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할 곳이 많도다
온 나라가 주택 관련 운영 문제로 소란하다. 청와대는 며칠 전에 장관급의 대통령 비서실장과 비서실 소속 수석비서관 5명 전원이 사의를 표명했다고 밝혔다. 언론은 “부동산 정책이 잇따라 실패하며 여론이 악화한 상황에서 청와대 참모진 중 다주택자가 많다는 사실이 드러나며 문 대통령과 여당 지지율까지 떨어지자 전원 사퇴를 결정한 것으로 풀이된다.”고 전했다. 저들 모두 현 정부로부터 부여받은 국가적인 직위보다 실리적인 재산관리의 길을 선택한 것이다.
사람이 “어디에서 살 것이냐” 하는 거주 공간에 대한 관심은 오랜 역사를 거슬러 올라간다. 사람이 바위 아래서나 동굴 속에서 살고 토굴을 파고 살던 시절이 있었다. 에스키모인들은 지금도 얼음집에서 산다. 아프리카에는 흙집에서 살거나 나무로 기둥을 세우고 풀이나 억새로 얼기 설기 엮어서 원두막 수준의 집을 짓고 사는 이들도 있다. 요즘도 남미나 동남아에서 살아가는 원주민들의 주거 환경은 열악하기 그지없다. 물 위에다 나무를 엮어 수상 가옥을 짓고 사는 이들도 있다. 동남아 사람들은 대대로 얼어 죽을 염려는 없으니 주거 환경을 발전시키는데 별로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을 것이다.
인도는 화장실 한 곳을 백여 명이 사용하며 상하수도가 없는 여건에서 아래층에는 개나 닭이나 돼지나 염소 혹은 오리 떼들이 살고 그 다락에 원두막 같은 집을 짓고 연명하며 살아가는 이들의 수도 엄청나다. 반면에 인도를 대표하는 세계적인 부자 무케시 암바니의 뭄바이에 있는 집은 관리 직원만도 600명이 넘는다고 한다. 시가 1조 2천억 원으로 알려진 27층 건물의 연 면적은 축구장 다섯 개의 넓이다. 거기서 저들 부부와 세 자녀가 살아간다. 건물의 높이는 일반 건물 60층에 해당하는 173m의 빌딩이다. 헬기장이 3곳이고 자동차 168대를 주차할 수 있다. 수영장, 헬스장은 물론이고 50명이 들어가는 영화관도 있다.
사실 우리나라도 왕족이나 귀족과 양반이 아닌 경우의 서민들의 주거 환경은 열악하기 그지 없었다. 조선 시대 말까지 그랬다. 그렇지 않나. 근사하게 지은 백 간 기와 집에서 살다가 죽은 이들이 몇이나 되겠는가. 우리나라 농어촌과 산간 마을에 새마을 사업이 본격화되기 이전의 주거 환경은 참으로 형편이 없었다. 주방 시설, 난방 여건, 화장실 상황, 상하수도를 해결하는 일 등등 그 어느 것 하나 번듯한 것이 없었다. 선교사들이 이 땅에 와서 남긴 글에 보면 “이렇게 지저분하고 이렇게 가난하고 이렇게 열악한 환경에서 사는 이들에게 어떻게 하면 복음을 전할까”를 고민한 흔적이 역력하다.
무주택 가구 주택 문제 해결에 적극적인 태도를 보이는 경기도의 경우를 예로 들어 보자. 경기도의 475만 가구 중 44%에 달하는 209만 가구가 무주택 가구다. 그 중 취약계층 및 신혼부부 등 약 8%의 가구만이 정부 지원 임대주택 혜택을 받고 있다. 나머지 무주택 가구만해도 36%에 이른다
예수 이야기를 좀 하자. 예수는 베들레헴에서 태어났다. 하나님의 아들을 수태한 만삭이던 마리아는 호적하기 위해서 베들레헴에 방문중이던 예비 남편 요셉과 동행하고 있었다. 예수는 태어나자마자 애굽으로 피신했다가 나사렛에 정착하였다. 베들레헴에서 왕이 태어났다는 소문을 들은 헤롯 임금이 베들레헴 주변의 사내아이들을 죽이라고 명령했기 때문이다.
예수를 낳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일찍 세상을 떠났다. 예수는 여러 명의 동생들을 돌보며 요셉의 목수 일을 대를 이어 맡아 하였다. 그렇게 살아가던 예수는 삼십살 때에 나사렛의 어머니와 동생들 곁을 떠났다. 그 이후로 예수는 십자가에 달려 죽임당하기까지 고향 집에서 잠을 잔 적이 없었다. 예수께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은 후에 사십일의 금식을 마쳤다. 그리고 본격적인 선교 사역을 시작한 후에 부르신 열두 제자들과의 일과가 날마다 계속되었다. 예수는 한 곳에 자리를 잡고 산 적이 거의 없으시다. 이 마을과 저 마을 혹은 이 도성과 저 도성으로 이동하셨다. 예수의 제자들은 항상 저녁이 되면 열 세 명의 잠자리를 날마다 해결해야만 했다. 예수와 열두 제자의 매 끼니를 해결하는 일도 일 중의 일이었다.
예수는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마8:20)는 말씀을 하신 적이 있으시다. 천지와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아들께서 정작은 이 땅에 일정한 거처가 없이 생활하셨다. 예수는 그렇게 사시다가 아버지께서 하라고 하신 사명을 완수하고 다시 아버지의 집으로 되돌아가셨다. 평소에 그 하나님의 나라를 설명해 주신 유명한 말씀이 요한복음 14장에 나온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14:1-3)
예수의 제자들 중에 베드로와 안드레 형제 그리고 야고보와 요한 형제 등은 갈릴리의 어부들이었다. 그들은 부모와 그 선대의 때부터 살던 갈릴리 마을의 옛집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 시골집 말고 저들이 예수의 제자로 부름을 받은 후에 문패를 달고 지내던 자기 집은 변변히 없었을 것이다. 하기야 도둑으로 낙인찍힌 가롯유다는 선교후원금을 빼돌려서 예루살렘의 경치 좋은 곳에 대리석 주택을 몰래 사 두었었는지 모를 일이다. 그러한들 무엇하겠나. 그 자신은 아겔다마라 불리게 된 피밭에서 불행하게 죽고 말았으니 말이다. 사도행전 1장 18절에 보면 그 아겔다마라는 피밭은 가롯유다가 ‘불의의 삯으로’사들였던 땅이라고 했다.
열왕기 상 21장에 보면 임금 아합이 나봇의 포도원을 탐낸 적이 있다. 그 포도원은 아합의 왕궁 가까이에 있었다. 물론 아합 왕은 제값을 주고 사길 원했고 다른 곳에 더 아름다운 포도원을 주겠다고 제안하였다. 그러나 나봇의 입장은 분명하였다. “내 조상이 유산을 왕에게 주기를 여호와께서 금하실지로다”(왕상21:3)라고 담담하게 대답하였다. 이런 대답을 들은 아합 왕은 음식을 먹으려 하지도 않고 침상에 누워 지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왕비 이세벨은 왕의 이름으로 편지를 쓰게 하고 인을 치고 봉하여 나봇 주변의 장로들과 귀족들에게 보냈다. 이세벨은 불량배 두 사람을 동원하고 나봇을 결박하여 백성들 보는 앞에서 높은 자리에 앉힌 후에 “나봇이 하나님과 왕을 저주하였다”고 거짓으로 증언하게 하였다. 성읍의 주민들은 나봇을 성읍 밖으로 끌고 나갔고 돌로 쳐서 죽였다. 나봇이 죽임을 당한 소식을 접한 아합 왕은 나봇의 포도원을 차지하려고 그 밭으로 내려갔다. 그때에 하나님은 선지자 엘리야에게 하나님이 아합과 이세벨을 심판하실 것이라고 경고하셨다. 탐심의 노예처럼 지내던 아합과 이세벨의 나중은 참담했다.
집을 투기 목적으로 삼던 일은 로마 시대에도 있었다. 이는 동서고금이 마찬가지이다. 원주민들이 헐값에 팔아넘긴 뉴욕시의 맨해튼이 오늘날과 같은 곳이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서민들은 서울과 같은 도심지에서 번듯한 집 한 칸 마련하며 자식 키우다 보면 나이 들고 늙고 병드는 길을 피할 수 없다.
예수는 머리 둘 곳 없는 고단한 나날을 사시다가 붙잡혀 십자가 위에서 운명하셨다. 그를 장사지낸 무덤의 주인은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었다. 예수는 마구간에서 태어나시고 남의 무덤에 뉘었다가 부활 승천하셨다. 예수께서 평소에 하신 말씀이 이것이다.(요14:2)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