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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기도를 들으소서(시86:14-17) 20200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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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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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06-26 16:46 조회 6,292 댓글 0
 
                나의 기도를 들으소서(시86:14-17)        2020. 6. 21      6.25전쟁 70주년


남북 관계가 다시 경색국면이 되었다. 북한은 남한의 지도부에 대하여 온갖 욕설과 저질스러운 막말을 쏟아 내고 있다. 사실 최근 몇 년간의 화해 분위기가 의심스러웠던 것은 사실이다. 올 날이 다시 온 듯한 느낌이 크다.

6. 25전쟁이 일어난지가 70년이 되었다. 이번 목요일이 6월 25일이다. 북한 공산당의 군대가 그 당시 새벽 4시에 3.8선을 넘어 남침을 시작한 지 사흘 만에 서울이 함락되었다. 6월 28일 새벽 2시 반 경에 한강 인도교를 우리측 군대가 폭파하였다. 역사가들은 그 당시 육군참모총장이었던 채병덕 장군의 판단과 폭파 명령에 따른 일이라고 전하고 있다. 한강 인도교인 한강 철교를 통해 피난 가던 3000여명 중에 차량 50여대와 800여명이 한강에 빠져 죽었다. 그 같은 새벽 시간에 인민군 탱크가 미아리 고개와 돈암동 주변에 나타났다. 이승만 대통령과 정부 주요 인사들은 이미 기차를 타고 서울을 빠져 나간 상태였다. 우리는 끊긴 한강 철교 난간에 목숨을 걸고 대추나무에 연이 걸리듯이 서로 매달려 한강의 남쪽으로 건너가려고 안간힘을 쓰던 피난민의 참상을 기억한다. 

전쟁은 죽이거나 죽임 당하거나 둘 중의 하나이다. 전쟁은 고대 전쟁이나 현대 전쟁이나 엄청난 목숨을 앗아간다. 삶의 보금자리가 포탄의 공격을 받고 불타고 무너진다. 전쟁은 비참한 것이고 참담한 것이다. 

우리나라의 70년 전에 발발한 6.25 전쟁은 3년 1개월인 1,129일동안 계속되었다. 전쟁으로 인한 인명피해는 남북한의 사상자는 약 450만명에 이른다. 그 중에는 남북한 군대와 중공군, 유엔군, 미군 등과 민간인이 포함된다. 그 가운데 남한의 인명피해는 민간인 약 100만 명을 포함한 약 200만 명이다. 공산 진영의 인명피해는 100만 명의 민간인을 포함하여 약 250만 명으로 추산되고 있다. 추산일뿐 정확하게 알 수도 없다. 

확인된 사망자의 수는 한국군이 22만 7,748명, 미군이 3만 3,629명, 기타 UN군이 3,194명이다. 중국인민지원군과 북한군의 정확한 전사자수는 아직까지 확인할 수 없는 상태이다. 전쟁 기간 중 한국은 43%의 산업시설과 33%의 주택이 완전히 파괴되었다. 북한에 고향을 두고 남하한 실향민의 수가 500여만 명이다. 그 당시 2,000여만 명 인구 중에서 절반에 가까운 일천만명의 백성들이 죽거나 실종되었거나 부상을 입었거나 고향을 떠나야 했다. 

6.25 전쟁 기간 중 948개 처소의 교회당과 기독교 관련 시설이 파괴되었다. 목회자 400여 명이 희생되었다. 이와는 별도로 북한에서만 장로교 교역자 240명, 감리교 교역자 46명이 죽임을 당하거나 행방불명되었다.

우리 중에 적지 않은 이들은 6. 25 전쟁 이후에 태어난 세대들이다. 우리 회중들 가운데는 6. 25 전투에 참전했던 김서경 집사가 참전 용사 중에 유일한 생존자이다. 그 외에 북한에 고향을 두고 피난해서 살아가거나 전쟁 경험 세대가 더러 계시다.

오늘 시편 86편은 다윗이 쓴 비탄시 가운데 한 편이다. 언제 썼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그러나 대단히 곤고하고 군급한 위기 상황을 겪으며 쓴 시가 분명하다. 이 시는 기도 형식으로 되었다. 기도시이다. 다윗은 무엇을 기도하고 있나. 역경과 고난과 공포와 질시와 고통 가운데 절박하고 다급한 심정을 가지고 안타깝게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을 간구하고 있다. 

성경의 인물들을 보라. 아브라함도 전쟁 경험을 가진 언약의 제 1대 조상이다. 그돌라오멜 연합군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아브라함의 일화는 흥미진진하다. 이삭도 우물을 파고 확보하는 일로 인해서 원주민들과 여러 차례 전쟁과 같은 처지의 다툼의 위험을 극복해야만 했다. 야곱은 형 에서와의 관계가 전쟁과 같았다. 형 에서는 20여년 세월이 지난 후에도 400명의 무장한 군대를 동원해서 야곱의 가는 길을 막아서서 대적하고 있었다. 그런 저들 쌍둥이 형제에게 화해가 가능하였던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이다. 

모세도 전쟁의 사람이었다. 출애굽이란 것이 전쟁이 아닌가. 하나님의 도우심이 아니라면 어떻게 뒤쫓아 오는 애굽의 바로 왕의 병거 앞에서 홍해를 육지처럼 건널 수 있었겠나. 200여만 명의 동족을 광야로 어떻게 이끌고 갈 수 있었단 말인가. 인간적인 계산으로는 도저히 결론이 나지 않는 불가능에 가까운 민족적인 대 이동을 하룻밤 사이에 성공적으로 이룩한 것이다. 그것이 유월절 아닌가. 하나님이 하시려고 하시면 이처럼 그 어떤 불가능해 보이는 일도 가능하게 하신다. 

모세 때의 광야 40년도 전쟁의 연속이었다. 불평과 원망을 다스려야 하는 백성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모세와 하나님을 향한 대적행위를 다스리는 것도 전쟁 수준이었다. 밖으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길을 막아 서는 아말렉이나 모압이나 암몬 지역을 통과해야 하는 것도 전쟁의 연속이었다. 

그렇게 보면 가나안의 일곱 족속을 진멸해야 했던 여호수아도 전쟁의 사람, 갈렙도 전쟁의 사람이었다. 사사기의 사사들도 마찬가지다. 언제 전쟁이 없었던 사사 시대가 단 한번이라도 있었는가. 어찌 보면 사람이 살아가는 것 자체가 날마다 전쟁이다. 약육강식. 먹고 먹히고 죽고 죽임 당하는 연속이 삶이다. 하루 하루 매 순간마다 선과 악의 전쟁, 진리와 거짓의 전쟁, 정의와 불의의 전쟁이 맞다. 

다윗은 이미 블레셋의 침략으로 인한 전쟁 위험에 휩싸인 시대에 태어나고 자라났다. 소년 다윗이 아버지 이새의 심부름으로 블레셋과의 전쟁에 참전한 형들을 면회하려고 갔던 곳이 엘라 골짜기의 최전선이었다. 그곳에서 블레셋의 골리앗 장군을 물맷돌 하나를 던져 쳐 죽이고 이기는 용사로 등장하였다.

그 후로 다윗은 평생토록 전쟁의 사람이었다. 다윗은 30살이던 주전 1010년에 왕이 되었다. 70에 죽기 까지 40년 동안 왕이었다. 그런 다윗의 생애는 왕이 되기 이전에 십 수년 동안 사울 왕의 시기와 질투와 불붙는듯한 적대감으로 인해서 죽을 위기를 수도 없이 피해야 했다. 그야말로 광야에 숨고 피하던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이 된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섭리요 인도하심이었다. 그러나 다윗의 왕정기는 그리 평탄하지 않았다. 그의 주변에는 국가의 안과 밖에 대적자들이 끊임없이 포진해 있었다. 하루도 마음 편할 날이 없었다. 노년기에는 아들인 왕자 압살롬의 반역으로 왕궁을 비우고 도망을 가야 할 지경이었다. 그야말로 다윗의 생애는 도전, 역경, 위기, 불안, 두려움, 초조, 공포 이런 표현을 빼면 달리 설명할 것이 별로 없을 정도로 긴장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윗을 존귀하게 붙들어 쓰셨고 위기의 순간순간마다 그를 보호해 주셨다. 

다윗의 생애는 하루하루가 날마다 전쟁터 같았다. 기도하고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는 한 순간도 편할 날이 없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의 제목을 ‘나의 기도를 들으소서’라고 정하였다. 다윗은 무엇을 기도하였나.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17절 분량의 기도문 중에서 마지막 부분 네 절을 읽었다. 다윗은 무엇을 기도하고 있나. 15-16절에만 보아도 “긍휼히 여겨 주세요, 은혜를 베풀어 주세요, 노하기를 더디 해 주세요, 풍성한 인자와 진실을 베풀어 주세요, 내게로 돌이켜 주세요”라고 기도하고 있다. 이 시편 86편 전체를 단숨에 읽어 보면 가장 반복되는 기도가 “은혜를 베풀어 주세요”라는 기도이다. 

3절에 “주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15절에 “주여 은혜를 베푸소서.”, 16절에도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라고 반복하여 기도하고 또 기도하고 있다. 

그렇지 않나. 우리가 뭘 더 복잡한 내용을 갖고 하나님께 기도드릴 것이 있나. 하나님이 나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시기만 한다면 더 바랄 것이 무엇이 있나. 우리 각 사람의 기도가 그러하지 않나.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며 살아가는 것이 신앙생활이 아닌가. 우리가 부르는 찬송가 가사 중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가사가 무엇인가. 은혜에 관한 가사가 아닌가.

“지금까지 지내 온 것 주의 크신 은혜라 
한이 없는 주의 사랑 어찌 이루 말하랴”

가사를 잘 기억하며 불러 보면 은혜를 찬송하지 않는 찬송이 있나.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
큰 죄악에서 건지신 주 은혜 고마워
이제껏 내가 산것도 주님의 은혜요
거기서 우리 영원히 주님의 은혜로.......

젊은이들이 즐겨 부르는 복음 성가도 마찬가지 아닌가. 

“은혜로다 은혜로다 주와 함께 거함이 은혜로다. 
은혜로다 은혜로다 주와 함께 거함이 은혜로다.
주가 계신 지성소에서 주를 찬송함이 
내 영혼에 부어주신 주의 큰 은혜로다.”

신앙생활이란 은혜 생활이다. 기도 생활도 은혜를 아는 이들이 기도생활 하는 것이다. “은혜는 무슨 은혜. 내가 이렇게 건강하고 내 직장이 이렇게 안정되고 내 사업이 이렇게 탄탄한데. 내 가정이 이렇게 평안하고 내 자녀들이 이렇게 잘 나가고 내 남편이 이렇게 능력이 있고 내 아내가 이렇게 조신하는데. 우리 집안이 이렇게 평안하고 형통한데 은혜는 무슨 은혜” 혹시 우리 중에 이렇게 생각하는 이가 단 한 사람이라도 있는가. 

사는 아파트에 다른 교회 부인 권사가 있다. 칠십대 초중반 나이다. 일주일이면 두 번 이상 골프장에 출입한다. 지난 육개월 만날 수가 없었다. 남편 장로가 쓰레기도 버리고 살림을 했다. “요즘 어떠세요.”“교통사고후에 요양하고 있다.”고 대답했다. 며칠전에 정원에서 만났다. 육개월전에 빌딩 주차장 진입하는 운전 중에 맥이 쪽 풀려서 두 손을 내려 놓고 사고를 냈다고 했다. 대형 사고 날 뻔 했다고 했다. 맥이 쪽 풀리니 아무 것도 못하겠다고 했다. 사람이 그런 것 아닌가. 사는 동안 사는 것이다. 매 순간 주의 은혜로 사는 것이다. 

예수의 비유 중에 농사가 풍년이 된 부자의 비유가 무엇인가. “이렇게 창고를 늘리고 쌓아 두었으니 여러 해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그런데 그 날 밤에 하나님이 네 영혼을 부르시면 네 가신 그 소유가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이것이 예수께서 비유로 가르쳐 주신 교훈이다.  

대형 로펌의 잘 나가던 변호사였던 김명섭 변호사가 지난 6월 8일에 55살에 숨졌다. 그날 그는 법정에서 마지막 변론을 위해서 재판정에 일어섰는데 말 한마디 못하고 갑자기 쓰러졌다. 119 엠브런스로 실려갔다. 뇌출혈로 숨졌다. 그는 평소에 이런 글을 남겼다. “지금 행복해야 한다. 지금을 수단으로 생각하지 마라. 지금 행복하지 못하면 지금의 행복은 영원히 찾을 수 없다.  지금 행복하려면 욕심을 버려야 한다. 행복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조건도 필요 없다.”

탐욕과 탐심과 시기와 지나친 경쟁심과 불안의 감옥에 갇혀 살지 말고 매 순간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살아갈 줄 알아야 한다. 그래야 기도를 드려도 진실한 기도를 드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주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힘을 주시고 구원하소서.
다윗은 자신을 주의 종이라고, 여종의 아들이라고 고백하고 있다. 다윗은 이 길지 않은 기도 중에 주여라는 ‘아도나이’라는 고백을 일곱 번이나 반복하고 있다. 이는 자기 자신이 주님의 종이란 고백을 강조하는 기도가 아닌가. 다윗이 하나님을 주님으로 삼고 자신을 종이라고 고백하며 무엇을 구하고 있나. “주여 주의 종에게 힘을 주세요”라고 기도하고 있다.

그렇지 않나. 우리가 병원에 문병 가면 환자에게 “힘을 내세요.”“힘을 내셔야지요”라고 위로한다. “어서 뭐든 좀 잡수시고 힘을 내셔야지요”라고 위로한다. 누가 뭘 먹고 싶지 않아서 못 먹는 게 아니지 않나. 우리가 병들어 보면 음식이 없어서 못 먹는 게 아니지 않나.

누군가는 “힘을 내세요.”라고 인사하지 말고 “제가 힘이 되어 드리겠습니다.”라고 인사하자고 제안하는 표현을 대한 적이 있다. 맞다. 옳다. 좋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 보면 누가 나에게 힘이 되어 줄 수 있나. 나에게 힘을 주시는 분이 누구신가. 내가 약해져 있고, 내가 상심해 있고, 내가 고민에 빠져 있고, 내가 불안해 하고, 내가 두려움과 근심과 염려와 초조의 감옥에 갇혀 있을 때에 나에게 진정으로 힘이 되어 주는 분이 누구인가. 

부모인가. 자식인가. 남편인가. 아내인가. 친구인가. 누구인가. 물론 내 곁에서 나를 사랑해주고 아껴주고 보살펴 주고 돌봐 주고 마음을 써 주는 가까운 가족이나 사랑하는 이의 도움이 힘이 될 수 있다. 힘이 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근원적인 힘은 어디서 오나. 우리가 뭐라고 찬송하나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님을 찬양합니다.”

왜 이런 찬송을 하나. 여호와 하나님이 언제 어디에서 어떤 경우, 어떤 상황에서 나에게 힘이 되어 주시나. 

다윗은 평범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30살에 왕이 되어 70살에 하나님 앞으로 갈 때까지 왕이었다. 그런데 그가 무어라고 기도하고 있나.  3절을 보자.

“주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가 종일 주께 부르짖나이다.”

7절에 보면,

 “나의 환난 날에 내가 주께 부르짖으리니 주께서 내게 응답하시리이다.”

12절에 보면,

 “주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전심으로 주를 찬송하고 
영원토록 주의 이름에 영광을 돌리오리니”

라고 서원하며 기도하고 있다. 전심으로 찬송하고 영원히 주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아가겠노라고 결단하며 서원하며 기도하고 있다. 

그렇다. 하나님이 나의 힘의 근원이시다. 하나님이 보호하시고 은혜 베풀어 주시고 붙들어 주시고 지켜 주시고 인도해 주시지 않는다면 나를 나되게 할 수 있는 힘이란 없는 법이다. 하나님이 우리 각 사람의 힘의 원천이시다. 하나님이 나의 맥박, 나의 호흡, 나의 신경 조직을 관장하신다. 나의 눈 하나 깜빡거리는 것부터 손가락과 발가락 하나 움직이는 것까지 그 모든 사지 백체의 건강과 생명의 근원이 하나님이시다. 나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내 마음, 내 생각, 내 감정, 내 의지, 내 뜻 그 모든 것을 다루시고 다스리시고 지배하시는 힘의 근원이 여호와 하나님 아버지 나의 주님이시다. 그래서 다윗은 이렇게 고백하는 것이다. 

“주여 주의 종에게 힘을 주소서”

뿐만 아니라 다윗은 “주의 여종의 아들을 구원하소서”라고 기도하고 있다. 모세도 어머니가 낳았고 다윗도 어머니가 낳았다. 다윗이 자신을 “주의 여종의 아들”이라고 고백하며 구원해 달라고 간청하고 있다. 다윗이 이 고백 속에는 베들레헴의 이새의 아내로 여덟 아들을 낳아 키웠던 다윗의 어머니를 언급하며 “주님. 주님의 여종인 나의 어머니의 아들인 종을 구원하소서”라고 기도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 각 사람의 주님이시다. 우리는 그분의 다스림과 인도하심과 통치를 받는 종이다. 물론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딸이다. 그러나 다윗이 이러한 고백 속에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높이고 경배하는 겸허하고 진지한 기도자의 고백이 담겨 있는 것이다.

생각해 보라. 주님이 내게 함께 하시고 힘이 되어 주시고 힘을 공급해 주시고 손 붙잡아 주시고 인도해 주시지 않는다면 이 세상에 스스로 존재할 수 있는 그 누군가가 단 한 사람이라도 있는가.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의 구원하심을 간구해야 하는 것이다.

시편 85편은 고라 자손의 시편이다. 거기에도 보면 같은 고백을 하고 있다. 시편 85편 7절을 보라. 

“여호와여 주의 인자하심을 우리에게 보이시며 
주의 구원을 우리에게 주소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주는 나의 여호와 나의 구세주” 이런 고백이 담긴 찬송이 끊이 없이 불려져야할 우리 모두의 찬송이 아닌가. 그런 은혜가 늘 함께 하기를 축원한다. 


은총의 표적을 내게 보이소서.
17절의 ‘은총’은 은혜와 자비와 긍휼을 뜻하는 ‘헤세드’가 아니다. 이 표현은 ‘좋다. 선하다. 아름답다’는 뜻을 가진 ‘토브’라는 단어이다. 이는 다윗 자신이 그의 눈 앞에서 하나님을 대적하고 업신여기며 교만하고 포악하게 행동하는 대적자들 보는 앞에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구체적인 증거로 보여 달라는 간구이다.

<6.25 전쟁 1129일>이란 책이 있다. 이중근 편저이다. 이중근(1941-) 씨는 부영그룹의 창립자이다. 대봉교회 장로이다. 올해 79세인 그는 대한 노인회 회장이다. 지방에 가면 부영 아파트가 많다. 세종시에도 잘 지은 아파트가 부영 아파트이다. 성공한 기독교 기업가다. 고향인 순천에 부영초등학교를 시작으로 전국 140곳의 초중고 대학교에 기숙사, 도서관,  체육관 등을 건축해서 기증했다. 2003년 이후 17년 동안 아시아 아프리카 등지의 16나라에 학교 600여곳을 건축해서 기증했다. 피아노 6만대 이상을 기증했다. 가난한 나라에 칠판 60만개 이상을 기부했다. 저들 나라에 아리랑, 고향의 봄 같은 노래도 보급했다. 주 안에 성공해서 그 받은 복과 은총이 주변 열방으로 흘러 가게 하자. 

14절에 보면 다윗 주변에는 교만한 자와 포악한 자들이 무리를 지어 다윗을 쳐 죽여 없애려고 달려 들었다. 13절에 보면 “내 영혼을 깊은 스올 즉 음부에서 건지셨음이니이다”하고 고백하고 있다. 이는 다윗이 얼마나 수 없이 하나님의 은총의 표적을 체험하며 살아 왔나를 실감하게 하는 고백이다.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꼭 드는 하나님의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곁에는 나라 안과 밖에 대적자들과 원수들이 많았다. 그 모든 것들이 그에게는 위협이요 도전이요 위기요 불안이요 두려움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다윗은 분명한 믿음을 갖고 기도하고 있다. 

“주여 은총의 표적을 내게 보이소서”이전 성경에 보면 “은총의 표징을 내게 보이소서”라고 번역하였다. 그렇다. 하나님은 표징과 표적을 구체적으로 보여 주시는 전능자이시다. 하나님만 의지하고 하나님의 불기둥과 구름 기둥의 인도하심을 받으며 한 걸음씩 한 걸음씩 주님을 따라서 살아가는  승리하는 신앙 생활이 계속되기를  축원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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