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도
성경에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믿음으로 살았던 선진들에 관한 기사로 가득하다. 하나님 안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고 믿음으로 산 자들을 성경은 ‘성도’(聖徒)라고 말한다. 복음서에는 성도라는 표현이 마태복음에 딱 한번 나온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크게 소리를 지르시며 극심한 고통 가운데 영혼이 떠나시고 운명하실 때에 예루살렘 성전의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었다. 땅이 진동하고 바위가 터졌다. 뿐만 아니라 “무덤들이 열리며 자던 성도들의 몸이 많이 일어났다.”(마27:51) 그렇게 다시 살아나는 부활을 체험한 성도들이 무덤에서 나와서 거룩한 성 예루살렘에 들어가서 많은 사람들에게 보였다. 이 장면에 대한 성경 주석가들의 의견은 분분하다. 심지어 어떤 해석자는 장차 예수님의 재림 후에 일어날 일을 미리 기록한 마태의 기록일 뿐이라는 식의 해석으로 마무리하기도 한다. 마태복음 27장 52절의 “무덤들이 열리며”라는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은 ‘죽음의 권세에 대하여 종지부를 찍는 사건’으로 장면으로 주목하여야만 한다. 이 사건 이후에 성경은 몇 차례 더 ‘성도’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사도행전 9장에 보면 오래도록 예수 그리스도를 불신하고 예수의 부활을 믿고 따르며 전파하는 이들을 핍박하고 박해하던 사울에 대하여 다메섹 성의 선지자 아나니아가 주께 여쭙는 질문 내용이 나온다. 아나니아는 “그가 예루살렘에서 주의 성도에게 적지 않은 해를 끼쳤다”(행9:13)고 언급하면서 ‘성도’라는 표현을 사용하였다. 그리고 사도 바울 자신이 예수의 부르심을 받고 변화되어 이방의 사도로 쓰임을 받던 선교 현장에서 붙잡혀서 아그립바 왕 앞에서 자신을 변증하는 내용이 사도행전 26장에 소개된다. 거기에 보면 사도 바울은 ‘많은 성도’를 옥에 가두며 또 죽일 때에 찬성투표를 하던 자가 바로 자기 자신이라고 간증하는 내용을 보게 된다. 이처럼 ‘성도’란 어떤 핍박과 고난을 당할 지라도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아버지를 믿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이들을 지칭하는 참 좋은 호칭이 아닐 수 없다. 요즘 교회 안에 이런 저런 직제로 인한 복잡한 호칭들이 많지만 가장 거룩하고 자랑스럽고 거듭남과 구원의 감격을 갖게 하는 호칭이 ‘성도’이다. 집사, 권사, 장로 혹은 전도사, 목사의 직제로 인한 호칭도 필요하고 교회와 교단의 연합을 위해서 회장, 총무, 위원장, 부장, 감리사, 감독, 시찰회장, 노회장, 총회장, 총대, 총재라는 등등의 별의 별 호칭과 직제가 다 많지만 성경적으로 가장 영광스럽고 아름다운 이름은 역시 ‘성도’라는 호칭이 아닐까. 예수님 당시와 초대교회의 제자, 사도, 집사, 장로, 감독 등의 호칭도 좋지만 말이다. 성경은 직분을 잘 감당하면 “아름다운 지위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의 큰 담력을 얻느니라.”(딤전3:13)고 약속하였다. 히브리서에서 거론하는 믿음의 선진들 중의 첫 인물은 아벨이다. 아벨은 아담이 그의 부인 하와를 통하여 낳은 둘째 아들이다. 그는 형 가인에 의해서 죽임을 당하였다. 그러나 아벨은 인류 최초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히11:4)얻은 주인공이다. 가인과 아벨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당시의 나이가 얼마였는지 성경은 언급하지 않는다. 그러나 어느 해에 저들 형제는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다.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고 아벨은 양을 치는 자였다. 저들은 자기들에게 허락하신 소산물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벨과 그의 제물인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은 받으시고 가인이 땅의 소산물로 드린 제사는 받지 않으셨다. 그 제사 후에 가인은 몹시 분해하였고 안색이 변하였다. 하나님은 인간의 생각과 감정과 느낌을 비롯한 마음속의 모든 것을 헤아려 아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은 가인에게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창4:6)고 물으셨다. 그리고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창4:7)는 충고의 말씀을 해 주셨다. 그 후에 형 가인은 동생 아벨을 들에서 쳐 죽였다. 가인이 누구인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던 믿음의 사람이 아닌가. 뿐만 아니라 그 개인에게 하나님이 찾아 오셔서 그에게 이런 저런 말씀을 해 주실 정도로 하나님과 영적 교감을 갖고 지내던 인물이 아닌가. 그런 그가 들판에서 동생 아벨을 쳐 죽였다. 이는 “성도란 누구인가?”라는 질문 앞에 답을 찾아 가게 하는 매우 중요한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인류 역사에 여호와 하나님을 인정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고 믿음으로 살아 온 이들은 그 수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이는 과거에도 그러하였고 오늘 날도 마찬가지이고 앞으로도 신앙의 고백을 갖는 이들이 처처에 계속될 것이다. 그러나 “과연 성도란 누구이며 성도는 하나님 아버지 안에서 어떤 삶을 살아가야 할까”에 대한 대답을 찾아가야 할 것이다. 성경은 에녹이나 노아 그리고 아브라함과 그의 아내 사라를 믿음으로 살았던 인물들 중에 포함하고 있다. 그 후손들 가운데 이삭, 야곱, 요셉, 모세를 거론하고 여호수아와 모세와 기생이었던 라합도 믿음으로 살다 간 성도의 반열에 구별시킨다. 그 외에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 다윗, 사무엘을 비롯하여 일일이 다 그 이름과 믿음을 거론 할 수 없는 많은 선지자들의 신앙에 대하여 언급한다. 엘리는 제사장이었지만 그 믿음 관리가 형편없었다.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당대의 악명 높았던 패륜아였다. 사울은 이스라엘의 초대 임금이었지만 그 나중이 너무 불운하게 끝나고 말았다. 최근에 새벽 말씀 분량으로 다시 자세하게 묵상할 기회를 갖는 유다서에 보면 저들처럼 살면 화가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유다는 그 중에 세 사람을 언급한다. “화 있을진저 이 사람들이여, 가인의 길에 행하였으며 삯을 위하여 발람의 어그러진 길로 몰려갔으며 고라의 패역을 따라 멸망을 받았도다.”(유1:11)고 하였다. 저들의 공통점은 이성 없는 짐승 같이 본능으로 살다가 멸망하는 자들이라고 하였다. 예수의 동생 유다도 그의 서신인 유다서에서 ‘성도’라는 표현을 사용하였다. 그러므로 ‘성도’란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자녀로 택함을 받고 죄 사함을 받아 구원을 얻은 믿음의 도를 따라 살아가는 자에게 붙여진 영광스러운 이름이다. 악명 높던 복음의 핍박자 사울은 변화된 후에 로마서에서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롬8:27)고 하였다. 성도! 그 영광스러운 이름인 성도됨을 회복함이 곧 이 시대를 살아가는 믿음의 사람들을 향한 주님의 기대와 분부하심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