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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해튼에서 쓰는 일기 2015. 8.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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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성래
지성래
작성일 15-07-30 04:42 조회 15,026 댓글 0
 
맨해튼에서 쓰는 일기
 
 
주말이면 뉴욕의 길거리에는 쓰던 물건을 파는 야드 세일 현장이 여기 저기 있다. 그 곳에서 크게 확대하여 쌓아 놓고 파는 6.25 한국 전쟁 때의 장면을 찍은 흑백 사진을 보았다. 영어와 한글말로 ‘Salvation Army'와 ‘구세군’이라고 쓴 찌그러진 함석 간판 아래에 한복 차림의 무표정하고 남루한 복장을 한 전쟁 피난민들이 무엇인가 생필품을 구해 보려고 웅성거리고 둘러 서 있는 장면이었다. 65년 전 대한민국의 모습이 그러하였다. 역시 한복 차림으로 메마른 논에 물을 대기 위해서 물레방아를 발로 밟아 가며 돌리는 장면을 담은 또 다른 사진도 보았다. 그런 우리나라가 오늘 날의 세계적인 경제 대국이 되었다. 애쓰고 수고하지 않았는데 저절로 발전한 나라나 도시가 있을까. 두 어 주간이 훨씬 넘게 머물렀던 큰 아들 집에서 수요일 예배를 같이 드렸다. 그리고 작은 아들 내외가 사는 집에 가서 며느리가 마련한 저녁 식사 후에 다 같이 둘러 앉아 예배를 드렸다. 시편 92편 12절부터 15절과 창세기 49장 22절부터 26절까지를 한글과 영어로 읽고 함께 묵상하였다. 큰 아들이 사는 미국 뉴욕 맨해튼 남단의 16가와 3에비뉴 가까이에는 아름다운 공원이 두 곳 있다. 그 두 곳의 공원을 중심으로 사방에 미국 동부의 역사와 흔적이 배어 있는 곳들을 살펴 볼 수 있었다. 가까이에는 ‘시내 산’(Mount Sinai)종합 병원이 있다. 멀지 않은 곳에 뉴욕대학교의 각 학부 건물들이 거대한 대학촌을 이루고 있다. 발가락 사이에 거는 뒤축 없는 슬리퍼를 신고 반바지 차림을 한 세계의 젊은이들이 거리를 누비고 다닌다. 그 곳의 한쪽 공원에는 피터 스터이베산트(Peter Stuyvesant, 1592-1672)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300년은 훨씬 더 되었을 법한 거대한 단풍나무와 크고 작은 나무들, 이름 모를 꽃들, 다람쥐들이 뛰노는 모습이 도심 속의 원시림과도 같다. 그 공원은 그를 기념하는 이름의 스터이베산트 공원이다. 그는 영국의 뉴욕 점령에 저항하던 인물이다. 그는 네덜란드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1645년에 북아메리카와 카리브 해 연안에 있던 모든 네덜란드 속령의 총독이 되었다. 그는 포르투갈령 생마르탱 섬 원정 중에 오른쪽 다리에 중상을 입자 다리를 잘라내고 그때부터 목제의족에 의지하고 절뚝거리며 걸었다. 한 쪽 무릎 아래로 나무의족을 한 그의 동상은 매우 강렬한 인상을 주었다. 그는 총독이 된 이태 후에 뉴욕 시의 당시 이름인 뉴암스테르탐에 도착하자마자 그 도시의 주민들과 갈등을 겪어야 했다. 그의 통치 방식은 강력하였고 서인도회사의 이익에만 충실했기 때문에 시민들은 그에게 등을 돌렸다. 시민들이 자치를 요구하자 그와 의회는 9명의 자문위원을 임명했고 6년 후에는 그 곳에 네덜란드의 시(市) 운영을 본뜬 최초의 지방자치 정부를 수립했다. 그러나 이러한 양보는 사실은 양보가 아니었으며 그는 그 후에도 계속하여 자치정부를 지배하였다. 그는 1650년에 뉴네덜란드와 코네티컷 사이의 경계선을 결정할 때에 많은 영토를 잃었다. 그러나 그는 델라웨어 강 연안의 네덜란드 영토에 살고 있는 스웨덴 사람들을 정착촌에서 몰아내고 그곳에 사는 인디언 원주민과 평화 협정을 맺는 공로를 세웠다. 1664년에 자치도시 주민들은 그를 돕기를 거부하였다. 결국 그는 뉴네덜란드를 영국에 양보할 수밖에 없었다. 기울어가던 서인도 회사는 그에게 많은 탓을 돌리려 했고 그는 결국 희생양이 되고 말았다. 그는 자신의 농장에서 남은 생을 보내다가 세상을 떠났다. 그 공원 맞은편에는 1749년에 세워진 성 죠지(St. George's)교회가 있다. 영국 성공회에 속한 교회(Episcopal Church)이다. 피터 스터이베산트의 손자가 할아버지를 기념하며 자신의 농장을 팔아 마련한 돈을 헌금하고 성도들이 힘을 합하여 건립한 교회이다. 짙은 갈색 빛의 대리석으로 거대하게 건축한 웅장한 예배당이다. 그 한 쪽 편 귀퉁이에는 족히 백 년 쯤은 되어 보이는 크게 자란 무궁화나무가 한창 꽃을 만발하고 있었다. 우리가 부르는 찬송가의 ‘샤론의 꽃’이 바로 무궁화가 아닌가. 물론 세계적으로 무궁화는 그 종류가 많다고는 하지만 말이다. 지난 주일에는 부르클린 터버너클 교회에서 예배드렸다. 평소에 세미나와 책을 통하여 한국 교회에 몇 차례 소개 된 바 있는 짐 삼발라 목사가 목회하는 곳이다. 20여분 전에 도착하였으나 큰 예배당에 거의 앉을 자리가 없을 정도의 예배자들로 넘쳐 났다. 한 시간 가까이 계속되는 은혜롭고 성령 충만한 찬양은 모든 예배자들을 찬양과 예배에 집중시키기에 충분하였다. 베드로전서 2장 1-5절을 본문으로 하여 ‘보배로운 산돌이시며 모퉁이 돌’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연합한 신앙생활을 강조하는 짐 삼발라 목사의 설교는 실제적이며 구체적이었다. 예배는 두 시간이 넘도록 진지하게 드려졌다. 그 곳의 예배에 가기 전에 주일날 이른 아침에 가까운 곳의 또 다른 예배처를 찾아 나섰었다. 그 곳이 성 죠지 교회이다. 예배 시간이 맞지 않아 그 곳의 성찬 예배를 드리지는 못하였다. 성악가 수준의 찬양대 몇 명이 일찍이 나와서 바이올린과 첼로와 피아노 연주에 맞추어 찬양을 계속하며 예배 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주중에 문을 열지 않던 그 곳 예배당의 내부는 정교하고 웅장하고 고색창연한 스테인 글라스가 아침 햇빛을 받아 그 아름다움을 더하였다. 그 길 맞은편에 ‘프렌드세미나리’(Friends Seminary)라는 이름의 사립학교가 있다. 그 학교는 퀘이커(Quaker) 교도에 의해서 1786년에 시작된 유서 깊은 학교이다. 각 분야에 인물을 많이 배출한 학교이다. 일 년에 학비가 4만 불 가까이 된다. 유치원부터 고등학교 과정까지의 학생 수와 교사 수가 서로 비슷한 정예화된 학교이다. 퀘이커는 1650년경에 영국의 조지 폭스(George Fox, 1624-1691)가 창시한 당시의 기독교 신흥 종교이다. 저들은 예배의 특별한 형식이 없이 명상을 강조한다. '친우회'(the Society of Friends)란 뜻을 가지고 있으며 퀘이커라는 이름은 “하나님 앞에서 떤다.”는 조지 폭스의 말에서 유래했다. 퀘이커 교도들은 영국 정부에 의해 탄압을 많이 받았다. 그러나 그들 중의 한 사람이었던 윌리엄 펜(William Penn, 1644-1718)이 찰스 2세 왕으로부터 종교의 자유를 인정받고 불하받아 델라웨어 강가에 발전시킨 곳이 필라델피아 도시를 중심으로 형성된 거대한 펜실베이니아다. 퀘이커 교도들은 하나님 앞에서 모두가 평등하다는 의미에서 스스로를 '친우회'라고 불렀다. 한국인 중에 이와 같은 신학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았던 인물이 함석헌 선생이다. 저들은 “모든 사람은 자기 안에 하나님을 닮은 신성(神性)을 지니고 있으므로 이를 기르는 법을 배우기만 하면 모두가 구원받을 수 있다.”고 믿었다. 저들의 위험할 정도로 모호하고 자기중심적인 신비주의나 각자 침묵을 통해 내면의 빛을 볼 수 있도록 한다는 ‘내적 광명의 교리’등은 <천로역정>을 쓴 존 버니언(John Bunyan, 1628-1688)에 의해서 맹렬하게 비판을 받았던 기록이 남아 있다. ‘만인제사장설’을 굳게 믿는 저들은 성직자의 제도를 인정하지 않는다. 역사를 자랑하듯 아름다운 담쟁이로 뒤덮인 학교 건물의 한 편에 연이어 세워진 4층짜리 도서관 건물의 유리창에는 큰 흰색 글씨로 여덟 개의 단어들이 새겨져 있었다. 이는 그 학교가 지향하는 교육의 지표가 아니겠는가. “다양, 평등, 고결, 단순, 연구, 침묵, 봉사, 평화”(Diversity, Equality, Integrity, Simplicity, Study, Silence, Service, Peace) 그 중에서 ‘Integrity’라는 단어를 ‘고결’(高潔)이라고 번역하였지만 이 단어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고결, 정직, 성실, 청렴, 완전함, 무결함, 흠이 없음”등의 여러 가지 복합적인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이는 성경적이고 신학적인 바탕 위에서 인재를 양성해 내려는 저들의 철학이 담겨 있는 명제(命題)들이 아닌가. 우리는 어디에서 살든지 항상 복음 안에서 고결한 신자의 삶을 추구하며 서로 더불어 살아가는 이웃의 소중함을 일깨워야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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