오 하나님 우리의 대주재시니
주 하나님 이름을 함께 높이며

70장
“만유 주 하나님 우리를 도우니 피난처요.....
“높으신 하나님 우리를 구하니 할렐루야.....

잠시 사람의 마음을 평안하게 위로하고 찬송하는 나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그런 찬송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을 드높이고 여호와의 전능하심을 찬양하고 경배하는 찬송이 참 찬송인 것이다. 

과거에 목사들끼리 버스를 타고 수련회를 떠났다. 버스 안에서 사회 보는 목사가 노래를 시켰다. 어느 연세 드신 목사님이 마이크를 받아 들더니 

“만복의 근원 하나님 온 백성 찬송 드리고 
저 천사여 찬송하세 찬송 성부 성자 성령 아멘”

하고  찬송가 1장을 불렀다.

그게 오히려 미음을 찡하게 하고 은혜가 되었다. 꼭 “동구 밖 과수원 길 아카시아 꽃이 활짝 폈네”나 “가을이라 가을바람 솔솔 불어 오니”를 불러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꼭 노래방을 들락거려야만 하는 것은 좀 이상하지 않나. 요즘 온 나라가 트롯트 음악으로 뒤 덮혀 있는 듯하다. 유행가는 돌고 돈다. 그러나 성도가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하고 그 발등상 앞에 엎드려 경배하고 하나님을 높이고 예배하는 일은 영원한 것이다. 찬송 하고 또 찬송하고 예배하고 또 예배하여도 늘 새롭고 늘 기쁘고 늘 감사하고 늘 복되고 늘 은혜로 채워지는 것이다. 

이 한 주간도 새벽과 밤 계속되는 기도와 영상 말씀 부흥 성회를 통해서 열매 풍성하고 찬송이 넘치는 성령 충만한 가을날이 되기를 축원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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