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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문    |  지성래목사  | 설교문
영원한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단7:13-14, 요18:33-38) 20241124 왕국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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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4-11-24 21:04 조회 3 댓글 0
 

          영원한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단7:13-14, 요18:33-38)   2024. 11. 24 왕국주일

 

 

오늘 읽은 두 본문을 대하다 보면 마태복음 6장의 주기도문이 생각난다. 마태복음 6장 9-13절에는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신 기도가 나온다. 우리가 ‘주기도문’ 혹은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라고 부르는 내용이다. 그 끝에 보면 13절에, 괄호 안에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이라고 되어 있다. 개역 한글 성경에는 ‘대개’라는 표현이 있었다. 그 뜻은 ‘왜냐하면’이란 의미를 담고 있다. 성경 주석가들은 이 내용은 후대 기독교인들이 유대인의 기도 관습의 끝에 송영이 따르는 것처럼 이와 같은 소중한 내용을 삽입해서 찬양으로 기도하였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렇다. 우리가 하나님을 표현할 수 있는 그 모든 것을 세 단어로 함축한다면 “나라와 권세와 영광”(kingdom, power, glory) 이것 말고 달리 표현할 말을 찾기 어려울 것이다.  이 시간 우리의 대 주재이시며 영원한 왕이신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설명하는 이 세 가지 명제를 묵상하려고 한다. 왕국 주일을 맞이한 우리 각 사람에게 은혜가 되기를 원한다. 이 시간에는 다니엘서 7장 14절에 보면 그에게 주어진 것은‘권세, 영광, 나라’라고 하였다. “그의 권세는 소멸되지 않는 영원한 권세요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라”라고 하였다. 미국 대통령은 4년 임기를 재선할 수 있다. 대한민국 대통령은 5년 단임으로 끝난다. 길어야 5년, 좀 더 길어야 8년 동안 주어지는 권력인데도 세상이 시끌 시끌하다. 세상 왕들의 권세와 평화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권세는 어떻게 다른가. 이사야 9장 6절에 보면 장차 한 아기로, 한 아들로 오실 그 분은 “기묘자, 묘사, 전능하신 하나님, 영존하시는 아버지, 평강의 왕”이라고 묘사 되어 있다.

 

그의 권세(權勢).

권세란 영어 성경에 보면, ‘power’라고 하였다. 권세란 힘이다. 주님의 권세는 사랑의 권세다. 주님의 권세는 긍휼히 여기고, 측은히 여기고, 불쌍히 여기는데서 나오는 권세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사랑의 영에 충만하신 아들이시다. 예수께서는 가시는 곳에서마다 수많은 병자들과 수많은 귀신 들린 자들을 만나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권세는 그 어떤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들의 권세와 달랐다. 예수의 권세는 아론이 입었던 에봇과 같은 화려하고 고급진 제사장의 복장으로 인해서 드러나는 그런 권세가 아니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권세는 곧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권세였다.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드러나는 권세는 창조주 하나님의 권세요 우주 삼라만상을 다스리시는 주권자의 권세였다. 

 

창세기 1장 1절의,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라는 말씀이 깨달아지고 믿어지는 자에게 주님의 권세가 임하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창조의 능력, 예수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 모세 시대에 홍해가 육지처럼 갈라지고, 여호수아 시대에 요단강이 육지처럼 갈라지게 하신 하나님의 권세를 믿는 믿음이 있어야 성경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래야 성경 말씀이 깨달아지기 시작한다.

 

이런 영의 눈이 뜨이지 않으면 성경의 그 많은 기사와 이적들이 다 허구처럼 여겨지고 말 것이다. “어떻게 사십 년 동안 광야에서 하늘에서 내려온 만나만 먹고 살 수 있다는 말이냐. 어떻게 이백여만 명이 먹을 만큼의 어마어마한 분량의 메추라기의 공급이 가능했다는 말이냐. 어떻게 반석에서 생수가 터져 나오는 기적이 가능하단 말이냐.” 이렇게 시비를 걸어오는 이들에게는 할 말이 없다. 그러나 구약 성경과 신약 성경에 하나님의 권세, 예수 그리스도의 권세를 드러내는 기사와 이적의 기록이 얼마나 많은가. 지난 기독교 이천년의 역사가 모두 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권세에 의한 역사가 아닌가. 예수 그리스도의 권세는 성령의 능력으로 드러났다. 초대 교회의 120성도들이 성령 받은 일과 베드로 사도를 통하여 3,000명이 하루 한자리에서 세례 받는 일들은 모두가 다 주님의 권세, 성령의 권세에 의한 기적들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가는 곳마다 각색 병자를 고치셨다. 귀신을 내어 쫓으셨다. 바람과 파도를 잔잔하게 하셨다.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장정만도 오천 명을 먹이셨다. 그날 벳세다의 그 들판에서 기적을 체험한 이들은 여인들과 어린이를 포함하면 이만 명도 넘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권세는 그를 만나기 원하는 모든 백성들의 필요를 채우고, 문제를 해결하는 권세였다. 치유의 권세요, 마귀를 제압하는 성령의 권세요, 자연이라도 다스리는 창조주의 권세였다. 예수 그리스도는 가는 곳곳에서 그를 만나려고 찾아오는 모든 백성들의 필요를 채워 주셨다. 38년된 병자가 나았다. 12해 혈루병자가 고침을 받았다. 앞을 못 보던 이들이 보게 되었다. 말하지 못하고 듣지 못하던 이들이 말하고 듣게 되었다. 걷지 못하던 이들이 걷게 되었다. 한센병이 나았다. 

 

예수의 권세는 여섯 번째 남자를 만나 동거하던 수가성 여인을 변화시켰다. 예수의 권세는 관원이었던 니고데모로 하여금 변화 받은 제자가 되게 하셨다. 니고데모로 하여금 예수의 장례를 엄숙하게 모시는 그 현장에 아리마대 사람 요셉과 힘을 모으게 하였다. 예수를 찾아왔던 니고데모는 예수께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는다면 그런 표적을 행할 수 없을 것이다.”라며 큰 관심을 보였다. 예수는 그에게 “거듭나야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있고,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라고 가르쳐 주셨다. 고민하며 돌아갔던 니고데모는 세월이 흐르고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임 당하신 골고다 언덕의 그 현장에 찾아왔다. 예수께서 그에게 던지신 거듭남의 초청에 대한 말씀이 그를 변화시킨 것이다. 

 

그렇다. 예수의 모든 말씀은 사람을 변화시키는 권세가 있다. 사람을 새롭게 하는 권세가 있다. 권세란 힘이라고 했다. 사람을 변화시키는 힘은 사람의 지혜나 사람의 강압이나 사람의 간청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다. 사람을 변화시키는 힘은 주님의 권세로부터 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진리를 깨달아야 한다. 그러므로 은혜를 받아야 한다. 그러므로 말씀이 들려야 한다. 그러므로 주님의 말씀이 꿀송이 같은 말씀으로 깨달아져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권세를 덧입고 살아가던 베드로는 성령의 충만함으로 예루살렘 성전 미문 앞의 걷지 못하던 거지를 걷게 하였다. 그의 나이는 사십여세였다. 사십년 동안 태어나서 한 번도 걸어 본 적이 없는 중증 장애인이었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의 권세”를 의지하고 그에게 일어나라고 명령하며 오른손을 잡아 일으켰는데 기적이 일어났다. 하나님의 권세, 예수 그리스도의 권세는 불가능을 가능하게 하는 권세이다. 절망을 소망으로, 어둠을 빛으로, 죽음을 생명으로 옮기는 권세가 주님의 권세이다.

 

“난 못해, 난 다 틀렸어, 나는 소용 없어, 나는 이제 끝이야”그렇게 생각하며 살아가는 것은 주님을 믿는 믿음의 사람의 모습이 아니다. 하나님의 권세, 주 예수 그리스도의 권세, 성령의 권세를 믿고 따르는 성도라면 어른이든 아이든, 노인이든 젊은이이든 주님을 절대 신뢰하는 믿음으로 주 어진 매 순간을 살아가야 한다.

매 순간마다, 날마다 내 안에서 역사하실 주님의 권세를 의지하는 믿음으로 살아가야 한다. 요한복음 10장 10절을 자주 인용하고는 한다.“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이는 예수께서 친히 하신 말씀이시다. 예수께서는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15:7)라는 말씀도 약속해 주셨다. 

 

예수의 권세는 사탄 마귀의 악한 권세를 넉넉히 이기는 권세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는 사자처럼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으려 하는 사탄 마귀의 권세를 무력하게 하신다. 예수의 부활은 사망을 이기신 영원한 생명의 권세를 만천하에 드러내신 것이다. 개인이든 가정이든 예수를 주님으로 영접하면 예수의 권세가 가정을 새롭게 하고 가족의 운명을 새롭게 한다. 예수 제대로 만나고, 예수 제대로 믿어서 잘못된 인생은 동서고금에 단 한 사람도 없다. 

 

사도 바울은 예수의 권세에 붙잡히고 나니까 가는 곳마다, 만나는 사람에게마다 예수의 부활과 영생을 증거하였다. 사도행전 26장에 보면 사도 바울이 아그립바 왕 앞에서 간증하고 복음을 전할 기회가 있었다. 그 곁에서 바울의 말을 듣고 있던 베스도 총독은 크게 소리를 지르며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행26:24)고 다그쳤다. 그 때에 바울은 베스도 총독을 향하여 “베스도 각하여 내가 미친 것이 아니요 참되고 온전한 말을 하나이다.”라고 담대하게 대답하였다. 바울은 다시 아그립바 왕에게 시선을 돌리면서 “당신 뿐만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나이다.”라고 전도하였다. 

 

그렇다. 초대 교회의 때에나 오늘날이나 다 마찬가지다. 복음의 권세, 주님의 권세에 붙잡혀 살아가는 믿음의 사람들은 누구나 다 사도 바울과 같아야 할 것이다. 우리 각 사람이 우리의 영원한 왕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그 놀라우신 권세를 믿고 의지하고 따르는 믿음의 사람다운 삶을 살아가기를 축원한다. 

 

그의 영광(榮光).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의 본채를 덧입고 이 땅에 태어나셨다. 누가복음 2장에 보면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신 아기 예수의 탄생 장면이 기록되어 있다. 베들레헴 지역의 목자들이 밤에 밖에서 자기 양떼를 지키고 있었다. 그 때에 주의 천사가 저들의 곁에 섰다. 주의 영광이 그들을 두루 비추었다. 목자들은 크게 두려워하였다. 천사는 저들에게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라고 하였다. 그 때에 홀연히 수 많은 천군이 그 천사와 함께 하나님을 찬송하였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눅2:14)

 

이 찬송을 마친 천군 천사는 하늘로 올라갔다. 아기 예수가 탄생한 마굿간을 찾아간 베들레헴의 목자들은 “듣고 본 그 모든 것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찬송하며 돌아가니라”라고 하였다. 

 

난지 팔일만에 예수는 예루살렘 성전에 가셔서 할례를 받으셨다. 시므온은 늘 예루살렘 성전에서 지내며 이스라엘의 위로자의 탄생을 기다리던 의롭고 경건하고 성령 충만한 믿음의 사람이었다. 그는 아기 예수를 만나서 반갑게 맞이하며 품 안에 건네 안았다. 그리고 하나님을 찬송하였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눅2:30-32)

 

맞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영광의 본채로 이 땅에 탄생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전 생애가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영광의 충만으로 충만한 것을 잘 안다. 생각하여 보라. 비교하여 보라. 신 구약 성경의 인물 중에 위대한 믿음의 선진들이 많다. 적지 않다. 히브리서 11장은 아벨, 에녹, 노아, 아브라함, 사라, 이삭, 야곱, 요셉, 모세, 여호수아, 기생 라합의 믿음을 일일이 기록한다. 그러나 저들의 그 대단한 것 같은 믿음의 생애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과 비교할 수 있는가. 히브리서 기자는 히브리서 11장 32절에서“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 다윗, 사무엘”의 이름만 기록하는 것으로 믿음의 선진들의 기록을 마무리 하였다. 우리가 아는대로 사사 기드온이나 역사적인 인물 다윗에 대하여 기록하라면 얼마나 많은 지면을 할애할 것인가. 그러나 히브리서는 저들의 이름만 기록하고 “저들의 일을 말하려면 내게 시간이 부족하리라로다”라고 덧붙이고 말았다. 물론 하나님 안에서 살았던 믿음의 사람인 저들에게서 영광스러운 신앙인의 위업을 찾아 볼 수 있다. 그 교훈이 적지 않다. 그러나 그 어찌 하나님의 영광,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과 비교할 수 있으랴. 우리는 이렇게 찬양한다. 

 

“영광 영광 할렐루야 영광 영광 할렐루야

영광 영광 할렐루야 곧 승리하리라”

 

그렇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스러운 섭리 가운데 이 땅에 보냄을 받으셨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전하는 천국 비유의 말씀과 그가 행하는 모든 기사와 이적 가운데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하였다. 예수 그리스도는 흠과 티가 없는 하나님의 아들이셨다. 고향 마을 나사렛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영광을 몰라보고 그를 낭떨어지로 끌고 가서 밀쳐서 떨어트려 죽여 버리려고 하였다. “너는 우리가 아는 목수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고 얏잡아 보려고 하였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항상 예수 그리스도를 시기하였다. 급기야는 대제사장의 역대 모든 문중이 나섰다. 산헤드린 관원들과 바리새파, 사두개파 사람들이 똘똘 뭉쳐서 예수를 죽이려고 하였다. 결국은 본디오 빌리도에게 넘겨서 사형 언도를 받게 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은 골고다 언덕에서도 떠나지 않았다. 예수의 시체를 장사지낸 돌무덤 속에서도 하나님의 영광은 떠나지 않았다. 하나님은 예수를 죽은 지 사흘 만에 다시 살리셨다. 예수는 부활하셨다. 하나님은 예수의 죽음으로 인하여 하나님 자신의 영광이 절대로 가려지게 하지 않으셨다. 이 세상 그 어떤 권세, 이 세상 그 어떤 힘으로도 하나님의 영광을 빼앗을 수는 없다. 왜 하나님 안에서 살아가야 하는가. 왜 예수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가. 왜 성령의 충만함과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순종하며 살아가야 하는가. 성도가 하나님의 영광을 따라서 살아가면 하나님은 그 믿음의 사람을 주목하신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영광을 따라 살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따라 살아가려는 믿음의 사람을 외면하지 않으신다. 

 

우리는 창세기 12장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한 믿음의 한 사람 아브라함을 만나게 된다. 우리는 잘 안다. 아브라함에게도 인간적인 부족함과 약점이 많았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믿음의 사람으로 살아가기를 소원하고 결단했던 아브라함의 생을 점점 존귀하게 하셨다. 그 아들 이삭, 그 손자 야곱, 그 증손자 요셉에게서 하나님의 영광이 점점 드러나게 하셨다. 모세는 아브라함의 칠대손이다. 하나님은 모세 때에 가셔서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권세와 능력을 애굽왕 바로 앞에 나타내 보여주셨다. 우리가 잘 아는 열가지 재앙이 그것이다. 하나님은 언제나 어디서나 하나님의 방법으로 하나님의 일을 성취하신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의 하시려는 일을 이룩하신다. 이것이 하나님의 영광,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인 것이다.

 

왜 믿음으로 살아가야 하나.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 몰라도 노아 시대처럼 다 시집가고 장가 간다. 잘 먹고 잘 살아간다. 예수의 비유 내용처럼 다 밭도 사고 소도 산다. 출세도 하고 성공도 한다. 세상에는 하나님 모르고도 잘 나가는 사람들로 넘쳐 난다. 예수 이름 한 번도 안 부르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단 한 번의 기도를 드려본 적도 없는 이들도 나라 안에, 열방에 떵떵거리며 잘 살아간다. 저들은 창세기 10장에 등장하는 니므롯의 자손처럼살아가는 것이다. 창세기 10장 9절에 보면,“니므롯은 여호와 앞에서 용감한 사냥꾼”이라고 하였다. 오늘날 세상에는 니므롯과 같은 이들이 많다. 남들과 비교해서 탁월한 이들이 많다. 힘과 재능과 끼와 외모와 그 출중함이 추종을 불허하는 이들이 많다. 소위 잘 나가는 이들이 많다. 그러나 문제는 그들의 마음 속에 하나님이 거하실 자리가 없다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바벨탑을 쌓던 때처럼 살아가고 있다. 배를 신처럼 섬기며 우상 숭배와 탐심 가운데 갇혀서 살아간다. 요즘 계속되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이스라엘과 하마스의 전쟁을 보라. 30-40년 전에 영화 속에서나 등장하던 가공할 무기들이 총동원되고 있다. 너도 죽고 나도 죽자는 심산이다.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이라고 했다. 전쟁으로 영원한 승리를 얻은 역사가 있는가. 전쟁으로 영원한 권력을 이어나간 왕이 있는가. 지금의 중국의 과거 역사는 어떠하였는가. 역사 속에 앗수르, 바벨론, 메대, 페르시아, 헬라, 로마는 어디로 갔는가. 

 

가이사의 영광, 알렉산더의 영광, 나폴레옹의 영광, 뭇솔리니의 영광, 히틀러의 영광, 진시황의 영광, 징키스칸의 영광, 스탈린의 영광, 히로히토의 영광, 김일성의 영광, 카다피의 영광, 오사마 빈 라덴의 영광이 다 어디로 갔는가. 이 세상에 영원한 영광은 오직 하나 뿐이다. 하나님의 영광,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만이 영원한 것이다. 왕국 주일을 맞아서 예배하는 우리 각 사람의 마음 중심에 주님의 임재로 인한 그분의 영광이 가득하기를 축원한다. 

 

 

그의 나라.

이 세상에 나라가 없이 살아갈 수 있는 국민은 단 한 사람도 없다. 사실 나라의 선택은 나의 몫이 아니다. 태어나 보니 그 나라의 국민으로 태어나는 것이다. 물론 미국 같은 나라는 세계의 다양한 인종의 이민 역사로 발전해 온 나라이긴 하다. 오늘날도 여전히 미국을 동경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나라를 새롭게 선택하기 위해서 어느 나라론가 이민을 가는 이들이 있다. 물론 가능하다. 그러나 생각하여 보라. 누가 전쟁 난민으로 나라의 국경을 넘어서 새로운 삶의 환경을 찾아서 정처 없는 길을 떠나는 것을 원하겠는가. 북한에서 남한으로 이주해 오거나 피난 오신 분들은 잘 기억할 것이다. 일제 말기와 신탁 통치의 격동기를 거치며 건국 선언을 하기는 하였으나 6.25 전쟁으로 폐허가 되었던 그 때를 기억하는 이들이 우리 가운데 생존해 있다.

 

이 세상에 완전한 만족과 완전한 행복을 주는 나라는 그 어디에도 없다. 또한 나라가 아무리 대단한 복지 혜택을 제공한다고 할지라도 그 혜택을 충분히 누리며 살만한 마음가짐이 되어 있지 못하다면 어느 나라에 사느냐의 문제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물론 지구촌에는 상대적으로 열악한 환경의 나라가 적지 않다. 심각한 가난과 경제 위기와 정치적 혼란 가운데 있는 나라도 많다. 전쟁이 끊임이 없는 나라도 있다. 오래도록 계속되는 내전으로 인해서 국경을 넘어 정처 없이 새로운 생의 보금자리를 찾아서 이주를 시도하는 이들도 있다. 북한의 국경을 넘어 보려 하는 탈북민의 실상을 보라. 말레이시아에는 국경을 넘어 온 마얀마 난민들이 넘쳐 난다. 유럽의 영국, 독일, 프랑스 등 여러 나라들은 난민을 받아 들여야 하느냐 마느냐, 받아들인다면 어느 정도 받아들여야 하느냐의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다. 

 

세상에서는 어느 나라의 국민으로 살아가느냐가 이처럼 중요하다. 그러나 성경이 말씀하는 성도의 나라는 이 세상이 아니다. 하나님의 나라이다. 마태복음은 ‘천국’,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은 ‘하나님의 나라’라고 하였다. 요한복음 14장에 보면 예수께서는 천국 즉 하나님의 나라를 ‘내 아버지의 집’이라고 하였다. “가서 너희를 위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14:3)라고 말씀하셨다. 히브리서 11장 16절에 보면 하나님의 나라를 ‘더 나은 본향’이라고 하였다. 히브리서 11장 13 - 15절에 보면 성도는 이 세상에서 외국인과 나그네로 살면서 본향을 생각하는 자들이라고 하였다. 

 

그렇다고 해서 성도들이 이 세상을 염세적으로만 살아서는 안 될 것이다. 본향 집만을 사모하며 이 세상의 나그네길을 함부로 살아서도 안 될 것이다. 예수를 보라. 예수는 이 땅에 머무는 동안에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습니다.”(요17:4)라고 고백하였다. 그렇다. 주를 믿는 성도들인 우리 각 사람은 주어진 삶의 자리에서 “주님이 하라고 하신 일”을 이루어가는 사명자의 삶을 살아가야만 할 것이다. 주님은 우리 각 사람을 믿음의 사람으로 택하시고 부르셔서 구원의 복음을 알게 하셨다. 죄와 악이 많은 세상에서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의 삶을 살기를 기대하신다. 그러므로 죄와 악을 멀리하고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누리며 증거하는 전도자의 삶을 살아가야만 할 것이다. 내 주변의 그 누군가가“당신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니 나도 예수 믿고 싶다. 나도 하나님 믿으며 살아 가고 싶다”라고 말하며 다가올만한 그런 삶을 살아가기를 주님은 원하신다. 그것이 세상의 빛과 소금과 같은 삶이 아닌가. 

 

우리는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를 안다. 주기도문으로 기도한다. 그 기도의 함축, 그 기도의 마무리가 “대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이다. 우리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십시오.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길 원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 진 것처럼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길 원합니다. 오늘도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길 바랍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하며 살아가길 원합니다 이처럼 주께서도 저희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시길 원합니다. 우리를 시험에 들지 않게 해 주십시오. 우리를 악에서 건져 주십시오. 대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기를 원합니다. 아멘

 

이런 기도, 이런 은혜가 날마다 순간마다 우리 각 사람에게 임하기를 축원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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