높아지려는 자와 낮아지려는 자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은 크게 두 가지이다. 좀 더 높아지려는 상향적인 삶을 사는 이들과 반대로 좀 더 낮은 곳을 향하여 내려가는 하향적인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아담의 아들 가인은 높아지려는 마음을 삭이지 못하여 하나님께 제사 드린 후에 동생을 쳐 죽였다. 사람의 딸들의 외모에 취해서 자기의 마음에 좋아하는 여자들을 아내로 삼던 하나님의 아들들은 이 땅에서 번성하기 시작하였다. 네피림 후손들은 용사였고 고대에 명성이 있던 자들이었다. 그들의 생활양식은 좀 더 높아지려는 마음에 사로잡혀 있었다. 노아 시대의 홍수는 하나님께서 그 당시 인간들의 죄악과 생각과 계획의 악함과 부패상을 더 이상 참아 주지 않으신 심판이었다. 홍수 후에 노아의 세 아들들은 이 땅에서 다시 번성하기 시작하였다. 창세기 11장의 바벨탑 사건은 다시 교만해지고 점점 높아지려고만 하던 인간의 어리석음에 대하여 언어를 혼잡하게 하심으로 심판하신 내용이다.
남들보다 더 높아지려는 인간의 마음은 언제나 계속되어 왔다. 애굽의 왕들이 그랬고 여호수아 시대의 가나안 일곱 족속의 생활상이 그러하였다. 사사 삼손의 나중도 그랬고 이스라엘의 초대 임금 사울의 마지막도 그랬다. 사무엘 선지자는 사울 왕에게 실망하고 더 이상 그를 만나려 하지 않았다. 하나님께서는 사울을 왕 삼으신 것을 후회하실 정도였다. 솔로몬 임금의 나중은 더욱 심각하였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다. 너무 높이 올라가면 내려 올 때가 더 위험하다. 점점 더 높아지려는 상향성이 낳은 역사의 인물이 헬라의 알렉산더였고 로마의 시이저였고 세례요한의 목을 자른 헤롯이었다. 독일의 히틀러도 빼어 놓을 수 없다. 섬나라 일본의 오다 노부나가의 뒤를 이어 일본 전국시대를 통일하고 관백의 자리에 오른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도 그런 자이다. 그는 1592년에 임진왜란을 일으킨 장본인이다. 이시다 미쓰나리(石田三成)는 어린 시절 히데요시의 눈에 띄어 그의 측근으로 있으면서 임진왜란 당시 총감독으로 참전하였다. 그러나 행주 대첩에서 패하고 그 자신은 부상을 입었다. 그 당시 일본인들에게 비추어지는 저들의 모습은 하늘 무서운 줄 모르던 권세와 대륙침략의 상징이었다. 탐험시대와 식민지 시대의 대영제국은 “해가 지지 않는 나라”라고 불릴 만큼 상향적이었다. 또한 몽골의 징키스칸은 자신의 침략야욕이 끝날 날이 있을 것이란 생각을 하며 살기는 했을까.
애굽의 피라미드나 중국 산시 성에 있는 병마용갱(兵馬俑坑)을 보면 인간의 높아지려는 마음이 어디까지인지를 상상하기에 충분하다. 병마용갱은 진시황(秦始皇)의 능에서 멀지 않은 유적지에서 발굴되고 있다. 네 곳의 병마용 갱도 중 세 곳에 모두 8000여 점의 병사와 130개의 전차와 520점의 말이 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 모든 것들은 모두가 흙을 구워 만든 것들인데 아직도 발굴이 되지 않은 상당수가 땅 속에 묻혀 있다. 병마용갱은 진시황제의 장례에 사용된 테라코타(terracotta)이다. 병마용갱은 1974년 한 농부에 의해 발견되었다. 진시황릉과 병마용갱에 대하여 사마천의 <사기>는 진시황이 340만 명의 인부를 동원하여 기원전 246년에 건축하기 시작한 것이라고 전하고 있다.
지난 해 가을에 <세상의 길 그리스도의 길>이란 50여 쪽 분량의 손바닥만 하고 얇은 책을 읽은 적이 있다. 요즘 그 책이 눈에 들어 와서 다시 읽을 기회를 가졌다. 앙리 누앙이 쓴 책이다. 앙리 누앙은 헨리 나우엔의 프랑스식 이름이다. 저자는 그 책에서 인간의 ‘상향성’과 ‘하향성’에 대하여 신학적이고 성경적인 해석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놓았다. 상향성이란 요즘 우리 사회에서 사용하는 시대 언어인 ‘금 수저’가 되기 위한 무한 경쟁의 모습을 말한다. 앙리 누앙은 상향성에 대하여 “오늘날과 같은 고도의 경쟁 사회이자 기술 혁신 사회에 살고 있는 우리들의 삶은 위로 향하려는 충동으로 특징 지워진다. 우리가 이와 같은 상향성의 생활양식에서 벗어나는 것은 상상조차 하기 힘들게 되어 버렸다. 우리 삶의 방식 전체는 성공으로 향하는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서 맨 꼭대기에 이르는 식으로 짜여있다. 문제는 개인이나 공동체의 차원에서 발전하고자 하는 열망에 있는 것이 아니라 상향성 자체를 하나의 종교로 삼는 것에 있다.”고 지적하였다.
그러나 주를 믿는 이들에게 요구하시는 예수의 가르침은 그것과 전혀 다르다. 인류 구원을 위하여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 오셨다. 하나님의 아들의 신분을 버리고 종의 신분으로 오셨다. 예수는 유대 땅 갈릴리의 나사렛 마을에서 결혼을 준비하던 동정녀 마리아의 태를 빌려서 오셨다. 그는 태어나자마자 헤롯왕의 칼을 피하여 강보에 싸인 채 애굽으로 피난하여야만 했다. 그는 세례 요한 앞에서 물로 세례를 받으셨다. 그는 갈릴리에서 물고기를 잡던 어부들을 비롯한 평범한 열두 명을 제자로 부르셨고 그들을 복음의 전도자가 되게 하셨다. 그는 왕의 권력이나 말과 병거 같은 군대의 힘이나 부자의 재물을 탐하지 않으셨다.
앙리 누앙은 그리스도의 하향성에 대하여 “예수는 죄인들과 더불어 먹고 낯선 자들과 함께 이야기하고 소외당한 자의 곁에 머무셨다. 그는 권력의 권좌로부터 무기력함으로, 강력함으로부터 연약함으로, 영광으로부터 치욕으로 자신의 삶을 옮겨 가셨다. 예수의 전 생애는 상향성을 전적으로 거부한 일생이었다.”고 요약하였다.
우리가 아는 대로 예수를 만나는 이들은 그가 왕이 되길 원했다. 그러나 예수의 한결 같은 대답은 “아니다”였다. 그분은 철저히 섬기는 자와 종으로서의 삶을 사셨다(마20:26-28). 그러므로 제자의 길이란 예수를 따라 낮아져 가는 섬기는 자의 삶을 사는 것이다. 예수의 낮아짐은 골고다의 고난과 죽음으로 이어졌고 남의 무덤을 빌려서 그 무덤에 장사 지낸 바 되기까지 낮아지셨다. 그의 죽음은 완전한 죽음이요 처절한 실패자의 죽음 같았다. 그런데 예수는 삼일 만에 부활하였다. 아니 하나님이 예수를 다시 살리셨다. 낮아지는 것이 영광스러운 길이다. 낮아지면 높아지고 죽으면 다시 사는 것이 성경의 진리다.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썩어야 많은 열매를 맺는 법이다. 이것이 영원한 진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