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광복 70주년을 맞는 해이다. 마침 필라델피아 근교인 미디어에 있는 서재필 기념관을 방문할 기회를 가졌다. 서재필(徐載弼,1864-1951)은 전남 보성의 외가 집에서 1864년에 태어났다. 그는 1925년부터 필라델피아에 살면서 대한민국의 독립 운동에 힘썼다. 그는 미디어에 마련한 집에서 세상을 떠나던 1951년까지 살았다. 현재 그의 집은 기념관으로 단장되어 그에 관한 사진과 한영 대조 설명 자료를 비롯하여 생전에 그가 사용하던 소장품, 주고받은 편지, 외교 문서, 수상한 상장과 상패와 훈장 등이 진열되어 있다. 우리 가족이 필라델피아에 살던 20여 년 전에는 펜실베니아 주정부로부터 사적지로 공인 받아 기념관으로 준비되던 때였다. 지난 2004년에 보수 공사를 마치고 재개관한 현재의 기념관은 매우 잘 단장되어 있었다. 서재필은 18살에 과거시험에 합격한 후 ‘교서관 부정자’라는 직책을 맡아서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그 다음해부터 이년 동안은 조선의 국방 근대화의 필요성을 절감하던 차에 김옥균(金玉均)의 권유를 따라서 일본의 ‘도야마육군학교’에 유학하였다. 21살 때인 1884년 7월에 일본에서 돌아온 그는 그해 12월에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홍영식 등과 함께 ‘갑신정변’을 일으킨 주역이 되었다. 고종 임금 당시였던 1874년경부터 김옥균을 중심으로 하여 본격적으로 형성되기 시작한 개화당은 개항 후 세력을 증대시키면서 자주 부강한 근대국가 건설을 위해 여러 가지의 근대화 개혁을 추진해 왔다. 그러나 1882년 7월 임오군란으로 인해 커다란 장애에 부딪치게 되었다. 고종의 부친인 흥선대원군은 임오군란을 통하여 민씨(명성왕후)의 외척 정권을 붕괴 시키고 자신이 직접 집권하였다. 결국 민씨 수구파는 청나라에 도움을 요청하였고 청나라는 3,000명의 군대를 파견하여 임오군란을 진압한 다음에 조선을 실질적으로 ‘속방화’(屬邦化)하기에 이르렀다. 한양에 주둔한 청나라 군대는 새로운 집권자인 대원군을 청나라의 군함에 초청한 후에 그를 납치하여 보정부(保定府)에 유폐(幽閉)하였다. 청나라는 대원군 정권을 붕괴시킨 다음 고종의 왕후인 민씨의 외척 정권을 다시 수립하였다. 민씨 수구파는 청나라의 ‘조선속방화정책’에 순응하였다. 민씨 수구파는 나라의 독립이 묘연해지고 자주적인 근대화가 저지되는 것에 대하여는 무관심한 채로 자신들의 사리사욕을 채우기에만 급급하였다. 결국 갑신정변은 청나라의 조선 자주독립의 침해와 민씨 수구파의 저지와 탄압에 반발하여 자연발생적으로 일어난 정변이었다. 그러나 개화당의 갑신정변은 청나라의 무력공격을 막아 내지 못함으로써 ‘삼일천하’(三日天下)로 허탈하게 끝나고 말았다. 이 일로 인하여 박영효를 도와서 군사 분야를 맡았던 서재필은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변수 등과 함께 일본으로 망명하여 목숨을 건졌다. 그러나 일본은 조선과의 외교문제로 비화될 것을 우려하여 망명객들을 냉대하였다. 서재필은 망명 4개월 만에 박영효·서광범과 함께 미국으로 재망명하였다. 이 때 그의 가족은 역적으로 몰려 부모와 형과 아내는 음독자살하였고 두 살 된 아들은 굶어 죽었으며 동생 재창(載昌)은 참형되었다. 홍영식 등의 남은 정변 세력 일곱 명은 청나라의 군대에 피살 되었고 그 후로 국내에 남아 있던 급진 개화파원들은 민씨 수구파에 의하여 색출되어 수십 명이 피살되고 말았다. 서재필은 미국 망명 이후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여 낮에는 힘에 겨운 노동을 하고 밤에는 YMCA에서 영어 공부를 하였다. 그 후로 시작한 해리 힐맨 고등학교(Harry Hilman Academy)공부를 3년 후에 졸업할 당시에는 우수한 성적을 인정받아 졸업생 고별 연설자로 뽑히기도 하였다. 그는 미국에서 고등학교에 입학할 때에 미국 국적을 가지고 제이슨(Jaisohn)이라는 미국식 이름을 사용하였다. 역사학자 중의 누군가는 그 이유를 “그는 당시 역적으로 몰려 있었고, 가족들 모두가 희생되어 본국에 돌아갈 날을 기약할 수 없었으므로 생존을 위해 귀화였다.”고 말하였다. 서재필은 25살에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펜실베이니아주 이스튼시에 있는 라파예트(Lafayette)대학에 진학하였다. 그러나 학비를 조달하기가 어려워지자 워싱턴 D. C로 가서 낮에는 육군의학도서관에서 일하고 밤에는 지금의 조지워싱턴대학교의 전신인 컬럼비아의과대학(Columbia Medical College)야간부에서 공부하여 4년 만에 2등으로 졸업하고 같은 학교의 병리학 강사가 되었다. 그는 한국인 최초의 미국시민권자요 의사가 되었다. 미국 철도우편사업의 창설자 암스트롱(Amstrong, G. B.)의 딸인 뮤리얼 암스트롱(Murial Amstrong)과 결혼하여 두 딸을 낳았다. 그 당시 백인 학생들의 유색 인종에 대한 차별이 심하여 이에 분개한 그는 모교의 강사직을 사임하고 워싱턴에서 병원을 개업해 의료 사업을 시작하였다. 한편 조선에서는 1894년에 갑오개혁으로 대개혁이 단행되고 있었다. 이로 인하여 갑신정변을 일으킨 급진개화파들에게 내려진 역적의 죄명이 벗겨졌다. 그 뒤 김홍집내각에서 내부대신이었던 박영효가 고종 폐위 음모죄로 일본으로 망명하였다가 미국에 들려 서재필에게 귀국할 것을 간청하였다. 서재필은 병원을 정리하고 1895년 12월말에 귀국하였고 다음 달에 중추원 고문에 임명되었다. 그 후로 그는 배재 학당에서의 후세 교육, 최초의 한글 신문인 독립신문 발간을 통한 민족의 개화 의식 고취, 협성회 조직을 통한 계몽 활동과 인재 양성, 독립문 건립 등을 통하여 범국민적인 독립심 고양에 앞장섰다. 그는 신문의 논설과 강연과 강의를 통해 우리 민족에게 미국을 포함한 세계의 정세를 알리며 민족독립 사상을 고취시키고 민주주의 사상을 가르치는데 힘썼다. 이로서 그는 한국인의 정치의식과 사회의식 발전에 큰 공헌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수구파 정부와 열강의 이권침탈에 대해 강렬한 비판을 계속하자 이를 꺼려한 수구파 정부와 국제 열강들은 의합하여 결국 다시 그를 미국으로 추방시켜 버렸다. 그 후 그는 미국의 펜실베이니아에서 3·1운동이 일어 날 때까지 다시 병원을 개업하여 의료사업에 종사해야만 했다. 그러나 그의 마음속에는 항상 조국의 독립에 대한 열망이 부글부글 끓어오르고 있었다. 그는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미국의 전 재산을 정리한 후에 독립운동 자금으로 내놓고 독립운동에 매진하였다. 잡지 ‘The Evening Ledge’와 제휴하여 대한민국의 독립을 세계 여론에 호소하고 일본 제국주의의 만행을 전 세계에 전하며 규탄하였다. 한편으로는 ‘한인친우회’(Friend of Korean)를 조직해 재미교포들을 결속시키고 평소에 교분이 깊던 미국인들을 모아서 독립운동후원회를 만들었다. 그는 상해임시정부의 구미위원회위원장의 자격으로 필라델피아에 구미위원회 사무실을 설치하고 영자 독립신문 ‘인디펜던트’(The Independent)를 발간하여 대한민국의 독립을 위한 언론 활동과 외교 활동에 모든 힘을 다 쏟았다. 그는 조국의 광복과 1948년의 정부 설립 과정을 지켜보며 혼신의 힘을 다 기울였고 광복 후에 시작된 미국의 군정(軍政)이 끝나고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감격을 같이 누린 후에 미국으로 건너가 3년 후인 1951년에 하나님 앞으로 돌아갔다. 그는 미국의 자신의 가세가 완전히 바닥나기까지 조국의 독립과 광복을 위해 헌신하던 기독교 지도자요 애국자요 독립운동가요 교육가요 의사요 민족의 선각자였다. 인간이 역사 앞에 선하게 응답하며 살면 후대가 기억하는 법이다. 폐허가 된 채 방치되었던 예루살렘 성곽 중건에 앞장섰던 느헤미야는 이런 기도를 드렸다. “내 하나님이여 나를 기억하사 복을 주옵소서.”(느13: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