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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들아 참으로 미안하다. 2015. 1.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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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성래
지성래
작성일 15-01-18 01:17 조회 13,901 댓글 0
 
아가들아 참으로 미안하다.

최근에 일어난 인천의 모 어린이 집 여교사의 아동 학대 동영상이 온 국민들에게 큰 충격을 안겨 주고 있다. 전국적으로 하면 진정으로 어린이를 위하고 사랑하며 인격적으로 대하는 수많은 훌륭한 원장과 교사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단 몇 사람의 교사이든 그와 같은 무자격한 이들에게 어린 자녀들의 성장기를 맡겨야 한다는 현실이 충격적이 아닐 수 없다. 성경은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들을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엡6:4)고 하였다. 그런 이들이 어떻게 해서 유치원이나 어린이집의 교사 자격을 획득하였을까. 직업처럼 출퇴근하며 그 어린 남의 집 귀한 자녀들을 그렇게 함부로 폭군처럼 대하고 학대하는 이들을 원장이나 주변 선후배동료 교사들이 어찌 그렇게 방치하며 함께 교육의 현장에서 서로 더불어 지낼 수 있었을까 하는 의구심도 쉽게 지울 수가 없다. 물론 인간의 악은 그 뿌리가 깊다. 인류 최초의 인간인 아담의 장남인 가인이 하나님께 제사 드린 후에 동생 아벨을 쳐 죽인 사건을 보면 그렇다. 형제간에라도 살인을 부르는 것이 인간의 악인 것을 생각하면 정신이 번뜩 든다. 가히 통계 숫자를 언급하기조차 어려운 엄청난 생명의 희생을 짓밟고 올라가서라도 권력을 잡으려고 하는 혁명군이나 독재자의 모습 속에도 그런 악의 피가 가득 차 있다. 그들의 실명을 이 지면에 언급하지 않아도 동서고금에 떠오르는 이름이 한 둘이 아니다. 출애굽기 1장에 보면 애굽에서 노예 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자손이 점점 번성해 가고 있었다. 애굽의 왕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더 무거운 짐을 지게하고 괴롭게 학대하였다. 그러나 그러면 그럴수록 더욱 번성하여 퍼져 나갔다. 흙 이기기와 벽돌 굽기와 농사 일등 중노동이 점점 심각해 져 갔다. 더 이상 통제가 불가능해 지자 태어나는 이스라엘 백성의 남자아기들을 죽이라는 명령을 내리기에 이르렀다. 그런 시대에 태어난 인물이 우리가 잘 아는 모세(Moses)다. 그는 지금으로부터 3400여 년 전에 그러한 애굽의 학정 아래 태어나서 120년을 살다 간 인물이다. 예수님이 탄생하시던 당시에도 남자 아기들을 죽이는 살해극이 벌어졌다. 베들레헴 근방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태어났다는 소식을 들은 분봉왕 헤롯은 그 근동의 두 살 미만의 남자아기들을 모조리 찾아내어 죽였다. 마태복음 2장에 나오는 내용이다. 아기의 탄생은 한 가정의 축복이며 한 나라의 소망이다. 아기가 태어나지 않는 가정이나 나라의 장래는 상상하기조차 어렵다. 요즘 우리나라는 출산율 저하로 인한 장래 인구 감소의 위기 앞에 있다. 지난 해 통계청의 통계 발표 내용에 따르면 우리나라 인구 1000명당 출생아 비율이 8.6명으로 사상 최저치였다. OECD 34개 국 중에서 합계 출산율이 가장 낫다. 지금의 사회 분위기로는 가임 여성 한 명이 평생 낳을 수 있는 합계 출산율이 1. 187명이다. 이 비율은 그 전년도에 비해서도 더 감소한 수치라고 한다. 지금 우리나라의 현실에서 한 아기가 탄생하는 그 소중함이란 가정으로 하든 국가적으로 하든 얼마나 소중한 선물인지 모른다. 그 한 아기를 훌륭하게 양육해서 사회와 국가와 열방에 지도자로 성장시켜 나가는 수고와 노력은 산업 시설에서 많은 물건을 생산해서 수출하고 적지 않은 외화를 벌어들이고 나라 경제 안정에 이바지 하는 것과 천배 만 배 비교할 수 없는 얼마나 귀하고 보람된 일인지 모른다. 놀이터에서 놀고 있는 어린이들과 누군가의 손길을 붙잡고 아장 아장 걷고 있는 그 어린 생명을 통하여 장차 펼쳐질 영광스럽고 아름다운 미래를 생각한다면 어떻게 어린 아기를 그렇게 함부로 막 대할 수 있단 말인가. 페뎅은 “어린이는 인간생활의 초보로, 독립된 완전한 인간으로 성장해 가는 준비 기간에 있지만 어린이를 단지 인생의 일부, 즉 성인의 부속품으로 봐서는 안 된다. 완전한 인격체로서 어린이를 바로 보호하고 바로 교육해 나가야 할 것이다.”라는 말을 했다. 칼릴 지브란은 “당신은 활이다. 당신의 어린이들은 그 활로부터 화살이 되어 튀어 나간다.”고 하였다. 그렇다. 어린이를 양육하는 부모나 유모가 화살을 다듬어 원수 앞에서 활시위에 얹는 순간의 그런 긴장감을 가지고 십년 혹은 이십 년 간의 양육기에 보호자의 마음가짐을 진지하게 하여야만 한다. 시편 127편에 보면 솔로몬도 그런 고백을 하였다. “젊은 자의 자식은 장사의 수중의 화살 같으니 이것이 그의 화살통에 가득한 자는 복되도다”(시127:4-5) 마치 화살과 같은 어린 자녀들을 잘 양육해 나가면 나중에 “그들이 성문에서 그들의 원수와 담판할 때에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리로다”(시127:5)라고 하였다. 인도의 시성 타고르는 “어린이는 신이 인간에게 절망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 이 땅에 보낸 사신(使臣)이다”라는 말을 하였다. 교회 안에도 기독교 교육, 유아 교육, 태교, 결혼 예비 학교, 어머니 학교, 아버지 학교 등의 학문적 바탕이나 프로그램이 적지 않지만 그 모든 것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어린이를 비롯한 상대방을 인격적으로 대하고 진심으로 사랑하는 마음가짐이 아닐까. H. F. 아미엘은 “어린이들의 존재는 이 세상에서 가장 빛나는 은혜다. 죄악에 물들지 않은 어린이들의 생명체는 한 없이 고귀하다. 우리는 어린이들에게서  미(美)를 발견하고 행복을 느낀다. 우리는 어린이들에게서 천국의 그림자를 엿볼 수 있다. 어린이들의 생활은 고스란히 천국에 속한다.”고 말했다. 지극히 성경적인 관찰과 고백이 아닐 수 없다. 하루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천국에서는 누가 크냐는 질문을 드린 적이 있다.  그 때에 예수님은 어린 아이 하나를 불러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말씀하셨다. 좀 긴 말씀이시지만 줄여 읽어서는 안 될 말씀이니 전문을 인용해 보자.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 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 중 하나를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이 그 목에 달려서 깊은 바다에 빠뜨려지는 것이 나으니라 실족하게 하는 일들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세상에 화가 있도다 실족하게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으나 실족하게 하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도다 만일 네 손이나 네 발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장애인이나 다리 저는 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과 두 발을 가지고 영원한 불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한 눈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 불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삼가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너희에게 말하노니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 .”(마18:3-10) 만약에 인천의 그 어린이집 여 교사가 성경의 이런 가르침을 미리 알았더라면 어린아이들을 그렇게 함부로 취급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긴 손녀딸 같은 골프장의 캐디를 성 희롱했다는 국회의장 출신의 노인이나 젊은 여 제자들을 수 없이 성 희롱한 대학의 교수나 주변 여성들을 성 노리개 감 삼았던 종합 병원의 원장이나 막내 누이 동생 같은 초급 여장교를 성희롱한 사단장이나 그 정신세계를 분석해 보면 젊은 여성을 희롱하는 심리나 천진무구한 어린이를 학대하는 여교사의 심리나 병들어 있기는 다 마찬가지가 아닌가. 온 세상이 장마철에 썩어 들어가는 감자 자루와 같이 악취를 풍기며 구석구석 병들어 가는 증거이니 말이다. 유대인들에게는 이런 교훈이 전해져 온다. “아이가 길을 걸을 때 천사가 앞서 가며 외친다.‘거룩하신 분의 형상이 나가신다. 길을 비켜라’”어린이와 교회가 이 땅의 희망이다. 이 세상의 희망이 되어야 할 교회의 성직자와 기독교인들마저 병들어 버리면 어찌할까. 등대의 불이 껴져 버리면 캄캄한 밤바다를 누가 어떻게 밝힐 수 있다는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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