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행기 안에서 본 영화 ‘역린'(逆鱗)
몇 주 전에 유럽의 중세 종교 개혁지를 돌아보고 귀국하는 비행기 안에서 영화 한 편을 보았다. 조선 시대 22대 임금 정조(正祖, 1752-1800)때의 일화를 다룬 ‘역린’(逆鱗)이란 제목의 역사물이다. 영화는 그 줄거리나 명장면도 인상에 남지만 중요한 대사나 배경 음악이나 그 노래 가사가 후대에 오래도록 전해지고는 한다. 영화 ‘역린’의 압권은 신하가 임금 앞에서 예기 중용 23장의 전문을 읊어 내리는 장면이다. “작은 일도 무시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야 한다. 작은 일에도 최선을 다하면 정성스럽게 된다. 정성스럽게 되면 겉에 배어 나오고 겉에 배어 나오면 겉으로 드러나고 겉으로 드러나면 이내 밝아지고 밝아지면 남을 감동시키고 남을 감동시키면 이내 변하게 되고 변하면 생육된다. 그러니 오직 세상에서 지극히 정성을 다하는 사람만이 나와 세상을 변하게 할 수 있는 것이다.” 그 원문은 이렇다. “其次는 致曲 曲能有誠이니 誠則形하고 形則著하고 著則하고 明則動하고 動則變하고 變則化니 唯天下至誠이니 爲能化니라.” 이는 어느 시대의 어느 분야의 지도자들이든지 마음에 새기고 또 되새겨야만 할 교훈이 아닐 수 없다. 정조는 사도 세자의 아들로서 할아버지인 영조가 승하(昇遐)하자 24살에 왕이 되어 24년간 나라를 다스렸다. 세손 시절의 그는 엄격한 관리를 받으며 학문에 열중하였다. 조선시대의 왕이나 세자(世子)는 정기적으로 유학(儒學)강연을 듣고 토론을 하는 학습을 하여야만 했다. 왕이 하는 것은 경연(經筵)이라고 하였고, 세자가 하는 것은 서연(書筵)이라고 하였다. 당시 서연에서 강론된 책은 ‘효경’이나 ‘동몽선습’ 같은 아동용 입문서에서 시작하여 “소학, 대학, 논어, 맹자, 중용” 등의 경서를 강론하였다. 열 살 이후부터는 “사략, 강목” 과 같은 역사서를 별도로 강론하였고 열일곱 살에는 “성학집요, 주자봉사”와 같은 것을 또 다시 별도로 강론하여 하루에 세 번의 서연을 여는 막대한 학습 분량을 소화해 내야만 했다. 1774년 정조는 ‘경희궁지’를 지어 자신이 기거하는 곳과 공부하는 곳에 대한 기록을 남기는 학자의 풍모도 지녔었다. 정조는 학문과 더불어 무예의 단련에도 남다른 기량을 보였다. 그의 활쏘기 솜씨는 50발을 쏘면 49발을 명중시킨 날이 10번이 넘었다는 내용이 ‘어사 고충첩’에 기록되어 후대에 전해 올 정도이다. 그가 열 살 때에 사도세자로 알려진 아버지 장헌세자가 당쟁으로 희생되고 자신도 당쟁의 피해를 입게 되자 당쟁의 폐해를 절감하였다. 그는 자기의 거실을 ‘탕탕평평실’(蕩蕩平平室)이라고 이름 짓고 당색에 구애되지 않고 인물 본위로 관리를 등용하려 했다. 역사가들은 “정조의 탕평은 준론(峻論)의 인물을 중심으로 하는 탕평이었다.”고 평가한다. 영조대의 탕평책인 완론탕평(緩論蕩平)은 척신과 권력을 장악한 간신이 정치를 어지럽히고 남을 억누르는 방편이 되었다. 간신들은 왕권에만 영합하여 권력유지에 부심하여 “세상에서는 탕평당이 옛날의 붕당보다도 심하다”고 하는 말이 퍼질 정도가 되었었다. 정조는 초기부터 노론 중에서 청론(淸論)을 표방한 인물들을 중심으로 정치개혁을 실시했다. 준론탕평은 완론탕평과는 달리 충역(忠逆)과 시비(是非)와 의리(義理)를 분명히 하는 탕평이었다. 이는 임금의 은혜를 강조하고 각 당에서 군자를 뽑아서 쓰는 “붕당을 없애되 명절(名節)을 숭상한다.”는 정책을 말하는 것이다. 정조는 영조에 이어 정치와 제도의 개혁을 추진했다. 그는 왕궁 박물관이며 도서관인 ‘규장각’(奎章閣)을 준공하였다. 그 곳에 역대 왕의 문적들을 수집해 보관하게 하고, 중국에서 보내온 서적을 비롯한 많은 책들과 사신들을 통한 중국의 선물들을 거두어 보관하게 했다. 정조 자신도 규장각의 학자들과 밤을 새워 토론하며 시정(施政)의 득실과 학문을 논했다. 그는 규장각을 통하여 노론과 소론 등 당파를 뛰어 넘는 참신하고 유능한 신진들을 길러 새로운 정치세력으로 키워 내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영조의 뜻을 이어 탕평책을 실시했으며 북학파를 중시하고 농업생산력 발달에 심혈을 기울였다. 안타깝게도 그가 병을 얻어 1800년 여름에 갑자기 세상을 하직하고 말았다. 그 해 여름에 정조는 종기를 앓았다. 며칠 만에 종기는 등으로 번졌고 왕실의 내의원들이 온갖 처방을 다 하려 하였으나 차도가 없었다. 병세는 점차 위중해져 미음도 제대로 먹지 못하는 상태가 되고 말았다. 결국 음력 6월 28일이던 양력 8월 18일에 그는 창경궁 영춘헌에서 48살의 한창 나이에 눈을 감고 말았다. 성경 이야기를 좀 하자. 요아스는 남 유다의 제 8대 임금이다. 여덟 살 때에 왕이 되어 40년 동안 다스렸다. 너무 일찍 왕으로 책봉되다 보니 누군가가 그를 보좌하여야만 했다. 그 배후 인물이 당시의 제사장이었던 고모부 여호야다이다. 시대 배경은 이렇다. 북 왕국 이스라엘의 악한 왕 아합의 딸 아달랴가 남 왕국 유다의 왕자 요람에게 출가하였다. 요람은 8년 동안 형편없게 정치하고 하나님을 멀리하던 왕이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그의 왕조를 지키셨다. 그 이유를 성경은 “여호와께서 그의 종 다윗을 위하여 유다 멸하기를 즐겨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그와 그의 자손에게 항상 등불을 주겠다고 말씀하셨음이라.”(왕하8:19)고 하였다. 요람의 아들 아하시야가 왕위를 이었으나 일 년 만에 예후에게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아하시야는 북 왕국 이스라엘의 아합 가문을 가까이 하다가 그런 변을 당한 것이다. 어수선한 남 유다의 정권을 장악한 것은 태후였던 아달랴였다. 요람 왕의 왕비였던 그녀는 남 왕국의 유일한 여왕이었다. 친정어머니 이세벨을 따라 바알 숭배에 앞장서던 그녀의 왕권도 6년 만에 끝나고 말았다. 그와 같은 격동기에 멸족되던 왕자들 중에서 고모부인 제사장 여호야다의 손길에 의해 숨겨져서 자라난 인물이 요아스 왕이다. 그는 성전을 보수하고 율법 신앙의 회복에 심혈을 기울였다. 요아스 왕의 배후에는 하나님 신앙으로 무장되었던 제사장 여호야다가 있었다. 성경은 “제사장 여호야다가 세상에 사는 모든 날에 요아스가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였으며”(대하24:2)라고 기록해 주었다. 요아스는 아달랴와 그의 아들들이 엉망으로 망쳐 놓은 성전을 수리하였을 뿐만 아니라 바알 숭배를 위하여 가져갔던 성전의 성물들을 제 재리에 회복시키고 복원하였다. 드디어 요아스의 때에 “하나님의 전을 이전 모양대로 견고하게”(대하24:13)하였다. 그와 같은 성전 복원 공사의 배후에는 하나님을 사랑하던 제사장 여호야다가 있었다. 여호야다는 130살에 나이가 많고 늙어서 하나님께로 돌아갔다. 여호야다가 살아 있는 동안 예루살렘 성전에서는 항상 번제가 끊이지 않았다. 영화의 제목 ‘역린’(逆鱗)이란 용의 가슴에 거꾸로 난 비늘이라는 뜻으로 임금의 노여움을 비유하는 표현이다. 그렇다. 세상 이치도 그러하거늘 만군의 주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주의 말씀을 거스르지 않고 순종하며 살아가는 것이 만복의 시작이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