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과 그 역사의 현장-4
예수께서 탄생하실 당시의 베들레헴은 로마의 통치 관할 지역이었다. 월요일 아침 일찍이 베들레헴 언덕 자락에 있는 “베들레헴 목자들의 들판교회”를 방문하였다. 2천 년 전, 목자들이 그 곳의 산자락과 언덕을 누비며 양떼와 염소 떼와 소떼에게 풀을 뜯겼을 그 시대와 별 차이가 없을 것만 같은 대자연이 한 눈에 들어 왔다. 오늘 날도 베들레헴은 이스라엘 땅이 아니다. 아쉽게도 “팔레스틴 자치정부”의 영향권 안에 있다. 베들레헴은 1949년의 ‘제1차 중동전쟁’이 끝난 후에 요르단에 속했었다. 그 후 1967년의 ‘6일 전쟁’이라고 불리는 ‘제 3차 중동전쟁’때에 이스라엘이 점령하였었다. 그러나 베들레헴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의 1993년 ‘오슬로 평화협정’ 이후 1995년 12월부터는 팔레스타인 자치 지역에 속하게 되었다. 베들레헴은 예루살렘에서 남쪽으로 10km 거리에 있으며 해발 777m의 산악 지대로서 높고 낮은 석회암 언덕을 이루고 있다. 베들레헴이 신구약 성경 전체에 차지하는 비중은 크다. 베들레헴은 야곱이 총애하던 부인 라헬이 요셉의 동생 베냐민을 낳고 길거리에서 죽자 슬픔 가운데 길가에 장례한 곳이기도 하다.(창35:19) 사사 시대에는 에브라임 산지에 살던 ‘미가’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의 집에 찾아간 레위인 청년을 제사장으로 삼은 일이 있는데 그 청년의 고향이 유다 베들레헴이다.(삿17:1-13) 이스라엘 백성들과 베냐민 지파와의 전쟁의 원인이 된 레위사람의 첩의 고향도 베들레헴이었다.(사사기 19:1) 베들레헴은 ‘에브랏’(창48:7)과 ‘에브라다’(시132:6; 미5:2) 혹은 ‘유다 베들레헴’(삿17:7)으로 불리기도 했다. 룻기에 등장하는 나오미의 죽은 남편 엘리멜렉의 고향이며 보아스의 고향이고 다윗이 태어나서 자라난 곳이기도 하다.(룻1:2, 2:4). 구속사(救贖史)적이고 목가적(牧歌的)인 내용을 담고 있는 룻기의 배경이 베들레헴이다.(룻1:19-22) 그 언덕 자락은 모압의 여인 룻이 남편을 잃은 슬픔을 안고 시어머니를 따라 가서 정착한 마을이기도 하다. 하루하루 남의 밭을 기웃거리며 밀과 보리 이삭을 주어다가 시어머니 나오미를 공양하던 젊은 이방의 과부에게 마음을 빼앗기고 그녀를 아내로 맞아들인 것은 베들레헴의 대 지주였던 노총각 보아스였다. 그리고 4대 후손 중에 역사적인 하나님의 사람 ‘다윗’이 태어나는 영광스러운 가문을 이루었다. 룻과 보아스의 증손인 소년 다윗은 베들레헴에 보냄을 받은 선지자 사무엘에 의하여 사울 임금의 대를 잇는 이스라엘의 제 2대 왕으로 기름 부음을 받았다.(삼상16:1-13) 다윗 왕 때에 베들레헴은 블레셋에 점령되기도 했다. 전쟁 중에 다윗이 목말라 하자 다윗의 용사들 중 세 명이 블레셋의 적진을 뚫고 베들레헴 성문 곁의 우물물을 떠서 다윗에게 갖다 바쳤다. 감동을 받은 다윗은 그 물을 마시지 못하고 여호와께 부어 드렸다. 다윗은 죽기를 각오하고 블레셋의 요새가 있는 베들레헴의 우물물을 떠온 세 명의 부하들의 충성심 앞에 감격해 하였다. 다윗은 “여호와여 내가 나를 위하여 결단코 이런 일을 하지 아니하리이다. 이는 목숨을 걸고 갔던 용사들의 피가 아니니이까”(삼하23:17)하고 충성된 용사들의 용맹스러움을 하나님께 고하였다. 솔로몬의 대를 이은 아들 르호보암은 분단된 남 유다의 초대 임금이 되어 예루살렘에 거주하면서 이 곳 저곳에 성을 쌓고 국방을 강화하였다. 베들레헴은 그 당시에 견고한 성을 쌓은 곳 중의 한 곳이기도 하다.(대하11:5-12) 하나님은 선지자 미가를 통하여 베들레헴은 메시아로 오실 예수의 탄생지가 될 것이라고 예언하셨다.(미가 5:2) 세월이 흘러갔고 예수는 미가의 예언을 따라 베들레헴에 호적을 하려고 방문하였던 부모의 품 안에서 태어났고 그곳의 마구간, 말구유에 누이셨다.(마2:11, 눅2:1-7) 오늘 날 “베들레헴 목자들의 들판교회”는 보아스 당시에 그의 토지가 있던 “보아스의 들판”이라고 불리는 밭과 목장이 있는 벳사흘(Beit Sahur)에 세워져있다. 예수의 탄생 장면을 묘사한 교회 내부의 벽화와 스테인드글라스는 너무나도 아름답고 섬세하게 장식되어 있다. 각국의 모든 순례객들은 그 예배당 안에 잠시라도 더 오랜 시간 머물고 파서 자리를 비울 생각을 하지 못할 정도였다. 교회가 세워진 언덕 자락은 천사들이 목자들에게 나타나 아기 예수의 탄생을 알려준 곳이라고 전해지는 곳이다. 이를 기념하여 가톨릭의 ‘작은 형제회’인 프란체스코회에서 그 곳에 교회를 세웠다. 꽤 험한 언덕 자락인데 왜 ‘들판 교회’라고 하였는지 궁금하였다. 유대인들은 그 정도의 언덕은 들판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자료에 의하면 목자들이 밤을 새우며 지냈던 몇 개의 동굴 위에 세워졌던 AD 4-6세기경의 비잔틴 수도원을 1951-1952년에 걸쳐 발굴 하였다. 그곳에서 4세기의 것으로 보이는 모자이크로 된 바닥의 조각이 발견되었다. 페르시아 사람들의 침략으로 인하여 파괴되었던 교회당은 AD 7세기 초에 다시 세워지게 되었고 수도원도 그 자리에 들어서게 되었다. 그리고 AD 10세기에는 이집트인에 의해 다시 파괴되었다가 AD 16세기가 되어서야 재건축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목자들의 들판에는 목자들이 지냈다고 여겨지는 두 개의 자연동굴에 동굴교회를 세웠는데 1954년 작은형제회는 캐나다의 정부의 지원을 받아 베두인족의 천막과 같이 생긴 모양으로 설계하여 새로운 기념 교회를 건축하였다. 그래서인지 강단 장식보에 캐나다 국기가 새겨져 있었다. 이탈리아건축가 안토니오 바루치(Antonio Barruchi)에 의해 설계된 교회의 돔 천정은 작고 둥근 유리창들을 뚫어 놓아 마치 밤하늘에 별빛이 비치고 있는 형상으로 지어졌다. 교회 내부는 1950년대에 그린 ‘예수의 탄생’, ‘베들레헴으로 가는 양치기들’, ‘천사의 음성을 듣는 양치기들’ 등 3점의 프레스코 벽화로 장식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4세기의 모자이크화도 보존되어 있고 교회 뒤쪽의 계단을 내려가면 ‘목자들의 동굴’도 있다. 그곳에는 옛 양치기들의 소박한 신앙생활을 짐작하게 하는 흔적이 남아 있다. 교회의 뒤쪽에는 양을 치던 목자들이 추위를 피하며 지냈던 곳으로 추정되는 자연 동굴들이 여러 곳 더 있다. 넓은 정원으로 잘 가꾸어진 본당 뒤편에 조그마한 동굴에는 순례객 20-30명쯤이 둘러서서 예배드릴 수 있는 강단과 예배 굴도 꾸며져 있다. 그 곳을 떠나서 사무엘의 무덤 위에 기념 교회가 세워져 있는 나비 사무엘의 ‘사무엘 기념 교회’를 찾아 갔다. ‘나비’(איבנ)는 ‘선지자’를 뜻하는 히브리어이다. 그 곳은 예루살렘에서 7km정도 떨어진 곳으로 주변 지형 중에서 가장 높은 해발 908m이다. 그 교회 앞마당의 넓은 바위 터전은 성전이 지어지기 전의 다윗 시대에 성막이 모셔져 있던 곳이다. 다윗은 그 곳에서 사독 제사장과 그의 형제 제사장들로 하여금 아침과 저녁으로 번제단 위에 번제를 드리게 하였다.(대상16:37-43) 솔로몬이 왕이 된 후에 일천 번제를 드린 곳이기도 하다.(왕상3:4) AD 5세기경에는 비잔틴 시대의 사무엘 수도원이 그 곳에 있었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가며 파괴되었고 AD1157년의 십자군 전쟁 이후에 ‘몬스 가우디 교회’와 수도원을 건축하였다. ‘몬스 가우디’란 ‘기쁨의 산’(Mountain of Joy)이라는 뜻이다. 십자군들은 그 곳에 도착하여 예루살렘이 바라다 보이는 사방을 내려다보며 감격과 기쁨을 나누었고 그런 의미의 교회를 세웠다. 그러나 30년 후에 다시 이슬람의 살라딘에게 패배함으로 모스크로 바뀌었고 오랜 세월이 지난 후인 AD1967년, 6일 전쟁으로 이스라엘은 그 곳을 다시 되찾게 되었다. 정통 유대인들은 그 곳의 지하에 있는 사무엘의 무덤에서 기도하고 토라를 읽으며 지내기를 즐겨하는 거룩한 처소로 알려져 있다. 그들이 기도하고 말씀을 읽는 현장을 직접 보니 크게 도전이 되었다. 순례단 일행은 다음 방문지인 사사 삼손의 활동 무대를 돌아보기 위하여 소렉 골짜기로 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