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 부활과 희망
예수가 붙잡히자 평소에 큰소리치던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이 불안과 두려움 가운데 예수를 떠나서 어딘가 숨어 버렸다. 그런 저들이 나중에 예수 부활의 증인이 되었고 장수한 사도 요한 이외에는 모두가 다 순교자가 되었다. 물론 가롯 유다는 아니지만 말이다. 이는 부활의 능력과 희망이 아니고는 그 무엇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역사적인 일이 아닌가. 마태는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가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마28:6)고 예수의 부활 사실을 간략하게 기록하고 있다. 이는 예수의 시체를 보기 위하여 무덤을 찾아갔던 막달라 마리아에게 천사가 해 준 말이다. 그렇다. 오늘 날 예수는 무덤에 계시지 않다. 그는 평소에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고 사십일 후에 하나님의 나라로 승천하셨다. 기독교만이 부활의 종교다. 이 세상의 그 어떤 종교에도 부활 신앙이란 없다. 기독교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부터 탄생하였다. 예수는 십자가에 죽었고 장사 된 지 사흘 만에 부활하였다. 사도행전 1장에 보면 예수는 열 한 제자가 지켜보는 가운데 승천하였다. 하늘을 쳐다보고 있던 열 한 제자들에게 두 천사가 나타나서 말했다.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행1:11) 이와 같은 내용들은 ‘사도신경’의 핵심을 이룬다. 이 모든 것들이 기독교의 역사성이다. 오늘 날 대한민국에는 130년 전인 1885년 4월 5일, 부활절 날 오후 3시경에 제물포 항에 도착한 헨리 아펜젤러(Henry G Appenzeller, 1858∼1902)부부 선교사와 언더우드(Horace G Underwood, 1859∼1916) 선교사를 직접 만난 본 사람들은 단 한 명도 살아남아 있지 않다. 그러나 한국 교회는 저들이 이 땅에서 사역한 선교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저들은 예수 부활 복음의 작은 씨앗을 뿌렸으나 지금의 한국 교회는 거대한 나무로 성장하였다. 오늘 날은 그 나무가 하도 크다 보니 썩은 가지도 적지 않고 병든 잎도 있고 진딧물도 끼고 벌래가 꼬이기도 한다. 저들은 1885년 2월 3일, 미국의 태평양 우편선인 아라빅(Arabic) 호를 타고 조선을 향해 샌프란시스코를 출발해서 일본 요코하마에 도착했다. 일본에 도착한 선교단은 로버트 매클레이(Robert S Maclay) 선교사를 만나서 조선 선교에 대한 치밀한 전략을 수립했다. 마침내 그 해 3월 23일, 증기선 나고야마루호를 타고 조선 입국을 시도하였다. 그 배는 매 달 한 번씩 조선을 드나드는 증기선이었다. 일주일 뒤 배를 바꿔 탄 뒤 4월 2일 밤 자정이 삼십분 쯤 지난 때에 부산항에 닻을 내렸다. 잠시 상륙해 동네를 둘러본 일행은 선상에서 하룻밤을 지내고 다음날 제물포로 향했고 드디어 제물포 항에 도착하게 되었다. 이것이 한국 선교의 본격적인 시작이다. 당시에 가난과 어둠 속에 살아가던 이 민족에게 기독교의 복음이 전해 진 것은 새로운 희망의 시작이었다. 하나님은 그 이전부터 아시아 동쪽의 작은 반도 국가였던 ‘조선’ 땅에 복음이 전파되도록 섭리하고 계셨다. 민영익을 비롯한 방미 사절단 일행이 1883년 감리교 목사 존 가우처(John F Goucher,1845-1922)를 미국의 열차 안에서 만나면서부터 시작됐다. 가우처 목사는 조선에 복음을 전파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고 즉시 2000달러를 선교 기금으로 희사했다. 가우처 목사의 지원에 힘입어 미 감리교 총회선교위원회는 매클레이 선교사에게 조선을 답사할 것을 명했다. 가우처는 미 서부에 175교회의 건축을 지원하고 중국, 한국, 일본, 인도 등의 선교와 발티모어 여자대학을 설립하고 총장을 지낸 목사요 교회 개척자요 교육가요, 모든 사람의 친구였다. 1884년 6월 23일 매클레이 부처는 제물포항을 거쳐서 그 이튿날 한양으로 올라가 일본에서 알게 된 개화파 김옥균(1851∼1894)을 만났다. 저들은 고종 임금을 통하여 교육과 의료 두 가지로 제한하는 선교 윤허(允許)를 받아냈다. 일본으로 돌아간 매클레이는 이미 전에 마가복음을 한글로 번역한 적이 있는 이수정(1842∼1886)에게 감리교 교리 문답서를 한글로 번역해줄 것을 의뢰하는 등 한국 선교의 문을 열기 위한 구체적인 전략을 세워나갔다. 이 모든 일들의 배후에 하나님의 조선 선교를 향한 손길이 오묘하게 착착 진행되고 있었다. 최근에 아담 헤밀턴의 <세상을 바꾼 24시간>이란 책을 읽었다. 아담 헤밀턴은 1990년, 25살 때에 미국 캔사스시티의 한 장례식장에서 부활의 교회란 이름으로 미연합감리교회를 개척하여 오늘 날 15,000명 이상의 교인들이 모으는 교회의 부흥을 체험한 젊은 목회자이다. 그 교회의 이름처럼 ‘부활의 복음’이 없었다면 교회는 성장할 수 없었을 것이다. 오늘 날 극성스러운 이단의 발흥은 때가 되면 사그라지고 말 것이다. 아담 헤밀턴은 예수께서 운명하시던 그 골고다 언덕에서 예수 처형을 진두지휘하였던 로마의 백부장이 남긴 말,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막15:39)는 신앙 고백을 책에서 언급한다. 그러나 그 십자가 아래서는 예수의 옷자락을 제비뽑기 하여 나누워 가지려는 병사들도 있었다. 그 현장을 백성들은 구경하고 있었고 관리들은 비웃고 있었다.(눅23:34-35) 아담 헤밀턴은 말한다. “당신은 십자가의 권능과 신비. 경이로움을 놓친 채 단지 얼마 안 되는 헝겊 몇 조각을 얻기 위해 제비뽑기에 열중하는 병사들처럼 되고 싶은가? 이 책을 다 읽은 뒤 또 다시 옷, 자동차, 휴가, 지위 등과 같은 세속적인 것을 더 얻기 위해 다시 세상으로 돌아갈 것인가.”하고 도전하고 있다. 이는 오늘 날 점점 세속화되어 가고 ‘성공제일주의’, ‘황금만능주의’의 우상에 짓눌려 신앙의 본질과 맥을 잃어가는 기독교인들에게 회개를 촉구하는 묵상이 아닌가. 강화도 시골 섬에도 기독교의 복음은 일찍이 들어갔다. 나의 고향 마을에도 선교사가 찾아 들어 왔다. 챨스 데밍(Charles Scott Deming, 1876-1938) 선교사의 한국 이름은 도이명(都伊明)이다. 그는 미국 일리노이 주에서 태어나 뉴욕대학교와 드루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뉴욕연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목회를 하다가 1905년 9월 13일 미남감리회 한국 선교사로 파송을 받아 내한하였다. 인천에 머물며 한국어를 공부하면서 서울지방과 해주지방 감리사를 역임하였다. 그는 감리교 협성신학교 조직신학 교수로 재직하면서 연희전문학교와 피어선성경학교 강사를 역임하였다. 조선예수교서회 총무직을 거쳐서 만주 선교사로 자원하여 하얼빈 주재 북만주지방 감리사로 재임하면서 복음전도와 주일학교운동을 전개하였다. 강화도에 1906년에 챨스 데밍 선교사에 의해 복음을 받아들인 이들이 있었다. 그 중의 한 곳이 흥천교회의 탄생이다. 마을의 첫 수세자가 김용하 권사인데 그의 손자 김종우는 나중에 목사가 되었다. 한 마을에 살던 나의 고조부 지상준 권사와 증조부도 그 같은 해에 복음을 받아들이고 챨스 데밍 선교사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김종우(金鍾宇, 1883∼1940) 목사는 스크랜튼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고 배재학당에서 공부하였다. 그는 고등과를 마치고 대학과정을 공부하다 말고 친구들과 조국의 독립을 위해 일하려고 만주로 떠나갔다. 그러나 만주에서 마적 떼를 만나 가까운 친구가 죽고 말았다. 그는 충격을 안고 서울에 되돌아 왔다. 신학문을 공부한 그에게 서양 사람이 운영하는 금광회사에서 월급 70원을 줄테니 오라하고 일본 정부에서는 판임관으로 오라하였다. 그러는 중에 정동제일교회의 부름을 받아 전도사로 사역하기로 결심하니 월급이 10원이었다. 그는 북한산 진관사 뒤 바위에 올라 이레 째 기도 하던 중에 성령의 충만을 받았다. 로마서 12장 1절 말씀처럼 “거룩한 산 제물”로 드려지는 삶을 살기로 결단하였다. 계속된 신학 수업과 깊은 기도생활과 성령 체험 후에 목사가 되었고 33살에 동대문교회의 담임목사가 되어 2년간 섬겼다. 그 후 1919년부터 8년간 정동제일교회의 담임목사로 사역하였으며 이어서 상동, 수표교 교회와 경성 지방 감리사 직을 거쳐서 다시 정동제일교회에서 목회하였다. 섬마을의 소년이 복음을 받아들이고 나니 하나님이 들어 쓰시는 부활의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희망을 전하는 복음 전도자가 된 것이다. 부활의 복음은 누구에게나 희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