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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자와 감자옹심이 한 그릇 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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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최고관리자
작성일 18-08-31 03:33 조회 11,136 댓글 0
 
자와 감자옹심이 한 그릇

어디에나 그 나라 혹은 그 지역의 토속 음식이 있다. 강원도를 대표하는 토속 음식은 막국수와 감자옹심이다. 옹심이 혹은 옹시미라고도 한다. 새알심을 강원도 사투리로 그렇게 말한다. 한 그릇의 맛있는 감자옹심이를 만들려면 감자의 껍질을 벗겨 내고 강판에 갈아 건더기를 자루에 넣고 감자 물을 알맞게 빼 주어야 감자의 아린 맛이 제거되고 빛깔이 곱다. 한 시간쯤 가라앉힌 뒤 웃물을 따라 내고 감자건더기와 앙금을 반죽해 만든다. 감자옹심이는 감자건더기와 감자 전분을 적당히 섞어 만들기 때문에 탄력이 넘치고 씹는 맛이 쫄깃쫄깃하다. 육수는 멸치와 다시마를 한참동안 충분히 끓여서 사용한다. 옹심이가 끓어 떠오르기 시작하면 채로 썰어 마련했던 호박, 표고버섯, 고추 등을 넣고 함께 끓인다. 나중에 김 가루, 깨소금, 황백지단 등의 고명을 얹으면 일품 감자옹심이 요리가 완성된다. 메밀국수나 칼국수를 함께 넣어 끓여 먹기도 한다. 이렇게 설명하지만 한 번도 직접 끓여 먹어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이렇게 정성스러운 과정을 거쳐 끓여낸 감자옹심이 한 그릇이 5,500원이다. 흉년과 기근으로 인해서 쌀이 귀하던 시절에 구황(救荒)식품으로 만들어 먹었다지만 그 맛은 설명하기가 어렵다. 구수한 그 맛이 일품이다. 매끼니 마다 감자옹심이만 먹는다면 질리겠지만 어느 시절 임금의 수라상도 부럽지 않다. 감자는 우리나라의 그 어디에서나 재배할 수 있지만 특히 원주 정선 강릉 등지의 기후에 적합하다. 

감자의 비타민 C는 열을 가해 조리한 후에도 70-80% 정도 보존된다. 섬유질이 많아 콜레스테롤을 저하시키고 소화가 잘 된다. 또한 감자에 함유되어 있는 폴리페놀(polyphenol)의 일종인 클로로제닉(chlorogenic) 산(酸,acid)은 암을 억제하는 효과가 있다. 그 외에도 감자는 아미노산, 단백질, 티아민, 니코틴산 등이 풍부하게 들어 있어서 소화 기관을 강화시켜 주고 혈액을 맑게 하며 몸의 기운을 북돋워 주는 역할을 한다.

감자 꽃을 눈여겨 본 적이 있는가. 보라색 감자가 더러 있기는 하지만 대개는 하얀 감자가 흔하다. 보라색 감자에는 보라색 꽃이 피고 하얀 감자에는 하얀 꽃이 핀다. 가녀린 감자 꽃의 꽃말은 “당신을 따르겠습니다.”이다. 감자의 순한 맛과 잘 어울리는 꽃말인 것 같이 여겨져서 꽃에까지도 정이 간다. 보라색 혹은 하얀 꽃잎의 한 가운데에 노란 꽃술이 밀고 나와 자리 잡으면 봄이 무르익어 가고 여름이 시작된다. 

감자 이야기를 쓰다 보니 권태응(1918-1951)의 시‘감자 꽃’이 생각난다. 이 시는 일제의 창시개명에 반대하는 그의 저항의지를 담은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자주 꽃 핀 건 자주 감자
파보나 마나 자주 감자

하얀 꽃 핀 건 하얀 감자
파보나 마나 하얀 감자”

그는 충주 출신의 문학가이며 독립운동가였다. 그는 한학자였던 할아버지에게서 어려서부터 한문을 배웠다. 그는 문학에 재능이 뛰어 났고 음악과 운동도 좋아했다. 다정다감한 성격에 언제나 정의감이 불탔다. 충주와 서울에서 고등학교 과정을 마친 그는 일본으로 유학하여 1932년에 와세다대학 전문부 문학과에 진학하였다. 그러나 어디에 가나 눈에 띄는 일본 사람들의 부당한 행위에 불만을 품고 항일운동에 나서게 되었다. 결국은 항일운동 혐의로 일본 경찰에게 입건되어 1학년도 마치지 못하고 퇴학당하였다. 그 후에 재일 유학생들을 규합하여 독서회를 조직하여 본격적인 항일운동에 투신하였다. 1939년 5월에 항일운동 혐의로 스가모형무소에 투옥되었다가 폐결핵으로 판정받아 1940년 6월 출옥하였다. 우리나라로 귀국하여 치료를 받던 중 병세가 악화되었고 고향인 충주로 내려가서 농사를 지으며 지냈다. 그는 농사를 지으면서 야학과 소인극(素人劇)을 통하여 민족운동을 전개하였고 어린이들에게 깊은 애정을 갖고 동요 창작활동에도 매진하였다. 그렇게도 소원하던 해방을 맞았으나 자신의 병세는 점점 악화 되어 갔고 약을 구하기가 힘들었다. 결국은 전쟁 중이던 1951년 3월, 33살에 눈을 감고 말았다. 

와세다 대학 동료 중의 한 사람이었던 최규하(1919-2006)는 시대의 흐름과 변화에 별로 눈 돌리지 않고 공부만 열심히 해서 일제시대부터 승승장구하였고 나중에 짧은 기간이지만 대통령까지 지냈다. 그러나 권태응의 생각과 역사의식은 그와는 달랐다. 그의 대표적인 시집 <감자꽃>에는 고추밭, 율무, 옹달샘, 도토리들, 달팽이 등의 작품이 실려 있는데 그는 시의 제목들처럼 자연을 가까이 하면서 민족 독립을 일깨우는 저항시를 써내려갔다. 50년 전인 1968년 어린이날을 맞아 윤석중 선생 등의 후원을 받아 충주 탄금대에 ‘감자꽃노래비’를 세웠다고 한다. 2005년, 항일운동의 공훈이 인정되어 그에게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

일년생인 감자는 덩이줄기 식물의 하나로 남미의 안데스 산맥이 원산지로 알려져 있다. 약 5천 년 전부터 남아메리카에서 재배한 감자는 그 곳을 침공한 스페인 사람들에 의해서 16세기 후반에 유럽으로 전해졌다. 특히 독일과 영국 서부에서 중요한 농작물이 되었으며 아일랜드 사람들은 아예 감자에 의존해서 생활할 정도였다. 19세기 초 약 40여 년 동안 전 세계로 보급되었다. 1845-1846년에 아일랜드에 덮친 전염병과 흉작과 기근으로 인해서 감자를 주식으로 하는 의존도는 점점 높아져 갔다. 우리나라에는 조선 숙종(1661-1720) 때 중국으로부터 전해진 것으로 여겨진다. 

요즘도 어디엔가 배고프게 살아가는 이웃들이 없지 않다. 아프리카나 제 삼 세계의 어린이들 중에는 굶어 죽어 가는 경우도 여전하다. 그러나 돌아보면 오늘 날의 세계 경제는 분배의 숙제인 것이 분명하다. 이건 나라 안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가진 자와 덜 가진 자, 넘쳐 나는 자와 부족한 자가 더불어 살아갈만한 세상을 가꾸어 가는 것이 시대적인 과제 중의 과제이다.  

현대인들은 옛날에 헐하게 먹고 살던 시절에는 없던 각종 병이 만연한 시대에 살아가고 있다. 어떤 병들은 너무 기름지게 먹고 너무 잘 먹어서 생기는 병들도 있다. 이천 년 전인 예수 때의 유대인들의 식생활이나 먹을거리는 오늘날 같지는 않았다. 우리나라도 보릿고개를 극복한 것이 그리 먼 옛날 얘기가 아니지 않나. 그러나 어쩌다 식품을 파는 대형 마트에 가 보면 ‘와...’이렇게 별의 별 것을 다 만들어 먹고 사나 하는 놀라움을 금할 수가 없다. 먹을거리가 지천인 세상에서 살아가지만 굶는 이웃들을 돌아보며 살아가는 것이 주님의 뜻이고 분부이다. 예수께서는 비유 중에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25:40) 감자옹심이 한 그릇이라도 따뜻하게 먹고 잠자리에 드는 것이 꿈인 이웃들이 여전히 적지 않은 세상을 바라보시며 주님은 무슨 말씀을 더 하시고 싶으신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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