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넝쿨 사랑
맘에 드는 꽃 한 포기나 괜찮은 수형으로 자리 잡은 나무 한 그루의 값이 만만치 않다. 나이도 꽤 먹고 모양이 수려한 소나무는 한 그루에 고급 승용차 두 세대 값을 훌쩍 뛰어넘는 것들도 있다. 지난봄에 주목(朱木) 세 그루를 거저 구해다가 옮겨 심었다. 그 중에 가장 키가 크고 수령이 꽤 되는 주목이 시들고 말았다. 내년 봄에 다시 살 가능성이 희박하다. 그도 그럴 것이 화단의 바닥에 흙이 깊지 못한 여건인데 무리한 이식을 감행한 것이다. 자리 잡지 못하고 시들어 버린 나무를 보면 아무리 말을 못하는 식물이라지만 미안한 생각이 든다. “주목은 살아 천년 죽어 천년이라”고 하지 않나. 자리를 잘 잡았으면 천년을 넉넉히 살 수 있는 나무를 죽이게 되었으니 어찌 미안하지 않겠는가. 겨울이 오길 기다렸다가 높다란 성탄 트리용으로 사용하고 내년 봄에 흙을 더 보강한 후에 능소화(凌霄花)를 몇 그루 그 곁에 심어서 지지대용으로 타고 올라가게 하면 덜 미안할 것 같다. 세월이 지나면 무성한 능소화가 풍성하게 자리 잡을 것이니 말이다.
시골 집 마당 한 귀퉁이에도 능소화가 있다. 문헌에 보면 중국의 <시경>(詩經)에 나오는 소지화(笤之華)가 능소화일 것이라고 한다. 능소화는 적어도 3천 년 전부터 사람들이 심고 가꾸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우리나라의 능소화는 중국에서 들여 왔을 것이다. 과거에는 부인병이나 비뇨기 계통의 질병 치료를 위해서 뿌리와 줄기와 꽃을 약재로 사용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요즘은 주로 관상용으로 사람의 눈길을 끈다. 봄철에 여기저기 풍성하던 형형색색의 꽃들이 지고 나면 한여름에 볼 수 있는 꽃이 흔하지 않다. 그러나 능소화는 여름 내내 아름다운 색상의 꽃이 피고 지기를 계속한다. 잎을 모두 다 떨군 겨울이 찾아오면 가느다란 실을 세로로 덕지덕지 붙여 놓은 것과 같은 회갈색의 줄기가 눈에 띈다. 줄기는 수령이 그리 오래지 않아도 고목 줄기 같은 은은한 느낌을 주며 오히려 기품이 있어 보인다. 과거에는 궁궐에나 양반 집 안 마당에서나 볼 수 있던 귀한 다년생 꽃나무이다.
화분에 옮겨 심은 두 그루의 주목은 그런대로 자리를 잡아 가고 있다. 그 중에 3m 정도 높이로 자라난 중간 크기의 주목은 성탄 트리용으로 제격이다. 그래서 성탄 트리를 할 올해 말의 강림절기를 은근히 기다리는 중이다. 마침 뿌리를 통째 캐내어 옮길 때에 함께 붙어 따라온 담쟁이 넝쿨이 여러 가닥 자리 잡고 줄기를 타고 오르기 시작하였다. 교회 뜰 안에서 볼 수 있는 꽃이나 나무가 적어서이기도 하지만 앙상한 주목의 줄기를 타고 오르는 담쟁이 넝쿨이 대견하고 고맙기까지 했다. 왜냐하면 이식 후에 몸살을 적게 하려고 정원지기가 가지치기를 과감하게 했기에 주목 자체가 좀 허전한 느낌을 주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며칠 전에 어느 몹쓸 마음을 가진 놀부 같은 이웃이 지난 봄과 여름 동안 몇 달째 잘 자리 잡고 주목 줄기를 타고 오르던 담쟁이 넝쿨의 허리 부분을 움켜잡고 끊어 버린 것을 뒤늦게 발견하였다. 너무나도 속이 상하고 그 범인이 누구인지 찾아내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 별것 아니라고 여길 수도 있겠으나 이런 일을 겪고 보니 “그 괘씸한 심보를 가진 이웃은 도대체 어떤 생김새를 가진 이일까”하고 얼굴이라도 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끊겨 나가 화분 가까운 길바닥에 버려진 채 시들어 버린 한 움큼의 담쟁이 넝쿨을 치우면서 성경, 요나서의 요나 생각이 갑자기 났다. 하나님은 회개하고 용서받는 백성들이 되기를 기대하셨던 니느웨 성민들에 대하여 요나는 반대의 생각을 갖고 있었다. 요나는 니느웨 백성이 망하기를 은근히 원하고 있었다. 죄악이 관영하던 도성 니느웨는 앗수르의 수도였다.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라고 했다. 큰 성이란 말이다. 요나는 삼일 동안 성안의 이곳저곳을 다니면서“사십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는 하나님의 심판을 경고하고 회개를 촉구하였다. 그런 후에 니느웨 성읍 동쪽에 앉아서 성의 운명을 지켜 보고 있었다. 초막을 짓고 그늘 아래 앉아 있던 그에게 하나님은 박넝쿨을 예비해 주셨다. 누구나 너무 뜨거울 때에는 손바닥으로라도 햇볕을 가리고 싶어 하는 것처럼 박넝쿨은 요나에게 너무나도 반가운 선물이었다. 박넝쿨이 그늘을 만들어 주자 요나는 크게 기뻐하였다. 그런데 그다음 날 아침에 벌레가 박넝쿨을 갉아 먹자 시들어 버리고 말았다.
요나서를 읽다 보면 박넝쿨이 생겨나서 그늘을 만든 것도 하나님이 하신 일이고 무성하던 박넝쿨이 다음 날 벌레에 먹혀서 시들게 된 것도 하나님이 하신 일이었다.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이러 저러한 일에 마음을 두고 애착을 갖고 살아간다. 그런데 그런 대상이 언젠가는 나에게 실망을 주거나 더 이상 기대할만한 가치가 없는 경우를 경험하게 된다. 어느 어린 여자아이가 팔이 떨어져 나간 인형을 애지중지 아끼는 모습에 대하여 그 마음을 관찰하고 기록한 글을 보았다. “얘. 왜 저렇게 좋은 인형들이 많은데 하필 팔이 떨어져 나간 이 인형을 그렇게 좋아하니?”라고 묻자 그 어린 여자아이가 대답하기를 “팔이 없는 인형의 모습이 불쌍해서 내가 사랑해 주어야만 할 것 같아서요.”라고 대답하더란다.
다시 요나서 이야기를 조금 더 하자. 요나는 그 큰 도시 니느웨 성민들이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와 은혜를 입고 보존 받는 성민이 되길 원하지 않았다. 요나는 하나님으로부터 부름을 받은 선지자인데 어찌 그런 속 좁은 심보를 지녔을까 싶다. 그런 그가 정작은 뙤약볕을 가려 주던 박넝쿨의 혜택을 입으면서 그렇게 크게 기뻐하던 모습은 너무나도 상충되는 장면이 아닐 수 없다. 다음 날 하나님은 벌레를 동원하셔서 박넝쿨을 갉아 먹어 버리게 하셨다. 어제는 시원한 그늘을 제공하던 박넝쿨이 오늘 아침에 시들어 버리자 요나는 머리가 띵하고 혼미해졌다. 하나님은 해가 떠오른 후에 뜨거운 동풍을 동원하셔서 요나로 하여금 더욱 더위에 지쳐 가게 하셨다. 그 때에 요나는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으니이다.”하고 탄식하였다.
요나서는 짧은 선지서이다. 그 다음 장면에는 하나님과 요나의 대화가 이어진다. 토를 달아 설명하기 보다는 성경, <새번역>을 읽는 것이 훨씬 더 은혜와 교훈이 된다.
하나님이 요나에게 말씀하셨다. "박 넝쿨이 죽었다고 네가 이렇게 화를 내는 것이 옳으냐?” 요나가 대답하였다. "옳다 뿐이겠습니까? 저는 화가 나서 죽겠습니다.”주님께서 말씀하셨다. "네가 수고하지도 않았고, 네가 키운 것도 아니며, 그저 하룻밤 사이에 자라났다가 하룻밤 사이에 죽어 버린 이 식물을 네가 그처럼 아까워하는데, 하물며 좌우를 가릴 줄 모르는 사람들이 십이만 명도 더 되고 짐승들도 수없이 많은 이 큰 성읍 니느웨를, 어찌 내가 아끼지 않겠느냐?”(욘4:9-11)
코로나 19로 인해서 비대면의 시간이 점점 길어지고 있다. 누구나 답답하고 우울하고 감염에 대한 두려움이 항상 그림자처럼 염려스럽게 사로잡는 요즈음이다. 그러나 이러한 때일수록 우리는 잠시 잠깐 후면 시들어 버리고 말 박넝쿨 그늘과 같은 것에 대하여 집착하지 말고 이웃을 향하여 진심으로 마음 문을 열고 누군가의 곁으로 가까이 다가가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마음을 가져야만 할 것이다.
성경, 이사야 40장 8절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