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찌하여 이런 악(惡)한 일이...
새해가 되었지만 너무나도 끔찍한 사건 소식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전해지고 있다. 그 어느 시대, 그 어느 문화권에서나 각종 종교인에 대하여 거는 국민의 기대치는 높다. 그래서 종교(宗敎)가 아닌가. ‘종’(宗)이란 “마루 혹은 가장 뛰어난 것”을 의미한다. 기독교에서 강조하는 거듭남과 죄 사함과 구원과 영생과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신학적인 논쟁을 하지 않더라도 종교란 인간의 인간스러운 윤리와 도덕을 강조하며 삶을 숭고하게 이끄는 힘이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더군다나 기독교의 종교 지도자들은 하나님의 아들이며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앞장서서 본 받아 살아가야 할 것이다. 또한 그런 삶을 기대하는 신도들과 세상 사람들 사이에서 투명하고 존경 받을 만한 모범적인 삶을 살아야만 하는 부담이 적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들보다 어린 딸을 심하게 구타하여 살해하고 일 년 가까이 시신을 집 안에 방치한 금수(禽獸)와 같은 사악(肆惡)한 사건의 전말이 세상에 알려졌다. 인면수심(人面獸心)이란 말이 있기는 하지만 어찌하여 그런 악(惡)한 일이 일어났단 말인가. <지킬박사와 하이드>같은 소설이야 로버트 스티븐슨이 꾸며낸 이야기니까 무슨 글인들 못 쓰겠는가. 그러나 현실에서 그런 악한 일이 벌어졌다니 참담하기 그지없다. 물론 악은 언제나 있었다.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아담과 하와의 가정에 두 아들이 태어났다. 그 장남 가인이 동생 아벨을 쳐 죽이는 사건으로부터 인류의 역사에는 죄와 악과 허물이 엉겅퀴와 가시덤불처럼 점점 뒤엉켜 왔다. 십계명 중에 “살인하지 말라”는 말씀은 인명(人命)을 존중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이다. 이스라엘에 왕이 없던 사사 시대에 에브라임 산지 구석에 살던 어떤 레위 사람이 유다 베들레헴에서 첩을 맞아들였다. 그런데 그 첩이 행음하고 친정에 돌아가서 넉 달을 지내고 있었다. 남편은 하인과 함께 나귀 두 마리를 이끌고 처갓집을 찾아갔다. 처가에서 며칠을 머문 후에 첩을 데리고 되돌아오던 길에 그는 베냐민 지파 사람들이 사는 기브아에서 묵을 곳을 찾고 있었다. 한 노인의 배려로 그의 집에서 대접을 받고 잠자리도 제공 받게 되었다. 그런데 그 밤중에 그 곳, 기브아 지역의 불량배들이 그 노인의 집을 둘러싸고는 문을 심하게 두드리며 소리쳤다. “네 집에 들어온 사람을 이끌어 내라 우리가 그와 관계하리라.” 저들은 낯 설은 사람들을 불러내서 동성애의 패륜한 짓을 하겠다는 악한 무리들이었다. 그 때 집 주인인 노인이 “내 처녀 딸과 이 사람의 첩을 끌어 내리니 너희가 그들에게 욕보이든지 너희 눈에 좋은 대로 행하라.”(삿19:24)고 말하였다. 이는 그 당시의 시대 상황이 얼마나 타락하고 패역하였나를 보여주는 내용이다. 결국 레위 남자의 첩이 문 밖으로 끌려 나갔다. 불량배들은 밤새도록 그 첩을 능욕했고 새벽녘에 그 노인의 집 앞에 버려 놓고 모두들 도망가 버렸다. 그의 남편이 그 현장을 목격할 때에는 이미 그의 첩이 숨을 거둔 후였다. 그는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첩의 시체를 나귀에 싣고 자기 곳으로 돌아갔다. 그리고는 칼로 첩의 시체를 열두 덩이로 나누어서 이스라엘의 사방으로 보내었다. 그 일을 대하는 이스라엘 사람들은 큰 충격에 빠졌고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올라온 날로부터 오늘까지 이런 일은 일어나지도 아니하였고 보지도 못하였도다.”(삿19:30)고 서로 수군거렸다. 역사적으로는 개인적인 살인 뿐 만 아니라 수 백 만 명 혹은 수 천 만 명의 목숨을 전쟁과 집단 학살의 늪으로 몰아넣고도 몇 십 년씩 떵떵거리며 큰 소리 치던 악한 독재자들은 동서양 그 어디에나 있었다. 히틀러, 스탈린, 뭇솔리니, 모택동, 호지민,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 김일성, 유고슬라비아의 요셉 브리즈 티토, 일본의 도조 히데키, 리비아의 무아마르 카다피 등은 근대사의 악명 높던 독재자들이었다. 그 중에는 캄보디아의 폴 포트 같은 악당도 빼어 놓을 수 없다. 요셉 스탈린(Joseph Stalin, 1878-1953)의 어머니는 신앙심이 깊었다. 우리가 아는 스탈린은 성(姓)이고 그의 이름은 ‘요셉’이다. 그의 아버지는 구두 공장에서 일하며 어린 아들에게도 그런 일을 시켰다. 그의 가정은 가난하였으나 어머니의 교육열은 매우 높았다. 요셉 스탈린은 교회에서 운영하는 소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였다. 곧 이어 그는 신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는 정교회에서 운영하는 트빌리시 신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거의 다 마쳤다. 그러나 그는 중간에 칼 막스와 엥겔스 등의 책을 탐독하기 시작하면서 사제(司祭)의 길을 걷기 보다는 혁명가의 길을 가려고 꿈꾸기 시작하였다. 결국은 신학교에서 퇴학당하고 말았다. 그런 그가 악명 높은 러시아 공산당의 최고 지도자로 많은 사람들을 학대하며 악몽 같은 죽음으로 몰고 간 장본인이다. 그는 1922년부터 1953년까지 31년 동안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었다. 그 기간 동안에 소련 국가평의회 주석을 겸하여 지냈다.(1941-1953) 그는 31년 동안 소련을 독재로 통치하면서 세계 속의 강대국으로 변모시켰다. 스탈린은 소련을 공업 국가로 일으켰다. 그는 소련의 농업을 강제로 집단화했다. 그는 철저한 경찰 조직을 통하여 그의 지위를 일인 체제로 공고히 했다. 제 2차 세계 대전 때에는 독일을 패배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그로 인하여 소련의 지배권은 동유럽의 여러 나라로 확대 되었다. 그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뛰어나고 무자비한 조직가였다. 그는 백성의 자유를 완전히 말살하고 개인의 생활수준을 궁핍하게 만든 반면 소련을 강력한 군대와 산업의 복합체로 만들어 핵을 보유하였고 미국에 맞섰다. 그의 전성기 때에 그는 백성들에게 “만능의 천재, 빛나는 태양, 삶의 지주, 위대한 선생이며 친구” 등의 호칭으로 추앙 받았다. 아니 그런 분위기를 만들어 나갔다. 한때는 러시아 정교회의 부주교가 나서서 공공연히 그를 ‘우리의 아버지’(Our Father)라고 부르기까지 하였다. 그런 그는 자기 자신의 흉상과 동상과 초상들을 처처마다 수 없이 건립해 개인숭배를 강요하였다. 그는 스스로를 광신적인 숭배의 대상으로 부각시켜 나갔다. 그런 그의 시대가 오늘 날은 어떻게 변하였는가. 개인이든 국가이든 악은 영원하지 않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별의 별 악한 사건을 대하며 치를 떨고 당혹스러워한다. 그러나 악은 언제나 있었고 어디에나 있었다. 심지어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설명으로 다 할 수 없는 수치와 조롱과 고난과 학대와 구타와 멸시를 다 당하셨다. 유대의 대제사장들과 산헤드린의 의원들은 앞장서서 예수를 로마의 권력자인 본디오 빌라도 앞으로 넘겨 버렸다. 로마의 병정들은 예수를 골고다 언덕까지 끌고 가서 십자가에 못 박아 매어 달아 죽였다. 예수는 십자가에서 여섯 시간동안 극심하고 참담한 고통을 다 겪으신 후에 운명하셨다. 공회원인 아리마대 사람 요셉과 니고데모가 나서지 않았다면 예수의 시체는 십자가 위에서 안식일을 맞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의 시체는 장례 되었고 그는 삼일 만에 부활 하셨다. 하나님께서 그를 다시 살리신 것이다. 부활은 죄와 악과 죽음인 사망 권세를 이기는 능력이다. 부활의 복음만이 영원한 대답이다. 진정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사람이라면 그런 악을 멀리해야만 한다. 예수는 사랑의 본체이시다. 성경은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요1서 5:18)고 교훈하였다. 그렇다. 두려운 마음으로 행하는 모든 악행에는 반드시 형벌과 심판이 따른다. 복음(福音)을 깨달았다면 그리스도 안에서 마땅히 선(善)을 행하여 이 땅에서부터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하도록 하여야 하지 않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