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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쳐 말하라(렘31:7-9) 2024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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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4-10-27 13:27 조회 580 댓글 0
 

                       외쳐 말하라(렘31:7-9)                2024. 10. 27

 

 

1879년 루이자 스테드(louisa Stead,1850-1917)는 29살의 가정 주부였다. 그녀는 영국에서 태어나 9살 때에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였다. 남편과 네 살짜리 딸과 함께 뉴욕시 롱아일랜드에 있는 바닷가의 해수욕장에 놀러 갔다. 해변의 아름다운 레스토랑에서 점심을 맛있게 먹고 있었다. 갑자기 “사람 살려”라는 고함소리가 들려 왔다. 해변 가까이에서 수영하던 소년의 허우적 거리며 고함치는 소리를 현장을 목격한 남편은 급하게 포크와 나이프를 식탁에 던지듯이 내려 놓고 바닷가로 달라 갔다. 불행하게도 그 소년과 남편은 함께 익사하고 말았다. 갑작스러운 슬픔과 충격에 휩싸인 아내는 거의 정신을 잃은채로 남편의 장례를 치루어야 했다. 어린 아들과 함께 남편의 빈 자리가 휑하게 느껴지는 집안에 들어 앉아 두문 불출하였다. 거의 일주일 동안을 먹지도 않고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며 비통한 심정을 다스리지 못하며 지내야 했다. 하나님을 향한 원망이 마음에 가득하였다. “왜 하필 저희 가정이 이런 일을 겪어야 하는 건가요”라고 하나님을 원망하며 낙담하며 하루 하루 지내고 있었다. 그렇게 지내던 어느 날 그의 마음 속에 알 수 없는 평안과 위로와 기쁨이 창가에 들여 비추이는 햇빛처럼 가득하게 차지하는 신비를 체험하였다. 그리고 이런 고백의 시를 남겼다. 이 시는1882년에 곡이 붙여져서 찬송가로 탄생하였다. 우리가 부르는 542장, <구주 예수 의지함이>라는 찬송가의 탄생 이야기이다. 

 

“구주 예수 의지함이 심히 기쁜 일일세 

영생 허락 받았으니 의심 아주 없도다 

예수 예수 믿는 것은 받은 증거 많도다 

예수 예수 귀한 예수 믿음 더욱 주소서”

 

“Tis so sweet to trust in Jesus,

Just to take Him at His word;

Just to rest upon His promise;

Just to know, Thus saith the Lord.

Jesus, Jesus, how I trust Him,

How I’ve proved Him o’er and o’er,

Jesus, Jesus, Precious Jesus!

O for grace to trust Him more.”

 

루이자 스테드 여사는 어린 아들의 손을 잡고 아프리카 짐바브웨 선교사로 떠났다. 평생 허약한 몸이었지만 그 곳에서 25년을 선교사로 섬겼다. 그가 선교자에서 눈을 감았을 때에 동료 선교사는 그를 이렇게 추모하였다. “그녀는 우리의 곁을 떠나갔지만 그녀를 통해서 지어진 찬송가가 우리 곁에서 계속하여 불려지는 한 그녀는 영원히 우리에게 기억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스스로의 힘으로 극복할 수 없는 시련과 고난과 고통과 슬픔과 절망 가운데에서도 여전히 끊이지 않는 소망과 평안이 넘쳐 나도록 새로운 길로 인도해 주신다. 절망을 이기는 소망, 고통을 이기는 위로, 슬픔을 이기는 기쁨의 근원이 우리 모두의 하나님 아버지이시다. 

 

예레미야 30-33장을 ‘위로의 책’이라고 부른다. 하나님은 여기서 장차 회복하실 이스라엘 백성의 앞날에 대하여 예언적으로 말씀하고 계시다. 바벨론 포로의 땅에 끌려가는 것이 민족적인 비극의 시작이었다면 포로의 땅에서 예루살렘과 유다 땅으로 되돌아오는 것은 회복의 시작이었다. 하나님은 지금 고난이 시작되었고 긴긴 세월 고난을 당해야 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예레미야의 입을 통해서 장차 때가 되면 회복의 날이 돌아 오리라는 분명한 회복의 약속을 해 주셨다.

 

오늘 읽은 본문은 그러한 위로와 회복의 말씀들 중의 일부분이다. 예레미야서에 가장 자주 등장하는 표현은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라는 표현이다. 맞다. 성경의 모든 말씀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시다. 하나님은 면죄부 같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벗어난 교황의 말에 흔들리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오직 말씀 오직 은혜 오직 믿음 오직 교회 오직 하나님 이런 신앙으로 살아가길 소원했던 34살의 젊은 사제, 마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를 통해서 1517년에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모든 믿음의 사람들에게 깨닫게 해 주셨다. 하나님의 말씀에서 벗어난 교황청이 책망을 받고 교황에게 하나님의 경고의 음성이 전해지게 하셨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신앙의 개혁이요, 종교의 개혁인 것을 열방에 천명하게 하셨다. 오늘 본문으로 읽은 예레미야 31장 7절부터도 보면,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라는 말씀으로 시작된다. 하나님은 무어라고 말씀하고 계신가. “너희는 여러 민족의 앞에 서서 야곱을 위하여 기뻐 외치라 너희는 전파하며 찬양하며 말하라”라고 하셨다. 무엇을 기쁘게 외치라는 것일까. 무엇을 기쁘게 전파하라는 것일까. 무엇을 찬양하며 말하라는 것일까.

 

 

남은 자를 구원(救援)하소서.

“여호와여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남은 자를 구원하소서”라고 기쁜 마음으로 외치고 전파하고 찬양하며 말하라고 하셨다. 이것은 장차 하나님께서 이루실 언약에 대한 약속인 것이다. 하나님은 남은 자의 주님이시다. 여기서 말씀하는 남은 자란 포로의 땅에서 살아 남은 자를 말한다. ‘남은 자’라는 표현에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실한 자”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언약을 성취할 백성들을 끊임이 없이 찾고 계시다. 하나님은 우상을 숭배하고 하나님을 배척한 채로 하나님의 구속사에서 점점 멀어져가는 백성들 가운데에서 ‘남은 자’를 찾고 계시다.

 

‘남은 자’의 사상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무조건적인 은혜”를 설명하는 매우 중요한 내용이다. 구약 성경에만도 무려 540번이나 반복하여 등장한다. 

 

노아의 홍수 시대에는 노아를 포함한 그의 여덟명의 가족만이 남은 자였다. 430년 애굽의 노예 생활 끝에 하나님은 출애굽한 백성들을 광야로 이끄셔서 남은 자의 삶을 이어 가게 하셨다. 하나님은 광야 40년을 마치고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에 들어 가는 세대 중에 출애굽 세대는 오직 여호수아와 갈렙, 두 사람만에게만 기회를 허락하셨다. 하나님은 여리고 성이 함락되던 그 날에도 여리고 성민이 모두 몰살당하는 그 현장에서 기생 라합과 그의 가족들 만이‘남은 자’의 은혜를 누리게 하셨다. 이사야 7장 3절에 보면, 하나님은 이사야의 아들 이름을 ‘스알야숩’이라고 짓게 하셨다. ‘스알야숩’이란 이름의 뜻은 ‘남은 자가 돌아오리라’라는 의미이다. 하나님은 70년 바벨론 포로 생활이 끝난 때에도 1, 2, 3차 귀환의 혜택을 입은 제한된 이들만이 예루살렘과 선조의 땅에 돌아가서 살도록 인도하셨다. 저들, 포로의 땅에서 돌아 온 이들이 ‘남은 자’들이다. 하나님은 남은 자인 저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언약을 게승해 나가는 백성으로 회개하고 돌이켜서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다시 번영하는 민족이 되기를 원하시고 원하셨다. 

 

예수 그리도의 오실 길을 예비한 세례 요한의“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마3:2)라는 선포가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가. 왜 회개하라는 것인가. 회개를 통해서 구원 받은 자만이 남은 자의 구원의 은혜를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마태복음 13장 24절 이하에 보면 예수의 비유 중에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자의 비유’가 나온다. 사람들이 잠을 자는 동안에 원수가 와서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뿌렸다. 싹이 나고 결실할 때가 되었다. 가라지도 보였다. 주인은 추수 날까지 그대로 내버려 두었다. 그리고 추수 날이 되자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서 불살라 버리게 하였다. 그리고 난 후에 알곡만 모아서 곡간에 쌓게 하였다. 알곡과 가라지를 구별하여 거두고 심판하는 순간이 있다고 가르쳐 주셨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1장에서 엘리야 시대 때에 엘리야와 함께 남겨 두셨던 칠천명의 남은 자들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그런즉 이와 같이 지금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롬11:5)

 

사도 요한은 남은 자에 대하여 요한 계시록에서 더욱 분명하게 교훈하고 있다. “용이 여자에게 분노하여 돌아가서 그 여자의 남은 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과 더불어 싸우려고 바다 모래 위에 서 있더라”(계12:17)라고 하였다. 

 

이처럼 하나님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 시대마다 믿음의 고백을 통해서 구원 받을 자를 구별하시고 남은 자의 은혜를 누리게 하신다. 예수께서는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7:21)라고 경고하셨다. 시대마다, 현장마다에서 주 안에서 남은자의 은총을 누리는 주인공이 반드시 될 수 있기를 축원한다. 

 

 

이곳으로 돌아오리라.

에베레스트 정상 등정길에 오르는 이들은 때가 되면 가족의 곁으로 돌아 오기를 간절히 고대할 것이다. 그러나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조난을 당하는가. 

 

1924년, 에베레스트의 정상 등정에 나섰던 영국의 22살 청년, 엔드류 어바인은 그해 6월 8일 정상 250미터 지점에서 실종되었다. 그는 옥스퍼드 대학교 학생이었고 조정 선수이기도 했다. 그의 실종된 사체가 100년만인 지난 10월 13일에 발견되었다. 최근 몇십 년 동안 기상 이변으로 에베레스트 정상의 북사면 센트럴 롱북 빙하도 녹기 시작했다. 그 현장을 탐사하던 내셔널 지오그래픽 다큐멘터리 촬영팀에 의해 사체가 발견된 것이다. 양말에 그의 이름이 새겨진 것을 보고 누구의 사체인지 알게 되었다고 한다. 

 

과거 바벨론 포로의 땅에 끌려간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러하였다. 포로 생활은 몇 년 만에 끝나지 않았다. 일이십 년도 아니었다. 자그만치 70년의 긴긴 세월 후에 포로의 땅에서 되돌아갈 수 있는 길이 열렸다. 하나님은 바가 왕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하게 하셨다. 그리고 그로 하여금 이스라엘 백성들이 선조들의 땅에 돌아가도록 명령하게 하셨다. 영원히 불가능할 것 같은 일이 벌어진 것이다. 그것이 우리가 아는 주전 537년, 스룹바벨을 앞장세운 제 1차 포로 귀환이다. 감격스러운 일이 아닌가. 상상하여 보라. 우리 가운데 북한에 고향을 둔 실향민들이 생존해 있다. 만약에 내일이라도 당장 남북 통일이 이루어지고 수일 내에 북한 땅의 고향 방문이 가능해진다고 생각해 보라. 생각만 해도 흥분되는 일이 아닌가. 

 

오늘 본문인 예레미야 31장 8절이 그런 내용이다. “보라 나는 그들을 북족 땅에서 인도하며 땅 끝에서부터 모으리라”라고 하셨다. 여기서 말씀하는 북쪽 혹은 땅끝은 바벨론의 점령 지역을 말씀하는 것이다. 때가 되면 하나님은 바벨론 땅에 끌려가서 지내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시고, 모으시고, 함께 하셔서 큰 무리가 예루살렘에 돌아오게 하시겠다는 약속을 하신 것이다. 그렇다. 하나님은 “일을 행하시는 여호와, 그것을 만들며 성취하시는 여호와”(렘33:2)이시다. 하나님은 말씀하시고 때가 되면 이루시고 성취하시는 전능하신 여호와이시다. 그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 돌아 오게 할 큰 무리는 어떤 자들인가. 앞을 못 보는 이들, 걷기가 불편한 이들, 잉태하고 해산할 날이 가까워 몸이 무거운 여인들이라도 누구라도 안전하게 인도함을 받아서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으로 되돌아 오게 하시겠다는 약속이시다. 아무리 연약한 자라도 아무리 보호가 필요한 그 누구라도 하나님이 인도하시면 안전하게 정하신 땅으로 인도함을 받게 해 주시겠다는 약속이신 것이다. 

 

하나님이 하려고 하시면 그 어떤 장애도 문제될 것이 없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그 어떤 장벽도 문제될 것이 없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천천 만만의 원수라도 하나님을 대적하여 이길 수는 없다. 우리는 기억한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하나님을 대적하는 앗수르의 군대 185,000명이라도 일순간에 송장을 만드시는 하나님이시다. <주께서 내길 예배하시네>라는 찬양을 보라. 

 

주께서 내길 예비하시네

주께서 내길 예비하시네

이제 하루 하루를 주를 위해 살리라

주께서 내길 예배하시네

 

나 이제 주를 따라 가려네

나 이제 주를 따라 가려네

세상 죄길 버리고 생명 길을 찾았네

나 이제 주를 따라 가리라

 

믿음의 사람은 애굽에 있으나 홍해 앞에 있으나 광야에 있으나 요단 강 앞에 있으나 하나님을 믿는 믿음 가운데서 살아가야만 한다. 하나님은 모세 때에도 계셨고 다윗 때에도 계셨고 예레미야 때에도 계셨다. 

 

마태복음 16장 13절 이하에 보면, 하루는 예수께서 빌립보 가이사랴 지방에 가신 적이 있다. 거기서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물으셨다. 제자들은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 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라고 대답하였다. 그 때 예수께서는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라고 물으셨다. 하나님은 엘리야 때에도 계셨고, 예레미야 때에도 계셨고, 세례 요한 때에도 계셨다. 그 하나님은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16:17)라는 신앙을 고백하던 그날 그 시간 그 현장에도 계셨다. 

 

얼마전까지 날마다의 묵상으로 묵상했던 호세아 6장 1절에 보면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라고 하셨다. 그렇다. 하나님의 본심은 택한 백성들을 찢으시고 매로 치시려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자녀들이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언약 백성다운 삶을 살기를 기대하신다.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싸매임을 받고 도로 낫고 회복되는 강건한 삶을 살기를 기대하신다. 

 

어느 아버지가 사랑하는 아들이 타국에 가서 빈털터리가 되길 원하겠는가. 어느 아버지가 사랑하는 아들이 남의 나라에 가서 거지가 되어 돼지 우리에 누워 지내는 한심한 신세가 되길 원하겠는가. 예수의 비유 중에 돌아 온 둘째 아들의 비유가 그런 내용이 아닌가.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랑 받는 자녀들의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가 잘 되고 강건하기를 원하신다. 오늘 본문인 예레미야 31장 9절에 보면 “나는 이스라엘의 아버지요 에브라임은 나의 장자니라”라고 하셨다. 출애굽기 4장 22절에 보면 하나님은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애굽의 바로 왕의 마음이 완악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을 풀어 주려 하지 않거든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라고 하라”라고 가르쳐 주셨다. 맞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그런 백성들로 택하셨다. 그래서 책망하시고 그래서 진노하시고 그래서 징계하시고 그래서 포로의 땅에 맡기신 것이다. 왜냐하면 사랑하는 하나님의 아들, 사랑하는 하나님의 장자된 이스라엘 백성들이 정신을 차리고 깨어 우상을 버리고 주께로 돌아와서 주님만을 잘 섬기는 백성으로 삼으시려는 목적이 분명하셨다. 그러므로포로의 땅에서 회개하고 돌아와 아버지 하나님의 유업을 상속할 자 다운 삶을 살아가라고 촉구하시는 것이다. 9절 시작 부분에 “그들이 울며 돌아 오리니”라는 말씀이 그것이다. 왜 우는 걸까. 뉘우치고 깨닫고 회개하는 울음이 아니겠는가. 이 울음은 회개의 울음이요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대한 감격의 울음인 것이다. 273장 천송가 <나 주를 멀리 떠났다>를 보라. 

 

나 주를 멀리 떠났다 이제 옵니다 

나 죄의 길에 시달려 주여 옵니다

나 이제 왔으니 내 집을 찾아 

주여 나를 받으사 맞아 주소서

 

사랑의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뉘우치고 회개하고 돌아오면 그 어느 누구라도 용납하시고 영접하시고 새 삶을 살아가도록 축복하신다. 

 

지난 금요일 강서구에 있는 성현교회 금요 기도회에 다녀왔다. 38년 된 교회이다. 저녁 기도회 전에 여장로님께서 저녁 식사를 대접해 주셨다. 밝은 표정이었다. 은혜 생활해 온 얼굴이었다. 식사 시간에 아들 이야기를 들었다. 아들이 10살 때에 근육이 점점 사라지는 희귀 병에 걸렸다. 그런 병에 걸리면 대개는 오래 살지 못하고 이 세상을 떠난다고 한다. 아무리 기름진 음식을 먹고 아무리 좋은 고기를 구워 먹어도 뼈만 앙상하게 남고 뼈에 피부만 남아서 앙상하게 버티며 지낸다고 한다. 그런 아들을 안고 엎고 초중고, 연세대 컴퓨터 공학과와 대학원까지 다녔다. 엄마는 아들 곁은 떠난 적이 없었다. 남편의 사업은 잘되서 경제적으로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아들은 20살이 되어도 몸무게가 22kg밖에 않되었다. 근육이 없고 살이 없으니까 어디 조금만 부딪쳐도 아파서 견딜 수가 없는 통증이 전신에 몰려 왔다. 그런 몸으로 총명하게 공부하고 연세대 대학원에서 컴퓨터 공학 석사까지 마쳤다. 그런 희귀병은 20살을 언기기 어렵다는데 그 가정의 아들은 사십살이 넘도록 살다가 주님 앞으로 돌아갔다. “그런 여건에서 얼마나 힘이 드셨어요”라고 물었다. “아닙니다. 목사님. 힘들고 고생스럽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아들로 인해서 더욱 크고 큰 주님의 은혜를 받으며 지냈습니다. 아들을 안고 엎고 모든 예배 시간마다 빠진 적이 없습니다. 철야 기도, 새벽 기도 늘 아들을 안고 없고 다녔습니다. 하늘나라 가기 전에도 아들의 몸 무게는 22kg이었습니다. 그 아들은 하나님이 저희 가정을 주님 앞으로 인도한 선물이었습니다.”라고 간증하였다. 

 

하나님 아버지는 사랑하는 자녀들이 환난과 고통과 고난과 역경과 질병 가운데서 하나님께 더욱 더 가까이 나아오는 아들딸이 되기를 원하신다. 하나님 아버지 안에서 사랑을 받는 에브라임의 은혜를 누리길 원하신다. 장자의 유업을 누리기를 원하신다. 하나님 아버지는 사랑하는 자녀들이 어떤 형편에서든지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기를 원하시는 것이 아니시다. 그 어떤 형편, 그 어떤 처지, 그 어떤 상황, 그 어떤 조건 가운데서라도 하나님의 사랑의 품 안으로 돌아 오기를 원하시고 원하신다.  

 

 

물 있는 계곡의 곧은 길로 가게 하리라.

하나님 안에서 남은 자로 살아가고  하나님의 언약의 땅에 돌아 온 백성으로 살기를 원하는 백성은 주께 간구할 수 있어야 한다. 9절 말씀을 보라. “나의 인도함을 받고 간구할 때에”라고 하였다. 울며 돌아오는 것으로 그치지 말고 주의 인도하시는 손길 안에서 간구할 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은 기도하는 자녀의 기도를 들으신다. 예수께서도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고 기도를 가르쳐 주셨다. 예수께서는 성전을 가리켜서“내 집은 하나님께 기도하는 집이라”라고 가르쳐 주셨다. 그렇다. 하나님의 집은 기도하는 집이다. 우리는 가정에서든 직장에서는 교회에서든 그 어디에서든 내 마음을 성전삼고 항상 주님께 기도하는 생활을 계속하여야만 할 것이다. 그것을 주님은 기뻐하신다. 사도 바울은“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5:16-18)라고 교훈해 주었다. 맞다. 그렇다. 우리가 항상 쉬지 않고 기도를 계속할 때에 성령께서 역사하신다. 주님이 귀 기울여 주신다.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롬8:26)라고 하였다. 

 

9절에 보니까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사랑하는 자녀들이 기도할 때에 저들의 가는 길을 “넘어지지 아니하게 하시고 물 있는 계곡의 곧은 길로 가게 하시리라”라고 약속해 주셨다. 

 

우리 동네에서 멀지 않은 고양시 덕양구 효자동의 북한산 국립 공원 관리 사무실 앞 길을 경위해서 산행을 시작하면 사철 계곡물 줄기를  따라서 산행할 수가 있다. 그런 면에서 북한산은 세계적인 명산이다. 아무리 가물어도 북한산 계곡에 흐르는 물이 마르질 않는다. 계곡에 흘러 내리는 맑은 물소리를 들으며 바라보며 산행하게 된다. 이 보다 더 만족스러운 환경이 어디에 또 있을까 싶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하나님이 그런 약속을 하셨다. 사랑하는 백성을 광야길과 사막 길로 인도하시는 것이 아니라 넘어지지 않을 만한 길로, 곧은 길로 인도하시겠다고 약속하셨다. 물이 있는 아름다운 계곡의 곧은 길로 인도하시겠다고 하셨다. 끝이 보이지 않는 사막길이 아니다. 그늘을 찾을 수 없는 광야길이 아니다. 하나님은 주의 인도하심을 받고 주께 간구하는 백성들의 울음 소리를 들으시고 곧은 길로 가게 하시며 넘어지지 않게 하시겠다고 약속해 주셨다. 물이 흐르는 계곡의 곧은 길로 인도하시겠다고 하셨다. 

 

사망의 음침한 길이 아니다. 맹수가 우글거리는 밀림 속이 아니다. 이스라엘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은 에브라임을 장자 삼으실 뿐만 아니라 오늘 날 믿음으로 살아가길 소원하는 우리 각 사람을 바른 길, 환한 길, 옳은 길, 복된 길로 인도해 주실 것이다. “한 걸음 한 걸음 주 예수와 함께 날마다 날마다 우리 걸어가리”라는 찬송가의 가사처럼 그런 은혜의 삶을 주님과 더불어 걸어가고 인도하심을 받는 범사가 되기를 축원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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