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격 받는 ‘소리’
2004년 이후 중단 되었던 대북 스피커 방송이 11년 만에 휴전선 11곳에서 재개 되었다. 북한의 소행으로 밝혀진 최근에 일어난 목탄 지뢰 폭발사고로 우리 측 젊은 하사 두 명이 발목을 잃었다. 대북 방송은 이와 같은 사건 이후에 시작되었다. 북한군으로 최전방에 근무하며 대북 방송을 접해 본 적이 있는 탈북 새터민들의 증언에 따르면 대북 방송의 위력은 그 어떤 무력의 힘 보다 크다고 한다. 그 이유는 몰래 남한의 드라마를 접해 보고 남한에 대한 동경심이 생긴 북한 병사들에게 계속하여 대북 방송으로 알려주는 자유세계에 대한 소식과 세계 뉴스는 폐쇄된 체제 안에서 살아가던 저들에게 심리적으로 엄청난 동요를 불러일으킨다는 것이다. 불안해하던 북한 측은 결국 대북 확성기 가까운 곳에 집중 위협 포격을 가하는 것으로 과민 반응을 보이고 있다. 물론 확성기를 조준 공격한 것은 아니지만 그 의도는 분명하다. 태어나고 성장기를 보낸 강화도에는 원하든 원하지 아니하든 저절로 들리는 것이 대남 방송이었다. 물론 그 때도 대북 방송이 있기는 하였겠지만 강화도의 지리적인 여건이 그러하였기 때문인지 대남 방송 소리가 훨씬 더 크게 또렷이 잘 들리고는 하였다. 그런 저들이 가장 과민 반응하는 것이 전방의 대북 확성기 방송이다. 소리의 영향력에 대한 불안을 드러낸 것이다. 성경 이야기를 좀 하자. 하나님의 말씀인 소리를 담은 책이 성경이 아닌가. 하나님은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 세상에 작은 소리로 말하지 말고 큰 소리로 외쳐 말하라고 하셨다. 이사야 40장에는 이런 내용이 나온다. “너희는 예루살렘의 마음에 닿도록 말하며 그것에게 외치라 그 노역의 때가 끝났고 그 죄악이 사함을 받았느니라 그의 모든 죄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손에서 벌을 배나 받았느니라 할지니라 하시니라 외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 골짜기마다 돋우어지며 산마다, 언덕마다 낮아지며 고르지 아니한 곳이 평탄하게 되며 험한 곳이 평지가 될 것이요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보리라.”(사40:2-5) 하나님은 장차 하나님께서 친히 이룩하실 일에 대하여 침묵하지 말고 큰 소리로 외쳐 말하라고 하셨다. 이사야가 물었다. “내가 무엇이라 외치리이까” 그 때 하나님은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의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이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 하라 아름다운 소식을 시온에 전하는 자여 너는 높은 산에 오르라 아름다운 소식을 예루살렘에 전하는 자여 너는 힘써 소리를 높이라 두려워하지 말고 소리를 높여 유다의 성읍들에게 이르기를 너희의 하나님을 보라 하라 보라 주 여호와께서 장차 강한 자로 임하실 것이요 친히 그의 팔로 다스리실 것이라 보라 상급이 그에게 있고 보응이 그의 앞에 있으며 그는 목자같이 양 떼를 먹이시며 어린 양을 그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 먹이는 암컷들을 온순히 인도하시리로다.”(사40:6-11)고 말씀하셨다. 그 말씀하신 내용을 소리 높여 외치라고 하셨다. 영(靈)이신 하나님은 역사 속에 소리로 존재하신다. 요한복음은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요1:1)는 말씀으로 시작된다. 여기서 ‘말씀’이란 곧 ‘소리’이다. 하나님은 태초부터 소리로 존재하셨다. 그 소리가 ‘혼돈과 공허와 깊은 흑암 가운데’ 울려 퍼질 때에 창조가 시작되었다. 하나님은 천지와 만물을 소리로 창조하셨고 역사 한 가운데서 소리로 섭리하고 주관하신다. 혁명군들이 나라를 장악할 때에도 각종 방송국과 언론을 점령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역사는 소리로 변천되어 가는 것이다. 그 소리 중에는 진리를 담고 있는 소리가 거짓된 소리를 이기고, 정의와 공의의 소리가 불의한 소리를 이기며, 사랑의 소리가 미움과 증오의 소리를 이기고, 선한 소리가 악한 소리를 이기는 힘이 담겨 있다. 평화롭게 잘 조성된 은평구 북한산 자락의 뉴타운 거주 지역에 깊은 밤과 어두운 새벽에 개떼가 짖어대는 소리가 단잠을 깨운다. 주인에게서 버리진 채 산 속에서 살아가는 개들이 떼로 몰려다니면서 늑대처럼 짖어 대고 으르렁 거리는 소리는 큰 공해가 되고 두려움이 되고 있다. 시쳇말로 요즘 살아가는 도심 한 귀퉁이에 ‘개 소리’가 만만치 않다. 행정적으로 나서서 해결해야 할 일이다. 인류 역사에도 그런 내용을 책에 담기도 하고 그런 소리를 키워서 인류를 혹세무민하던 때가 있었다. 칼 막스, 레닌, 스탈린으로 이어지던 공산주의의 힘과 그 소리는 역사에서 사라지지 않을 것만 같던 때가 있었다. 악에 붙들린 거짓된 지도자들이 목소리를 키우며 수 천만 명의 목숨을 벌레 죽이듯이 짓밟아 가며 자신의 힘과 권력을 유지해 가던 날들이 역사 속에 사라져가고 있다. 독일의 히틀러는 ‘하이 히틀러’를 외치며 손바닥을 편 채 오른 손을 높이 치켜들고 생명을 다 바쳐 충성을 맹세하던 이들을 앞장 세워 유태인 600만 명 이상을 죽였다. 이런 모습은 이웃 나라 일본도 마찬가지였다. 진주만을 공격하고 미국 본토라도 삼키려 하며 천황을 숭배하며 목숨을 바치며 자살비행을 감행하던 ‘가미가제’식 충성심은 무엇이라고 설명해야 할까. 요즘 두려운 집단으로 거론되는 IS의 세력 확장도 마찬가지다. 우리나라는 그런 유형 중에서도 대표적인 집단이 휴전선 이북을 지배하는 지리적인 환경에서 남북으로 대치하여 지난 70년 동안 대한민국을 여기 까지 발전 시켜왔다. 아니, 하나님이 오늘 날과 같은 눈부신 부흥과 발전을 선물해 주셨다. 열왕기 상 18장 이후에 보면 여호와 보시기에 극악하던 북 왕국 이스라엘의 제 7대 임금 아합(재위, B. C 874-853)과 그 아내 이세벨의 포악하던 목소리가 역사에서 사라지지 않을 것 같던 때가 있었다. 그 동시대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활동하던 선지자 엘리야는 그래서 외롭고 그래서 고독하였다. 삼년 동안 이스라엘에는 비가 내리지 않았고 사마리아에는 기근이 극심하였다. 성경은 그 모든 일들이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고 강조한다. 북 왕국 이스라엘 안에는 우상인 바알과 앗세라를 하나님 대신에 섬기는 이들이 넘쳐 나고 있었다. 그런 시대에 엘리야는 갈멜 산꼭대기에서 여호와의 살아 계심을 입증하는 제사를 드렸고 하나님은 하늘에서 불을 내려서 응답하셨다. 갈멜산의 기도 응답 후에 하나님은 엘리야를 통해서 바알과 앗세라를 섬기는 선지자 850명을 기손 시내로 데려다가 모조리 죽이게 하셨다. 엘리야는 임금 아합에게 곧 다가올 비 소식을 전한 후에 다시 갈멜 산꼭대기로 올라갔다. 그리고 그 곳에서 “땅에 꿇어 엎드려 그의 얼굴을 무릎 사이에 넣고”기도하기 시작하였다. 엘리야는 사환을 시켜 일곱 번이나 바다 쪽의 먼 하늘을 관찰하게 하였다. 드디어 하나님은 삼년 만에 바다 저쪽 끝에 “사람의 손 만 한 작은 구름”이 일어나는 것을 보여 주셨다. 엘리야는 임금 아합에게 사환을 보내서 “비에 막히지 않도록 마차를 갖추고 내려가소서”하고 전하였다. 조금 후에 구름과 바람이 일어나서 하늘이 캄캄해 지며 큰 비가 내리기 시작하였다. 아합은 마차를 타고 이스라엘로 항하고 있었다. 그 때에 여호와의 능력이 다시 엘리야에게 임하였다. 엘리야는 허리를 동였고 마차를 탄 아합 왕보다 오히려 더 앞서서 달려가고 있었다. 그렇다. 언제나 ‘하나님의 소리’는 우리가 눈으로 보는 역사보다 한 발짝 앞서서 달려가신다. 때가 되면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영원한 현실이 되는 날이 분명히 올 것이다. 헤롯이 세례 요한의 목을 쳤으나 그를 통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는 소리는 오늘 날도 여전히 살아 있는 것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