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이란 무엇인가
부활은 기독교 신앙의 바탕이다. 만약에 십자가에 죽은 예수가 다시 살아나는 부활이 없었다면 이 땅에 기독교는 존재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 이 땅에 계신 동안에 다양한 비유로 ‘하나님의 나라’인 천국(天國)을 설명해 주셨다. 그러나 만약에 예수 자신이 죽임 당하시고 장례 된 것으로 그의 생이 끝났다면 어떻게 이 세상에 그의 복음(福音)이 전파될 수 있었겠는가. ‘십자가의 도’를 설명하는 것이 복음이지만 복음의 완성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근거한다. 부활의 증언자로 살았으며 순교자의 길을 회피하지 않았던 제자들의 생애가 그것을 입증하지 않는가. 가롯 유다를 제외한 열 한 사도들은 예수의 부활뿐만 아니라 예수 의 승천도 목격한 자들이다. 사도행전 제 1장은 예수의 승천과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리며 기도하던 이들의 모습을 담고 있다. 예수는 부활 후에 40일간 이 세상에 계시면서 “하나님 나라의 일”을 더 말씀하셨다. 그리고 약속하신 것이 ‘성령’이시다. 예수께서는 승천(昇天)하시기 전에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행1:4)고 말씀하셨다. 그 ‘약속하신 것’이란 성령이다. 그 성령은 부활하신 예수께서 “숨을 내 쉬며”,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셨던 그 성령이시다. 예수의 그 ‘숨’은 십자가에 죽으시기 전에 쉬던 그런 ‘숨’과는 차원이 다른 ‘숨’이시다. 그 숨은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영생하시는 ‘숨’이시다. 그 때 약속하신 성령이 임하자 베드로를 비롯한 사도들과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을 비롯한 120여 성도들은 부활과 성령의 증거자들이 되었다. 그렇게 비겁하게 예수를 부인하고 배반하고 맹세하며 저주하고 도망가 버렸던 베드로인데 어떻게 그가 예수 부활의 증언자가 될 수 있었을까. 그것은 성령의 능력일 뿐만 아니라 부활의 사실성과 역사성을 입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다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역사적 사실이란 말이다. 사도행전 2장은 성령 받은 베드로의 복음 전파 내용을 담고 있다. 베드로는 “하나님께서 그를 사망의 고통에서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행2:24) 그리고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행2:32)라고 힘차게 예수의 부활을 증거하였다. 예수의 부활 사실은 입에서 입으로 불길처럼 전해져갔다. 이와 같이 예수 부활의 소식이 사방에 펴져 나가자 당황한 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와 사두개인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 저들은 “예수 안에 죽은 자의 부활이 있다”고 백성들을 가르치고 전하는 것을 싫어하였다. 결국은 베드로와 요한 사도가 붙잡혀서 이튿날까지 옥에 갇히고 말았다. 다음 날 대 제사장 안나스와 가야바와 요한과 알렉산더와 및 대제사장의 문중이 다 참여하였고 관리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이 모인 자리에서 심문이 시작되었다. 저들은 40년 동안 걷지 못하던 성전 미문 앞의 걸인을 걷게 한 치유 사건에 대하여 시비를 걸어 왔다. “너희가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고 심문하였다. 그 때에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대답하였다.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강건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행4:10) 베드로의 대답의 핵심 내용이 무엇인가. 부활하신 예수의 이름의 능력으로 이 사람이 회복되었다고 증언한 것이다. 위협할 이유를 찾지 못하고 궁지에 몰린 저들은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고 경고하고 협박한 후에 베드로와 요한을 풀어 놓아 주었다. 그러나 두 사도들은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고 분명한 입장을 밝혔다. 여기, “보고 들은 것”이란 무엇인가. 이는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지 않을 수 없다는 담대한 선언이 아닌가. 그렇다. 지난 2,000년 동안 계속되어 온 기독교 복음 전파의 바탕은 이것이다. 보고 들은 것을 증언한 부활 복음의 증거가 세계 열방에 편만해져 온 것이다. 큰 무리의 수로 부흥해 가던 예루살렘 교회 안에 세움을 받았던 스데반 집사가 예수의 부활 복음을 증언하다가 돌에 맞아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스데반은 초대교회의 첫 순교자가 되었다. 스데반의 죽음을 마땅하게 여기던 유대교의 젊은이가 있었다. 그의 이름은 사울이다. 그는 예수의 부활을 믿고 따르는 이들을 앞장서서 핍박하던 자였다. 사도행전 9장에는 예수의 부활 복음을 전파하던 초대 교회의 성도들을 색출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끌고 가기 위하여 다메섹 성을 향하여 찾아가던 사울의 일화가 나온다. 부활 승천하신 예수께서 강한 빛을 그에게 비추셨다. 그리고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고 책망하셨다. 그 때에 사울은 “주여 누구시니이까”하고 묻자 주께서는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고 대답해 주셨다. 이와 같은 부르심은 악명 높던 핍박자 사울이 이방 땅에 예수의 부활 복음을 전파하는 선교의 사람으로 택함 받는 계기가 되었다. 사울은 이와 같은 변화의 체험 이후에 부활 복음의 강력한 전파자가 되었다. 이 얼마나 놀라운 변화인가. 바울은 언제 어디서 누구를 만나든지 담대한 부활 복음의 증언자가 되었다. 사도행전 26장에 보면 사도 바울은 아그립바 왕에게도 전도하였다. 그 당시 사도 바울은 붙잡혀서 결박된 채로 로마로 호송되고 있던 중이었다. 아그립바 왕은 “네가 적은 말로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하는도다”하고 말하자 사도 바울은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나이다.”(행24:29)라고 대답하였다. 변호사 더둘로는 벨릭스 총독 앞에서 “이 사람은 전염병 같은 자라 천하에 흩어진 유대인들을 다 소요하게 하는 자요 나사렛 이단이 우두머리라”(행24:5)고 사도 바울을 고발하였다. 나사렛 예수를 핍박하던 사울이 어떻게 예수의 부활 복음을 전파하는 선봉장이 되었을까. 그를 부르신 분은 하나님이시며 부활 예수이시다. 그를 거침이 없는 이방의 전도자 되게 한 힘은 성령의 능력이었다.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반복해서 강조하는 ‘복음’이란 ‘부활 복음’을 말씀하는 것이다. 사도 바울이 깨닫고 믿고 전파하던 부활 복음은 그 무엇과 비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복음 그 자체이다. 그는 에베소서에서 “그의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 모든 통치와 권세와 능력과 주권과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또 만물을 그의 발아래에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엡1:20-23)고 편지하였다. 그 내용 중의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라는 이 부활의 복음은 바울이 전하던 복음의 핵심이다. 뿐만 아니라 지난 2,000년간 열방을 향하여 그 수를 이루 다 헤아릴 수 없는 선교사들과 순교자들을 배출한 신앙의 원동력이다. 사도 바울의 부활 복음 전파의 백미(白眉)는 로마서이다.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롬8:11) 이보다 더한 문장으로 표현할 수 있는 부활 복음의 해석이 또 있을까. 오늘은 춘분(春分)이며 종려 주일이다. 계절의 변화처럼 예수의 부활 복음을 영접하는 이들이 점점 많아지는 이 땅의 백성들이 되기를 소망한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주 예수를 다시 살리신 이가 예수와 함께 우리도 다시 살리사 너희와 함께 그 앞에 서게 하실 줄을 아노라.”(고후4:14)고 편지하였다. 부활(復活)! 이것은 기독교인의 믿음의 바탕이며 전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