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모와 중심
며칠 전 어디를 갔다가 엘리베이터를 탔다. 중간에 문이 열리자 그 앞에 키가 1미터 겨우 조금 넘어 보이는 60대 여성이 혼자 서 있었다. 그녀의 달덩어리처럼 환하고 밝은 표정이 기억에 생생하다. 그 나이까지 살아오면서 그런 표정을 짓기까지 지난 날 얼마나 인생의 애환이 많았겠는가. 그러나 지금 60여년 이상을 살아 온 그녀의 얼굴이 말하는 그 중심은 매우 안정되어 보이고 평화스러워 보였다. 지난 2015년 5월 28일에 독일 기반의 다국적 시장조사기관 GfK가 ‘세계 외모 만족도’를 조사하여 발표하였다. 한국을 비롯한 미국, 중국, 일본, 독일, 멕시코 등 총 22개국의 15세 이상 남녀 27,000명을 대상으로 한 이번 조사결과 국가별로 외모에 대한 만족도의 차이가 컸다. 열정이 넘치고 자유분방한 남미인은 자기 외모에 가장 만족했다. 특히 멕시코인은 “완전히 만족한다.”, “만족한다.”고 답한 사람이 무려 74%에 달해 외모 만족도가 세계에서 가장 높았다. 이어 터키, 우크라이나, 브라질, 아르헨티나가 뒤를 이어 전반적으로 남미 사람들이 자신들의 외모에 자신감이 강했다. 반면 자기 외모에 대한 불만은 일본인이 가장 많았고 만족한다는 사람은 26%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우리나라는 “완전히 만족한다.”, “만족한다.”고 답한 사람이 34%에 그쳐서 조사 대상국들 중에서 꼴찌에서 두 번째였다. 전문가들의 말을 빌리면 우리나라 사람들이 패션이나 화장품에 관심이 많고 성형 등이 성업하는 이유가 사회 심리적으로 여기에 근거한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외모에 대하여 “만족도 불만도 아니다”고 답한 사람이 무려 47%로 가장 높았다.
물질세계의 모든 것에는 형체가 있다. 겉으로 들어나는 모양을 ‘외모’(外貌)라고 한다. 해와 달과 별들을 비롯하여 이 땅의 삼라만상(森羅萬象)에는 형체가 있다. 벌과 나비와 곤충들도 그 외양이 얼마나 다양하고 정교한 외모를 갖고 있는지 모른다. 모양뿐만 아니라 색깔과 기능과 그 역할 속에 창조의 신비가 온전히 담겨 있다. 요즘 집에서 교회로 걸어가고 오는 인도(人道)의 보도블록 위에 수 천, 수만 마리의 깨알보다도 훨씬 작은 개미 떼가 새카맣게 모여서 대 역사를 이루는 장면을 자주 목격하게 된다. “얘 너희들 지금 여기서 무엇하고 있는 거니?”라고 물어 보고 싶을 정도이다. <곤충기>를 쓴 프랑스의 곤충학자 파브르에게 물어 보면 금방 그 대답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도 그가 관찰하여 아는 정도의 범위 안에서만 설명이 가능하지 않겠는가. 그와 반대로 정신세계의 그 모든 것들은 모양이 없다. 사랑과 미움, 소망과 절망, 믿음과 의심, 평화와 불안, 선과 악, 진실과 거짓, 의와 불의 이런 것들을 모양으로 설명할 수는 없다. 그와 같은 보이지 않는 것들 중에 어느 것을 추구하느냐에 따라서 그 삶의 질과 방향과 결과가 달라진다.
성경, 사무엘상 16장에 보면 이스라엘의 초대 임금 사울 왕에 대하여 실망하신 하나님께서 베들레헴에 선지자 사무엘을 파견하셔서 이새의 가정에서 다음 왕을 간택하시는 장면이 나온다. 이새는 아브라함의 십 삼대 후손으로 그에게는 여덟 명의 아들들이 있었다. 그 중에 다윗이 막내이다. 맏형인 엘리압으로부터 시작하여 일곱 아들을 차례대로 면접하였으나 하나님은 허락하지 않으셨다. 선지자 사무엘이 이새의 장남 엘리압을 보는 순간 마음에 들어 하였다. 사무엘은 엘리압을 보자마자 마음속으로 생각하였다. “여호와의 기름 부으실 자가 과연 주님 앞에 있도다.”(삼상16:6) 그러나 하나님의 관찰과 생각은 다르셨다. 그 때 하나님이 하신 말씀은 이렇다. “그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삼상16:7) 결국은 일곱 아들들을 차례대로 다 면접하였으나 하나님은 그들 중에서 왕 될 자를 택하지 아니하셨다. 막내아들 다윗은 그 시간에 들판에서 양을 치고 있었다. 그 다윗이 불려 와서 사무엘 앞에 섰다. 성경은 “그의 빛이 붉고 눈이 빼어나고 얼굴이 아름답더라.”(삼상16:12)고 하였다. 그 순간에 하나님은 사무엘에게 말씀하셨다. “이가 그니 일어나 기름을 부으라.” 다윗의 시대는 이렇게 전개되기 시작한 것이다.
사무엘은 기름 뿔 병을 가져다가 다윗에게 부었다. 그 날 이후로 다윗은 여호와의 영에 크게 감동된 사람의 생을 살아가기 시작하였다. 성경의 표현을 보면 다윗의 외모도 약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러나 여하튼 하나님은 다윗의 겉으로 드러나는 생김새보다 그의 마음가짐을 더 귀하게 주목하셨던 것이 분명하다. 그 마음이란 것이 보이지 않는 세계이다. 물론 상대방이 어떤 마음과 생각을 갖고 있느냐에 따라서 그 행동이 달라지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마음이 행동과 표정으로 드러나고 숨길 수 없는 것은 사실이다. 다윗을 이스라엘의 두 번째 임금으로 결정하시기 전에 하나님이 사무엘에게 하신 말씀인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는 그 ‘중심’이란 무엇일까. 하나님이 사용하신 표현의 ‘외모’란 육신의 눈을 일컫는다. 반면에 ‘중심’이란 ‘마음의 눈’을 의미한다. 그렇다. 사람은 상대방을 볼 때에 육안으로 보지만 하나님은 영의 눈으로 관찰하신다.
잠언 16장 2절에 보면 “여호와는 심령을 감찰하시느니라.”고 하였다. 로마서 8장 27에 보면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을 살피시는 분이라”고 하였다. 데살로니가 전서 2장 4절에 보면 사도 바울은 자신의 삶의 목적을 “오직 우리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 함이라.”고 밝혔다. 참회시인 시편 51편에 보면 다윗은 “보소서 주께서는 중심이 진실함을 원하시오니 내게 지혜를 은밀히 가르치시리이다.”(시51:6)라고 고백하였다. 이사야는 “밤에 내 영혼이 주를 사모하였사온즉 내 중심이 주를 간절히 구하오리니”(사26:9)라고 하나님을 향한 자신의 마음가짐을 밝혔다.
당신은 어떠한가. 요즘처럼 외모지상주의 시대가 되어서 화려한 의상과 값비싼 액세서리와 주변 사람들의 시선을 끄는 짙은 화장 등으로 자신을 치장하는 이 때에 잠시 멈추어 서서 자신의 중심을 살피며 속사람을 새롭게 하는 수심(修心)의 시간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 바벨론 포로 시대에 바벨론에 끌려갔던 유대 청년 다니엘은 “나 다니엘이 중심에 근심하며 내 머리 속의 환상이 나를 번민하게 한지라”(단7:15)고 하였다. 룻은 남편 죽고 시부와 시숙마저 세상을 떠난 불운한 가정의 시어머니 나오미 곁에서 얼굴을 가리고 이삭을 줍던 베들레헴 들판의 모압 여인이다. 그런 그녀가 보아스의 아내가 되고 다윗의 증조모가 된 것은 그녀의 외모보다도 그녀의 중심이 하나님의 마음을 감동시켰기 때문이 아닐까. 성경은 말씀한다.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의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과 같으니...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사40:6,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