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과 쉼
일에 지친 사람은 좀 쉬고 싶어 하고 일자리를 못 찾아 하고많은 날을 늘 놀고 지내는 이들은 일자리가 그립다. 언제부터인가 우리나라에도 낯 설은 피부색의 이웃 나라 사람들이 적지 않게 눈에 띈다. 그들 중에는 유학생도 있고, 결혼해 온 여성들도 있지만, 이주노동자들이 많다. 현재 1,300여 명의 외국인 노동자가 대우조선 하청업체에서 일하고 있다고 한다. 그들 중 350여 명이 네팔에서 왔다. 우즈베키스탄과 베트남, 미얀마 등의 이주노동자들 중 가장 많은 수이다. 우리나라의 조선산업이 예전 같지 않으면서 작업 현장은 값싼 비정규직과 더 값싼 이주노동자들로 대체되고 있다. 조선소의 노동 현장은 언제나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5년 전에는 조선소 하청 업체에서 일하던 우리나라 인부가 800kg의 강판에 깔리는 사고로 숨지는 사고가 있었다. 3년 전에는 조선소에서 일하던 네팔의 노동자가 추락하여 숨졌다. 최근 삼년 동안 산업현장에서 상해를 당한 이주노동자의 인정 받은 건수 만도 2만 건이 넘는다. 지난 3년 동안 산업현장에서 죽은 이주노동자의 수는 300명도 더 된다. 불법 체류자이거나 법의 혜택을 잘 몰라서 수혜를 입지 못하는 이주노동자들 중에 상해를 입거나 사망하는 경우의 통계는 자료조차 없는 실정이다.
우리나라도 100년 전에 하와이 사탕수수밭과 멕시코의 사탕수수밭에 이주했던 노동자들의 현실이 그러하였을 것이다. 그들 중에서 적지 않은 이들이 다치거나 죽어 갔다. 그나마 살아남은 이들의 후손들이 이민 역사를 써 온 것이다.
네팔에서 우리나라에 와서 이주노동자로 지내는 이들 중에서 35명이 쓴 시를 묶어 <여기는 기계의 도시란다>라는 시집을 출간하였다. 네팔에 두 차례 방문한 적이 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네팔은 산악의 나라이다. 그 높고 아름다운 자연 속에 살던 이들이 빌딩이 숲을 이루고 있는 대한민국에 와서 기계처럼 쉴 틈이 별로 없이 일 만하며 산다. 충분한 휴식 시간이나 휴가도 제대로 주어지지 않는다. 본인 자신도 돈이 될 수만 있다면 잠을 아껴서라도 더 일하고 싶어 한다. 몸은 지쳐가고 고향 산천이 눈에 어른거리며 자기 나라에 두고 온 처자와 부모가 늘 그립다. 자기 나라의 명절이나 가족의 생일을 맞으면 그리움은 더해만 간다.
그 네팔 이주 노동자인 러메스의 시 중에 <고용> 이란 긴 문장의 시의 마지막은 이렇게 끝난다.
“.....
하루는 삶에 너무나도 지쳐서 내가 말했어요
사장님, 당신은 내 굶주림과 결핍을 해결해주셨어요
당신에게 감사드려요
이제는 나를 죽게 해주세요
사장님이 말씀하셨어요
알았어
오늘은 일이 너무 많으니
그 일들을 모두 끝내도록 해라
그리고 내일 죽으렴.”
우리나라 사람들이 하는 말 중에 ‘죽지 못해 산다’는 말이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세계 OECD 국가 중에서 자기 목숨을 스스로 끊는 비율이 가장 높다고 한다. 하루 평균 40명에 육박하며 매년 14,000여 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그 수는 교통사고 사망자의 두 배에 가깝다. 독감으로 죽는 사람이 매년 3,000여명에 이른다. 코로나로 죽은 사람은 지난 반년 동안 300명이 조금 넘는다. 코로나19는 감염율이 높아서 그렇지 사망 비율은 오히려 낮은 편이다.
일이란 무엇인가.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후서 3장 10절에서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고 하였다. 바울은 소문에 들었다. 데살로니가 지역의 사람들 중에는 게으르고 일도 잘 하려 하지 않으며 오히려 일을 만들기만 하고 말썽만 일으키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바울은 그런 저들에게 “조용히 일하여 자기 양식을 먹으라.”(살후3:12)는 권면도 하였다.
사실, 일은 귀한 것이다. 노동은 신성한 것이다. 하나님은 불순종으로 범죄하여 에덴을 떠나게 된 아담에게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으리라.”(창3:17, 19)고 말씀하셨다. 일 즉 노동을 단순히 에덴에서 추방된 아담과 그의 후손인 인간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형벌로만 이해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인류의 문명이란 땀 흘려 열심히 창의적으로 일하는 노동의 열매로 이루어진 것이니 말이다.
물론 세상에는 무위도식하는 이들도 없지는 않다. 부모나 조상이 일구어 놓은 재산을 꽂감 뽑아 먹듯이 뽑아 먹으며 사는 이들도 없지는 있다. 버는 것에는 관심이 없고 쓰는 재주만 있는 이들도 있다. 어느 나라의 어느 도시나 부동산 정책이 쉬운 것은 아니지만 천정부지로 뛰어오르는 아파트 값의 상승은 서민들의 마음을 더욱 우울하게 한다. 아파트를 산 지 한 달 만에 그 값어치가 5억이 뛰었다느니 하는 뉴스를 접하는 서민 대중의 마음을 더욱 허탈해져만 갈 것이다.
예수의 비유 중에 나오는 둘째 아들이 그런 자였다. 그는 일찍이 아버지께 유산을 요구하였다. 유산이란 것이 아버지의 아들이기에 주어지는 크나큰 혜택이 아닌가. 그런데 그 둘째 아들은 아버지에게 요구해서 서둘러 나누어 받은 분깃을 갖고 다른 나라로 떠나갔다. 오늘날로 하면 이민을 간 것이다. 성경의 표현을 그대로 빌리면 ‘허랑방탕’(눅15:13)하게 살았다. 재산이란 것이 있을 때 재산이지 제대로 관리하지 않고 허랑방탕하게 쓰는데 무엇이 남아 있을 수 있겠는가. 결국 그는 남의 나라에서 거지 신세가 되었다. 그 많던 재산이 한 푼도 없이 다 없어졌다. 그가 가서 살던 나라조차도 흉년이 들었다. 그에게 궁핍한 순간이 찾아 왔다. 어느 집에 얹혀살던 중에 주인이 그를 들로 보내서 돼지를 치게 하였다. 쥐엄 열매는 돼지가 먹는 사료인데 그것조차도 주는 사람이 없어서 굶주려 갔다. 그때에 스스로 돌이키는 회개가 시작되었다.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그는 용기를 내어 아버지의 나라, 아버지의 집을 향하였다. 그를 먼저 알아본 것은 아버지였다. 아버지는 아들을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었다.”아버지는 종들을 시켜서 잔치를 준비하였다.
아버지의 집을 떠나는 것은 자기 선택이지만 허랑방탕한 나날의 그 뒤에는 후회와 탄식과 굶주림과 처참한 운명만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것이 일 중의 일이다. 아버지의 집에 머무는 것이 쉼 중의 쉼이다. 예수의 이와 같은 비유 속에 놀라운 교훈이 담겨 있다. 아버지의 집에서는 일하고 싶으면 일하고 쉬고 싶으면 쉴 수 있는 완전한 자유와 혜택이 권한으로 주어져 있다. 이것이 양자됨의 은총이며 자녀됨의 은혜다. 성도는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른다. 이것은 세상의 그 무엇과 비교할 수 없는 특권이며 선물이다.
일 할 수 있을 때에 일하는 것은 축복이다. 땀 흘려 열심히 성실하게 일하고 수고한 후에 쉬는 것은 혜택이며 상급이다. 이처럼 보람되고 기쁘고 만족스러운 일이 또 어디에 있겠는가.
노아는 백 년 동안 세상 사람들의 온갖 비방과 조롱을 감내하며 방주를 건설하는 일을 하였다. 홍수 심판 앞에 그의 판단은 가족 모두를 살리는 구원의 기회가 되었다. 홍수 중의 방주 생활은 쉼이며 안식이며 새날을 준비하고 기다리는 설렘이었다. 모세, 여호수아, 갈렙, 기드온, 사무엘, 다윗, 느헤미야 등등 저들 모두는 일의 사람들이었다. 저들은 숨질 때 되도록 하나님께서 하라고 하신 일을 충실히 감당하였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마찬가지이셨다. 예수는 십자가의 쓴 잔을 피하지 않고 받으셨다. 그 골고다의 죽으심은 일 중의 일이었다. 생명을 바치는 일, 극심한 고난과 고통과 슬픔의 처참한 처형 앞에 비굴해지지 않는 구세주로서 감당해야 하는 일이었다. 그 일이 있은지 사흘 후에 예수는 무덤에서 부활하셨다. 부활은 그를 믿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영원한 안식이다. 일도 귀하지만 쉼이 좋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