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을 일답게 하려면
매일 받아 보는 일간지의 주말 삽지에는 “지구를 웃겨라”라는 제목과 함께 ‘폭소, 실소, 냉소, 썩소’를 주제로 하는 짧은 읽을거리를 싣고는 한다. 이번 주의 주제는 폭소하게 하는 내용이 실렸다. 영국의 조 바틀리 씨는 89세의 혼자 지내는 노인이다. 젊어서는 영국군 공수부대 출신으로 지금은 연금을 받으며 생활한다. 그런 그가 최근 지방 신문에 두 차례 구직광고를 냈다. 그가 낸 광고 기사는 이렇다. “지겨워서 죽겠으니 살려 주세요. 89세 노인, 주 20시간 이상 근무, 청소, 가벼운 정원일, 간단한 가구 조립 가능.” 맞다. 연세가 90이 다 되어도 늘 신문이나 뒤적거리고 TV채널이나 이리 저리 넘기며 지내는 것으로는 생활에 만족이 있을 리가 없다. 그는 그의 구직 광고가 알려지면서 여기저기서 인터뷰가 쇄도하자 더욱 적극적으로 자신을 소개하였다. “2년 전에 아내와 사별하고 혼자 책 읽고 TV 보는데 질렸어요. 일 할 때는 내가 나라고 느껴졌지만 연금 생활을 한 이후에는 더 이상 나라고 생각되지 않아요.” 일에 대한 의욕을 갖지 못하고 지내는 이들에게는 이 얼마나 도전이 되는 내용인가. 사람은 일을 하며 살아야 한다. 아기를 낳아 양육하는 것도 일이고 세상에 나아가서 경제 활동을 하는 것도 일이다. 학생은 공부하는 것이 일이고 군인은 나라를 안전하게 지키는 것이 일이다. 일이란 꼭 돈만 벌어야 일이 아니다. 나에게 주어진 건강한 몸과 마음을 가지고 무엇인가 활동하며 생활하는 그 모든 것이 일이다. 그러므로 아무 일도 하려 하지 않고 백수건달(白手乾達)로 살아가는 것은 그런 생활 자체가 죄 된 것이다. 일이 무엇인가. 하나님은 아담에게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창3:17-19)고 말씀하셨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 먹은 후에 주어진 벌(罰)이다. 여자에게 있어서는 생명을 임신하고 자녀를 해산하여 양육하는 그 모든 과정이 불순종에 대한 벌로 주어졌다. 그러나 자녀를 낳는 일이 꼭 벌일 수만은 없다. 일정한 노동과 수고를 통하여 생산적인 그 무슨 일엔가 종사하는 것을 꼭 벌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평민에게는 평민의 일이 있고 임금에게는 임금에게 맡겨진 일이 있다. 그러므로 자기 자신에게 주어진 그 일을 제대로 잘 맡아 하는 것이 세상을 세상답게 살아가는 이치이다. 우리나라는 어린 아기를 키울 때에 ‘도리 도리’를 가르친다. ‘도리 도리’가 무엇인가. ‘도리’(道理)란 도(道)와 이치(理致)가 아닌가. ‘도리’(道理)라는 단어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사람이 마땅히 행하여야 할 바른 길”이라고 되어 있다. 그렇다. 사람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그 누구나 도리(道理)를 잘 감당하여야 한다. 요즘 우리나라가 몹시 어수선한 이유가 무엇인가. 지도자가 자신에게 맡겨진 도리를 제대로 잘 감당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국민들이 실망하고 분노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최근에 고려 대학교의 심리학 교수로 30년을 재직하고 내년에 퇴직을 준비하는 고참 교수의 특강을 접한 바 있다. 그의 아들은 과거에 방위로 근무하였다. 아버지의 마음은 아들이 최전방에 배치되는 군인이 되길 원하였으나 어찌된 연고인지 방위 생활을 하였다고 한다. 그 아들이 소속한 동 사무소에서 그에게 한 겨울에 일을 맡겼다. 눈이 내리면 새벽에 출근하는 시민들의 불편을 해결하기 위해서 새벽 2-3시에 일어나서 관할 지역 안에 있는 지정 받은 육교의 계단에 내린 눈이 얼어붙지 않도록 매 시간 마다 계속하여 눈을 쓸어 내는 일이 책임으로 주어졌다. “다 자란 아들을 부모가 새벽 2-3시에 깨워서 동네에 있는 큰 길의 육교 계단에 쌓이는 눈을 치우라”고 아버지가 부탁한다면 그 추운 겨울에 그 아들이 “네 아버지 그렇게 하겠습니다.”하고 나서서 순종하겠느냐고 우리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방위라는 직책을 국가가 부여하고 의무적으로 일정한 기간 동안 감당해야 하는 군복무 대체 제도를 따라서 국가가 그에게 명령하니까 한 밤중에라도 일어나서 주어진 책임을 다하기 위하여 육교의 눈이 얼어붙지 않도록 깨끗하게 치우는 일을 하더라는 것이다. 그렇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것은 자신에게 주어진 일정한 분량의 일을 하면서 살아가는 것이다. 군인을 예로 들면 땅과 바다와 하늘에서 주어진 일을 제대로 잘 맡아서 성실하게 감당해야 하는 사명이 육해공군에게 주어지듯이 말이다. 사도 바울은 일의 소중함에 대하여 디모데에게 “자기 생활에 얽매이지 않는 좋은 병사와 승리자의 관을 얻기 위하여 경기하는 자와 수고하는 농부”(딤후2:3-6)를 예로 들어 교훈해 주었다. 예수께서는 천국을 비유로 설명하실 때에도 ‘일’과 관련하여 교훈하신 바가 여러 차례 있다. 어떤 사람이 타국에 가면서 세 명의 종들에게 각기 재능을 따라서 자기 소유를 맡겼다. 한 종에게는 다섯 달란트를 또 다른 한 종에게는 두 달란트를 그리고 또 한 종에게는 한 달란트를 맡겼다. 세월이 오래 지난 후에 주인이 돌아 왔다. 다섯 달란트 받은 자와 두 달란트 받은 자는 주인이 떠난 그 직후부터 장사를 시작하여 갑절로 남긴 것을 주인 앞에 내어 놓았다. 그러나 한 달란트 받았던 종이 문제였다. 그는 주인이 맡겨준 한 달란트를 땅 속에 묻어 두었었다. 그리고 주인 앞에 그 한 달란트를 캐어다가 내어 놓았다. 주인은 다섯을 열 달란트로 만들고 둘을 네 달란트로 만든 두 종에게 똑 같은 내용으로 칭찬하였다.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마25:21, 23) 그러나 한 달란트를 땅 속에서 캐어 온 종에게는 엄한 책망이 쏟아졌다.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는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는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마25:26-30) 그렇다. 지위나 직분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주어진 일을 일답게 해 나는 올바른 태도와 자세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