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자와 볼펜 이야기
인간은 말을 할 줄 알뿐만 아니라 글 즉 문자를 고안하고 사용하여 왔다. 문명의 발전은 곧 문자의 발전 과정과 그 역사를 같이 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각 종교가 그러하되 기독교는 특히 그러하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많은 비유의 말씀들과 하나님의 말씀들도 문자화 된 기록인 성경이 없었다면 오늘날과 같은 기독교 보급이 가능하였을까. 인간이 문자를 고안하여 사용한 역사는 언제부터일까. 21세기인 오늘날에도 아직 문자가 없이 살아가는 부족들이 없지 않다. 서로 통하는 자기들만의 언어는 있지만 그 말을 기록할 문자가 없는 부족들이 있다. 가령 인도네시아의 소수 부족인 부톤 섬의 찌아찌아 족은 지난 2009년 8월 6일에 한글을 자신들의 문자로 받아 들였다. 부톤 섬의 바우바우시는 과거에 부톤 왕조의 수도였기에 역사와 문화에 대한 자긍심이 강한 부족이다. 이 날은 한민족 역사상 최초로 한글을 이웃 나라에 수출하는 의미 있는 날이었다. 인도네시아에는 최대 공용어인 인도네시아 어를 비롯해서 583개 이상의 방언이 사용되는 나라이다. 한글(한㐎)은 조선글(朝鮮㐎)이다. 한글은 1443년에 조선 제4대 임금이었던 세종대왕이 훈민정음(訓民正音)이라는 이름으로 창제하여 1446년에 반포하였다. 한글은 만들어지고 반포되기까지의 과정 중에 한문을 고수하는 사대부들로부터 거센 저항을 받고 노골적으로 무시 받기도 하였다. 그런 가운데 조선 왕실과 일부 양반층과 서민층을 중심으로 이어지다가 1894년 갑오개혁에서 한국의 공식적인 나라 글자가 되었다. 거기에 기독교의 복음 전파와 함께 성경의 한글 번역과 성경 공부는 한글을 읽지 못하던 백성들의 문맹률을 크게 낮추었고 한글 사용 인구를 확대해 나가는데 공헌하였다. 1910년대에 이르러 한글학자인 주시경(周時經, 1876-1914)이 '한글'이라는 이름을 사용하였다. 그는 황해도 봉산의 글쓰기를 좋아하던 가난한 선비였던 주학원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12살 때에 한양의 작은 아버지께 양자로 옮겨와 살면서 한학을 공부하다가 19살에 배재학당에 입학해서 공부할 기회가 열렸다. 선교사 헨리 아펜젤러도 그 때에 만났다. 그는 배재 학당의 교내 출판사인 삼문출판사에서 한글 교열과 수정 작업을 도우면서 자연스럽게 기독교 복음에 심취하게 되었다. 나중에는 서재필, 윤치호 등이 앞장섰던 <독립신문> 출간 과정에도 참여하였다. 24살 때인 1900년에 배재학당을 졸업하면서 세례를 받고 본격적으로 기독교인의 삶을 살기 시작하였다. 그는 이화학당, 배재학당, 중앙학당, 휘문 학당 등에서 강의를 계속했으며 상동감리교회 내의 상동청년학원과 여러 강습소를 중심으로 한글 보급에 열의를 다하였다. 한글학자 최현배 선생 같은 인물도 그에게서 영향을 받았다. 그는 “말과 글을 잘 수리하여 보전한 민족은 부강해지고 그렇지 못한 민족은 멸렬되어 간다.”고 가르쳤다. 그는 1905년에 <국문문법> 발간 이후 수십 권의 한글 관련 문법책을 저술하였다. 스티븐 로저 피셔의 <문자의 역사>라는 책에 보면 문자의 발전사에 대한 다양한 자료와 정보를 제공해 준다. 인간은 돌이나 동물의 뼈 혹은 패조류의 껍데기에 문자를 각인하거나 그림을 새겨서 남겼다. 서구의 경우, 인간은 기원전 4천 년대 메소포타미아에서 출현한 완전한 문자 체계로부터 문자사용이 구체화 되어 왔다. 그리스 문자에 영향을 미친 페니키아 문자를 비롯하여 오늘 날 영어의 세계화를 이룬 알파벳 문자의 발전사 등이 흥미롭다. 아시아 지역의 문자는 중국의 한자를 비롯하여 한국의 한글, 일본의 문자 등 동남아 여러 나라들은 각기 다른 문자들을 사용한다. 볼테르는 “문자란 목소리의 그림이다”라는 정의를 내렸다. 이처럼 문자란 인류가 발전시켜 가고 있는 지식의 궁극적인 도구로서 오늘 날의 과학을 이루었고 사회의 문화적 매개체로서 문학을 발전시켜 왔다. 뿐만 아니라 서로의 의사 표현과 정보와 지식의 대중화를 위해서 언론을 발전시켜 왔으며 독자적인 예술형식으로 서예의 예술 세계를 변천시켜 왔다. 문자와 인쇄술의 발전이 없었다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오늘 날처럼 세계에 보급될 수 있었겠는가. 요한복음의 매 마지막 절에서 사도 요한은 “예수께서 행하신 일이 이 외에도 많으니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 줄 아노라”(여21:25)고 기록하였다. 그 책이란 곧 ‘성경책’을 말하지 않나. 남은 지면에서는 문자의 발전사와 더불어 필기구의 변천사 가운데 ‘볼펜’(ballpoint pen) 이야기를 좀 하려고 한다. 오늘날은 컴퓨터로 메시지와 프로그램 모두를 작성할 수 있다. 동시에 컴퓨터는 인간이 ‘문자’(文字)라는 낱말을 통하여 묘사해 오던 모든 것을 뛰어넘는 새로운 체계를 만들어내고 있다. 과거에는 상상에 그쳤던 놀라운 발전과 변화가 아닌가. 종이가 통용되면서 양피지나 파피루스나 석각 혹은 팔만대장경과 같은 목각술을 대신 하였듯이 앞으로는 종이처럼 얇은 플라스틱 스크린 위의 전자잉크(e-ink)가 종이를 대신할지도 모른다. 먹물과 붓과 종이가 없이는 문자를 남길 수 없었고, 종이와 잉크와 펜 혹은 잉크를 채워 사용하던 만년필이 없이는 글을 쓸 수 없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볼펜의 발명은 이 모든 글씨 쓰기의 방법과 필기도구에 혁명을 가져 왔다. 이이(李珥)나 이황(李滉)이나 송강 정철(鄭澈)이나 톨스토이나 셰익스피어는 붓글씨와 잉크를 사용하던 펜글씨 세대가 아닌가. 유성 볼펜은 1884년 미국의 존 라우드가 발명하였다. 그러나 잉크가 새어 나오는 문제점을 보완해서 제대로 쓰기 시작한 것은 1938년 6월 헝가리 출신 라디즐로 비로와 게오르그 비로 형제가 개발하였다. 이는 자동차나 비행기의 발명과 상용화보다도 훨씬 늦다. 볼펜의 발명은 취재 현장을 급하게 뛰어 다니는 기자들을 행복하게 해 주었다. 그래서 ‘기자 펜’이라고 불릴 정도였다. 1962년 5월 16일에 광신화학공업 사장
송삼석(1928-)은 경복궁에서 열린 ‘국제산업박람회’에 제품을 출품하였다. 그곳에서 그는 일본 참가 회사의 직원이 안 주머니에서 꺼내 쓰는 신비한 필기구를 넋을 잃고 바라다보고 있었다. 그것이 볼펜이었다. 전남 완주에서 태어난 송삼석은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1960년에 미술재료를 생산하는 회사를 창립하였다. 많은 품목을 일본에서 수입하던 그는 모나미 물감과 왕자 파스를 만들어 내면서 학생들에게 인기가 대단하였다. 송삼석은 그날 그 볼펜을 빌려 써 보고는 큰 충격에 빠졌다. 그를 만난 인연으로 일본의 우치다요코사 사장을 알게 되었고 그는 송삼석을 다시 오토볼펜에 소개하였다. 당시 오토볼펜은 일본 볼펜 시장의 90%를 차지하고 있었다. 송삼석은 노력 끝에 기술을 전수 받아 1963년 5월 1일 모나미볼펜 생산에 성공하였다. 볼펜 이름을 공모하자 여러 의견 중에 ‘153’이 절대적이었다. 의견을 낸 직원은 그 숫자를 합치면 ‘가보’인 ‘9’가 된다고 설명하였다. 그러나 사장 송삼석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성경책을 펼쳐 들었고 요한복음 21장 11절의 ‘153마리 물고기’ 숫자를 찾아냈다. 그리고 그 숫자는 하나님이 주신 숫자이며 예수님이 축복하신 숫자라고 믿었다. 드디어 모나미 153 볼펜이 탄생한 것이다. 그에게도 경영에 시련은 있었다. 송삼석 사장은 기도원에 찾아 가 하나님께 엎드려 기도하였다. 하나님을 잘 믿는다고 하였지만 바쁘다는 핑계로 주일 예배도 제대로 드리지 못하고 십일조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새벽 기도 한 번 제대로 하지 못한 것 등 회개할 기도 제목이 쏟아져 나왔다. 아들 송하경 사장이 경영의 대를 이은 오늘 날까지 모나미 153볼펜은 50억 자루도 더 팔렸다고 한다. 이 글을 쓰는 나의 책상 한 귀퉁이의 필통에도 모나미 153 0.7 볼펜이 여덟 자루나 꽂혀 있었다. 올해 88세인 송삼석 회장은 정동제일감리교회의 원로 장로이다. 시편은 “의인은...늙어도 여전히 결실하며 진액이 풍족하고 그 빛이 청청하니...”(시92:14)라고 선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