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城)에 들어갈 권세
해가 바뀌었지만 온 나라가 거짓말의 거미줄에 얼기설기 뒤덮이어 있는 듯하다. G-20정상회의를 개최한 나라들 중의 하나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국들 중에서 상위권의 위상을 자랑하는 대한민국이 부끄러워졌다. 역대 최고 명문대학을 나오고 법을 너무나도 잘 알며 국가의 요직을 맡아 일하던 정부의 요인들이 매사를 거짓말로 일관하고 있다. 그 어느 누구도 책임을 지고 역사의 심판 앞에 자신의 양심을 따라 행동하려고 하지 않고 있다. 권한이 정지된 최고 권력자를 비롯하여 너나 나나 할 것 없이 거의 모두가 다 비겁해질 대로 비겁해져 있다. 구한말 나라를 외침으로부터 구해 보려 힘쓰고 일제의 식민지로부터 되찾아 보려고 목숨을 바쳐 애국하던 선조들의 희생 앞에 부끄럽고 민망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몇몇은 이 때다 하고 다음 정권을 쟁취하는 데만 혈안이 되어 가고 있다. 요한 계시록 마지막 장인 22장에 보면 “성에 들어갈 권세를 받을 자”와 “성 밖에 있을 자”를 구분하는 말씀이 나온다. “성에 들어갈 자”란 장차 “구원 받을 자”를, “성 밖에 있을 자”란 “구원 받지 못할 자”를 일컫는 설명이 분명하다. 그러면 누가 구원 받고 누가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말인가. 우선 구원 받지 못할 자에 대한 성경의 설명을 보자. “개들과 점성가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및 거짓말을 좋아 하며 지어내는 자는 다 성 밖에 있으리라.”(계22:15)고 하였다. 저들 성 밖에 있을 자들 중에 거짓말을 좋아 하는 자들과 거짓말을 지어 내는 자들이 포함된다. 비선실세에 의해서 국정 대 혼란이 오고 권력의 중심에 얼씬 거리면서 나라의 기강을 흐트러트린 이들을 색출해 내기 위한 검찰의 수사가 진행 중이다. 청문회 장에서는 “당신 그렇게 거짓말 하면 천국에 들어 갈 수 있겠소. 하나님이 두렵지 않소....”라는 책망의 언성을 높이는 국회의원도 있다. 그리고 “잘 모르겠다. 기억이 나지 않는다.”로 일관하는 증인들의 거짓말이 난무하고 있다. 거짓말이란 무엇인가. 십계명 중의 제 구 계명은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라.”이다. 거짓말이나 거짓 증거는 스스로 자기의 인격을 파멸에 이르게 하는 악이다. 창세기에 보면 타락한 인간인 아담과 하와가 서로에게 책임을 전가하며 죄를 은익하려 하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아담과 하와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 먹은 후에 무화과 나뭇잎으로 부끄러운 곳을 가렸다. 불순종하여 범죄한 후에 동산 나무 숲 사이에 숨어 버렸다.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셨다. “네가 어디 있느냐”(창3:9) 이 질문은 인류 역사에 두고두고 계속되는 질문이다. 오늘 날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은 “000야 어디 있느냐”고 묻고 계시다. 뿐만 아니라 “000야 그 때 그 시간에 네게 어디에서 무엇 하고 있었느냐”고 묻고 계시다. 모르는 것이 없으시고 아니 계신 곳이 없으신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의 가고 오는 길을 모르셨을 리가 없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다 아신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왜 뱀의 유혹 앞에 무너지던 하와에게 나타나셔서 책망하시지 않으셨는가”하고 반문할 수 있다. 또한 “하나님께서 하와의 말을 듣고 선악과를 따 먹으러 따라 나서는 아담에게 왜 책망하지 않으셨는가”하고 질문할 수 있다. 그것이 “자유 의지”의 영역이 아닌가. 하나님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에게 스스로 판단하고 스스로 결정하고 스스로 말하고 스스로 출입할 수 있는 자유를 선물로 부여해 주셨다. 그 선물인 자유 의지를 선용하면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는 역사적인 생을 살게 될 것이다. 그러나 자유 의지를 악용하거나 사탄의 꼬임에 빠져 버리면 예수의 제자 가롯 유다처럼 불행해지고 말 것이다. 가인의 경우를 보라. 가인과 아벨은 아담의 가정에 태어난 형제들이다. 그런 저들이 하나님께 제사 드린 후에 형 가인이 동생 아벨을 죽이고 말았다.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가인에게 아벨의 행방을 물으셨다.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창4:9) 그 때에 가인은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하고 거짓말을 하였다. 영어로는 “I don’t know.” 그리고 이어서 말했다. “Am I my brother’s keeper?”이다.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라는 말은 요즘 청와대와 국회 의사당의 청문회장에서 반복하여 난무하는 말이다. 한 마디로 거짓말이다. 거짓말은 비열하게 자신의 양심을 팔아먹는 비겁자가 사용하는 언어이다. 8년간의 재선 임기를 마치고 물러나는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12년 전인 2004년 미국 일리노이주 민주당 전당대회 기조 연설자로 연설하면서 미국 역사의 중심에 등장하게 되었다. 그의 연설 내용 중에 인용 된 성경 말씀이 이것이다. “Am I my brother’s keeper?”(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그의 연설문을 한글로 인용하면 이렇다. “우리의 훌륭한 개인주의와 더불어 우리를 하나로 연결해주는 지혜와 믿음은 미국이 갖고 있는 고유하고 또 다른 요소입니다. 만약 시카고 남쪽 지역의 글을 읽지 못하는 한 아이가 있으면 그 아이가 비록 나의 자식은 아니지만 그것은 저에게 중요한 문제입니다. 만약 어딘가 약 값을 제대로 감당할 수 없고 병원에 갈 것이냐 집을 임대할 것이냐 하는 하나를 포기해야만 하는 그러한 선택을 해야 하는 어르신이 있다면 그 분은 비록 저의 할아버지가 아닐지라도 그 사실은 나의 삶을 더욱 가난하게 만듭니다. 만약 변호사나 다른 정당한 과정의 혜택 없이 살아가고 있는 아랍에서 이민한 미국인 가족이 있다면 그것은 분명 나의 시민의 자유를 위협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근본적인 믿음이 있습니다. ‘나는 내 형제를 지키는 자요 나는 내 자매를 지키는 자’(I am my brother's keeper, I am my sister's keeper)라는 믿음 말입니다. 이것이 미국을 움직이게 하는 힘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우리 개인의 꿈을 추구하게 허락해주면서도 우리는 여전히 ‘한 가족’이라는 것입니다. ‘E pluribus unum’(많은 사람 중에 우리는 하나)입니다.” 그렇다. 누가 과연 심판을 넘어 상급을 주시는 하나님의 영원한 도성에 들어갈 자로 구별 받을 것인가. 성경은 교훈한다. 역사의 질문 앞에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된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