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천 명을 먹인 잔치
“기쁜 일을 나누면 배가 되고 슬픈 일을 나누면 반이 된다.”는 말이 있다. 지난 7월 30일, 터키의 국경도시 킬리스에서 결혼식을 올린 신혼부부가 결혼식 피로연 비용으로 시리아 난민 4,000여명에게 식사를 대접했다. 페툴라 유즘코글루와 에스라 폴랏 부부는 결혼식을 올린 후 국제구호단체 급식 트럭을 빌려서 이와 같은 아름다운 일을 한 것이다. 킬리스는 전쟁으로 피폐해진 시리아를 떠나온 난민 수만 명이 거주하고 곳이다. 난민들은 결혼식에 온 하객들과 함께 어울려서 모처럼 맛있는 결혼식 음식을 배 불리 먹었다. 이 일은 신랑의 아버지가 아들 부부에게 제안해서 이뤄졌다. 신랑의 아버지는 이동식 무료 급식소를 운영하면서 난민에게 식사를 제공하는 터키 구호단체 ‘킴세욕무’(KYM)에서 자원봉사자로 일하고 있다. 그는 “아들 부부가 남을 섬기는 결혼 생활을 계속해 갈 수 있기를 바란다.”는 감회를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성경에는 예수께서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 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신 후에 열 두 광주리의 부스러기를 거두게 하신 기적 외에 또 다른 기적이 기록되어 있다. 마태복음 15장에 보면 예수께서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 떡 일곱 개를 가지고 4,000여명의 무리를 배 불리 먹이신 후에 일곱 광주리가 차고 넘치도록 남은 조각들을 거둔 장면이 나온다. 그 당시 성경의 숫자 계산에는 여자와 어린이가 제외되었다. 이 말은 만여 명 이상이 풍성하게 먹었다는 이야기가 아닌가. 같은 기적의 내용이 마가복음에 다시 한 번 나온다. 예수께서 이처럼 넉넉하게 베푸는 기적을 행하시게 된 동기가 그 앞부분에 기록되어 있다. 예수께서는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그들이 나와 함께 있은 지 이미 사흘이매 먹을 것이 없도다. 길에서 기진할까 하여 굶겨 보내지 못하겠노라.”(마15:32)는 말씀을 하셨다.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다. 사랑은 이론에 그치지 않고 실천으로 이어져야 한다. 야고보서에 보면 행함이 없는 믿음은 무슨 유익이 있겠느냐고 도전한다. 만약에 먹을 것이 없고 헐벗은 형제자매에게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고 말만 하고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한다면 무슨 유익이 있겠느냐고 하였다. 이미 널러 알려져 있고 <경주 최부잣집 300년 부의 비밀>이란 책으로도 세상에 잘 소개된 가문이 있다. “부자가 삼대 가기 어렵다.”는 말이 있지만 그 가문은 달랐다. 경주 최씨 가문은 17세기 초반부터 20세기 중반까지 무려 300년 동안 12대를 내려오며 만석꾼의 부를 이어 왔다. 1950년대에 전 재산을 영남대의 전신인 ‘대구대학’에 기증함으로써 ‘노브리스 오블리제’를 실천한 가문이 되었다. 그 최 부자 집 가문이 지켜 온 가훈 중에는 “너무 높은 벼슬 하려 하지 마라, 지나치게 재산 늘리려 하지 마라, 나그네를 후하게 대접하라, 흉년에 남의 논 밭 사 들이지 마라, 며느리를 맞으면 삼 년 간은 무명옷을 입게 하라, 이웃 사방 백리 안에 굶는 사람이 없게 하라, 흉년이 들면 창고의 양식을 이웃에게 나누어라.”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그 가문의 후손인 최준(1884-1970)의 결단은 영남대학교의 전신인 대구대학과 청구 대학을 세웠고 백산상회를 세워 일제 식민지시대 에 독립자금을 지원하는데 앞장섰다. 그는 한 노승에게서 들은 “재물은 분뇨(糞尿)와 같아서 한 곳에 모아 두면 악취가 나 견딜 수 없게 되고 골고루 사방에 흩뿌리면 농사에 좋은 거름이 되는 법이다.”라는 교훈을 실천하는 삶을 살고자 하였다고 전해진다. 대구대학교의 설립자요 대구 서문교회의 담임 목사요 대구맹아학원과 한국사회사업대학의 설립자요 초대학장을 지낸 이영식(1894-1981) 목사는 1919년 3. 1 독립 운동을 한 이유로 25살 때에 붙잡혀 옥살이를 하였던 애국지사요 독립 운동가이다. 1946년, 해방 다음해에 그가 불쌍한 소외 계층을 섬길 그리스도인의 정신을 갖고 시작한 대구맹아학원이 오늘 날의 대구대학교로 발전한 것이다. 뜻이 있으면 길이 있는 법이다. 그는 일본의 신학자요 목사요 복지 사업가였던 카가와 토요히코의 영향을 받아 평생을 장애인과 한센병자와 재소자의 갱생을 위하여 헌신적인 삶을 살았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그를 배반하고 도망갔던 제자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한다면 내 양을 먹이고 치라”는 돌봄과 섬기는 삶의 실천을 사명으로 분부하셨다. 그렇다. 기독교는 섬김의 종교다. 예수께서는 자신의 살과 피를 다 내어 주시면서 사랑의 섬김을 강조하셨다. 죠지 뮬러(George Muller, 1805-1898)는 평생 5만 번 이상의 기도응답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독일에서 태어난 그는 젊은 시절에는 방탕한 시절을 보내기도 하였다. 그러나 예수를 믿고 회심한 이후에 영국에 건너가서 산업혁명 이후 가난한 사람들과 버려진 아이들과 부모 잃은 아이들을 끌어안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돌보고 섬겼다. 엘리너 루즈벨트(Anna Eleanor Roosevelt, 1884-1962)여사는 프랭크린 루즈벨트 대통령의 부인이다. 그녀는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의 조카딸로서 미국에서 태어 났으나 영국에서 공부한 뒤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서 프랭클린과 결혼했다. 결혼 초기에는 다섯 아이들을 키우는 데 몰두했다. 그녀의 남편이 뉴욕 주 상원의원에 선출된 이후에는 올버니와 워싱턴에서 정치가의 아내로서의 자질을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그녀는 39살 때에 소아마비로 고생하게 된 남편을 도우며 그에게 활력을 불어넣어주던 지혜로운 아내였다. 1933년부터 12년 동안 대통령 부인으로서 뛰어난 활동과 자유주의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활동하였다. 1936년 이후 수년 동안 대통령의 부인으로서 일간신문에 '나의 나날'(My Day)이라는 칼럼을 쓰기도 하였다. 곳곳에서 정치집회와 각종 단체에 연사로 초청받았다. 그녀는 전국청년협회와 아동복지와 빈민가퇴치운동과 평등권 등과 같은 뉴딜 정책의 인도주의적 측면에도 남 다른 관심을 보였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군대의 사기를 높이기 위해 미군 기지를 비롯하여 영국과 남태평양 현장을 순회했다. 그녀는 가는 곳마다 사천 명을 먹이는 것과 같은 기적과 미담이 따라 다녔다. 그녀는 남을 돌보고 섬기는 일에 앞장섰던 성공회 교인이었다. 그의 가슴 속에는 불쌍한 자를 긍휼히 여기는 예수님의 마음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녀는 고독하고 외롭게 수 없이 많은 난관을 극복해 나가면서 가는 곳마다 연약한 이들과 소외된 이들과 가난한 이들을 돌보고 섬기는데 앞장섰다. 그녀는 남편이 세상을 떠난 후에 유엔 주재 미국 대사로 임명 받아 활동하기도 하였다. 그녀를 그런 요직에 두 번이나 임명한 것은 해리 트르먼 대통령이었다. 해리 트르먼은 맥아더 장군을 한국전에 보낸 한국의 은인이기도 하다. 그녀는 UN 인권위원회 의장에 임명되어 1948년에 세계인권선언을 기초하고 채택하는 데에도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죤 에프 케네디 대통령은 그녀를 여성지위 위원회 회장으로 임명하기도 하였다. 세월이 많이 지난 오늘 날 그녀의 얼굴을 미국의 10달러 지폐의 새 주인공으로 정하자고 지지하는 이들이 가장 많다는 여론 조사 결과가 발표되었다. 오늘 날도 세상 어딘 가에서는 사천 명을 먹이는 기적이 계속 새롭게 일어나고 있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언제 어디서나 새로운 기적을 일으키는 원동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