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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히 살아 있는 거위 2015. 6.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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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성래
지성래
작성일 15-06-22 15:22 조회 14,464 댓글 0
 

영원히 살아 있는 거위

영국의 런던과 프랑스의 파리를 거쳐서 도착한 스위스 루째른 호수에서 여러 마리의 희고 큰 거위들을 보았다. 그리고 독일의 처처를 방문해서 종교 개혁의 거인(巨人)이었던 마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의 삶의 흔적들을 대할 기회를 가졌다. 그리고 귀국 전에 둘러 본 곳이 체코의 기독교 역사현장이었다. 체코의 개신교가 자랑스럽게 여기는 인물이 얀 후스(Jan Hus, 1369?-1415)이다. 그는 1411, 그 당시의 교황 요한 23세에 의해서 파문당하였고 4년 후에 불에 태워 죽이는 화형을 당하였다. 프라하 구시가지 중심가에 얀 후스의 높다란 청동상이 우뚝하게 세워져 있다. 그를 중심으로 한쪽에는 종교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후스파의 전사들과 다른 쪽에는 체코의 부흥을 상징하는 한 젊은 어머니의 모습이 돋보였다. 얀 후스는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보다 100여년 앞선 141576일 교황청의 면죄부 판매를 중단할 것을 주장했다는 이유 등으로 콘스탄츠 공의회에서 이단자로 낙인찍혀 화형에 처해졌다. '후스'(Hus)라는 성()은 체코어로 거위이다. 그는 화형을 당하기 이전에 비록 지금 나는 죽임을 당하나 거위가 사라진 백년 후에는 백조가 나타나서 노래할 것이고 그 노랫소리조차 잠잠하게 할 수는 없을 것이다.”라는 예언적인 말을 남기고 주님 곁으로 돌아갔다. 그가 예언한 백조란 마틴 루터의 등장을 예견한 것이었다. 체코인들은 얀 후스가 화형 당한 76일을 국가적인 기념일로 정하고 지켜 온다. 미국인들이 조지 워싱턴이나 마틴 루터 킹 목사의 탄생일을 연방공휴일로 정하여 기념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는 남 보헤미안 후시네크 지방에서 평범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프라하대학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했으며 그 곳의 철학부에서 교수로 활동하기도 하며 학장을 지냈고 1409년에는 같은 대학의 총장이 되었다. 1402년부터 3천여 명이 모이는 프라하 베들레헴 성당의 주임 신부로서 설교하기도 하였다. 이번 종교 개혁지 방문 여정의 맨 마지막 날 오전에 둘러 본 곳이 프라하 베들레헴교회였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경적인 교회의 본질을 회복하는 교회개혁과 사회윤리에 관한 설교에 늘 비중을 두었다. 평민들은 물론 프라하 대학의 교수들과 왕족과 귀족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그의 설교에 감동과 도전을 받았다. 그가 교황청의 면죄부 판매에 대하여 그 부당성을 비판하자 교황청에서는 그를 핍박하기 시작했다. 그는 평소에 설교와 주장을 통하여 만일 교황이 하나님의 율법과 복음을 아는 경건한 신자들을 무시하고 인간적인 전통에만 눈을 돌리거나 교황과 교황청의 고위층들이 경건한 삶에서 벗어나서 세상적인 일에 얽매여 살아가는 위험을 지적하였다. 뿐만 아니라 교황이 그리스도를 섬기는 일에 상업적이고 세속적인 세력들과 손을 잡고 성도들을 압박하고 하나님의 말씀에서 벗어나서는 안 되는 이유를 늘 언급하고는 하였다. 는 룩셈부르크의 신성로마 황제 지기스문트로부터 신변의 안전보장과 함께 콘스탄츠 공의회에서 자신의 종교적인 견해를 펼쳐 보이라는 호출을 받게 되었다. 결국은 141410월에 콘스탄츠 공의회에 도착하자마자 체포되어 감옥에 갇혔고 심한 고문을 당하였다. 1415년에 그는 이단 혐의로 재판을 받게 되었고 변론할 기회도 얻지 못한 채 화형에 처해졌다. 후스주의자들은 성만찬 때마다 성경적으로 빵과 포도주를 함께 나누었다. 이는 오늘 날까지도 로마 가톨릭에서 빵만을 나누어 주며 포도주는 사제들만이 마시는 비 성경적인 성찬에 대한 신학적인 저항이었다. 그 후 포도주를 담은 성배(聖杯)가 그려지거나 새겨져 있는 깃발이나 조형물은 오늘 날까지 후스주의 개혁 신앙 운동의 상징물로 전해 오고 있다. 방문지를 체코로부터 출발했어야 시대적인 순서대로 밟아 갈수 있었을 터이나 우리 일행은 18세기 영국의 요한 웨슬리에게서 시작해서 프랑스와 스위스의 잔 칼뱅과 독일의 마틴 루터를 거쳐서 14세기와 15세기, 체코의 얀 후스에게로 다가가는 역순의 여정을 가졌다. 얀 후스가 화형당한 이후 그의 신학사상을 이어받은 사람들이 보헤미안 공동체를 만들었고, 그의 주장은 마르틴 루터 등 후대의 종교 개혁가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는 영국의 종교 개혁자 쟌 위클리프(John Wycliffe, 1320-1384)의 예정구원론을 기반으로 하여 성경을 기독교 믿음의 유일한 권위로 인정할 것을 강조하는 복음주의를 쫒던 가톨릭의 신부요 목회자요 신학자요 설교가요 행정가요 교회 개혁가요 개신교 탄생의 물꼬를 터 가며 프로테스탄트 운동의 선봉에 섰던 하나님의 사람이었다. 얀 후스에게 영향을 미친 쟌 위클리프는 1382년에 라틴어 성경을 영어로 번역한 최초의 인물이다. 가톨릭은 그의 시신을 재 발굴하여 그의 복음적인 저서들과 함께 불살라 버리는 만행을 저지르기까지 하였다. 프라하의 종교개혁 광장중앙에는 얀 후스의 순교 500주년을 기념하여 1915년에 세운 그의 동상이 서있다. 동상의 기단에는 체코어로 이런 말이 적혀 있다. “서로를 사랑하라. 모든 이들 앞에서 정의를 부정하지 마라.” 오늘 날 우리는 사회 전반에 걸쳐서 너나 할 것 없이 변질과 타락의 탁류 앞에 서 있는 도전과 영적 미혹의 때를 살아가고 있다. 이와 같은 때에 우리는 묵묵히 화형장의 순교 현장으로 성경적인 진리를 담대하게 말하며 하나님의 사람다운 정의의 길을 걸어갔던 자칭 거위라고 비유한 얀 후스와 같은 신앙을 가진 인물을 필요로 한다. 유대 지역의 분봉 왕 헤롯은 동생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를 제 부인으로 빼앗아서 살던 자였다. 세례 요한은 그의 그와 같은 처신을 옳지 않다”(6:18)고 말하였다. 이것이 화근이 되어 헤로디아는 세례 요한을 원수로 여겨서 죽이고자 하였다. 헤롯은 세례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두려워하여 보호하며 또 그의 말을 들을 때에 크게 번민”(6:20)하고는 하였으나 결국은 세례 요한의 목을 베어 쟁반에 담아 내오게 하였다. 불의한 역사는 이처럼 의로운 자와 진리의 편에 서는 자들을 수 없이 죽음으로 몰아갔다. 조롱하거나 채찍질하거나 결박하거나 옥에 가두는 일은 다반사였다. 뿐만 아니라 돌로 치거나 톱으로 켜거나 맹수의 먹잇감으로 던져 버리거나 불에 태우거나 목을 치거나 십자가에 거꾸로 라도 달아 죽였다. 그러나 믿음으로 살았던 하나님의 사람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히 살아서 말한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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