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이드 러너와 세르파
“빨리 가려면 혼자 가야하고, 멀리 가려면 함께 가야 한다.”는 말이 있다. 그러나 시각 장애인들은 빨리 가든 멀리 가든 그 어디를 가는 것이 그리 쉽지 않다. 앞을 못 보는 이들에게 있어서는 안내견의 도움도 크지만 안내인의 도움이 절실하다. 그 중에 ‘가이드 러너’나 ‘세르파’의 혜택은 특별하다. 지난 4월 25일 오전 11시 15분, 네팔이 지진으로 큰 어려움을 겪던 그 시간에 에베레스트 산 6,100미터 고지의 제 1 캠프 또한 진도 7.8도의 강진의 여파를 벗어날 수 없었다. 그날 그 시간에 시각 장애인 송경태 씨는 새벽에 5,300미터의 베이스캠프를 출발해서 그 곳, 제 1 캠프를 향해 험난한 등정을 계속하고 있었다. 그의 올해 나이는 54살이다. 그는 말했다. “못 보니까 두 발로 한 발자국씩 간다.” 이것이 얼마나 대단한 고백인가. 그는 21살 때에 군대에서 사고를 당하여 실명하였다. 그가 담당한 부대의 탄약고 안에서 수류탄이 폭발한 것이다. 그는 육 개월 간의 치료를 받고 완전 실명 상태에서 퇴원과 동시에 제대하였다. 그에게 남아 있는 것은 제대증과 국가 유공자 증서와 1급 시각 장애인 증서뿐이었다. 그 후 그는 여섯 차례 자살을 기도(企圖)하였다. 저수지에 뛰어 든 적도 있고, 철길에 누운 적도 있고, 쥐약을 먹어 본 적도 있었다. 그 후 언제부터인가 ‘자살’을 주문처럼 외우기 시작했고 그 ‘자살’이란 단어의 연속이 ‘살자!’라는 희망의 언어로 바뀌기 시작하였다. 5남매 중에서 장남이었던 그를 위하여 그의 아버지는 “내 눈을 뽑아 아들에게 줄 수 없느냐”며 전국의 유명한 안과를 찾아 다녔다. 어머니는 날이면 날마다 밤낮 없이 불쌍한 아들을 바라보며 흐느껴 우셨다. 앞을 못 보게 된 청년 송경태에게 유일한 벗은 라디오였다. 그는 방송을 듣던 중에 점자를 배워서 공부를 계속할 수 있는 길이 있다는 내용을 알게 되었다. 후천적인 시각 장애를 딛고 점자를 배우는 일은 말처럼 쉽지 않았다. 점자를 익혀서 책 한 페이지를 읽는데 서너 시간이 걸렸다. 손끝의 감각을 예민하게 해 보려고 사포로 손끝의 살갗을 문질러서 얇게 벗겨 내다보니 피 범벅이 된 채로 피를 닦아 가며 점자책을 읽어 나갔다. 세상을 끝내려 하던 그에게 희망과 의지가 생겨나기 시작했고 그는 당시에 세 가지의 목표를 정했다. 세월이 지난 오늘 날 그의 30년 전의 목표는 꿈처럼 모두 다 이루어 졌다. ‘결혼, 대학 진학, 컴퓨터 배우기’가 그것이다. 그는 동갑내기 신부와 결혼하였고 태어난 두 아들은 공군 장교와 육군 장교로 군 복무도 마쳤다. 그는 한일장신대 사회복지학과의 대학 공부를 시작으로 석사, 박사 공부를 계속하였다. 그는 같은 처지의 장애인 복지를 위하여 열심히 일해 왔다. 전주시 시의원에 당선되어 ‘장애인체육진흥조례안’등 각종 장애인 정책을 입안하는데도 공헌하였다. 시인(詩人)이기도 한 그는 수필집, <신의 숨결 사하라>도 발간하였다. 전북시각장애인도서관장 직을 맡아 일하고 있는 그는 모험가이다. 16년 전인 1999년에 미국 동서 4,000킬로미터 횡단을 시작으로 세계 4대 마라톤 극한 코스인 이집트의 사하라, 중국의 고비, 칠레의 아타카마, 남극 대륙 횡단 코스를 모두 완주하여 ‘그랜드슬램’을 달성하였다. 3년 전에는 네팔의 히말라야 안나푸르나의 4,130미터 등정의 꿈을 이루었고 그 후에 271킬로미터의 미국 그랜드캐년 마라톤 코스를 완주하기도 하였다. 그는 세계의 참가자 중에 유일한 장애인이었다. 지난해에는 아프리카 최고봉인 우후루피크(5,895미터)와 히말리야의 임자체(6,189미터) 등정도 성공적으로 마쳤다. 금번에 에베레스트 8,848미터 정상을 향하여 오르던 그의 발걸음을 되돌리게 한 것은 진도 7.8도의 지진이었다. 산이 흔들리고 눈 폭풍이 뒤덮이는 순간적인 죽음의 공포 가운데 평소 6시간이면 하산이 가능한 곳을 15시간 반 만에 겨우 내려 올 수 있었다. 그와 일행이 겨우 목숨을 건진 채 하산하여 도착한 네팔의 수도 카트만두는 8천명이 넘는 사망자와 1만 7천명이 넘는 부상자들이 폐허가 된 대 재앙의 현장에서 들판으로 피신한 수백만의 이재민들 사이에 뒤 섞여 아비규환이 되어 있었다. 앞을 볼 수 없게 된 이후 그의 생명줄을 잡아 주는 ‘가이드 러너’(guide runner)가 언제나 그의 곁에 그림자처럼 따라 붙으며 한 발자국 앞서 걷는다. ‘가이드 러너’의 역할이 숭고하지 않나. 앞 못 보는 그가 사막을 종주할 때에는 그 곁에서 언제나 1미터 남짓의 생명줄을 꼭 붙잡아 주며 앞서 달리는 ‘가이드 러너’와 수 천 미터 고지의 산악을 등정하는 길에 앞서가는 ‘세르파’(Sherpa)가 있었다. 그가 복지회 예산 마련을 위해서 전국의 백화점을 찾아다니며 자선 바자회를 열 때에 운보 김기창(1913-2001) 선생이 그린 ‘청록산수’를 기증 받은 적도 있었다. 그는 그 자선 서화 바자회를 통해서 3억 원이 넘는 기금을 모으기도 하였다. 그 후에 그는 전북 최초의 시각장애인도서관도 세웠다. 운보 김기창도 8살 때 이후로 듣지 못하고 말이 어눌한 농아(聾啞)인으로 살았다. 그런 답답한 환경의 김기창 화백이나 여섯 번씩이나 자살을 기도하던 그를 오늘 날의 저들로 붙잡아 일으켜 세운 힘은 무엇일까. 최근에 송경태 씨에 관한 기사가 일간지에 특집으로 실렸다. 앞 못 보는 그의 한 걸음 앞서 생명줄을 잡고 세계 처처의 숨 막히는 사막을 달리며 삶과 죽음 사이에 끼어서 히말라야를 등정하는 가이드 러너와 세르파의 언제나 함께 걷는 그 힘이 큰 의지가 되고 말벗이 되지 않았겠나. 그렇다. 이 땅의 모든 인생들에게는 보이지 아니하는 가이드 러너와 세르파의 손길이 있다. 성경은 그 전능자의 이름을 “스스로 있는 자”라고 부른다.(출3:13) 출애굽기에 보면 애굽 사람을 죽인 후에 미디안 광야에 숨어 지내며 사십년 세월을 보낸 연세 팔십의 모세 이야기가 나온다. 그는 거기서 장가들었고 장인 이드로의 양떼를 치며 그 긴긴 세월을 지냈다. 한때 애굽의 바로 왕의 왕위 직을 이어 받을 왕 승계 서열 제 1위였던 그가 사람을 죽이고 스스로 광야로 도망친 것이다. 그리고 사십년 세월을 역사의 중심에서 비켜서서 살아 왔다. 그런 그에게 어느 날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그의 이름을 부르셨다. “모세야 모세야” 모세는 “내가 여기 있나이다.”하고 얼떨결에 대답하였다. 그런 그에게 하나님은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곳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고 하셨다. 그리고 이어서 하나님은 “나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나타났던 그 하나님이라”고 소개하였다. 갑자기 모세의 마음속에 두려움이 가득 차게 되었고 그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하나님은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보고, 부르짖음을 듣고, 그 근심을 알고, 내려가서, 건져 내고,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하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데려 가려 하노라.”고 앞일을 설명하여 주셨다. 그리고 “이제 가라.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에게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출3:9-10)는 사명을 부여 해 주셨다. 모세는 하나님의 계획처럼 쓰임 받았고 동족을 출애굽 시키는 일에 앞장섰다. 뿐만 아니라 사십일 간 시내 산에 올라가서 하나님의 계명의 말씀을 받는 성경 역사의 중심인물이 되었다. 광야 생활 사십년 간 이스라엘 백성들의 중심에는 성막이 있었다. 그 성막 건축의 모든 공정이 가능하였던 것도 모세를 통한 하나님의 섬세하신 손길이었다. 이 세상에 그 누군가의 도움이 없이 어느 날 갑자기 유능해진 능력자는 단 한 사람도 없다. 심지어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 조차도 나사렛에서 어머니 마리아의 품에 안겨서 크지 않았는가. 페르시아의 아하수에로 왕의 왕비로 간택된 에스더는 일찍이 부모를 잃었다. 그런 고아 소녀를 사촌인 모르드개가 ‘가이드 러너’와 ‘세르파’로 나서서 부모의 사랑의 마음을 갖고 돌보아 양육하였다. 에스더는 어려서부터 용모가 곱고 아리따웠다. “죽으면 죽으리이다.”는 고백을 가능하게 하였던 에스더에게 그녀를 세속의 손길에 휩쓸리지 않도록 붙들어 주며 보살펴 준 것은 ‘자기의 딸 같이 양육’(에2:15)한 사촌 오라버니 모르드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