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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사랑교회
복음 인재를 양성하여,열방선교에 앞장서는 교회
설교문    |  지성래목사  | 설교문
전도자의 감사와 자랑(살후1:1-4) 2025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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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최고관리자
작성일 25-11-02 21:46 조회 11 댓글 0
 

                  전도자의 감사와 자랑(살후1:1-4)            2025. 11. 2

 

 

데살로니가 교회는 칭찬 받을만한 일이 많은 교회였다. 데살로니가 전서 1장에 보면 “믿음의 역사, 사랑의 수고, 소망의 인내”가 모범적으로 소문난 교회였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의 성도들을 생각할 때에 항상 하나님께 감사드린다고 하였다. 그 뿐만 아니라 여러 교회들 앞에서 자랑거리라고 하였다. 이보다 더한 칭찬이 어디에 있을까.

 

 

믿음이 더욱 자라는 것에 대하여.

믿음이 무엇인가. 믿음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우리가 누구의 믿음에 대하여 말할 때에 “저 이는 믿음이 참 좋다” 혹은 “저 이는 어째서 믿음이 저 모양이냐”라고 말한다면 그 상대방의 믿음에 대하여 어떤 기준을 가지고 그런 평가를 하는 것일까.

 

사도 바울은 로마서나 갈라디아서를 비롯한 그의 편지 마다에서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이신득의(以信得義)의 교훈을 일관되게 강조하였다. 그러나 ‘믿음이 있다’ 혹은 ‘믿음이 좋다’ 혹은 ‘믿음이 크다’는 증거는 겉으로 들어나는 그 무엇으로 평가되게 마련이다. 바울 사도가 데살로니가 교회의 성도들의 믿음을 칭찬할 때에 “믿음의 역사”라고 말한 것은 “work produce by faith” 혹은 “work of faith”라고 하였다. 여기서 강조되는 믿음의 역사란 “복음 전파 사역과 이웃을 위한 선행”을 언급한 것이다. 물론 구원은 믿음으로 받는다. 믿음 그 자체의 결과로 구원을 받는 것이다. 예수님 우편 강도는 십자가에서 죽어가는 그 순간에 자신의 곁에 있는 십자가에 달린 예수가 누구인지를 깨닫고 자신도 구원을 받을 수 있게 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그리고 예수님의 구원 초청을 받은 은혜의 주인공이 되었다. 물론 강도짓 하다가 붙잡혀 십자가에 죽게 되었으니 부끄럽고 황송한 구원이다. 그러나 구원을 향한 믿음은 그런 것이다. 선한 행실로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 안에서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성도라면 믿음으로 살아가는 그 증거가 무엇인가. 

 

예수께서는 마태복음 25장의 양과 염소의 비유에서 자세하게 교훈해 주셨다. 내 곁에 있는 주리는 자, 목이 마른 자, 나그네, 헐벗은 자, 병든 자, 옥에 갇힌 자를 대하는 마음가짐과 생활 태도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는 야고보서에서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 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약2:15-16)라고 하였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약2:17)라고 하였다.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 가는 길에 강도 만난 사람이 있었다. 예수님의 비유이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그 현장을 보고 피하여 지나가 버렸다. 그러나 사마리아 사람은 달랐다. 예수님의 교훈의 목적이 무엇인가. 제사장과 레위인이 누구인가. 오늘 날로 하면 목사 장로 권사 집사가 아닌가.

 

주님은 교회를 통하여 주를 믿는 각각의 성도들이 거룩한 공동체를 이루게 하셨다. 그리고 주님의 몸된 교회를 통하여 끊임이 없이 선교와 구제와 봉사를 목적으로 하는 선한 일을 계속하게 하신다. 예수님 자신이 이 땅에 와서 머무시는 동안에 쉴 시간이 없을 정도로 분주하게 누군가를 돌보고 섬기셨다. 날마다 예수님의 곁에는 수 많은 각색 병자들이 넘쳐 났다. 예수님은 식사할 겨를이 없을 정도로 분주하셨다. 예수님은 병자를 고치시고 귀신 들린 자에게서 귀신을 내어 쫓으셨다. 예수님은 세상을 향한 그의 믿음의 증거를 늘 삶으로 보여 주셨다. 

 

오늘 날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믿음이 있다. 믿음이 좋다. 믿음이 크다는 증거가 무엇인가. 우리는 매달 벌어들이는 수입의 일정한 부분을 주님 앞에 봉헌한다. 십일조는 물론이고 예배 시간마다 별의 별 헌금을 드리고 또 드린다. 그런 끊임이 없는 봉헌 신앙과 몸으로 나서서 봉사하고 섬기는 헌신 생활이 아니라면 믿음으로 살아가는 증거를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데살로니가 교회의 성도들은 그런 면에서 믿음이 점점 좋아지고 믿음이 점점 더 자라나는 증거가 사방에 소문으로 퍼져 나갔다. 데살로니가 1장 8절에 보면 “너희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졌다”라고 칭찬하고 있다.

 

믿음이 좋아지고 믿음이 점점 자라나는 두 가지 증거가 있다.

그 하나는 복음을 계속하여 전파하려는 전도자의 태도이다.

또 하나는 누군가를 섬기고 무슨 일인가를 나서서 행하는 선한 행실이다. 

 

그렇지 않나. 과거에 누군가를 통해서 내가 복음의 사람이 되었다면 나 자신 또한 계속해서 내 주변의 그 누군가에게 끊임이 없이 복음이 전파되어 가도록 전도자의 삶을 살아가야 한다. 이것이 마땅하다. 이것은 선택이 아니라 의무이다. 먼 나라에 가서 복음을 전하려고 씨름하는 선교만 거창한 것이 아니다. 나 자신의 일상생활 주변에 있는 사랑하는 가족과 친척과 친구와 주변 사람에게 내가 믿는 믿음이 전파되도록 복음 전도자의 삶을 계속해서 살아가야 한다. 

 

11월 초에 매일 묵상으로 대하는 디모데 후서의 편지 수신자인 디모데의 믿음은 그의 외할머니 로이스와 그의 어머니 유니게를 통해서 전해진 믿음이었다. 외할머니 로이스와 어머니 유니게는 디모데와 같은 시대적인 인물을 키워낸 믿음의 사람이었다. 디모데에게는 거짓이 없는 믿음이 있었다. 디모데에게는 불타오를 만한 각양 은사가 있었다. 

 

지금 나 자신에게 있는 믿음이 계속 자라나는 증거는 복음 전파에 대한 날마다의 태도로 입증된다. 이웃을 대하며 선한 행실을 실천해 나가는 크고 작은 일들로 확증된다. 마태복음 8장에 보면 예수님은 그를 찾아 왔던 백부장의 믿음을 칭찬하셨다.“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느니라”(마8:10)라고 칭찬하셨다. 예수님은 “가라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라고 말씀하시는 그 즉시 백부장의 병든 하인의 병이 깨끗하게 나았다. 

 

우리 각 사람의 믿음이 시들어 가는 믿음이 아니라 점점 싱싱하게 자라나는 믿음의 열매가 풍성하게 맺을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각기 서로 풍성하게 사랑하는 것에 대하여.

사랑은 명사가 아니다. 사랑은 동사이다. 사랑한다는 것은 생각하는 명상의 세계가 아니다. 사랑은 실천하는 행동 명령이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사랑하셔서 그의 아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선물로 보내 주셨다. 예수님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구원을 받았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우리 속담에 “콩 한 쪽도 나누어 먹는다”라는 말이 있다.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라는 속담도 있다. “가는 말이 고아야 오는 말도 곱다”라는 속담도 있다. “이웃이 사촌이다”라는 속담도 있다. 이 모든 속담의 공통점이 무엇인가. 서로 주고 받는 사랑의 힘을 예찬한 교훈을 담고 있다.

가정은 가족이 서로 사랑하며 살아가는 곳이다. 우리나라는 오래도록 대가족 중심이었다. 그러나 오늘 날은 홀로 사는 세대가 1,000만 세대가 넘는다고 한다. 외로움과 고독이 일상이 되어 가고 있다. 사회와 이웃으로부터 고립되어 사는 이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혼자 먹고, 혼자 마시고, 혼자 일하고, 혼자 자고, 혼자 살아간다. 직장 생활도 재택 근무를 선호한다. 점점 홀로 살아가는 이들이 늘어난다. 결혼도 기피하고 출산도 기피한다.

 

외로움이 일상이고 고독이 그림자처럼 따라 다닌다. 고독사 뿐만 아니라 고립사하는 주변 이웃들이 점점 늘어나는 것은 심각한 사회 문제이다. 이제는 국가가 나서서 무언가를 돕지 않으면 안되는 세상이 되었다. 일본은 2021년에 “고독·고립 대책 담당상”직을 신설해 전담 부처가 고독과 고립과 외로움에 대한 정책을 국가가 나서서 총괄한다. 영국은 이미 2018년에“외로움부 장관”을 임명하고 국가적인 전략을 실천해 가고 있다. 스웨덴은 독거노인과 이웃의 가족을 연결하는 매칭 프로그램을 운영해 정서적 유대를 강화 해 나가고 있다. 우리 나라도 독거 노인들을 돌보는 일을 지속해 나가고 있다. 그 모든 제도와 운영의 바탕은 각각 서로를 돌아 보고 살펴보며 돌보고 섬기는 지속적인 사랑의 실천이 아닌가.

 

박용만 회장은 두산 그룹 회장과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직을 성공적으로 마친 저명 인사이다. 경제계의 거목이다. 그는 지난 십여 년 째 매주 이틀씩 달동네에 마련한 조리 공간에서 봉사자들과 함께 반찬을 손수 만든다. 감자도 깍고 콩나물도 다듬고 무와 호박도 썬다. 봉사자들과  함께 정성스럽게 만든 반찬을 150가정의 독거 노인들에게 직접 가가 호호 방문해서 전달한다. 말 벗도 되어 드린다. 옷가지와 이부자리 세탁도 해 드린다. 보여 주기 식이 아니라 삶으로 이어간다. 일상이 된지 오래다. 돈을 주는 것은 담장 너머의 얼굴을 모르는 그 누군가에게 도옴을 주는 일이다. 그러나 그는 직접 발로 뛴다. 직접 나서서 식재료를 다듬과 음식을 만든다. 직접 나서서 한 사람씩, 한 가정씩 찾아 다닌다. 행사로 하는 것이 아니다. 일과가 되었다. 자기 자신은 그 섬기는 보람을 가슴에 담고 돌아 오는 것이다. 요즘 <그늘까지도 인생이니까>라는 책과 <지금이 쌓여서 피어나는 인생>이란 그의 산문집을 틈틈이 읽어 보고 있다. 

 

사랑을 실천하는 일은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다. 아프리카 어린이를 후원하는 것이 귀하지만 내 곁의 병든 가족, 소외된 이웃을 대하는 나의 마음가짐과 태도가 어쩌면 더욱 더 소중한 것이다. 물론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잘해야 하지만 말이다. 내 주변에, 내 가족에게, 나의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그 누군가에게 다가가서 사랑을 나누는 것이 사랑의 실천이다. 말 한마디에도 사랑을 담을 수 있다. 손길 하나 발길 하나에도 가득한 사랑, 풍성한 사랑을 담을 수 있다. 사랑의 실천은 때마다 일마다 계속되어야 한다. 그 유명한 성경 말씀이 데살로니가 후서에 있다.

 

“평강의 주께서 친히 때마다 일마다 너희에게 평강을 주시고 

주께서 너희 모든 사람과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라”(살후3:16)

 

두어 달 전에 전화를 받았다. 후배 목사님이 본인이 사역하는 교회의 특별 새벽 집회에 초청하는 전화였다. 나를 어떻게 아느냐고 물었다. 십 수년 전에 천안남지방 연합 여름 산상 성회에 초청 받아 간 적이 있다. 그 때 나를 만났고 은혜를 받았다고 했다. 지금은 큰 교회의 담임 목사지만 그 때는 목회를 그만 접으려고 까지 하며 3주 동안 금식하며 씨름하며 괴로워 하던 개척교회의 목회자 시절이었다고 했다. 그런데 낯선 선배 목사의 설교에 은혜를 받고 힘을 얻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십 수년 세월이 흘러 갔다. 그는 지금 안양의 큰 교회의 담임 목사로 건강하게 사역을 감당하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에 힘이 있다. 서로 서로 주님의 말씀으로 격려하고 위로하고 용기를 주고 힘이 되어 주는 사랑의 실천자들이 다 되어야만 할 것이다. 사랑의 통로가 되어야 할 것이다. 먹을 것 나누고, 마실 것 주고, 입을 것 주고, 병든 자, 갇힌 자 찾아가 주고 나그네를 환대하는 것 다 좋다. 반드시 그래야 한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해야 한다. 자기 만족으로 끝나거나 자기 생색 내기가 되면 곤란하다. 사랑은 명사가 아니라 동사이다. 예수님은 먹을 시간과 주무실 시간이 모자랄 정도로 사랑을 실천하며 사셨다. 그리고 붙잡혀 십자가에 죽으시기 까지 그의 살이 찢겨 나가고 피와 물을 다 쏟는 사랑의 실천자로 사셨다. 

 

“녹이 슬기 보다는 달아서 없어지는 인생으로 살기를 원한다”라고 말한 이가 있다. 그렇다. 주님은 우리가 몸과 마음과 정성과 힘을 다하여 사랑을 실천하며 살아가기를 원하신다. 

 

 

박해와 환난을 견디는 인내와 믿음에 대하여.

데살로니가 전서는 갈라디아서와 함께 신약 성경 27권 중에서 가장 먼저 쓰여진 편지라고 한다. 마태 마가 누가 요한 복음의 복음서보다 오히려 더 먼저 쓰여졌다. 주후 49 –52년 경에 쓰여진 것으로 전해진다. 그 당시에 기독교인들은 끊임이 없는 핍박을 이겨내야만 했다. 데살로니가 전서 1장 6-7절에 보면 “또 너희가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 우리와 주를 본 받은 자가 되었으니 그러므로 너희가 메가도냐와 아가야에 있는 모든 믿는 자의 복이 되었느니라”라고 하였다. 그 당시의 박해와 핍박은 점점 더 극심해져 가고 있었다. 

 

사도행전 12장에 보면 헤롯 왕에 의해서 요한의 형제 야고보 사도가 목 베임을 당하여 순교하였다. 이 일을 보고 유대인들이 기뻐하였다. 헤롯 왕은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 다기 오는 무교절 기간 이전에 베드로도 붙잡아서 처형할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베드로는 체포되었고 옥에 갇혔다.  군인 네 명씩이 사인 조로  24시간 베드로를 지켰다. 교회의 성도들은 한 마음으로 기도하였다. 하나님은 천사를 보내셔서 감옥에서 잠 자고 있는 베드로를 깨우셨다. 베드로를 이끌고 옥문 앞에 섰다. 옥문이 열리고 또 열리는 기적이 일어났다. 그날 밤 성도들은 마가라 하는 요한의 집 다락방에 모여서 간절히 기도하고 있었다. 그 곳에 도착한 베드로는 문 밖에서 두드렸다. 로데라는 여자 아이가 문 안에서 베드로의 음성을 알아 들었다. 너무 기뻐서 문도 열기 전에 집안에 뛰어 들어 갔다. 기도하는 이들에게 소리쳤다. “베드로 사도가 문 밖에 와 계세요”기도하던 이들이 한결같이 말했다. “내가 미쳤구나” 로데가 대답했다. “아네요 참말이에요. 베드로 사도의 목소리가 문 밖에서 들렸어요”저들이 대답했다. “그러면 문 밖에 천사가 왔나 보구나”

 

그 시간에 문 밖에 서 있던 베드로는 계속해서 문을 크게 두드렸다. 집안에서 로데와 이야기를 나누던 이들이 일제히 현관 문앞으로 몰려 가서 문을 활짝 열었다. 문 밖에는 베드로 사도가 서 있었다. 저들은 서로 깜짝 놀랐다. 베드로는 자신이 그 날 밤에 감옥에서 천사를 통해서 풀려난 기적을 이야기 해 주었다. 그 사실을 예루살렘 교회의 담임 목사인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와 그의 형제들에게 전해 주라고 부탁한 후에 베드로는 그 밤에 그 곳을 떠나서 다른 안전한 곳으로 갔다. 헤롯 왕의 권세는 점점 높아만 갔다. 헤롯이 연설하면 백성들은 큰 소리로 말했다. “이는 신의 소리요 사람의 소리가 아니로다”헤롯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는커녕 점점 자기 권력에 취해 있었다. 사도행전 12장 23절에 보면 “주의 사자가 헤롯 왕을 치니 벌레에게 먹혀 죽으니라”라고 하였다. 권력은 무상한 것이다. 화무십일홍 권불십년이라고 했다. 그 다음 구절의 말씀이 중요한다. 사도행전 12장 24절에 보면 “하나님의 말씀은 흥왕하여 더하더라”라고 하였다. 영원할 것 같던 헤롯 왕의 권세는 끝났다. 헤롯은벌레에 물려 죽었고 초대 교회는 점점 부흥해 갔다. 점점 흥왕하고 왕성해져 갔다. 

 

기독교 2천년 역사에 환난과 핍박과 박해가 없었던 적은 없다. 그러나 성도의 신앙은 환난과 핍박과 박해와 고난 가운데서 점점 더 견고해져만 갔다. 오늘 본문으로 읽은 데살로니가 후서 1장 4절 말씀이 그런 역사적인 사실을 입증한다. 다 같이 한 번 읽자.

 

“그러므로 너희가 견디고 있는 모든 박해와 환난 중에서 너희 인내와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여러 교회에서 우리가 친히 자랑하노라”

 

세상에 견디고 인내하는 믿음의 없이 이루어진 일이 한가지라도 있는가. 신앙 생활은 더욱 더 그러하다. 환난은 언제라도 있다. 고난과 시련과 핍박과 박해는 누구에게라도 있다. 그러나 그 어떤 환난도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의 사랑에게 끊을 수는 없다. 로마서 8장 35절에, “누가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라고 말씀하였다. 그렇다. 우리의 믿음을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는 힘은 이 세상 그 어디에도 없다. 오직 사랑만이 이기고 승리하는 법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그 사랑이 최후 승리하는 것을 믿어야 한다. 

 

336장 찬송가 <환난과 핍박 중에도>의 가사 그대로이다. 

 

환난과 핍박 중에도 성도는 신앙을 지켜 왔다.

옥중에 매인 성도라도 양심은 자유를 누려 왔다.

성도는 고난을 받으나 죽어도 영광이 되는 것이다.

성도가 복음을 위하여 죽도록 충성하는 것은 복되고 영광스러운 일이다. 

 

히브리서 11장에 보면 믿음의 선진들은 “고문, 조롱, 채찍질, 결박, 옥에 갇히는 시련, 스더반처럼 돌에 맞아 죽고, 이사야처럼 톱으로 켜는 죽임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으로 몸을 가리며 유리하였다.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다. 광야와 산과 동굴과 토굴에서 이리 피하고 저리 숨어야 했다.”저들 모두가 우리의 신앙의 선배들이다. 저들이 구름 같이 허다한 증인으로 오늘 날의 우리를 주목하고 있다. 그러므로 모든 무거운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여야 한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12:2)

 

이 좋은 계절, 전도의 열매를 맺으며 복음 안에서 승리하는 나날이 되기를 축원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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