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려와 감사(마6:25-34) 2024. 11. 10
오늘 읽은 본문은 마태복음 5, 6, 7장에 실려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산상 수훈의 일부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염려의 무익함에 대하여 교훈해 주고 있다. ‘메림나오’(μεριμνάω)라는 ‘염려(念慮)라는 단어의 뜻은 “분열하다, 찢어지다”라는 뜻이다. 누구나 그 마음 속에 염려가 찾아들면 마음이 상하고 불안해져서 마치도 헝겊이 찢어지듯이 이리 저리로 나뉘이고 만다. 오래 전에 미국의 어느 연구 기관에서 염려하는 이들에 대한 통계를 조사 분석하였다.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미리 걱정하고 불안해하며 염려한 경우가 40%, 이미 지나가 버린 일을 염려하는 경우가 30%, 불확실한 문제에 골똘해서 걱정과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는 경우가 26%였다. 실제로 염려 거리는 4%밖에 되지 않았다. 우리가 사용하는 말 중에 ‘기우’(杞憂)라는 단어가 있다. 옛날 중국의 기나라 사람이 늘 염려에 사로 잡혀 있었다. 날마다 뭘 그렇게 염려하느냐고 물었다. 그의 대답은 “하늘이 무너질까봐 염려라”라고 대답하였다. 그래서 생긴 말이 ‘기우’라는 말이다.
산상 수훈의 여러 가지 주제의 교훈의 말씀 중에 오늘 본문으로 읽은 바로 앞 부분에는 건전한 재물관에 대하여 교훈해 주셨다. 너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고 하늘에 쌓아 두라고 하셨다. “네 보물 있는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마6:21)라고 하셨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고 하셨다.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6:24)라고 하셨다. 그리고 이어서 교훈해 주신 말씀이 하나님 안에서 살아가는 성도로서 염려 하지 않는 생활 태도에 대한 교훈하신 말씀이 오늘 본문이다.
염려의 실상.
이 세상에 염려 없이 사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다. 누구나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사람은 다 염려, 근심, 걱정, 불안, 두려움 가운데서 초조한 마음을 갖고 살아간다. 문제는 나의 생각을 사로 잡으려 하는 염려로부터 어떻게 탈출해서 감사와 소망과 용기와 힘과 지혜를 덧입고 살아가느냐가 관건이다.
물론 염려의 순기능도 없지는 않다. 사람은 적당한 염려가 있어야 계획도 하고 준비도 하고 대비도 하고 변화와 발전을 꿈꾸고 실현하는 것이 맞다. 그러나 지나친 염려는 사람의 몸과 마음을 상하고 병들게 한다. 1939년에 일어나서 1945년까지 6년 동안 계속 된 제 2차 세계 대전으로 죽은 미국 군대가 407,000여 명이다. 전쟁이 일선에 아들이나 남편이나 가족을 보낸 후에 불안과 두려움과 염려로 인해서 심장병에 걸리고 각종 병으로 죽어간 이들의 수는 그보다 몇배 더 많은 200여만 명이라고 한다.
예수께서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그런 것으로 너무 염려하지 말라고 하셨다. 그보다 중요한 것이 목숨이며 몸이라고 하셨다. 공중의 새와 들에 핀 백합화를 보라고 하셨다. 새는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쌓아 놓지 않고도 잘 살아간다. 들에 핀 백합화는 수고 하는 것도 없고 길쌈해서 입고 사는 경우도 없다. 예수께서는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그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다고 하셨다.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 할 수 있겠느냐”라고 하셨다. 등소평(鄧小平, 1904-1997)의 키는 155cm였다. 1978-1990년까지 22년이나 중국의 주석 자리를 지켰던 그가 스스로 자신의 키를 조절할 수 있었다면 한 30cm 정도는 늘리고 싶지 않았겠는가.
세상 사람들은 별의 별 염려 가운데 갇혀서 살아간다. 불안, 걱정, 근심, 염려, 초조, 두려움, 긴장 가운데서 지낸다. 그래서 스트레스 성 질병이 그렇게 많다. 우울증도 많고 무기력 증으로 고생하며 사는 이들도 많다. 생의 의욕이 없이 답답하게 살아가는 이들도 많다. 대개 몸은 마음의 지배를 받는다. 그러하다 보니 마음의 불안과 염려와 근심과 걱정이 쌓여서 몸에도 이 구석 저 구석에 병이 찾아 든다.
심지어는 하나님을 믿으며 살아가는 성도들 중에도 기도는 기도대로 하고 염려는 염려대로 달고 살아가는 이들이 있다. 베드로는 베드로전서 5장 7절,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라고 하였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4장 6-7절,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라고 하였다. 물론 사도 바울에게도 그의 마음을 붙잡는 염려가 있었다. 고린도후서 11장 28절에 보면, “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아직도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것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라고 하였다. 그는 약한 자를 보면 함께 약해 하였고 실족한 자를 보면 애타하며 안타까워 하였다. 바울은 이방의 복음 전파를 위하여 부르심을 받은 다메섹 체험 이후로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번 굶고 춥고 헐 벗었노라”라고 간증하였다.
기도가 무엇인가.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안에서 살아가는 믿음의 사람의 마땅한 생활 태도이다. 육체의 연단이 유익이 있듯이 기도 생활과 경건 생활은 범사에 유익한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염려하는 대신이 감사함으로 자신의 처지와 상황과 기도 제목을 하나님께 아뢰라고 하였다.
하나님 아버지는 사랑하는 자녀를 돌보시고 위로하시고 격려하신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딸을 지키시고 도우신다. 하나님은 그 얼굴의 빛을 비추셔서 은혜와 평강을 주신다. 모세를 통해서 주신 제사장인 아론과 그의 아들들을 통한 축복 기도가 무엇인가.
“여호와는 네가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항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민6:24-26)
그 다음 절에 보면 하나님은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리라”(민6:27)라고 약속해 주셨다. 맞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믿는 민족과 개인에게 복을 주시기를 원하시는 아버지이시다. 그렇지 않나. 어떤 아버지가 자기 아들딸이 걱정과 근심과 염려와 불안과 두려움에 갇혀서 살기를 원하겠는가.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 너희가 내게 부르짖으며 내게 와서 기도하면 내가 너희들의 기도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렘29:11-13)라고 하였다.
예수께서는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마6:30)라고 말씀하셨다. 예수의 이 말씀을 주목해 보라. 염려하며 살아가는 것은 먹이시고 입히시는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믿음과 신뢰가 연약하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렇다. 어떤 부모가 자기의 사랑하는 자식이 문전걸식하며 살기를 원하겠는가. 아무리 흙수저 환경에서 태어난 자녀라도 그 아들 딸이 잘되고 복되고 형통하고 행복하길 원하는 것이 정상적인 그 부모의 자식을 향한 소원과 기대가 아니겠는가. 맞다. 하나님은 하나님 아버지 안에서 그 사랑과 은혜를 덧입고 살아가는 자녀들이 염려의 감옥에 갇혀서 불행하게 살아가기를 원하지 아니하신다. 먹고 입고 살아가는 의식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허덕이는 인생으로 살아기를 원하시지 않는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 안에서 그 영혼이 잘되고 그 범사가 잘 되며 강건하고 행복한 삶을 영향력 있게 살아가기를 원하신다.
예수님의 기대.
하나님은 하나님의 아들딸들이 삶의 우선순위를 분명하게 하고 살아가기를 원하신다. 어린 시절과 청년의 때와 장년의 때와 노년의 날에 하나님 안에서 어떤 삶을 살아가야 할지에 대하여 분명한 인생관을 갖고 살아가기를 기대하신다.
마태복음 6장 33절의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라고 하셨다.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것을 생의 우선순위에 두고 살아가라고 하셨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예수께서는 이 땅에 계신 동안에 말씀하신 모든 비유 말씀의 주제가 한결같았다. “하나님의 나라 즉 천국”이었다. 예수께서는 이 세상 나라에 대한 관심보다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관심에 집중하셨다.
물론 우리는 이 세상에 몸을 담고 살아가는 동안에 이 세상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을 수는 없다. 추우면 춥고 더우면 덥고 배 고프면 배 고프고 몸이 아프면 아픈 것이다. 생노병사(生老病死)의 과정을 피할 인생은 단 한 사람도 없다. 천하를 호령하는 권세자라고 해서 천년을 사는 게 아니다. 예수께서 마태복음 6장 29절에서 인용하신 이름 ‘솔로몬’은 60살에 죽었다. 솔로몬은 20살에 왕이 되어 죽기까지 40년 동안 왕이었다. 그런 그에 대하여 예수께서는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라고 하였다. 생각하여 보라. 천하를 호령하는 권력자라고 천년을 사나. 북한의 김정일은 69살에 죽었다. 세계적인 재벌이라고 만년을 사나. 절세가인이라고 영원히 사나. 마릴린 먼로는 36살에 죽었다.
그러므로 인생이 창조주 하나님 앞에서 생의 우선순위를 정하고 실천하며 살아가지 아니하면 남는 것은 후회와 아쉬움 뿐이 되고 말 것이다. 예수께서는 분명하게 말씀하신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이 모든 것’이 무엇일까. 해 아래 살면서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며 하나님이 주시는 생의 낙을 누리며 전하며 사는 성도의 삶, 하나님의 자녀의 삶을 가치있고 보람 있게 누리며 살게 해 주신다는 약속이 아닌가.
유덕종(1959- ) 의사는 경북의대 출신이다. 1992년, 한국국제협력단(KOICA·코이카)의 제 1기 모집 3명의 의사 중 한 사람으로 아프리카 우간다에 도착했다. 2년마다 계약을 연장하는데 오늘날까지 아프리카에 머물고 있다. 그는 가난과 불편 속에서 진정한 행복을 찾았다고 말했다. 지난 32년 동안 우간다와 에디오피아에 병원을 세우고 의과대학을 세웠다. 4,000명의 의과 대학생을 키워냈다. 우간다에서 23년, 에디오피아에서 9년째 의료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세 딸들도 아프리카 현지에서 초중고등학교를 졸업했다. 그 후에 한국에 와서 대학을 다녔다.
“전기와 수도, 의료와 치안 등 부족한 게 많은 우간다에 비하면 한국은 너무나도 풍족하다. 파라다이스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사람들은 감사할 줄 모르고 남과 비교하며 스스로 불행하게 살아가는 이들이 너무나도 많은 것 같다.”
“큰딸이 뇌수막염으로 생사를 오갈 때 전기도 없이 모기장 안에 촛불을 켜고 돌봐야 했다. 응급 상황이 생길 경우 한국이라면 인공 호흡이나 보조 치료로 대처할 수 있었을 것이다. 아프리카에는 아무 의료 장비도 없었다. 생명만 유지하면 나아질 가능성이 높은데, 손쓸 방도가 없으니 너무나 마음이 아프고 괴로웠다. 할 수 있는 건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기도뿐이라 울부짖으며 기도했다. 큰 딸을 그 때에 하나님이 살려 주셨다.”큰 딸을 위해 기도하는 그의 곁에는 청년기 때에 교회에서 만난 아내가 늘 함께 있었다.
“한국은 몇 평 아파트에 사느냐, 내 집이냐, 전세냐, 월세냐, 무슨 차를 타느냐, 서울에 살면 강남이냐 강북이냐, 애들이 어느 대학 다니냐 그런 것으로 자신을 드러내려는 것이 너무나도 이상하게 여겨진다”라고 했다.
대구에서 태어난 그는 초등학교 4학년 때 엄마가 돌아가셨다. 할머니마저 중학교 1학년 때 돌아가셨다. 보건소 공무원이었던 아버지 곁에서 자라났다. 그는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우선순위에 두고 평생을 달려 온 이 시대의 증인이다.
정문현 장로는 캐나다 프리마코프 변처스(Primacorp Ventures) 회장이다. 캐나다 최대 교육 기업인 CGI회장이다. 피터 정 회장은 캐나다에 40개의 직업 학교, 3개의 예술 학교를 운영하고 있다. 종합대학도 2개를 운영한다. 북미 지역에 100만평 이상의 부동산을 관리하고 있다. 사회 복지 재단인 코람 데오 재단을 통해서 아프리카에 집중 선교하였다. 미국 LA에서 개척 교회 목사 아들로 청소년기를 보냈다. 선교사의 꿈이 있었던 그는 아버지로부터“선교하는 선교사보다 선교사를 후원하는 선교사”의 길을 걷는 것이 좋겠다는 제안을 마음에 품었다. 수입의 30%를 선교에 쏟아 부었다. 파라과이, 아이티, 에디오피아, 탄자니아에 수 없는 고아원을 세웠다. 1,000개 이상의 우물을 파 주었다. 파라과이 명예 총영사로 임명 받기도 하였다. 그는 100만명에게 복음 전하고 43만명이 그의 비즈니스 선교를 통해서 복음을 받아 들였다. 1,375개의 교회를 개척하였다. 하늘 나라로 앞서 간 아들 이름으로 요셉 장학회를 운영하고 있다. 매년 목회자와 선교사 자녀들, 특수 교육을 공부하는 학생들, 지적 장애 가족을 둔 학생, 탈북민 학생들에게 꾸준히 장학금을 후원하고 있다. 장애와 비 장애인이 함께 바리스타로 섬기는 조스 테이(Joe’s Table)블 카페를 운영하고 있다. 큰 아들 정요셉은 간질, 자폐증으로 32년 살다가 하나님 앞으로 갔다. 장남 요셉이를 하나님 앞으로 보낸 후에 그는 아내 이성자 권사와 여섯 달 동안을 날마다 눈물로 지냈다. 그는 중학교 1학년 때인 1968년에 부모님을 따라서 미국에 갔다. 아버지는 UCLA 유학생이었다. 아버지의 전공은 교육학이었다. 석사 학위를 받은 후에 신학을 공부하고 목사가 되었다. LA에서 개척교회를 시작하였다. 어머니가 오래도록 고생을 많이 하셨다. 아버지는 10년 동안 사례비도 못 받는 목회를 계속하셨다. 어머니가 생계를 이어 가셨다. 아버지는 성품이 온유하고 인정도 많고 인품이 좋으셨다. 미국 교회 예배당을 빌려 쓰던 한인 개척 교회는 나중에 7만불을 주고 예배당 건물을 마련하게 되었다. 자기도 건축 헌금을 작정하였다. 아버지는 ‘왜 그렇게 많은 헌금을 작정했느냐’라고 말씀하셨다. 그는 고등학교 때 여름 방학 내내 아르바이트를 해서 4,500불을 벌었다. 1,500불은 건축헌금하고 450불은 십일조했다. 1,500불은 어머니께 드리고 나머지를 자기가 썼다.
아버지를 따라서 UCLA에 입학하였다. 형의 기숙사에 얹혀 지냈다. 룸 메이트가 신실한 크리스천이었다. 룸 메이트인 형 친구는 아침 일찍 일어나서 새벽 기도를 했다. 성경을 읽고 큰 소리를 기도했다. 새벽 잠에 방해가 되었다. 불평했더니 형이 “너는 목사 아들이면서 그것도 못 참느냐”라고 했다. 그 룸 메이트 형을 통해서 개인적으로 예수를 만나게 되었다. 그 후로 날마다 학생들에게 전도하였다. 선교사 꿈이 생겼다. 아버지는 “가는 선교사보다 후원하는 선교사의 길을 생각해 보라”라고 하셨다. 친구 중의 한 명은 의과대학생인데 LA의 큰 부자집 아들이었다. 선교사 간다니까 부모님이 경제적인 후원을 끊어 버렸다. 결국 그는 나중에 필리핀 선교사로 떠났다. 자기가 매달 월급의 50%를 그 선교사 친구에게 보냈다. 매년 시간을 내서 필리핀의 그 친구 선교 현장에 방문하였다. 그 친구가 부러웠다. 부럽다고 말하니까 “너처럼 후원하는 이들이 있으니까 선교가 가능한 것이라”라고 대답했다. 주는 자의 기쁨을 깨닫게 되었다. 컴퓨터프로그래머, 엔지니어, 회계사 일도 했다. MBA 공부도 마쳤다. 선교를 후원하는 선교의 길을 가기 위해 사업을 시작했다. 캐나다로 가서 컴퓨터 프로그래밍 수업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어렵게 10명이 모집되었다. 지금은 매년 3만명이 언라인 수업에 참여하는 거대한 교육 기관이 되었다.
그는 사도행전 2장 37절 말씀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라는 말씀을 가슴에 품고 전도한다고 간증했다. 마가복음 16장 15절 말씀,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라는도 늘 마음에 품고 살아간다고 했다.
그는 나누어 주고 도와 주는 자의 기쁨과 전도하는 자의 기쁨을 누리며 살아가고 있다고 했다. 베드로 전서 3장 15절,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라고 하였다. 정문현 장로는 잘 되던 사업이 망해서 95%의 재산이 날아간 적도 있었다. 남아 있는 5%의 작은 재산으로 다시 일어섰다. 그런 실패의 경험을 통해서 그는 하나님 앞에서 겸손한 믿음의 사람으로 다듬어지게 되었다고 고백하였다.
전도서 3장 12절, “사람이 사는 동안에 기뻐하며 선을 행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없는 줄을 내가 알았고”라는 말씀이 있다. 젊은이이든 장년이든 노년이든 하나님 안에서 누구든지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며 살아갈 때에 하나님이 친히 영광을 받으시고 그 각 사람의 삶을 주 안에서 존귀하고 보람되게 인도하실 것이다.
예수님의 충고.
예수께서는 “내일 일을 염려하지 말라고 하셨다.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라고 하셨다.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라고 하셨다. 우리는 이 말씀을 곡해 해서는 안될 것이다. 내일 일을 염려하지 말라는 말씀은 아무 계획이나 준비나 인생 설계도 없이 하루 하루 되는대로 막 살라는 말씀이 절대로 아니다. 성도는 하나님 앞에서 하루 하루 순간 순간을 최선을 다하여 성실하게 살아가야 한다. 그것이 주님이 기대하시는 바이다. 때로는 주님도 우신 적이 있으셨다. 친구처럼 지내던 나사로의 죽음의 소식을 듣고 눈물을 흘리시기도 하였다. 마태복음26장 38절에 보면 겟세마네 동산으로 기도하러 가시던 예수께서는 함께 동행하길 원했던 베드로와 세배대의 두 아들인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가시면서 고민하고 슬퍼하셨다. 친히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되었으니”라는 말씀도 하셨다. 맞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도 고민은 고민으로 슬픔은 슬픔으로 받아 들이셨다. 우리의 일상이 그러하지 않나. 슬픈 일이 있는데 기뻐할 자가 누가 있나. 마음이 괴로운데 단풍놀이 가는 사람이 어디 있나.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
우리가 평생을 살면서 ‘하루’라는 시간이 얼마나 소중한 시간인지를 깨닫게 된다. 어린이나 소년기 때에는 어서 세월이 흘러서 어른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시간과 세월이 얼마나 쏜살과 같이 지나가나 모른다. ‘쏜살 같다’는 말이 무엇인가. 화살이 활시위를 떠나면 참으로 빠른 속도로 날아간다. 인생이 그렇게 세월이 흘러 간다. 연세가 드실 만큼 드신 분들은 아실 것이다. 생각하여 보라. 인생이 일장춘몽(一場春夢)처럼 지나간다. 올해도 덥다 덥다 하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난방을 시작하는 계절이 되었다. 올 한해도 40일밖에는 남지 않았다.
정문현 장로는 하나님 앞으로 가기 전에 그 동안 벌게 하신 돈과 재물을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해서 모조리 다 쓰고 가고 싶다고 했다.
“내일 일을 난 몰라요 하루 하루 살아요”라는 찬양은 세상을 무책임하게 살아가는 자들의 찬양이 절대로 아니다. 시간과 세월과 생명의 주관자이신 여호와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을 절대 신뢰하며 살아가기 원하는 믿음의 사람의 고백이 담긴 찬양인 것이다. 오늘이란 하루의 시간의 가치를 소중하게 여기며 오늘 이 세상에 살아 있음을 감사하는 사명자의 찬양인 것이다. 누가 가도한 것처럼 “오늘은 어제 이 세상을 앞서 떠난 이들이 그렇게 살고 싶어 했던 새 날인 것이다.”예수께서 말씀하신,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 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
라는 말씀은 하루 하루 순간 순간의 삶을 부르심을 따라서 충성된 사명자로 살아가라는 분부이신 것이다.
그 찬양의 3절 가사는 이렇다.
“만왕의 왕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만백성을 구속하사
참 구주가 되셨네 순교자의 본을 받아 나의 믿음 지키고
순교자의 신앙 따라 이 복음을 전하세 불과 같은 성령이여
내 맘에 항상 계셔 천국가는 그 날까지 주여 지켜 주옵소서”
우리 함께 이 찬양을 부르며 결단하는 기도의 시간을 갖기를 원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