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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사랑교회
복음 인재를 양성하여,열방선교에 앞장서는 교회
설교문    |  지성래목사  | 설교문
곡식과 가라지의 비유(마13;24-30, 36-43) 2020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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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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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07-26 22:42 조회 7,615 댓글 0
 
               곡식과 가라지의 비유(마13;24-30, 36-43)      2020. 7. 26


설교 원고를 작성할 때마다 제목 그리고 성경 본문 그 오른쪽에 설교하는 연월일을 기록하고는 한다. 이번주는 우연히 3030년으로 기록한 것을 뒤에야 발견하고 수정하였다. 3030년은 1010년 후에야 찾아온다. 그 이전에 주님이 오실지 아니면 그 때까지도 오시지 않을지 우리는 아무도 모른다. 왜냐하면 주님께는 “천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년 같다”고 하셨으니까 말이다. 천년이 꽤 긴 세월이지만 백 년도 결코 짧은 세월은 아니다. 예수는 이천년 전에 이 땅에 사람의 모습으로 오셨다. 예수의 초림이다. 예수는 이 땅에 오셔서 복음의 씨를 뿌려 놓고 가셨다. 그 좋은 씨인 복음을 제대로 받아 들인 신자의 마음 밭이 천국의 아들들 즉 천국 백성들이다. 그런데 밤중에 몰래 원수가 와서 가라지를 뿌렸다. 좋은 씨와 가라지씨가 뒤섞여 있는 것이 세상이라고 하셨다. 교회가 그렇다는 말씀이다. 교회 안에 알곡 신자만 있는게 아니다. 이단이 들락거리는것처럼 마귀가 뿌려 놓은 가라지와 같은 이들이 뒤섞여 있을 수 있다. 개인과 개인이 그러하고 각 사람의 마음 밭의 상태가 그러하다. 

아담은 930년을 살았다. 노아의 증조할아버지인 에녹은 365년을 살았다. 에녹의 아들인 무드셀라는 969년을 살았다. 무드셀라의 아들이고 노아의 아버지인 라멕은 777년을 살았다. 홍수 심판을 경험한 노아는 950년을 살았다. 창세기 5-9장까지 읽어 보면 나오는 내용들이다. 노아의 아버지 라멕은 홍수 심판 5년 전에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노아의 할아버지인 무드셀라는 홍수가 나던 해에 969살 때 죽었다. 성경이 기록한 인간의 나이 중에 최장수이다. 그러나 그런 그도 홍수 심판 때에 방주 안에 들어간 노아의 가족 여덟명 중에 포함되지는 못하였다. 

분명한 것은 이 땅에서 백년을 살든 천년을 살든 그 어느 누구도 이 땅에서 영원히 살아 있는 인생은 단 한 사람도 없다는 점이다. 여러분은 이 세상에서 몇 년쯤 살고 싶은가. 반대로 여러분 주변의 가족이나 친척이나 주변 분들 중에서 누가 몇 살에 세상을 떠나면 슬프고 아쉽나. 반대로 그 앞서 세상을 떠난 그 누군가가 나의 기대로는 몇 년 혹은 몇십 년쯤 더 살다가 하나님 곁으로 돌아갔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여기나. 만약에 이 세상이 전부이고 하나님의 나라가 없다면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사는 것이 얼마나 허망하겠가. 이 세상에서 아무리 잘 먹고 잘 입고 호강을 누리며 살아간들 인생이 일장춘몽과 같이 지나가는 이것이 전부라면 얼마나 덧없겠나.

요즘 새벽마다 로마서를 묵상하고 있다. 로마서를 비롯하여 13편의 서신을 기록한 성경 기록자인 사도 바울도 60대 초반에 목 베임을 당하고 하나님 앞으로 돌아갔다. 예수의 시대와 초기 기독교의 시대는 한 마디로 순교의 역사였다. 우리나라에도 개신교보다 먼저 들어온 천주교가 자리잡기 까지 얼마나 많은 순교자가 생겼는지 모른다. 김대건(1822-1846) 신부는 우리나라 최초의 마카오 유학 출신의 순교자가 된 제 1호 신부이다. 24살에 순교 당하였다. 복음 안에서 살고, 진리와 더불어 살고, 좋은 씨를 받은 좋은 땅 신앙으로 산다는 것은 이런 것이다. 세례 요한이나 저들은 죽었으나 영원히 후대에 교훈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항상 비유로 말씀하셨다. 사 복음서에 소개된 예수의 49가지 비유 말씀의 주제는 한가지다. 천국 즉 하나님의 나라에 관한 말씀만을 일관되게 증거하셨다. 왜일까. 이는 천국이 허구의 세계가 아니라 실존하는 하나님의 나라임을 분명하게 강조하신 것이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엄마의 모태에 있을 때에는 경험하지 못한 세상인것처럼 하나님의 나라는 실존하는 세계이다.

예수의 승천은 그런 것이다. 예수는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다. 때가 되는 그는 고난과 죽임 당함을 이기고 부활한 후에 사십일을 이 땅에 더 머무시다가 하나님 나라로 돌아가셨다. 그것을 우리는 예수의 승천이라고 말한다. 

창세기 5장 24절에 보면,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다가 죽음을 보지 않고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셨다. 엘리야도 죽음을 보지 않고 승천하였다. 예수께서도 부활 후 40일을 더 계시다가 11제자가 보는 앞에서 승천하셨다. 

현대인들은 비행기를 타고 10,000미터 상공을 날아 다닌다. 혹은 우주선을 타고 우주 공간에 날아 오르고 업무를 마치고 지구로 되 돌아 오기도 한다. 요즘은 코로나 19로 인해서 공항이 한산하다지만 과거에 인천 공항에 가서 보면 수 많은 비행기들이 1분 간격으로 계속 뜨고 내리는 광경을 목격하게 된다. 장관이다. 이미 2016년에 하루 1,000대가 이착륙하는 기록을 세웠다. 사람이 하늘을 이렇게 자유롭게 날아다닌 역사가 그리 길지 않다. 1903년 12월 17일, 미국의 연합감리교회의 목사 아들인 윌버와 오빌 라이트 형제가 그 주인공이다. 이들은 엔진을 장착한 비행기인 플라이어(Flyer, 날틀)로 하늘을 날았다. 12초 동안 36미터를 나는데 성공하였다. 그렇게 시작한 비행기 연구가 오늘날의 비행 시대를 가능하게 한 것이다. 인류 역사에 공중을 이처럼 자유롭게 날아서 지구의 오대양 육대주를 누비게 된 역사가 불과 100년 조금 넘는 역사이다. 

인간이 지구가 둥글게 생긴 것을 깨달은지도 그렇게 오래지 않다. 더군다나 지구가 태양을 중심으로 자전과 공전을 한다는 태양계의 원리를 발견한지도 그렇게 오래지 않다. 그 이전에는 지동설이 아니라 천동설을 믿었다. 해가 뜨고 지니까 지구는 멈추어 있고 태양이 떴다 졌다 하는 줄로 착각한 것이다. 그런 인간의 지혜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예수 그리스도의 천국 비유를 깨닫고 믿는 것은 얼마나 크나큰 은총이며 복인지 모른다.

예수께서 곡식과 가리지의 비유를 말씀하신 이유가 뭘까. 하루는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천국은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과 같다”는 비유의 말씀을 시작하셨다. 

사람들이 잘 때에 그 원수가 와서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다.
싹이 나고 결실할 때에 가라지도 보였다. 
집 주인의 종들이 와서 말했다.
“ 주여 밭에 좋은 씨를 뿌리지 아니하였습니까 그런데 가라지가 어디서 생겼습니까”
주인이 말했다.
“원수가 이렇게 하였구나”
 종들이 말했다
“ 그러면 우리가 가서 이것을 뽑기를 원하십니까”
주인이 대답하였다.
“가만 두어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가 된다.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어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수꾼들에게 말하겠다.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어라. 그리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고 하겠다.”
자 그러면 왜 예수께서 이런 비유를 말씀하셨는지를 묵상해 보자.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
예수의 이 비유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궁금해진 제자들이 설명 듣기를 원했다. 그 때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어느 집안에 들어가셔서 질문에 차근 차근 대답해 주신 설명이 마태복음 13장 36절 이하에 나온다. 

첫째,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인자(人子) 즉 예수 자신이다.
둘째, 그 좋은 씨가 뿌려진 ‘자기 밭’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다.
셋째, 좋은 씨는 ‘천국의 아들들’이다. 복음을 받아 드린 하나님의 자녀다.

씨뿌리는 비유에서 씨가 복음이라면 곡식과 가라지의 비유에서 말씀하신 ‘좋은 씨’는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제대로 믿는 ‘참된 신자가 된 아들딸’을 말씀하신 것이다. 여기 ‘아들들’이란 표현을 주목해야 한다. 하나님이 아버지이시고 곡식으로 비유된 구원 받을 백성들을 아버지의 아들들이라고 하였다.

그 반대로 ‘가라지는 악한 자의 아들들’이라고 하셨다. ‘악한 자의 아들들’이란 표현은 성경이니까 점잖게 표현한 것이다. ‘악한 자의 자식들’ 혹은 ‘악한 자의 새끼들’이라고 해야 실감이 날 것이다. 왜냐하면 가라지로 비유되는 악한 자의 아들들의 운명은 사탄의 지배를 받다가 영원히 지옥 심판을 받을 멸망할 영혼들이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시기 까지 하나님은 수 많은 선지자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하시려는 말씀을 하셨다. 세례 요한도 선지자들 중의 한 사람이었다. 예수 그리스도도 마찬가지이다. 예수는 그리스도이시다. 그리스도라는 말은 선지자란 말이다. 뿐만 아니라 왕중 왕이시고 제사장 중 대 제사장이시란 말이다. 그렇다. 예수께서도 이 땅에 선지자로 오셔서 복음의 말씀을 전하신 것이다. 예수는 늘 하나님의 나라를 비유로 전하시고는 하였다. 곡식과 가라지의 비유도 마찬가지이다. 예수께서는 이 땅에 좋은 씨를 뿌리셨다. 그 좋은 씨가 복음이다. 천국 비유이다. 그런데 그 좋은 씨를 사람들이 좋은 땅으로 받아들여서 좋은 열매를 맺지 못하였다. 그것이 씨뿌리는 비유의 길가, 가시 덤불, 돌짝 밭에 비유된 인간의 마음이다. 아무리 좋은 씨가 뿌려져도 내 마음 밭이 길가와 같고 가시덤불과 같고 돌짝 밭과 같은 상태에서는 좋은 열매를 30배, 60배, 100배로 결실할 수가 없다. 

예수는 예수를 믿는 성도된 우리 각 사람의 마음 밭이 좋은 밭이 되길 원하신다. 38절에 ‘밭은 세상이요’라고 말씀하시지 않았나. 똑 같은 좋은 씨가 뿌려져도 옥토 즉 좋은 밭에 뿌려져야 그 좋은 씨가 풍성한 열매를 거두게 되는 법이다. 

오늘날과 같은 비대면의 시대에 각 사람이 자기 마음 밭을 좋은 밭으로 잘 관리해서 내 마음 밭에 뿌려지는 주님의 말씀인 좋은 씨를 받아 드려서 풍성한 곡식을 결실하는 은혜 생활이 계속되길 축원한다. 


추수 때의 곡식과 가라지의 운명.
자 그러면 과연 내 마음이 좋은 씨를 받아들여 좋은 씨가 싹이 나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어 가는 좋은 곡식의 밭이냐 아니면 가라지가 뿌려진 마음 밭이냐가 숙제이다. 의문이다. 이건 너나 나나 다 마찬가지이다.

목사라도 그 마음 밭에 곡식이 자라기는커녕 가리지만 무성하게 자라날 수도 있다. 이는 장로 권사 집사 젊은이 노인 어린아이 어른 다 마찬가지이다. 지금은 알 길이 없다. 아직은 모른다.

우리가 어렸을 적에 보면 봄철에 논에 모를 내고 한 두 달이 지나면 요즘 같은 여름 철에 벼가 자라는 논에 피라는 것이 눈에 띈다. 농부들은 이 더운 여름에도 논에 들어가서 그 피를 일일이 뽑아 내는 것을 보았다. 그래야 피가 곡식에 섞여 수확되는 것을 최대한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벼가 아니고 피와 같은 가리지를 섣불리 미리 뽑아 내려 하지 말라고 경고하셨다. 

예수의 이 비유는 그 당시 이스라엘 나라의 농경 문화를 알아야 이해 할 수 있다. 대개는 밀 농사나 보리 농사인데 밀이나 보리를 파종한 이웃의 밭에 주인이 잠을 자는 밤 중에 몰래 원수가 들어가서 가라지 씨를 덧 뿌리는 경우가 있었다. 남의 밭 일년 농사하는 밀 밭이나 보리 밭에 뿌려서는 안되는 가라지 씨를 뿌렸으니 심각하지 않나. 요즘 같은 cctv 설치하던 시절이 아 니니 범인을 잡을 수도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원수가 와서 그렇게 한 것이다. 그러면 그 가라지를 뿌린 원수는 누구인가. 39절에 보니까 ‘가라지를 뿌린 원수는 마귀’라고 예수께서 분명하게 구분해 주셨다. 마귀가 그렇게 한다는 것이다.

이 비유를 좀더 폭을 좁혀 묵상하면 ‘밭은 세상이요’라고 말씀하신 그 밭은 곧 오늘 날의 교회이다. 교회 안에서 성도들이 예수의 복음의 말씀을 좋은 씨로 받아 들여서 아멘하고 준행하여 좋은 열매가 풍성한 추수 날을 준비하고 기다리며 살아간다. 그런데 자신도 모르는 잠을 자는 시간에 원수인 사탄 마귀가 몰래 와서 나의 좋은 씨를 받아 들여 가꾸어 가는 내 마음 밭에 가라지를 뿌리고 가 버렸다. 잠을 자는 시간이기 때문에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고 세월이 지나다 보니까 내 마음의 밭에 곡식이 자라는 대신에 곡식을 잘 보이지 않고 가라지만 잔뜩 자라고 있는 것이었다.

시골에서 보면 어떤 집 논이 벼가 절반 그리고 피가 절반인 밭이 있다. 보는 이의 마음을 안타깝게 한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그 곡식과 가리지의 비율이 어떠하든 가라지를 섣불리 뽑아 버리려 하지 말고 추수 때까지 내 버려 두라고 하셨다. 

그 다음 비유 설명을 보자.  39절에 보면, ‘추수 때는 세상 끝이요 추수꾼을 천사들이다.’어느 이단이라고 꼬집어 말하고 싶지도 않다. 요즘 한국교회와 성도들을 어지럽히고 기성교회를 무너트리려 하는 이단 중에 ‘추수꾼’뭐 이런 용어를 사용하는 데가 어딘 지 우리는 다 안다. 이것이 예수께서 가라지로 비유하신 마귀의 궤계이다. 예수께서 사용하신 마귀 즉 ‘디아볼로스’란 ‘중상모략하는 자’혹은 ‘비방하는 자’라는 뜻이다. 마귀의 특징이 그런 것이다. 교인 행세하고 교회 들락거리고 예배 생활도 열심이고 속회도 열심이고 교회의 구석 구석에서 봉사도 잘 하고 앞장서서 헌신하는 것 같다. 그런데 그 본심이 마귀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세상을 떠난 우리 나라 대표적인 대형교회의 목사가 목회자 세미나에서 간증하였다. 그 교회는 일 년 결산이 그 당시 450억이 넘는다고 하였다. 그런데 여러 해 재무부에서 일하던 한 사람이 교회 헌금에 손을 대는 사실을 뒤 늦데 알게 되었다. 우리 같은 작은 교회야 상황이 다르지만 대형 교회는 수 십명의 재무위원들이 아침부터 4, 5, 6부로 예배드리는 주일 헌금 정리를 위해서 돈에서 피어 오르는 작은 돈 먼지를 막기 위해서 하루 종일 마스크를 쓰고 재무 일을 보았다고 한다. 그런데 십 수년 동안 충성되게 재무부에서 계수 요원으로 섬기는 듯 했던 그가 매 주일마다 헌금에 손을 댄 것이다. 마치도 사도행전 5장의 아나니아와 삽비라처럼 거짓되고 마귀의 지배를 받은 것이다. 그는 직업이 불분명한 딸의 이름으로 수 십억 짜리 빌딩도 구입해 주었다고 했다. 

이런 일은 예수때에도 있었다. 예수의 12명의 제자들 중에서 가롯 유다가 그랬다. 그리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요한복음 12장 6절을 찾아 보라. “그는 도둑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고 하였다. 

요한 복음 13장 2절도 찾아보라.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롯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라”고 하였다. 

마귀라는 존재가 실존하는 존재다. 성령이 실존하는 하나님의 영이신 것처럼 예수께서 이 곡식과 가라지의 비유에서 분명하게 설명해 주신 대로 마귀라는 영적 존재가 있다. 내 마음에, 나의 가족의 마음에, 우리 교회 안에, 우리 교회의 각각의 성도들의 마음 밭에 내가 잠을 자는 시간에 마귀가 와서 가라지를 뿌려 놓으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가라지의 씨가 자라나기 시작한다. 가라지의 기운에 밀이나 보리의 기운보다 세어서 나중에는 가라지 밭이 되고 만다. 그 가라지의 기운으로 밀 밭과 보리 밭이 가라지로 인해서 망치고 만다. 

쑥인 건강에 좋은 것이지만 채소 밭이나 곡식 밭에 쑥이 번져가면 쑥대밭이 되고 마는 것처럼 말이다. 마귀는 성도의 마음 밭에 곡식이 자라지 못하도록성도가 잠을 자는 시간에 몰래 마음 속에 들어 와서 가라지 씨를 잔뜩 뿌려 놓고 사라져 버린다. 시간이 흐르다 보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마음 밭에 가라지만 잔뜩 자리잡게 된다. 원수인 마귀가 하는 짓이 그런 것이다. 마귀 즉 ‘디아볼로스’는 중상모략하고 대적하고 비방하고 이간질하는 악한 영이다. 이걸 영적으로 분별하여 지혜롭게 감당해 내지 못하면 추수 날 내 마음 밭이 모두 다 불태워지고 말 것이다. 알곡을 하나도 거두지 못하는 흉작이 되고 말 것이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섣불리 가라지를 뽑아 내려 하지 말라고 하셨다. 우리가 정신을 차리고 깨어 기도하며 제대로 말씀 따라 살아가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입으로만 주여 주여 하고 세상에 나가서 마귀의 이끌림을 받아 이리 저리 끌려 다니면 마귀는 나의 마음 밭을 가라지 천지로 바꾸어 버릴 것이다. 두렵지 않나. 잠이 오나. 내가 세상에서 지위가 뭐냐, 권력이 있느냐, 재력이 어느 정도냐, 얼마나 배웠느냐, 어느 학교를 나왔느냐, 어떤 집에 사느냐, 얼마나 넓은 아파트에 사느냐, 얼마나 좋은 차를 타고 다니느냐 그런게 아무 상관 없다. 내가 잠자는 순간에 원수가 와서 몰래 마음 밭에 가라지를 뿌려 놓는 날에는 낭패다. 

40절에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사르는 것 같이 세상 끝에도 그러하리라”고 하셨다. 지금은 모른다. 아직은 모른다. 인생은 누구나 끝이 있다. 이 세상에 끝이 없는 인생이 있나.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다. 태어나면 때가 되면 누구나 죽는다. 그 끝 날에 가라지 인생으로 여겨진다면 추수 꾼에 의해서 단으로 묶여서 불에 태워지고 말 것이다. 이것이 지옥의 심판이다. 

마태복음 13장 41-42절에서 예수는 분명하게 설명해 주셨다.“인자가 그 천사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그 나라에서 모든 넘어지게 하는 것과 또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거두어 내어 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이 세상을 살아가면 우리는 다양한 계층의 별의 별 사람들의 죽음을 본다. 그 죽음이 우리에게 교훈하는 바가 크다. 예수믿는다 하는 우리 각 사람이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지금, 요즘 내 마음 밭에 좋은 씨가 풍성하게 자라나고 있는가. 아니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마귀가 내 마음 밭에 와서 가라지 씨만 잔뜩 뿌려 놓지는 않았는가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자신의 신앙의 현주소를 확인해야 할 것이다. 나의 신앙의 실상을 점검해야 할 것이다. 

 
의인들과 자기 아버지의 나라.
예수께서는 이 곡식과 가라지 비유를 설명하시면서 마지막에 이런 말씀을 해 주셨다. “그 때에 의인들은 자기 아버지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나리라 귀 있는 자는 들으라.”

그렇지 않나. 지금도 중요하지만 그 때가 중요하다. 물론 좋은 결과를 위해서는 좋은 과정이 반드시 필요하다. 우리 각 사람은 나의 ‘그 때에’가 언제 찾아올지 아무도 모른다. 예수께서는 “도적 같이 오리라”고 경고하셨다. 며칠 전에 지방 목사 두 사람과 셋이서 저녁 나절에 등산을 몇 시간 하였다. 지방 어느 교회의 권사님 딸이 오십대 초반 대기업 간부인데 아파트 엘리베이터 앞에서 출근길에 쓰러졌다. 119 엠브런스로 실려 응급실로 향했지만 그는 길에 숨졌다. 우리는 ‘그 때’가 언제 어떤 모습 어떤 상황으로 찾아 올지 아무도 모른다. 

그 날을 준비하자. 그 때를 준비하자. 우리가 벤살렘 교회 건축을 준비하며 늘 기도하고 기도할 때에 부르던 복음 성가가 생각 난다. 

“보라 그 날이 곧 다가 오리라”하는 복음 성가였다.

보라 그날이 곧 다가오리라
생명의 주 예수 영광 중에 오실 날
네가 그것을 곧 보게 되리니
영원한 집으로 인도하시리라

이런 찬양의 분명한 고백과 믿음 가운데 살아가는 우리 각 사람이 되기를 간절히 소원한다. 

추수 때에 풍성한 곡식으로 거두어질 좋은 밭의 좋은 씨 인생으로 살아가자. 

주께서 나를 의인으로 구분하여 아버지의 나라에서 영원히 해와 같이 빛나는 하나님의 자녀의 영광을 누리게 해 주실 것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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