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살아가다가 보면 매사에 이기적인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상대방을 배려(配慮)하고 주변 사람이나 이웃에 대하여 세심한 관심을 갖고 살아가는 이들이 있다. 자기중심적인 사람은 남들이 어떠하든 상관하지 않고 자기만 편하면 되고 자기만 좋으면 좋은 것이란 식으로 세상을 살아간다. 자기 유익과 자기 이익을 챙기는데 혈안이 되어 살아가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자신의 많은 부분을 희생 해가면서 까지도 남들을 위하여 섬기고 돌아보고 봉사하면서 살아가는 이들이 없지 않다. 영국의 간호사 나이팅게일이나 <동의보감>을 쓴 조선 중기 선조와 광해군 시대의 허준 같은 분이 그런 사람이다. 현대사로 하면 장기려 박사나 문창모 박사 같은 이들이다. 안정된 자리를 버리고 세계 처처의 오지로 가서 현대 문명의 사각지대에서 방치된 채 지내는 이들에게 하나님의 사랑과 복음의 역사를 이루어 가는 이들이 적지 않다. 아프리카 남부 수단을 선교 거점으로 삼고 현지인과 그곳의 어린이들에게 희망을 불어 넣어 주던 “울지 마 톤즈”의 주인공인 이태석 신부 같은 이를 보라. 그는 그의 신앙이 구교냐 개신교냐를 떠나서 세상에 널리 알려진 섬김과 배려의 생을 살다가 갔다. 그는 국내에서의 안정된 의사 생활을 접고 자원하여 섬김의 오지로 뛰어 들었고 후회 없는 생을 살다가 갔다. 이 세상에 어떤 사람들은 열심히 자기를 개발하여 좋은 학교 나오고 성공하고 출세하여 명예와 권력을 손에 잡은 후에는 자기 배를 채우는 나날을 살다가 추락하는 씁쓸한 경우도 있다. 열왕기 하 4장에 보면 선지자 엘리사 때에 수넴에 살던 귀한 부인에 관한 일화가 나온다. 그녀는 여유가 있고 안정된 삶을 살아가던 여인이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녀는 자신의 집안에 엘리사 선지자가 묵을 수 있는 게스트 룸을 마련하고 선대하였다. 성경이 “침상과 책상과 의자와 촛대”를 마련하였다고 하지만 그 귀한 부인은 엘리사와 그의 사환 게하시의 출입을 위하여 정성을 다하여 모든 것을 섬겼던 것을 충분히 상상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수넴 지역에 방문할 때마다 풍성한 음식을 마련하여 공궤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 부인은 하나님을 향한 신앙심도 깊었다. 엘리사를 대할 때에 그가 하나님의 사람다운 거룩한 사람인 것을 주목하여 보았다. 엘리사는 당시의 북왕국 이스라엘의 왕이었던 여호람을 상대하고 남왕국 유다의 왕 여호사밧과 에돔의 왕이 전쟁 중에 서로 손 잡고 방문하여 난세(亂世)에 하나님의 뜻을 물을 정도로 거국적이고 시대적인 선지자였다. 그런 엘리사는 수넴 여인의 환대를 받으면서 그의 따뜻하고 섬세한 배려에 감사하며 그 가정을 축복하였다. 자녀 없이 연세 지긋한 남편과 함께 살아가던 이 가정에 “한 해가 지나 이 때쯤에 네가 아들을 낳으리라.”고 축복하였다. 그리고 일 년 후에 그 말한 대로 아들을 낳아 키우는 은혜를 입게 되었다. 열왕기 하 4장 13절에 보면 하나님으로부터 이처럼 아들을 낳아 양육하는 은총을 입었던 그 부인에 대하여 ‘세심한 배려’를 하는 성품의 사람으로 설명하고 있다. ‘배려’가 무엇인가. 살다 보면 있어도 못하고 가졌어도 못 쓰며 살아가는 수전노들이 없지 않다. 남에게 배려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덧입은 주인공을 말하라고 하면 아브라함을 빼어 놓을 수 없을 것이다. 창세기 12장에 나오는 주인공이 아브람이다. 하나님은 그의 나중 이름을 아브라함으로 다시 지어 주셨다. ‘아브람’은 ‘존귀한 아버지’라는 뜻이고 ‘아브라함’은 ‘열국의 아버지’라는 뜻이다. 그의 아버지 데라는 갈대아 우르 사람으로 우상을 만들어 팔던 사람이었다. 우리나라에도 석재상들 중에 각종 우상을 돌로 깎고 새겨서 파는 데가 눈에 쉽게 띄는 것처럼 말이다. 아브라함은 그의 아버지 데라처럼 자연스럽게 우상을 숭배하는 생을 일흔 다섯 살 때까지 살았다. 그런 그에게 하나님이 찾아 가셨고 그 나이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자식 없이 노년기를 지내던 그에게 하나님은 말씀하셨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창12:2) ‘큰 민족’을 이루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은 거창하였지만 세월이 지나도 자손은 태어나지 않았다. 그날이 그날 같은 무료한 날들을 지내던 아브라함이 어느 날 마무레 상수리나무 숲에 있는 자기의 장막 문에 앉아 있었다. 그 날도 역시 날씨가 뜨겁도록 더웠다. 그런 뙤약볕 아래서 쉬지도 못하고 어디론가 향하여 지나가고 있는 세 사람을 보았다. 아브라함은 직접 나서서 저들을 집안으로 영접하여 들였다. 성경의 표현을 그대로 빌리면 “그가 그들을 보자 곧 장막 문에서 달려 나가 영접하여 몸을 땅에 굽혀”가며 저들 세 사람을 선대하고 환영하며 세심하게 배려하였다. 아브라함은 저들에게 발을 씻을 물을 제공하고 나무 아래에 앉아 쉬게 하였다. 아브라함은 아내 사라에게 부탁해서 새 떡을 만들게 하고 자신은 가축 떼 있는 곳으로 달려가서 기름지고 좋은 송아지 한 마리를 끌어다가 하인에게 건네며 급하게 요리하도록 하였다. 그 장면을 보면 아브라함에게는 마지못해 하는 모습이 전혀 없었다. 그는 세 사람의 낯 설은 나그네를 선대하고 환영하며 ‘세심하게 배려’를 다하는 진심이 풋풋하게 묻어나는 섬김의 사람이었다. 저들 세 사람을 위한 식탁도 종들에게 시켜서 마련한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이 직접 나서서 확인하고 점검하였다. 그 해에 아브라함의 나이가 99세였다. 식탁에는 엉긴 젖 즉 요거트와 우유와 송아지 요리가 차려졌다. 즐거운 마음으로 기분 좋게 환대를 받으며 식탁에 둘러 앉아 음식을 먹던 세 나그네들은 아브라함의 아내에게 문안하길 원하였다. 저들 중의 한 사람이 “내년 이맘 때 내가 반드시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고 말하며 축복하였다. 사라는 주방에서 이 소리를 들으며 웃었다. 그리고 속으로 생각하였다. “내가 노쇠하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무슨 즐거움이 있으리요.” 그 시간에 하나님이 직접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셨다. “...여호와께 능하지 못한 일이 있겠느냐”(창18:14) 한 해의 세월이 금방 지나갔고 사라에게서 아들 이삭이 태어났다. 그렇게 자라나던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였던 아브라함에게 다시 말씀하셨다. “내게 네게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라”(창22:17-18)고 하셨다. 아브라함이나 수넴 여인이나 아들 압살롬에게 쫓겨 피신하던 다윗을 위하여 온갖 생필품을 공궤하던 바르실래와 비천한 여인 룻을 위하여 자기 밭에서만 이삭을 줍게 하던 보아스 같은 이들은 ‘세심한 배려’가 몸에 배인 섬김의 사람들이었다. 의사이며 심리학자인 크리스 라반은 그의 책 <배려의 심리학>에서 “배려는 상대방과 자기 자신을 더 높이 날수 있게 하는 도약점이다”라고 정의하였다. 배려가 기적을 가능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