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과 그 역사의 현장-15
예루살렘과 감람산 자락을 거닐면서 생각하는 예수님에 대한 묵상은 특별한 기회였다. 이천 년 전에 주님께서 친히 오가시고 머무시며 기도하셨던 그 곳 말이다. 예수님의 생애는 마지막 일주일에 집중된다. 물론 하나님의 아들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는 삼년 여 동안의 공생애 기간 중에 수많은 각색 병자들을 고쳐 주시고 귀신을 내어 쫓으시고 심지어는 죽은 자들까지도 살려 주시는 각색 기사와 이적을 행하지 않으셨나. 그는 배고픈 무리들을 배부르게 해 주셨다. 그는 한 밤 중에 갈릴리의 호수 위를 걸어서 풍랑을 만나 고생하는 제자들이 타고 있는 배에 오르기도 하셨다. 그가 말씀하시면 바람도 잔잔해졌고 파도도 고요해졌다. 그는 늘 비유를 통하여 천국을 교훈해 주셨다.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신 목적은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에 귀추(歸趨)된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인간의 죄를 속량하시고 부활하심으로 영생의 첫 열매가 되셨다. 이 복음의 비밀을 깨닫지 못했던 사울은 살기등등한 채로 다메섹 성을 향해 가고 있었다. 그는 그 곳에 숨어 지내던 기독교인들을 남녀를 불문하고 붙잡아다가 죽음에 넘기려고 찾아 가던 중에 예수님의 부르심을 체험하였다. 그런 사울이 성령 받고 새 사람이 된 후에 로마교회에 이런 편지를 썼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줄을 믿노니...그가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가 살아 계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계심이니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 지어다.”(롬6:8, 10-11) 이스라엘이나 예루살렘을 방문하는 성지 순례객들에게 이와 같은 믿음이 없다면 굳이 왜 꼭 그 나라 혹은 그 도시를 찾아가야 하느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에 대답할 말이 궁색해 질 것이다. 기독교의 복음은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찾는 신앙의 유일한 대답이다. 이 세상에 또 다른 복음이란 없다. 불교의 조게종 종정을 지낸 승려 성철(1912-1993)은 8년간이나 장좌불와(長座不臥)했다고 한다. 즉 눕지 않고 앉아서 8년을 지내며 지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그는 40년이 넘도록 기우고 또 기워 입은 누더기 옷 두 벌을 번갈아 입으며 지냈다고 한다. 주변의 그 누군가가 음식을 푸짐하게 먹으면 음식 낭비한다고 버럭 화를 내기도 했다고 한다. 그는 대단한 절식을 하며 지냈고 어떤 날은 도토리 한 알을 먹은 것 말고는 뭘 더 먹으려고 하지도 않았다고 한다. 그는 제자들에게 “잠을 적게 잘 것, 말하지 말 것, 책을 보지 말 것, 간식을 먹지 말 것, 돌아다니지 말 것.” 등을 늘 강조하여 권하였다고 한다. 성철 자신도 청빈하게 생활하며 소금기 없는 음식을 조금 만 먹고 작은 암자에서 검소하게 지내며 이 땅에서 82년을 살았다. 속인(俗人)이 성철을 만나고 싶어 하면 삼천배를 한 후에야 만날 기회를 주었다고 한다. 그가 교만해서가 아니라 불상 앞에 엎드리는 삼천 배와 자기 성찰을 강조하였다고 한다. 그렇게 일배일보(一拜一步)하여 평생을 살아간들 자신이 자신을 구원할 수 있는가. 성철은 여러 권의 불교 서적을 썼고 무려 37권의 선림고서들을 번역하고 발간하는데 앞장섰다. 그렇다고 해서 승려 성철이 스스로 세상을 구원하였는가. 아니면 스스로 자신이라도 구원하였는가. 절대로 불교를 폄하하기 위하여 이런 글을 쓰는 것이 아니니 오해가 없기를 바란다. 단지 구원의 길을 소개하려는 것뿐이다. 핍박 받고 옥에 갇히기도 했던 베드로는 재판 받는 자리에서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행4:12)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 세상에 석가, 공자, 맹자, 노자, 장자...얼마나 뛰어나고 유명한 인물들이 많은가. 우리나라에도 최치원, 신숙주, 김시습, 이이, 이황, 정철, 정약용, 박지원 등 얼마나 출중한 사상가와 학자와 대 문장가가 많았는가. 불교의 유명한 대사(大師)들은 또 얼마나 많았는가. 그러나 그들이 그들의 능력으로 이 세상을 구원할 수 있었는가. 정치가는 어떤가. 바로가 애굽을 구원하였는가. 알렉산더, 시저, 징키스칸, 무솔리니, 히틀러, 나폴레옹, 스탈린, 모택동이 자기들의 백성을 구원하였는가. 북한의 김일성과 김정은 그리고 리비아의 카다피, 루마니아의 차우세수크, 이집트의 무바라크, 캄보디아의 폴 포트는 지금 어디에서 무엇하고 있는가. 우리는 왜 예수의 생애와 사상과 말씀과 삶에 주목하여야 하는가. 세계 처처에서 계속되는 크고 작은 폭탄 테러 소식을 대할 때에 이슬람의 모하멧이 살아 있다면 어떻게 반응할까. 우리 일행은 일정상 벳바게 기념 교회에서 이른 아침에 수요일 예배를 드린 후에 예수님이 승천하신 곳으로 전해지고 있는 감람산 꼭대기에 세워진 승천 교회에 먼저 방문하였다. 안타까운 것은 그 곳은 이슬람의 지배 영역이어서 이슬람 세력에 의해서 관리되고 있다. 높은 회색 돌담으로 쌓여 있고 그 내부 정원 중앙에 팔각형의 돔 건물이 예수님의 승천을 기념하는 곳이다. 건축 초기에는 팔각 면이 다 열려 있었다고 하니 지금은 한 곳에만 낮고 좁은 문을 남겨 놓았고 나머지 일곱 면은 돌로 쌓아 막아 놓았다. 건축 초기에는 천정도 하늘이 환히 쳐다 보이도록 열어 놓았다고 한다. 그러나 1187년에 아랍의 살라딘(Saladin, 1138-1193) 장군이 침략하면서 이슬람 사원으로 사용하기 위해서 천장을 돌 지붕으로 막았다고 한다. 그 내부에 예수님께서 승천하실 당시에 두 발로 밟으신 곳의 족적(足跡)이라고 전해지는 돌 판이 보존되어 있다. 누가는 예수님의 승천 장면을 “예수께서 그들을 데리고 베다니 앞까지 나가사 손을 들어 그들에게 축복하시더니 축복하실 때에 그들을 떠나 하늘로 올려 지시니”(눅24:50-51)라고 기록하였다. 그리고 누가는 사도행전에서 예수님의 승천 사실을 “그들이 보는데 올려져 가시니 구름이 그를 가리어 보이지 않게 하더라...제자들이 감람원이라 하는 산으로부터 예루살렘에 돌아오니 이 산은 예루살렘에서 가까워 안식일에 가기 알맞은 길이라.”(행1:9, 12)고 기록하였다.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은 지난 이천년간 기독교 복음이 전파되어온 바탕이요 핵심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